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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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승식에서 영주연합군이 결성되고 일주일이 흘렀다.
그 사이 대략적인 목표와 전략은 거의 다 구성되었다.
최종목표는 서북방 영주들의 폭넓은 자치권 획득. 가능하다면 넉넉히 금화를 배상받는 것도 좋겠지.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일단 중앙군과 한 판 붙어 완승을 거둬줘야 한다.
물론 중앙과 맞서는 걸 꺼려하는 귀족들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영주연합군이라고는 해도 모든 영주가 동등한 권한을 가지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주요한 결정은 서북방의 영주들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큰 켈자르, 레시아르, 파티스트롬이 협의하는 삼두정의 형국으로 귀착되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발언권이 큰 것은 물론 내가 있는 레시아르가 되었다.
몰래 야간도주하려던 자가 나오자, 나는 그 자를 배신자로 낙인찍어 조리돌림하고 목을 베었다.
그 조치가 과하다고 항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포만으로는 연합을 유지할 수 없으니, 회유도 적절하게 병행했다.
내가 소유한 창관인 ‘초가을의 과실’ 소속 창부들을 저택까지 불러 소귀족과 기사들의 몸을 녹이고, 세력이 있는 귀족들에게는 금화를 풀었다.
결전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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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잠에 들었던 개구리가 깨어나 울기 시작한 날.
나는 드디어 군을 출정시켰다.
영주들은 일단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서 군을 모아 집결지에서 모이기로 하고, 당장 내가 움직일 수 있는 레시아르 군부터 먼저 출격한 것이다.
휘하병력이 많지 않은 소귀족과 기사들은 자연스레 레시아르 군에 편입되었다.
군을 이끄는 총대장은 당연히 내가 맡았다.
파티스트롬 공작은 직접 말을 타고 참전하지는 않되 휘하 기사단을 파견하고, 이번에 보내준 차관과는 별도로 전비(戰?)를 담당하기로 했다.
반면 켈자르는 지난 원정으로 인한 전후처리와 배상금 때문에 빈털터리가 된 신세라 비용을 대지는 못하고, 고급 전력인 기사단과 마력병단도 박살이 난 상태라 알보병 밖에는 내놓을 게 없었다.
그것도 훈련도가 높은 상비군이 아니라 영지민을 징집한 병력이라 고기방패 말고는 쓸 데가 없다.
영지민을 아끼는 마리안은 착잡한 표정이었지만, 병사도 내놓지 않고 삼두정의 일각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백작님. 점호를 마쳤습니다.”
부관 타라가 말을 몰고 다가왔다.
겨우내 눈에 깔려 있던 연병장 모래가 말발굽에 날렸다.
“보고해.”
“예. 백여우 기사단과 적여우 기사단에서 각 백 명씩 기사를 차출하였고, 마력병 이백과 친위병 이백 명을 골라 뽑았습니다. 이상이 출정할 레시아르 백작군의 현황이고, 합류한 소귀족과 기사들은...”
“보병은 됐고 기사 전력만 간단하게 말하지.”
“도합 일흔한 명입니다.”
어중이떠중이라고는 해도 모으니까 많아 보이는군.
“그들을 따로 지휘할 지휘관을 세워야 할 텐데. 개중에 말귀 밝고 능력 있는 자 없나?”
“애민기사 헬무트를 제외하면 딱히 빼어난 자는 없습니다.”
“그 친구는 너무 어려. 그럼 부게른 남작... 은 전장에서 뛰기엔 살이 너무 쪘지. 루이사는 임산부니까 성에 있어야 하고, 기돔 자작은 아직 군을 맡기기엔 껄끄럽고.”
“암묵적으로 추대된 자가 있기는 합니다.”
“누군데?”
“괴팅겐 남작의 동생인 노딘 괴팅겐입니다. 쉰한 살의 나이로 참전해서 직접 기사로 검을 쥐기로 한 자들 중에서는 나이가 가장 많습니다. 지금껏 능력을 보일만큼 대외적으로 활동을 한 적은 없지만 대체로 무던하다는 평입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적당히 타협하기로 했다.
“그럼 그 자에게 지휘관을 맡기고, 부관으로 헬무트를 쓰게 해.”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출진시켜.”
“예.”
타라는 뒤로 손을 휘저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악대가 나팔과 피리를 불고 북을 두들겼다.
가장 먼저 오록스 단장이 이끄는 백색 예복의 백여우 기사단이 전진했고, 그 뒤를 제트리 단장의 적여우 기사단이 따랐다.
이후 말에 오른 친위대원들이 검은색 정복을 자랑하며 행렬을 이었고, 승마에 익숙지 않은 마력병들은 그래도 꼿꼿이 자세를 세우려 하며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노딘과 헬무트가 기사들과 함께 후미를 장식했다.
아티아의 성민들은 거리에 빼곡히 나와서 내 승리를 기원했다.
계승식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인근의 귀족들을 휘어잡았으니 위상이 한층 더 올라간 느낌이다.
그래서 중앙과 맞선다는 소식에도 다들 걱정이 없어보였다.
“레시아르 영지민 중에서 백작님의 승리를 믿지 않는 자는 없습니다.”
“그래도 민심이 흔들리는 건 한 순간이야. 마티란 자작이 나 없는 동안 중심을 잘 잡고 있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출산이 가깝기도 하고, 정무를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겠지. 화리메와 아옹다옹 싸우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메이드장 세리야에게 따로 부탁을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입지가 약하다 보니.
이럴 때는 부인의 존재가 좀 아쉽긴 하다. 본성을 든든하게 맡기고 떠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을텐데.
여하튼 당장 크게 문제될 건 없으니. 그건 차차 생각하도록 하고.
성 밖으로 줄줄이 병력이 빠져나가는 걸 지켜보고 있는데, 타라가 성벽 위 한 켠을 가리켰다.
“저기 자작님이 서 계시는군요.”
가만 보니 두 여자가 붙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배가 산처럼 불러온 마티란 자작과, 그 뒤에 살그머니 선 브레이스였다.
나는 그녀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는 말 머리를 돌렸다.
마침 행렬 맨 뒤에 있는 기사가 성문을 나서던 참이었다.
“가자.”
기수가 깃발을 곧추세우고 외쳤다.
“레시아르 군! 전진!”
수백 기에 달하는 기수들이 말을 달렸다. 말발굽에 얼음과 눈이 튀기며 흙밭이 드러났다.
말은 해가 지기 전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이번 출정에 보병을 뽑지 않은 건 빠른 기동을 위해서였다.
그걸 위해 마력병과 친위대원들에게까지 모두 승마 훈련을 시켰다. 타고 달리는 것만 연습시켜서 그런지 행군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계승식에서 목을 친 놈의 영지까지 도착하는 데에 열흘이 채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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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아티아와 비교하기엔 민망한 수준이다.
방비수준도 하찮은데, 그래도 우리가 다가오는 걸 보고 도개교를 올리긴 했다.
“여기는 폴 남작께서 적법하게 다스리는 성이오! 거기 오시는 분들은 정체를 밝히시오!”
기사 하나가 성벽 위로 올라가 소리쳐 물었다.
“나는 레시아르 백작이다.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해라.”
“레, 레시아르 백작님? 헌데 어째서 저희를 공격하시는 겁니까?”
이 작자들은 자기네 영주가 죽은 것도 모르는 모양이다. 입단속을 시키긴 했는데 다들 이렇게까지 말을 잘 들을 줄은 몰랐네.
“폴 남작은 배신한 죄를 물어 죽였다. 너희도 목숨이 아깝다면 당장 성문을 열고 나와 내 앞에 조아려라.”
“하지만 폴 남작님의 허가가 없으면...”
“글쎄 그 폴 남작이 죽었다니까.”
기사가 우왕좌왕하던 차에 덜떨어진 궁수 한 놈이 겁을 먹었는지 화살을 쏘았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궁병도 활시위를 당겼고, 어정쩡하게 전투가 개시되었다.
“억!”
친위대원 하나가 재수도 없게 방패를 뚫고 들어온 화살에 가슴팍을 맞았다.
“저 개잡놈의 새끼들이 내 병사를 상하게 해? 오록스 단장! 당장 성벽을 점령하여 내게 바쳐라!”
“존명을 따르겠습니다.”
곰처럼 커다란 오록스 단장이 직접 사다리를 타고 올랐고, 백여우 기사단이 그 뒤를 따랐다.
궁병들은 기사들이 하나둘씩 성벽을 타고 넘어오자 덤빌 생각도 못하고 도망부터 쳤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항복해라!”
오록스는 도끼를 휘두르며 궁병들을 몰아냈다.
시퍼런 마력이 감도는 도끼가 한 번 번쩍일 때마다 궁병 서넛의 허리가 반으로 잘렸다. 마력 없는 수혈 평민들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역시 기사에 맞설 수 있는 건 같은 기사 뿐. 하지만 조그마한 영지에서 기사단을 따로 꾸릴 수 있을 리가 없지.
나와 이야기하던 적 기사는 허둥지둥 대다가 손 한쪽을 날려먹고 나서야 무릎을 꿇었다.
그 사이 백여우 기사 하나가 성탑에 걸린 깃발을 던져버리고, 레시아르 가문의 깃발을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문이 열렸다.
나는 말을 탄 채로 성 안에 들어갔다.
제압된 적병들이 벌레처럼 이마를 땅에 박고 있었다. 굳이 죽일 것도 없지만 신경을 써줄 필요는 더더욱 없다.
“이 중에 아까 내 친위대한테 화살 쏜 놈이 있나?”
“그쪽 성벽에 올라가 있던 궁병들은 전부 죽었다고 합니다.”
“그럼 됐고... 파샨.”
“네! 도련님!”
"저택으로 바로 가서 일족들 전부 확보해."
“알겠습니다!”
파샨은 친위대원들을 이끌고 성 안쪽으로 달려 나갔다.
“백작님.”
제트리 단장이 공을 원하는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딱히 시킬 일이 없었다. 이 촌구석 성에는 백여우 기사단만으로 과잉전력이었다.
“단장은 나를 수행하도록 해. 아주 중요한 임무라고 할 수 있지.”
“예... 물론입니다, 백작님.”
나는 적여우 기사단과 마력병을 이끌고 성을 한 바퀴 돌았다. 그다지 볼만한 건 없는 자그마한 동네였다.
거친 병사들이 이리저리 말을 타고 다니자 성민들은 이불 안에 숨어 떨었다.
약탈이 마렵긴 했지만 여기면 레시아르 령부터 그리 멀지도 않고. 향후 추이에 따라 은근 슬쩍 삼킬 수 있는 땅이니만큼 약탈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적당히 시간이 흘렀을 무렵 나는 파샨이 보낸 전령의 뒤를 따라 저택으로 향했다.
영주의 일족이 저택 앞에 나와 서 있었다.
파샨이 성별과 연령 별로 구분해두었는데 아이가 셋, 젊은 여자는 다섯이었다.
나이 많은 여자가 푸들푸들 떨더니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레, 레시아르 백작님. 저희가 무슨 결례를 범했나요? 그게 무슨 일이든 사죄하고 용서를 빌겠습니다. 부디 저희가 무슨 결례를 범했는지만이라도 알려주세요.”
“네 아들이 중앙에 붙어 다른 영주들을 팔아넘겼기에 벌하였다. 죄가 그의 목으로 갚을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니 내 직접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아…….”
늙고 살찌기는 했지만 그녀도 귀족가의 여식.
내 말이 사실이건 허위건 간에 자신들 일족이 모두 살아남기 힘들 거란 건 파악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내 앞에 넙죽 엎드렸다.
“모두 구해달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와 젊은 여자들만은,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약속하지. 아이와 여자는 살 것이다.”
“백작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늙은 여자는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구명 받지 못한 남자들은 눈을 감았다.
“목을 베어라. 중앙으로 보낼 것이다.”
친위대원들이 가차 없이 그들의 목을 베어 상자에 담았다.
귀족의 피를 보는 데에 주저하는 병사들이 많은 걸 생각해보면 역시 직속 친위대원들의 충성심은 최고 수준이다.
나는 파샨에게 저택 안에 들어가서 금화와 보석을 챙길 것을 주문하고, 젊은 여자들 중에 미색이 괜찮은 이를 둘 골랐다.
“너희는 내 말 위에 올라라.”
여자들은 자매인지 사촌인지 모르겠지만 서로 꼭 붙어서 부들부들 떨다가 말 위에 올랐다.
말이 푸르릉 소리를 내긴 했지만 완전무장한 기사를 태우고 돌격도 감행하는 녀석이 여자 둘 더 태운 걸로 버거워할 리가.
나는 앞에 앉은 여자의 가슴을 조물딱거리면서 뒤에 앉은 여자의 엉덩이에 하반신을 문질렀다.
두 여자를 주물럭거리면서 말을 타고 점령한 성을 한 바퀴 돌았다.
병사들의 채근에 못 이긴 성민들이 집 밖으로 나와 만세삼창을 외쳤다.
그 이후에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작은 성과 요새 몇 개를 점령했다.
어정쩡한 자세를 보이던 인근 귀족들은 모조리 목이 달아났다.
친중앙 성향의 영주와 그 일족의 목을 베어 중앙으로 보내자, 중앙의 대신들은 다른 지역의 영주들을 회유하는 한편, 서북방으로는 중앙군을 출진시켰다.
병무대신 올드완이 본대를 이끌고, 선봉으로는 데픈 후작이라는 나름대로 전장터에서 뼈가 굵은 인간이 나섰단다.
참모로 아우럼 백작이 붙었다는 소식은 뒤늦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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