〈 68화 〉 계승식
* * *
연회실 앞. 나는 몸단장을 마지막으로 체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어라.”
“예. 백작님. 흐읏...!”
메이드들이 낑낑대며 정문을 힘주어 열었다.
시종을 전부 쫓아내서 힘쓰는 일까지 여자가 맡게 되었지만, 예쁜 메이드들이 안간힘을 쓰면서 일하는 걸 지켜보는 것도 나름 풍류가 있다.
잔뜩 기름칠을 해두었는지 두꺼운 정문이 경첩 소리도 없이 매끄럽게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파샨과 하이덴을 위시한 친위대원들이 보였다.
평소에도 군기가 바짝 들어있는 녀석들이지만, 오늘은 유독 더 눈동자에 생기가 살아있다.
“백작님께서 이 땅의 주인이 되셨음을 알리는 날이니까요.”
마티란 자작이 다가와 달콤한 음성으로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는 배에 손을 얹은 채로 다가와 내 오른쪽 팔에 자신의 팔을 끼웠다.
반대편, 내 왼쪽으로 팔짱을 낀 화리메는 마티란 자작과 함께 다뤄지는 게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크게 내색하진 않았다.
“새로이 레시아르의 주인이 되실 바이스 레시아르 백작께서 입장하십니다.”
메이드장 세리야가 넓은 연회장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쳤다.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나는 왼쪽에 화리메, 오른쪽에 마티란 자작을 낀 채로 잠시 서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이 두 여자가 내 첩실이 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들은 질투와 시샘이 담긴 시선을, 남자들은 정욕과 갈망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
덕분에 화리메와 마티란 자작의 어깨는 거의 턱에 닿을 정도로 으쓱 튀어나와 있다.
두 여자가 허영심을 적당히 만족할 때까지 나는 느긋하게 기다려주었다.
“백작님. 오르실 때가 되었습니다.”
식순에 따라 부관 타라가 다가와 내게 눈짓을 보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비스듬하게 앞에서 걷기 시작한다. 힐이 꽤 높은 구두를 신고 있어 발을 들었다가 놓을 때마다 엉덩이가 조금씩 움직이는 게 볼만하다.
그런 음심을 빼놓고 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흰 색 예복을 차려입은 타라는 첫눈처럼 아름다웠다.
화리메와 마티란 자작에게 쏠렸던 시선이 타라에게로 꽂혔다가, 타라의 아버지인 오록스 단장의 눈총에 급히 흩어진다.
연회실 정문에서부터 저 앞의 단상까지는 붉은색 카펫이 일자로 깔려 있었다. 희귀한 마수의 털가죽으로 만든 사치품이다.
나는 힘주어 카펫을 밟으며 화리메, 마티란 자작과 함께 나아갔다.
그 앞을 타라가 진행하고 뒤로는 파샨과 체닐린이 각기 친위대원과 호위기사를 데리고 따른다.
카펫 좌우로는 제트리, 오록스 단장이 각기 거느리는 적여우 기사들과 백여우 기사들이 완전무장을 한 채 도열해있다.
그들은 내가 다가올 때마다 한쪽 무릎을 굽혀 묵언의 충성맹세를 올렸다.
척, 척, 척하고 갑주 부딪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반복되며 꽤나 듣기 좋은 화음을 만들어낸다.
기사들이 차례대로 몸을 숙이자 그 뒤로 기돔 자작, 부게른 남작을 비롯한 내 휘하 봉신들과 주변의 영주들이 모인 게 보인다.
귀부인과 귀족 영애들은 물론이고 근방에서 이름 날린다는 명사들도 내게 정중히 인사를 보내었다.
실제 속내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힘으로 백작위를 쟁취한 화염의 마법사에게 밉보이고 싶은 바보는 적어도 여기에는 없는 듯하다.
단상 가까이에 서 있는 파티스트롬 공작이 눈인사를 보낸다. 나도 슬쩍 눈인사를 돌려준다.
마리안은 히아신스의 어깨에 손을 얹고 약간 고개를 숙인 채다. 일부러 시선을 피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신경쓰지 않으려는 것 같기도 하고.
히아신스는 엄숙한 자리가 불편한지 입술을 쭉 내밀고 자기 머리카락을 꼬면서 놀고 있지만 엄마가 뒤에 있어서 큰 장난을 칠 엄두는 못 내고 있는 것 같다.
주변을 살피며 걷다보니 마침내 단상 앞에 도착했다.
화리메와 마티란 자작은 잠시 내게서 떨어져 단상 아래에서 대기하고, 나만이 층계를 올라 단상 앞에 선다.
바닥보다 약간 높지만 연회장이 다 내려다보이는 위치다.
다들 저마다의 기대와 속셈을 가지고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네마로우스 교의 주교가 단을 올라, 나보다 한 층계 아래에 발을 멈추어 서서는 향유 항아리를 올려 바쳤다.
“경애하는 레시아르 백작 각하. 고귀한 레시아르 가문이 천세토록 이어져 온 이 땅 위에 광휘롭게 임하시어 광영하게 비추소서.”
주교가 공손히 허리를 숙인 채로 말했다.
나는 그가 바친 항아리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향유를 묻힌 다음, 내 머리칼 위로 문질렀다. 약간 차가운 기름이 머리를 적신다. 그 느낌이 의외로 나쁘지 않다.
적당히 향유를 바른 후에 고개를 꼿꼿이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나, 바이스 레시아르는 레시아르의 백작으로서 봉신의 권리를 수호하고 어린 아이와 처녀를 배려하며 신성한 피가 부여한 의무를 다할 것임을 이 자리에서 맹세한다.”
나는 허리춤에 찬 화염검을 꺼냈다. 손잡이에 박아 넣은 마석은 황금의 시대로 전이되면서 깨어진 상태지만, 그래도 아름다움은 여전하다.
물결치는 듯한 검날에, 좌중은 예식용 검이라고 생각했는지 찬사를 쏟아낸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워도 검은 검.
무언가를 파괴하기엔 충분하다.
나는 검을 한껏 치켜들었다가 그걸로 탁상을 내리쳤다.
쾅!
탁상은 마력이 담긴 일격을 견디지 못하고 반으로 쪼개졌다.
갑작스런 흉행에 귀족들은 숨을 참고 내 눈치를 살폈다.
“무, 무슨 일이오? 백작님이 왜 갑자기 검을?”
“모르겠소만……. 미드로 자작께선 귀띔 받은 것 없소?”
“일단은 부게른 남작께로 갑시다. 이럴 때는 공신 옆에 딱 붙어 있어야 해요.”
반대파 귀족들은 물론이고 내 봉신들까지 혹시라도 이 자리에서 대숙청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내가 아버지를 밀어내고 아티아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피는 거의 흐르지 않았다.
노예경매를 통해서 금화를 빨아들이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주 양호한 수준의 강탈이었고.
그러니 여태 보지 않았던 피를 이번 계승식에서 보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다들 불안해하는 것이다.
나는 가타부타 말없이 검신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화석(火?)이 깨져서 마력 운용이 이전보다 덜 매끄럽긴 하지만 큰 장애는 되지 않는다.
불길이 탁상을 휘감아, 활활 타오른다.
뜨거운 열기에 단상 근처에 있던 귀족들이 슬금슬금 물러났다.
검은 재가 날린다.
이번에는 버티려 하던 귀족들까지 우르르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이 자리에 모인 자들 중에 내가 두 차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자 화염의 마법사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모두가 차근차근 공포에 질려 몸을 떨 지경이 되었을 때, 나는 드디어 입을 떼었다.
“다들 알 것이다. 이번 겨울에 끔찍한 마수들이 횡행하며 인명을 살상하고 마을을 폐허로 만들어버린 일을.”
겁에 질려 있던 귀족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겨울에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손해는 눈앞의 두려움도 잠깐 잊을 정도로 상당한 것이었으니.
나는 검을 든 채로 소리쳤다.
“나는 레시아르의 모든 권리와 의무의 수호자로서 그 끔찍한 괴물들을 무찌르려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그럼에도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을 전부 지키지는 못하였다. 나의 충실한 농노들이 허무하게 죽었고, 기백 년의 역사를 가진 개척촌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입을 다문 채 반응을 지켜보았다.
겁에 질려 있던 귀족들의 얼굴에도 분노가 물들기 시작하는 게 보인다. 다만 이들은 무엇을 향하여 분노해야 할지 아직 모른다.
마수는 자연 현상과 같은 것이라 그걸 상대로 화내봐야 바위나 강을 향해 화내는 것처럼 바보 같을 뿐이다.
하지만 같은 사람이라면,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앗아간 것이 같은 사람이라면 그 분노는 아주 뜨겁게 타오를 것이다.
나는 이들이 분노해야 할 대상을 알려주기로 했다.
“중앙. 이 모든 것은 중앙에서 꾸민 일이었다.”
한탄 같기도 하고 비명 같기도 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백작이 미치지 않고서야 아무런 증거도 없이 계승식에서 중앙을 모함할 리가 없으니까. 설령 백작이 미쳤더라도 그가 이러한 발언을 내뱉은 순간 분쟁은 피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네마로우스 교를 신봉하며 평화주의자임을 자랑하던 귀족들은 비틀거렸다.
반대로 호전적인 귀족들은 내 말을 따져볼 생각도 않고 벌써부터 중앙에 대한 분노에 이를 갈았다.
“내무대신 바리보예즈는 모종의 세력과 연합하여 네스트라고 불리는 마수를 만들어내었다. 인간의 혈육을 먹고 마수를 낳는 끔찍하기 짝이 없는 괴물이다. 내무대신은 중앙의 지령에 따라 그 마수를 사방에 퍼뜨렸다.”
누군가가 손을 들고 물었다. 검은색 머리칼을 길게 기른 청년 기사였다.
“백작님! 허나 중앙에서 어찌 그런 일을 벌였단 말입니까? 저는 중앙에 의무를 다하였고, 그렇다면 중앙 또한 저의 마을을 보호할 의무를 질 터인데!”
"그대의 이름이?"
“블랑드르에서 온 기사 헬무트입니다.”
“아. 애민기사(?民??) 헬무트인가. 그대의 위명은 내 익히 들어 알고 있네.”
“감사합니다.”
자기가 나고 자란 마을을 워낙 사랑하여 근방의 도적들을 단기로 휩쓸어버렸다는 젊은 기사는 내 찬사에 얼굴을 붉혔다.
순진한 청년기사가 말상대라면 중앙의 더러움을 부각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나는 한숨을 내쉬는 척하고는 말했다.
“모두가 그대와 같이 순수하고 열정적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중앙의 늙은 대신들은 그대와 같이 깨끗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지 않다네. 그 노괴들은 고블린과도 같지. 자기네 창고에 금화 한 푼, 은전 한 닢을 더하기 위해서라면 변방의 영지에는 피가 흘러넘쳐도 좋다고 생각한단 말일세.”
사실은 그것보단 복잡하지만 선동은 간명해야 하는 법.
나는 대신들이 마수를 풀어 영지를 휩쓸고 난 후에 기사단을 동원해 재화를 털어갔다고 주장했다.
좀 엉성한 주장이긴 했지만, 어느 귀족이고 마수를 쫓아내준 중앙의 기사단에 사례하지 않은 자가 없다. 게다가 수백, 수천의 마수 무리가 파괴한 마을에 재물이랄 게 남아있을 리가 없으니,
그렇지 않아도 중앙에 바친 재물이 아깝다고 생각하던 차에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이어붙인 선동이 그들이 중앙에 대해 가지던 막연한 의구심과 적개심을 부채질했다.
귀족들은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영지의 사정을 교환했다. 그리고는 편향된 확증을 차례대로 불려나갔다.
“사실 지나치게 공교롭기는 했지. 요청도 보내지 않았는데 중앙에서 갑자기 구원군을 급파했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지난 번 제국이 도발했을 때는 출병식까지만 해도 반 년이 걸렸지 않소. 그것과 비교해보면 이번 겨울 중앙의 움직임은 너무 빨랐지.”
“미리 준비했다는 것이오?”
“미리 짜두었다는 것이오. 레시아르 백작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바로 그것 아니오.”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웅변을 이어나갔다.
“폰세르크 국왕은 근래 왕권이 신성한 것이라고 외치고 다닌다지. 왕권은 신성하지 않아!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금혈(?血)이 그의 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직 신성한 것은 귀족의 피일진저! 고귀한 자라면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내 말에 귀족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 년이 넘도록 봉건 사회가 유지되어 온 이 세상에서 왕은 귀족 중 다소 고귀한 자일 뿐이다.
명분과 금화, 그리고 군대만 충분히 준비되었다면 왕에게 대적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몸을 타고 흐르는 고귀한 피가 협잡꾼들만 모인 중앙에 모욕당해도 좋은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영지를, 피와 같은 그 땅을 더러운 마수의 발굽에 짓밟히고서도 공물을 올려 바치며 약자의 웃음을 지을 것인가 말이다!”
“결단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청년기사 헬무트가 갑주를 덜그럭거리면서 소리쳤다. 그 외에도 드문드문 호응이 터져 나왔다.
나쁘지는 않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나는 더욱 격정적으로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그대들은 참을 것인가? 나는 참을 수 없다! 나는 중앙과 싸우겠다! 이 땅을 모략으로 더럽히고 명예를 비웃는 그 자들에게 진정한 고귀함이 무엇인지 피로써 보여줄 것이다!”
검을 바닥에 꽝 내리찍고 아랫배에 힘을 주어 우렁차게 외친다.
“그 누가 나와 함께하겠는가!”
내 외침에 대머리 부게른 남작이 제일 먼저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제가 백작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남작에겐 미안하지만 대머리가 이러니까 모양이 잘 안 사는군.
한 발 늦게 따라온 미남 기돔 자작도 무릎을 꿇었고, 다른 영주들의 지지선언이 뒤를 이었다.
“레시아르 백작님을 따르겠습니다!”
그제야 모양이 좀 잡혔다.
그러나 모든 이가 내게 호응하는 것은 아니다.
레시아르와 봉신관계가 희박한 영주들은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이다.
계승식에 들러서 축하나 해주고 돌아가려 했는데 갑자기 중앙과 싸워야 한다고 하면 어이가 없긴 할 거다.
하지만 그런 사정 다 봐줄 생각은 없다.
“중립은 없다. 그대들은 바로 이 자리에서 선택해야 할 것이다. 중앙인가, 레시아르인가.”
작위가 좀 높다고는 해도 일개 영주가 다른 영주에게 협박처럼 명령하는 것에 불만이 없을 수가 없다.
애초에 이런 편 가르기는 서로 한참의 협의가 파발로 오간 뒤에 우아한 살롱에서 상호를 존중하는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관습이었다.
반면 이번의 경우에는 귀족들이 아무런 귀띔도 받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결단을 강요받았으니, 확실히 파격이긴 했다.
그러한 파격을 마뜩치 않게 여기는 이들은 입을 재게 놀렸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울리며 삼삼오오 뜻 맞는 이들이 모인다.
레시아르의 탕아가 백작이 되더니 실성한 게 아니냐, 애초부터 믿을 수 없는 자였다, 차라리 전 백작을 복권시키는 게 낫겠다 운운.
결국 한 젊은 영주가 총대를 멨다.
“레시아르 백작님.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난폭한 처사...”
그가 항의하려 한 순간.
“레시아르 백작의 말이 지당하다. 나, 파티스트롬 공작은 이 건에 있어서는 레시아르 백작을 전면적으로 지지함을 천명한다.”
“켈자르 백작의 복대리인으로서 저, 마리안 마이포흐 자작 또한 레시아르 백작님을 지지합니다.”
공작과 마리안이 차례대로 지지선언을 했다.
나 혼자 나댄 게 아니라, 근방의 삼대 영주가 계승식 전에 뜻을 모은 게 확실한 상황.
항의하러 나섰던 소영주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어물쩍 주저앉으려 했으나, 본보기는 필요하다.
나는 그를 가리켰다.
“저 놈은 중앙의 첩자다. 잡아라.”
“아, 아닙니다!”
그는 손을 내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함께 내 욕을 주고받던 영주들은 이미 잽싸게 자리를 떴다. 간청하는 눈길로 보아도 그들은 고개를 휙 돌려 모른 척을 하고 있다.
결국 그가 믿을 건 호위기사 둘 뿐.
“이런 망할! 날 지켜라!”
소영주의 발악에 호위기사들은 내키지 않아하면서도 검을 빼들었다.
그들에게 제일 먼저 달려든 건 파샨이었다.
“멍청한 놈들!”
파샨은 검을 빼지도 않은 채 검집 째로 휘둘렀다.
작은 여우수인의 무용담은 근방에서는 꽤나 유명하다. 호위기사들은 방심하지 않고 잔뜩 긴장하여 검을 받아내려 했다.
하지만 파샨의 검집과 부딪힌 그들의 검은, 말 그대로 박살이 나고 말았다.
“흐억!”
깨진 칼 조각이 기사들의 얼굴에 박혀들었다. 예식 중이라고 투구를 쓰지 않은 게 패착이었다.
파샨은 쉴 틈을 주지 않고 좌측에 선 기사의 발을 밟고, 이어서 우측의 기사에게 복부를 노린 펀치를 넣었다.
“켁!”
“쿠억!”
기사 둘이 나란히 고개를 숙이자, 파샨은 펄쩍 뛰어 그들의 뒤통수를 잡아 바닥에 내리꽂았다.
기사들의 몸이 그대로 접히더니 꽝하는 소리가 울렸다.
저것들도 나름 기사니 죽지는 않았겠지만 한동안은 제 발로 걷지 못할 듯하다.
파샨은 자기 손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좀 놀랐다.
원래 파샨의 장기는 작은 체구를 이용한 민첩한 움직임이었는데, 방금 파샨은 그냥 힘으로 기사 둘을 제압해버렸다.
원래 저렇게 세진 않았는데. 이유로 생각나는 건...
아르토에게서 훔쳐온 꿀술과 황금사과. 그게 무슨 작용을 한 건가?
잠깐 딴 생각에 빠진 사이 친위대가 소영주를 질질 끌고 와 내 앞에 무릎 꿇렸다.
그도 은혈의 귀족으로, 마력만 놓고 보면 호위기사보다 더 강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두들겨 패서 데려왔다.
말 한 번 실수한 것 치고는 좀 심한 게 아닌가 싶지만, 중앙과 대적하기로 한 시점에 유약한 태도를 보이면 내 쪽으로 사람들이 모일 리가 없다.
누군가의 피라도 흘려내야 한다.
내 얼굴을 본 소영주가 퉁퉁 부은 얼굴 앞에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어댔다.
“백작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실언이었습니다!”
나는 체닐린에게 눈짓을 보냈다.
체닐린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검을 휘둘렀다.
“제, 제발... 컥!”
서겅.
죽는 순간까지 비굴하게 빌던 소영주의 목이 연회장 바닥을 굴렀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이 자는 중앙과 공모하여 우리 서북방 영주들을 위기에 빠뜨렸기에 참하였다. 불만이 있다면 내 앞으로 나오라.”
물론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이와 같은 자들이 계속 나올 것이다. 중앙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은 연합하는 것뿐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서북 영주연합군의 결성을 제의한다. 연합군에 들어올 자, 자칭하라.”
기돔 자작이 먼저 내 앞으로 달려와 부복했다.
“기돔 가가 연합군의 선봉에 서겠습니다. 서북 영주연합군에 영광 있으라!”
“부게른 가 또한 연합군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이번에는 한 발 뒤쳐진 부게른 남작이 뒤늦게 그 뒤를 이었고, 결국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이 군에 합류하기로 맹세하였다.
“연합군에 영광 있으라!”
“레시아르 백작님의 영도 하에!”
“중앙의 협잡꾼들을 몰아내자!”
나는 영주들이 소리치는 걸 지켜보다가 적당한 틈을 타 자리를 파했다.
자세한 방향과 지침은 곧 마련될 것이다. 어차피 귀족들이 모두 레시아르 령에 모인 참이니.
빠르면 봄꽃이 다 피기 전에 군사를 움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집무실로 향하는 내 뒤를 마리안이 급히 따라왔다.
“지나친 거 아닌가요? 그 자리에서 사람을 죽인다는 얘기는 없었잖아요.”
마리안은 따지듯 물었다.
그 모습이 그리 나쁘게 느껴지지 않아서 일부러 느물거리며 받았다.
“내가 그런 것까지 남작과 협의했어야 하나?”
“... 그건... 아니지만요.”
삼대 가문이 중앙에 맞서 연합하기로 했다고 해도, 켈자르와 레시아르의 힘의 차이는 여실하다.
마리안은 분을 삭이며 한 발 물러났다가, 다른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하지만 체니를... 그렇게... 마치 도축하는 칼처럼 부린 건 용서할 수 없어요...!”
“체닐린은 이제 내 호위기사야. 내가 어떻게 부리든 내 마음이지. 그게 마음에 안 든다면... 적당한 대가를 준비하든가?”
손끝을 세워 마리안의 뒷덜미를 살살 긁자, 마리안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팔을 걷어냈다.
“착각하지 마세요. 그 날의 일은 그 날로 끝난 거니까.”
“오우, 그런가? 내가 착각을 하고 있었군.”
"네. 착각하고 계시는군요."
"착각을."
"네."
“…….”
“…….”
부연과 침묵 속에서 오묘한 분위기가 피어났다.
마리안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일부러 만들어낸 듯 딱딱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먼저 실례하도록 하지요. 레시아르 백작님.”
"곧 부르지."
"... 예?"
"중앙에 맞설 군략을 논의해야 할 거 아니야. 무슨 상상을 한 건가?"
“…….”
마리안은 고개를 홱 돌려, 히아신스의 손을 잡고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나는 마리안의 뒷태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래. 그녀는 절조 없는 여자가 아니었다. 카르마시아에서의 일은 그녀의 관점에서는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되는 예외 중의 예외였겠지.
쉽게 다시 안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이렇게 선을 긋는 모습을 보면 아쉽긴 하다.
마리안의 손을 잡은 히아신스만 나를 돌아보며 바이바이, 작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마주 손을 흔들어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애가 사랑스럽게 생기긴 했네.”
“정말 저 아이... 마이포흐 소영애와 혼약 약속을 하셨습니까?”
부관 타라가 뒤에서 슥 나타나서 물었다.
“그냥 해본 말이야. 내가 결혼하자고 말한 여자만 줄 세워도 이 저택을 포위할 수 있을 걸.”
“... 그렇군요. 그런 날이 한번쯤은 오기를 바라겠습니다.”
“악담도 그런 악담을 하냐.”
“미녀들에게 둘러쌓인다, 백작님께서 바라는 상황이 아닙니까?”
타라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지만 한기가 풀풀 날린다.
“어흠……. 요즘 내 주위 여자들이 왜 이리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모르겠어.”
“보고하겠습니다.”
타라는 내 말을 끊고 쌀쌀맞은 어조로 말했다.
“아마트리체 영애가 백작님을 몰래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파티스트롬 공작님께도 알리지 말고 몰래 나와주시기를 청하시더군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