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아우럼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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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픈 후작이 이끄는 적 선봉이 이틀 정도 거리 앞에서 탐지되었다. 중앙군의 본대는 선봉군과는 사흘 정도 거리를 두고 진격해오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영주연합군이 아군과 합류하기로 정해진 날도 딱 사흘 정도였다.
적 선봉과 레시아르 군이 한 차례 격돌하고 난 다음에야 각자 본대가 합류하겠지만, 나야 연합군보다 내 직속 부대를 믿으니까 딱히 아쉬울 건 없다.
나와 이오시스, 그리고 타라는 전장을 시찰하기 위해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초원을 돌았다.
녹은 눈이 초원 이곳저곳을 흐르는 작은 실개천으로 변해있었다. 그 외 지형은 바위가 약간 있는 정도. 기사의 일제돌진이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실개천이 꽤 많은데, 백작님의 화염 마법을 쓰시는 데는 지장이 없을까요?”
이오시스가 슬쩍 물었다.
“이 정도면 크게 문제는 없지. 적 진영에 수석(??)의 마법사가 있으면 모를까.”
“아우럼 백작은 금석(??)의 마법사지요?”
“그래. 상성으로는 나쁘지 않긴 한데... 마법명가의 당주이니만큼 실력이 만만치는 않겠지.”
분위기가 약간 무거워졌다.
아우럼 가문이 하이브의 배양에 손을 얹은 게 확실한 이상 서로 적이 된 거야 당연한 이치지만, 설마 당주가 직접 참전까지 할 줄은 몰랐다.
“그 작자가 왜 전쟁터에까지 나오는 거지?”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실 필요는 없을지도 몰라요.”
달래려는 건지, 이오시스가 그렇게 말했다.
“글쎄……. 내가 그 노인네랑 호적수를 이룬다고 해도, 그렇게 되면 레시아르 군이 적 선봉과 내 지원 없이 싸워야 된단 말이지.”
“그런 말이 아니라, 아우럼 백작이 백작님께 원하는 게 있어서 참전한 걸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에요.”
“원하는 거?”
화리메라도 돌려달라고 하려나? 방계 출신인 화리메가 아우럼 가에서 대접 받고 살아왔을 것 같진 않은데. 본인도 자격지심이 좀 있었고.
간만에 화리메의 커다란 젖가슴을 떠올리고 있는데 옆에서타라가 탄성을 터뜨렸다.
“마석! 혹시 하이브의 마석을 돌려받으려는 게 아닙니까?”
“무슨... 아. 그럴 수도 있겠네.”
오페이아가 갇혀있던 동굴에서 내가 쳐 죽인 하이브만 해도 수십 마리다. 그 마석이 가진 잠재성을 생각해보면 아우럼 백작도 몸이 달아올랐을만 하지.
게다가 마더 하이브의 마석까지 내가 쏙 챙겼으니까.
“그럼 타협의 여지도 있다는 건가?”
“가능성은 충분해요. 아우럼 백작으로서도 굳이 전쟁영웅이신 백작님과 일전을 감수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아첨은.”
이오시스는 싱긋 웃어넘겼다.
“그래도 좀 안심이 되긴 하네. 어차피 훔쳐온 건데, 마석 좀 돌려주고 아우럼 백작을 전장에서 이탈시킬 수 있으면 이득이지.”
“맞아요. 아우럼 백작이 이탈하면 그만큼 백작님의 활동영역도 넓어질 테구요.”
“그래도 다 돌려줄 필요는 없겠지?”
이오시스는 그냥 웃기만 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정하라는 건가.
가만히 듣기만 하던 타라가 내게 물었다.
“아우럼 백작이 그렇게 뛰어난 마법사입니까? 저는 백작님께서 당연히 이기실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그렇게 생각해주는 게 고맙긴 한데. 기본적으로 마법사끼리는 싸움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가장 좋은 거지.”
마법사가 하나라도 끼어있으면 수 싸움이 복잡하게 된다.
카르마시아 전투에서도 켈자르 백작이 어디 숨어 있을지 몰라서 한동안 적에게 공세권을 줘야했지 않나.
마법사를 잡을 수 있는 건, 기사를 엄청나게 모으지 않는 이상은 같은 마법사뿐이라, 적진에 마법사가 존재한다는 게 확실하면 아군 마법사를 대마법사 용으로 아껴야 한다.
보병을 진영째로 무너뜨리고 기사를 학살할 수 있는 마법사를 예비대로 쓴다는 게 상당히 아깝단 말이지.
“아.아우럼 백작을 확실히 전장에서 이탈시킨다면 백작님께서 마음껏 전장을 활보할 수 있다는 거군요.”
그제야 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지. 전장시찰은 이만하면 됐고 돌아가자고. 내일부터는 저쪽에 나무 울타리를 치도록 작업 시켜.”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녁 메뉴는 뭐냐?”
“글쎄요...?”
“글쎄요 하면 군 생활 끝나냐?”
나는 간만에 타라를 갈구면서 숙영지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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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를 마치고 막사에 들어가는데, 탁자 앞에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남자였다.
여자라면 모를까, 내 허락도 받지 않고 들어올 간 큰 놈은 레시아르 군에 없다. 나는 서슴지 않고 그에게 불길을 뿜어냈다.
“아무리 젊은이라도 혈기가 지나치군.”
그는 손바닥을 들어 내 불길을 빨아들이고는, 가볍게 손을 털었다.
“누구냐.”
전력을 다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 공격을 이렇게 가볍게 파훼한 상대는 처음이다.
나는 내심 긴장해 마력을 끌어올렸다.
“뤼니베르트 마지카 아우럼. 아카데미에서 수학하지 않은그대라도 마법사임을 자처한다면 내 이름을 모를 리가 없는데.”
아우럼 백작이라고?
그는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었는데, 우습게도 머리에는 터럭 하나 없었다.
그래도 그 앞에서 그의 휑한 머리를 비웃는 자는 없겠지. 마법명가 아우럼의 이름은 드높았으니까.
그는 근엄한 표정으로 나를 심문하듯 물었다.
“화리메는 어딨는가?”
“죽였소.”
“레시아르의 계승식에 그 아이가 있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다시 묻지. 화리메는 어딨는가?”
“내가 죽였다면 죽인 줄 알 것이지, 대머리가 말이 많아.”
내 말이 짧자 아우럼 백작은 떨떠름하게 수염을 쓸었다.
같은 백작끼리, 그것도 아군도 아닌 사이에 공경해줄 생각은 없다.
그가 마법명가의 당주라지만 나도 호락호락하게 당하진 않을 거고, 무엇보다 여기는 내 진영이다.소란이 벌어지면 내게 합세할 기사가 수백 명에 이른다. 아무리 아우럼 백작이라도 다굴 앞에는 장사 없는 법이지.
가만 보자. 다소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여기서 아우럼 백작을 격살하는 게 아군에는 도움이 되려나?
그렇게 되면 굳이 마석을 돌려줄 것도 없이...
“너무 방자하게 굴지 말게.”
아우럼 백작이 검지를 쭉 뻗자, 내가 디디고 선 바닥에서 은은한 황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미리 수작을 부려놓은 건가?
무슨 마법일지 몰라 바싹 긴장한 채 마력만 끌어올려 놓은 채로 대기하는데, 아우럼 백작은 놀리듯 검지를 다시 접었다.
그와 동시에 황금빛도 슥 사라졌다.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네. 마법사끼리 싸우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면 자네에게도 나쁘기만 한 제안은 아닐 터.”
“그렇긴 하지.”
“그럼 앉게, 젊은이.”
나이를 헛먹은 건 아닌지, 아우럼 백작은 자연스레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내 막사임에도 그가 주인처럼 내게 자리를 권하는 게영 아니꼽긴 하지만... 그 말대로 싸움을 피할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게 없긴 하지.
나는 그를 마주보고 탁자 앞에 앉았다.
“협상을 하러 온 거요?”
“내가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군?”
“직접 올 줄은 몰랐지.”
아우럼 백작은 허허 웃으며 수염을 쓸었다.
“화석(火?)의 신예 마법사를 만날 수 있다면 발걸음을 옮기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지.”
“그만큼 하이브... 아니, 그쪽은 네스트라고 부른다지? 네스트의 마석을 급히 원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겠소.”
내가 이죽거리자, 아우럼 백작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탁자에 기대 세워둔 지팡이를 짚었다.
바닥을 치는 탁탁 소리가 막사 안에 울렸다.
“이 늙은이를 너무 자극하지 말게.”
“사실 아니오? 그 마석이 얼마나 간절하면 마법명가의 당주가 직접 전쟁터까지 나와, 적진에 숨어들기까지 했을까.”
“그야 당연히 원하지! 그것은 원래 아우럼 가에서 찾아낸 보물이었다, 이 애송아.”
“아우럼 가에서 찾아낸 것이라도, 지금은 내 손에 들어와 있다는 걸 잊지 마시오.”
“잘 알고 있어. 그러니 그대를 도둑놈 취급하는 대신 협상의 상대로 대우하는 게 아닌가.”
아우럼 백작은 내가 도발해도 협상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렇다면, 나도 진지하게 협상에 임하기로 했다.
“마석을 돌려주는 대가로 무얼 줄 수 있소?”
“그대가 화리메를 첩실로 삼는 것을 묵인해주고...”
“그거야 당연한 거고.”
“아우럼 가문은 이번 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서약하며...”
“그것도 당연한 거.”
“이번 겨울에레시아르 령이 입은 피해에 대해 중앙과는 별개로 금화로 배상을...”
“당연.”
“끝까지 좀 듣게!”
아우럼 백작은 벌컥 화를 냈다.
“알았소. 더 끼어들지 않을 테니까 얘기하시오.”
“그러니까... 음, 그게 다네.”
나는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보았다.
“백작께서 제시한 건 아우럼 가가 중앙에 편승하여 레시아르 령을 침탈한 데에 따른 피해보상에 지나지 않소. 하이브의 마석을 원한다면 마석에 대한 값은 따로 치러야지.”
“허…….”
아우럼 백작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우럼 가문의 위세를 그대가 모를 리는 없고. 정녕 전장에서 이 늙은이와 마주치기를 바라는 것인가?”
“싸워야 한다면 싸워야지. 레시아르는 비굴하게 피하지 않소.”
“오만하기 그지없는... 기껏해야 지방의 영주들과 치른 영지전이 전부인 주제에, 중앙군을 상대로 그대가 이길 것이라 그리 자신하는가?”
“솔직히 말하면 내가 백작께 묶인 상태에서 이기기란 쉽지 않겠지.”
“헌데?”
“그래도 비굴한 승리보다는 호기로운 패배가 낫다는 게 내 지론이오.”
사실 거짓말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싸움을 하면 무조건 이겨야지.
하지만 일부러 눈빛을 강렬하게 쏘아 아우럼 백작을 노려보며 비장한 목소리로 말한다.
“질 때 지더라도 나는 굴종하지 않소. 내 의기의 표시로,내가 지면 네스트의 마석은 사나우 강에 흘려버릴 테요.”
“그런 미친 짓을!”
아우럼 백작은 경악해서 지팡이를 쿵 내려쳤다.
“협박하는 것처럼 보이시오? 그 빌어먹을 마석 때문에 애초에 이 사달이 난 걸 생각해보면 그리 못할 것도 없지. 두고 보시오. 내가 그 개같은 마석들을 강물에 쳐넣나, 안 넣나.”
협상은 더 간절한 자가 불리한 법이다.
하이브의 마석을 돌려받기 위해 적진까지 기어들어온 시점에서 아우럼 백작은 자신의 간절함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장고하긴 했지만, 결국 백기를 들었다.
“마석 하나에 금화 삼백 닢. 어떤가.”
“너무 적소. 아우럼 백작께서도 네스트 마석의 가치를 모르지 않을 텐데.”
“그야 잘 알지. 그러니 하나에 금화를 삼백 닢이나 쳐주는 것 아닌가. 속성석도 어지간한 상품이 아니고서야 그만큼 받진 못할 걸세.”
“아니. 그래도 그걸론 부족하지. 네스트 마석으로 황금의 시대로 전이해서, 황금의 인간들이 빚은 술과 음식만 가져오더라도 그 가치가 얼만데...”
“뭐, 뭐라 했나?”
아우럼 백작은 갑자기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늙은이가 귀가 좀 먹었을 수도 있지. 나는 그런 면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이번에는 그가 잘 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황금의 시대로 전이해서...”
“전이했다고?”
아우럼 백작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되물었다.
뭐야. 반응이 이상한데.
마치 자기는 황금의 시대로 전이해본 적이 없는 것처럼…….
아, 그럴 수도 있는 건가?
돌이켜보면 화리메도 황금의 시대로 전이한 적이 없었지. 그건 화리메가 방계 출신의 아웃사이더여서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그게 아우럼 가문을 통틀어 처음으로 황금의 시대에 전이한 거였던가.
하필 그 때만 성공했던 이유가 뭐지? 화리메가 특별한 건가? 아니면 그 동굴이? 내가? 내가 들고 있던 마검의 화석이? 아니, 애초에 마석에 마력을 불어넣은 건 바리보예즈였으니까 그 놈일 수도 있겠고.
당장 여러 요인들이 떠오르지만, 일단 확실한 건 아우럼 백작가는 하이브의 마석을 가지고서도 황금의 시대로 전이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거다.
하긴. 생각해보면 이 황금성애자들이 황금의 시대로 전이할 수 있는 마석을 그까짓 괴수를 만드는 데에 낭비했을 리가 없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데, 생각해보기 전에는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았다는 게 신기하단 말이야.
“여, 여보게. 사위.”
“누가 사위야. 당신 화리메 아버지도 아니잖아.”
입장이 아쉬워진 아우럼 백작이 내 팔을 잡았다.
남자가 몸에 닿는 걸 싫어하는 나로서는 오히려 기겁할 노릇이다. 팔을 빼치며 눈살을 찌푸렸지만 아우럼 백작은 개의치 않고 말을 붙였다.
“그 아이와 내 촌수가 그리 멀지 않아. 어릴 적에는 내가 화리메를 업어 키웠지.”
“그런 말은 화리메한테 못 들었는데…….”
“아이고. 이 사람아. 왜 이제 왔는고. 어서 결혼식부터 정식으로 올리세.”
“아니. 갑자기 친한 척 하지 마시고.”
아우럼 백작은 체신머리도 잊고 내게 매달렸다.
“나를 황금의 시대로 보내주게! 부탁하네! 아니, 방법만이라도 알려줘도 되네! 금화를 원한다면 성과 저택을 몽땅 팔아서라도 댈 테니!”
명색이 마법명가의 당주가 이 정도로 저자세로 나오니, 나는 약간 질려버리고 말았다.
"내가 할 말은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체신을 좀 지키시오. 당주란 사람이..."
“황금의 시대를 눈에 담는 건 천 년을 이어온 아우럼 가문의 숙원사업일세! 황금마법의 근원을 추구하는 자로서 황금의 시대를 견학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아깝지 않다니까! 자넨 몰라! 아니, 몰라도 되네! 그냥 원하는 게 있다면말만하게! 금화든, 영지든, 사람이든, 내 마누라를 달래도 주겠네!”
“실례지만 귀부인께서는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쉰둘일세.”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은 없다가 내 좌우명이긴 하지만 쉰둘은 불가능이오.”
“누가 내 마누라를 준다든가?원하는 걸 말하게, 원하는 걸!”
몸이 잔뜩 달아오른 아우럼 백작이 간청 반, 호통 반으로 소리쳤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곤란하오.”
나는 슬쩍 뒤로 몸을 뺐다.
여기서는 내가 원하는 걸 말하는 것보다, 아우럼 백작이 내가 원할법한 걸 제시하도록 하는 편이 이득이 크다.
“으음……. 그럼 이건 어떤가?”
예상대로, 아우럼 백작은 내게 아주 매력적인 제안을 던졌다.
일전을 앞둔 수장으로서는 거절할래야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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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럼 백작을 떠나보내고 나서 이틀 후.
적 선봉을 맡은 데픈 후작이 기사 팔백과 보병 육천을 이끌고 도착했다. 마력병의 수는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대략 오륙백 정도로 예상된다.
선봉이라고는 해도 상당한 전력이다.
이에 맞서는 내 레시아르 영지군은 기사 이백, 친위대와 마력병을 합해 사백, 그리고 노딘과 헬무트를 비롯한 기사 일흔한 명.
전력의 차이는 확연했고,나는 자신이 없었다.
질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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