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 선봉
* * *
적은 초원에 발을 들이자마자 숙영지 건설에 나섰다.
피차 진영을 갖추고 있지 않았으니 전투는 내일부터다, 라고 선봉군을 이끄는 데픈 후작은 생각하겠지.
진영을 갖추지 않은 상대를 공격하는 건 명예롭지 않은 일이기도 하고. 실제로 지난 카르마시아 전투에서도 켈자르 백작은 아군이 진형을 갖출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런데 전쟁에 명예가 어딨나. 명예 찾다가 지면 그것처럼 꼴불견이 없지.”
“예?”
“타라. 마력병들을 보내. 깊이 들어가지 말고, 멀리서 마력창으로 숙영지 건설만 방해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백작님.”
마력병들도 나름대로 갑주를 챙겨 입긴 했지만 기사에 비하면 경장 수준이다. 그들은 가뿐히 말에 올라 적진을 향해 달려갔다.
아군 숙영지가 서쪽에 지어진 덕에 마력병의 돌격을 지는 해를 등지고 감행되었다.
“적이다! 적 기병 습격!”
숙영지를 짓느라 바쁘던 적 진영은 마력병의 기마돌격으로 한층 더 시끌벅적해졌다.
아군 마력병들은 엉성하게 짓다 만 망루와 목책을 빙 둘러가며 마력창을 발사했다.
“마력창! 쏘아!”
“쏘아!”
한창 숙영지 건설에 힘을 쓰던 보병들이 줄줄이 쓰러졌다. 같이 망치를 휘두르던 동료가 마력창에 꿰뚫려 죽자, 보병들은 겁에 질려 사방으로 도망쳤다.
일선의 보병을 몰아낸 아군 마력병은 계속 말을 달리며 진영 곳곳을 휩쓸었다.
마력창을 난사하다보니 이제 골조만 세워진 막사가 팍팍 부서지며 무너지기도 했다.목재를 모아둔 곳에도 마력창이 날아들었는데, 근처에 있던 화로가 넘어지면서 불이 옮겨 붙었다.
“불이야!”
“불부터 꺼!”
“아니, 일단 저 놈들부터... 컥!”
사관들이 하나둘씩 나와서 보병을 추스르려 했지만 마력병의 좋은 과녁이 될 뿐이었다.
“아군 마력병은 뭐하나!”
“지금 막추격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적 마력병은 거의 다 보병이라 아군 마력병의 기동력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따금 솜씨 좋은 적 마력병이 아군 마력병을 마력창으로 맞추어 떨어뜨리기도 했는데, 그런 경우에는 뒤에서 쫓아오던 마력병이 그곳으로 마력창을 난사하여 복수했다.
잔뜩 화가 난 기사들이 말에 올라 마력병들을 뒤쫓았다.
“거기 서라! 이 비겁한 놈들!”
마력병들은 당연히 기사에 맞서지 않고 부리나케 도망쳤다.
중장갑주를 입은 기사들은 경장의 기마 마력병들을 따라잡지 못했다. 홧김에 마력창을 쏘아보지만, 이미 잔뜩 거리를 벌린 마력병을 맞추진 못했다.
“와아아아!”
초전의 승리를 거두고 온 마력병의 귀환을 전군이 환영헀다.
마력병들은 말 위에서 으쓱거렸다.
적이 입은 피해가 그리 크진 않았을 테지만 전장에 도착하자마자 습격을 당했으니 사기가 꺾였겠지.
적 지휘관인 데픈 후작도 부담이 적지 않을 거다. 듣기론 그는 후작위를 가문계승한 게 아니라 중앙에서부터 공을 세워 하사받았다는데.
그런 입지전적인 인물은 늘 공을 탐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초전의 작은 실수를 어떻게든 만회하고 싶어 할 터. 본대가 합류하기 전에 데픈 후작이 독자적인 판단으로 내게 회전을 걸어올 가능성이 높다.
나는 타라에게 병사들을 잘 쉬게 하라고 전하고 이오시스에겐 숙영지와 전장 한 곳에 설치한 울타리의 일을 당부한 뒤에 일찍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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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데픈 후작은 해가 뜨기 무섭게 병사들을 정렬시켜 내보냈다. 약간의 예비대를 제외하면 기사를 앞에, 마력병을 중앙에, 보병을 맨 뒤에 배치한 돌격 일변도의 진형이었다.
그만큼 기사의 전력에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일제돌격만으로 우리 군을 박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이 엿보인다.
그에 맞서 나도 병사들이 진형을 갖추게 했다. 연합군 기사들을 좌측, 백여우 기사단과 적여우 기사단을 중앙, 친위대와 마력병을 우측 멀찍이에 배치했다.
진열을 마치고 나니 적 진영에서 붉은 깃발을 쥔 기사가 말을 달려왔다.
“나는 케린에서 온 기사 호노스요! 데픈 후작님의 전언을 가져왔으니 레시아르 백작은 귀를 씻고 똑똑히 들으시오!”
어제 기습을 당해놓고서도 전장의 예법을 지키려는 건가.
귀족들은 이런 면에서는 지나치게 완고하다.
“내 말을 가져와라.”
“백작님. 직접 나서실 필요는...”
“아니. 어제 기가 덜 꺾인 모양인데. 전투에 들어가기 전에 확실히 기를 꺾어놔야겠어.”
나는 말을 타고 진영을 나서 호노스에게 다가갔다.
내가 정말로 직접 나오자, 호노스는 약간 기가 죽은 듯했다. 하지만 그는 목울대를 한 번 울리고는 우렁찬 목소리로 데픈 후작의 말을 전했다.
“그대, 바이스 레시아르는 아비인 케인즈 레시아르를 핍박하여 백작위를 강탈함에 그치지 않고 봉신을 괴롭혀 금화를 탈취하였으며 인근의 처녀들을 탐하여 귀족으로서 명예를 더럽혔다! 이에 중앙의 대신들은 폰세르크 국왕 전하의 성지(??)를 받들어 그대를 벌하기로 하였다! 지금이라도 죄를 뉘우치고 병력을 물려 항복한다면 너그러이 용서할 것이나, 감히 국왕 전하의 권위에 대적하겠다면 그대의 목숨은 부지할 수 없을 것이며, 그대가 그리 아끼는 여자들 또한 창부로 제국에 팔려나가리라!”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이런 개씨발놈의 새끼들이 감히 내 여자들을 건든다고!”
내가 지른 고성에 호노스의 말이 놀라 앞발을 들어 올리며 펄쩍 뛰었다.
호노스는 말 갈기를 쓰다듬으며 말을 간신히 진정시키고는 내 눈치를 살폈다.
“이, 이상이 데픈 후작께서 보내신 전언이오. 하실 말씀이 있으시오?”
“비열한 중앙의 쥐새끼들이 먼저 수작을 부리더니 이제는 적법하게 가문계승한 내 백작위를 가지고 떠들어대고 내 여자들까지 건드리겠다고 겁박을 한단 말이냐! 이제부터 내가 중앙과 나눌 말은 오직 철과 화염뿐이다!”
“알겠소. 그럼 그리 전하겠소.”
호노스는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진영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나는 그 앞에 불길을 확 일으켰다.
그가 탄 말이 놀라 푸르릉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무, 무슨 짓이오?”
“방자한 말을 그대로 전한 그대도 내 명예를 더럽힌 죄가 있으니, 결투를 신청한다.”
“아, 아니. 그건...”
기사 호노스는 당황해서 말을 얼버무렸다.
마법사가 평기사, 그것도 전령으로 온 자에게 일대일 결투를 신청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여기는 거친 사내들이 모인 전장.
이런저런 사정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대도 들어줄 사람은 없다. 호노스가 결투를 거절하고 적 진영으로 돌아간다면 그는 겁쟁이가 될 뿐이다.
“거절하고 도망쳐도 좋다. 어찌할 텐가?”
그를 도발하며 묻자, 호노스는 분개하여 소리쳤다.
“좋소! 결투를 받아들이지!”
역시 젊은 놈이라 격장지계가 잘 먹혀들어간다.
나는 말머리를 돌려 호노스와 거리를 약간 벌렸다. 그는 잔뜩 긴장해서 검을 빼들었다. 한 손에는 깃발, 다른 손에는 검.
꽤나 멋들어진 모습이지만 실력은 어떨지.
“그대가 신호하면 개시하는 걸로 하지.”
“신호할 것도 없소! 백작! 그 오만함에 사죄하며 죽으시오!”
기사 호노스는 두 발로 말의 아랫배를 걷어차며 돌격해왔다.
깃발이 펄럭이며 쫙 펴짐과 동시에 반대편에 들린 칼날이 예리한 곡선을 그리며 내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반으로 불타서 죽어.”
검지로 호노스의 상반신을 가리킨다. 기사의 허리 위에서부터 투구까지 불길이 확 치솟았다.
바이저 사이로 검은 연기가 풀풀 뿜어져 나왔다.
호노스가 쥔 검과 깃발이 내 몸에 닿는 일 없이, 그가 탄 말만이 타그닥타그닥 소리를 내며 내 옆을 지나쳤다.
잠시 후, 호노스의 몸이 기우뚱하더니 말에서 툭 떨어졌다.
“...퍼...”
그는 입을 작게 열고 뻐끔거리다가 이내 아무 소리도 내지 않게 되었다.
“와아아아!”
진열을 갖춘 채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마법사가 기사를 일대일로 싸워서 이긴 거니 좀 비겁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이긴 건 이긴 거지. 나는 사기가 오른 김에 바로 몰아치기로 했다.
“진격하라. 먼저 들이친다.”
오록스 단장이 백여우 기사단을 이끌고 선두에 섰다. 그 뒤를 제트리 단장의 적여우 기사단이 받친다. 기사단장의 성향에 따라 백여우는 공격, 적여우는 방어를 전담하도록 했다.
한편, 노딘과 헬무트를 비롯한 일흔한 명의 기사들은 크게 좌측으로 돌아서 맹진했다. 반면 친위대와 마력병은 각자 임무에 따라 배치된 곳으로 향했다.
상황을 파악하느라 어수선하던 적 진영에서도 뒤늦게 기사들이 돌격에 나섰다.
“죽여라! 쥐새끼 같은 중앙 놈들!”
“레시아르의 여우 놈들!”
마력창이 양 진영에서 촘촘히 발사되며 하늘을 수놓았다.
하지만 첫 격돌에서 죽거나 다치는 이가 많이 나오지는 않았다.
중앙의 기사들은 마력창을 발사한 직후 마력 방어막을 세웠고, 아군 측에선 적여우 기사단이 미리 마력 방어막을 만들어두었기 때문이다.
소나기가 창문을 두들기는 것처럼 마력창이 연이어 방어막을 때려댔다. 그 사이에 양측 기사들은 더 맹렬히 말을 몰아 서로와의 간격을 좁혔다.
“발사!”
“계속 쏘아붙여!”
한 번 더 마력창이 쏘아졌고, 이번에는 마력 방어막에 군데군데 빈틈이 생겨났다.
점을 노리는 마력창에 비해 면을 지켜야 하는 마력 방어막은 불리하기 마련이다. 방어막이 뚫린 틈을 타고 마력창이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커흑!”
“웩!”
“죽여버려!”
“간다!”
세 번째로 마력창을 쏘기 전에 적 선두와 아군 선두가 서로 맞닥뜨렸다.
오록스는 전투 도끼를 휘둘러 적 기사의 쇄골을 내리찍었다. 적 기사는 검을 내밀어 막아보려 했지만, 도끼에 밀려 제 검까지 어깨에 깊게 박혔다.
그는 컥 소리를 내며 앞으로 고꾸라지더니 말에서 풀썩 떨어졌다.
“레시아르 백작 각하 만세!”
오록스는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외치고는 연이어 달려드는 적 기사의 머리를 두 쪽으로 갈라버렸다.
뇌수와 뼈가 사방으로 튀는 바람에 피아를 가리지 않고 근처에 있던 기사들이 질색하며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중앙의 기사들도 만만치만은 않았다.
그들은 상대하기 껄끄러운 오록스를 빙 둘러서 백여우 기사단을 노렸는데, 일대일로 붙으면 기량이 압도적이었다. 게다가 기사의 수도 중앙 쪽이 네 배는 더 많았으니.
적여우 기사단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백여우 기사단은 차츰차츰 밀려났다.
“백작님.”
타라가 다가왔다.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나팔수에게 눈짓을 보냈고, 곧 퇴각을 알리는 뿔나팔 소리가 울렸다.
“후퇴!”
오록스가 피에 젖은 도끼날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표정만 보면 후퇴가 아니라 몰살을 외칠 것 같지만 어쨌든 후퇴는 후퇴.
레시아르의 기사들은 말 머리를 돌려 아군 진영 쪽으로 도망가려 했고, 그 뒤를 중앙 기사들이 마구 쫓았다.
어제의 습격 때문에 열이 잔뜩 올랐는지 중앙 기사들은 정말 맹렬히 추격했다.
마력창에 내 기사들이 하나둘씩 꿰뚫려 죽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지금도 막 백여우 기사 하나가 하늘에 붕 뜨더니 구겨지듯 바닥을 굴렀다. 말이 마력창에 궁둥이를 맞고 쓰러진 것이다.
발목이 옆으로 꺾여 저거 꼼짝없이 적에게 잡혀 죽겠구나 싶었는데, 근처에서 적여우 기사 하나가 달려오더니 그를 일으켰다.
“흡!”
백여우 기사는 그의 어깨에 기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적 기사가 적여우 기사를 노리고 마력창을 쏘아냈다. 다행히도 마력창은 투구 옆면을 치고 비스듬하게 빗나갔다.
깡 하는 소리가 청명하게 울리며 투구가 날아갔다. 그 아래 숨겨진 곱상한 얼굴이 드러났는데, 오페이아의 연인인 미장센이었다.
“어서 일어나. 같이 돌아가자고.”
“고, 고마워.”
백여우 기사는 그의 부축을 받아 어깨를 맞대고 뛰었다.
눈물 나는 전우애군.
적도 뭔가 느끼는 게 있는지 그들에게 더 이상 공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오페이아는 저택에 그냥 방치해뒀던가. 아마 메이드로 교육을 시키고 있겠지만 좀 더 신경을 써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봉사섹스 열 번에 미장센을 한 번 만날 수 있는 쿠폰을 만드는 건 어떨까. 물론 만나서 할 수 있는 건 담소밖에 없을 테지만.
미장센은 미장센대로 연인을 잃은 슬픔을 창관 ‘초가을의 과실’에서 풀고 있다던데.
두 남녀가 각자 정욕은 따로 해결하면서도 플라토닉 러브를 유지할 수 있는지 지켜보는 것도 재밌긴 하겠다.
여하튼 미장센은 백여우 기사를 부축하여 무사히 말에 올랐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불운한 기사들은 적의 끈질긴 추격전에 말려 줄줄이 죽어나갔다. 출격시킨 기사 이백 명 중에 삼, 사십은 잃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피해가 너무 커지는군.”
“이 정도는 예상범위 내 수준이에요.”
이오시스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적, 백여우 기사단은 내 병력 중에서도 주력이야.”
“전략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의 피해에요. 적은 기사만 팔백 명이라는 걸 감안하셔야죠.”
“그렇긴 한데…….”
부관 타라가 전장 좌측을 가리켰다.
“백작님. 기사 노딘이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과연. 적 마력병과 대치 중이던 연합군 기사들이 아군의 후위를 지키기 위해 돌아오고 있었다.
기사의 수는 일흔한 명에 불과하지만 마력과 기력 모두 쌩쌩한지라 적에게 나름대로의 충격을 줄 수 있었다.
게다가 헬무트의 기량이 예상 외로 뛰어났다.
그는 양손에 하나씩 쥔 쌍검을 휘두르며 적진을 종횡무진 후비고 다녔다. 허벅지를 조였다가 푸는 것만으로 말을 모는 솜씨가 예술이었다.
하지만 한 번 기운 전세를 개인의 용맹만으로 뒤집을 수는 없다. 헬무트를 제외한 다른 기사들이 중앙 기사들에 의해 하나씩 참살 당하면서 다시 아군은 숙영지 쪽으로 밀려났다.
헬무트도 완전히 포위당하기 전에 빠져나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레시아르의 여우들아! 추하게 도망치지 말고 싸우자!”
“와하하하하!”
적 기사들은 창을 들어 올리거나 검을 방패에 부딪치며 다가왔다. 아예 아군 숙영지를 점령해서 레시아르 군을 몰아버리겠다는 기세였다.
정예 기사만 팔백 명이니, 실제로 그러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
나는 놈들이 물 밀듯이 쳐들어오는 걸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피해가 좀 크긴 했지만 계획대로 됐군. 이제 병사들 전부 뒤로 물려.”
“백작님. 그래도 부관은 곁에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타라가 검집을 꽉 쥐며 말했다.
“귀관의 실력을 자신하지 마. 귀관이 남겠다면 나는 귀관을 지키면서 싸울 수밖에 없어.”
“... 죄송합니다.”
“억울하면 실력을 더 쌓으라고. 자고로 가장 편하게 실력을 쌓는 방법은 파샨처럼...”
“부디 조심하시길.”
타라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 기사들과 함께 떠났다.
“에이씨. 쟤는 자꾸 말을 끊냐. 체닐린. 너도 가. 파샨도.”
체닐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처음부터 반대였다. 이런 무지막지한 계획.”
“누가 찬성해달래?”
“그게 아니라... 너무 위험하다는 거다!”
걱정해주는 게 기특해서 엉덩이라도 두들겨주고 싶지만 지금은 한 시가 급하다.
이걸 어떻게 설득해서 보낼까 하는데, 파샨이 체닐린을 끌다시피 해서 데려갔다
“도련님이 하신다면 하시는 거야. 잘 알지도 못하면서.”
파샨에게 내 말도 끌고가라고 해서 보내고, 혼자 선 채로 적진을 살폈다.
적 기사들은 낙오한 아군 기사들을 전부 정리하고 이리로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그 기세가 날카롭기 그지없다. 다 이긴 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데픈 후작은 기사 간의 접전이 완승으로 끝나자마력병과 보병들을 연이어 출격시켰다.
하지만 적 기사들은 의기양양해서 보병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아군 숙영지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겨우내 바싹 마른 목재와 짚더미로 지어진 막사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다가 그 중앙에서 홀로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레시아르 백작이다!”
중앙의 기사들은 호기롭게 하나씩 덤비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들은 검을 뽑아든 채 말에서 내려 나를 몇 겹으로 감쌌다.
선임 기사 하나가 나와서 내게 말을 걸었다.
“항복하시오. 바이스 레시아르.항복한다면 그대를 백작의 예우에 준하여 대접하겠소.”
“준하고 말고 할 것 없다. 나는 레시아르 백작이다.”
“나도 고귀한 금혈귀족의 피를 손에 묻히고 싶진 않소. 정말 항복해주면 안 되겠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군. 모두...”
“죽어라!”
“화염 마법이다! 대비하라!”
나는 마력을 아낌없이 끌어냈다.
적 본대가 사흘거리에 있으니, 여기서 마력을 뿜어내며 싸우고 난 후에 사흘 동안 휴식을 취하면 그만.
그 동안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마력이 일렁이면서 전신의 땀구멍에서 뿜어져 나왔다.
“방어막 전개!”
“우선 막는 데 전념하라!”
수백 명의 기사들이 사력을 다해 만들어낸 방어막을 단숨에 뚫는 건 불가능하다.
내 몸을 휘어감은 불길은 기사들의 방어막 사이에서 퉁퉁 튕겨 다니다가 사이사이로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 규모는 처음에 뿜어낸 거대한 화염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하지만 그렇게 빼죽 튀어나온 불씨가 바닥에 옮아 붙자, 바닥에 거미줄처럼 쳐져 있던 노끈을 타고 화마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이렇게 불을 키우는 건 마법이 아니라 자연현상이니 기사들로서도 대응할 방법이 없다. 마력 방어막을 내세워봐도 숙영지 전체를 덮을 수는 없는 법.
나무로 지어진 숙영지가 거대한 불가마로 변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데픈 후작도, 선임 기사도, 여기 모인 중앙의 기사 누구라도 내가 숙영지를 통째로 불태울 줄은 몰랐겠지.
“아아악!”
매캐한 연기가 눈, 코, 입을 마구 찔렀다.
미숙한 젋은 기사 하나는 바이저를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하며 건틀렛으로 얼굴을 비비다가 괜한 상처를 냈다.
노련한 기사들에게 있어서도 화염은 천적이나 다름없다. 불은 검으로 가를 수도, 방패로 막을 수도 없다. 불길이 덮친 기사의철제 갑옷이 익혀지며 그 안에 든 몸까지 통째로 구워졌다.
“백작부터 죽여라! 마력창 투사!”
뒤늦게 선임 기사가 명령을 뒤집었지만, 그건 어이없는 실책이었다.
차라리 방어막으로 불길을 억제한 채 검을 들고 다가왔어야지.
기사들이 마력창을 쏘기 위해 방어막을 해제한 순간을 노려, 마력으로 만들어진 불길을 전 방위로 방출한다.
“카악...!”
나를 둘러싼 기사들은 나로부터 가까운 순서대로 숯덩이가 되어 죽었다. 마력창 한 번 쏘아보지 못한 개죽음이었다.
숙영지를 땔감 삼아 일렁이던 불길은 마력으로 만들어진 화염과 더해져 덩치를 불렸다.
개중가장 큰 화염은 나였다.
포식관계는 이제 완전히 뒤집혔다.
기사들은 내게서 벗어나기 위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그나마 정신을 차린 선임기사가 목 터져라 외쳤다.
“흩어져선 안 된다! 뭉쳐서 활로를 뚫어라!”
“전부 다 막혔습니다! 사방이 불바다입니다!”
“레시아르의 창놈아! 나와라! 비겁하게 숨지 말고 나와서 싸우란 말이다!”
적 기사들은 이리저리 말을 달리다가 서로 부딪혀 쓰러지기도 하고, 의미 없이 악을 쓰면서 기운을 빼기도 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불길이 커지기 전에 빠져나간 극히 소수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중앙 기사 팔백 명 거의 전원이 불가마에 갇혔다.
이렇게 적 기사들을 모조리 태우기 위해서는 아군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깊숙이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제일 먼저 나섰다면 아군의 피해는 줄일 수 있었겠지만, 마찬가지로 적도 적당히 물러났겠지.
나는 정예라 불리는 중앙의 기사들이 오합지졸처럼 움직이다 타죽는 걸 팔짱끼고 구경했다.
그들은 나이와 훈련 경험과 마력량에 상관없이 불길이 그들을 덮치는 순서대로 죽어나자빠졌다.
“저, 저기! 저기가 활로다!”
투구까지 벗고 헐떡이던 선임기사가 한 곳을 가리켰다.
사방이 화염지옥이지만, 딱 한 곳만 불길이 약한 곳이 있었다.
숙영지 우측. 간신히 눈에 띈 활로처럼 보이는 그 곳으로,적 기사들은 우르르 몰렸다.
“하악, 하악…….”
“멈추지 마라! 여긴 아직 적지다! 달려야 한다!”
찬 공기를 허겁지겁 들이켜는 기사들에게 선임기사가 호통을 쳤다.
그래도 아직은 중앙 기사단의 군기가 남아있는지, 기사들은 그를 따라 열심히 달렸다.
그렇게 불구덩이로 변해버린 숙영지를 등지고 달렸건만, 그들이 마주한 건 어지럽게 가설된 울타리 지대였다.
적을 기다리며 미리 조성해둔 함정이었다.
기사들이 울타리 앞에서 망설이고 있자 사방에서 마력창이 휙휙 날아들었다.
바싹 자세를 낮추고 숨어있던 마력병들이 기습을 가한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이... 푸흑!”
마력을 소모한 기사들은 평소에 깔보던 마력병들의 공격에 만신창이가 되어 죽어나갔다.
마력 방어막을 전개하며 꿋꿋이 버티는 자도 없지 않았지만,
“쳐!”
그런 자들에게는 파샨이 이끄는 친위대원들이 직접 달려 나가 갑주의 관절 사이, 빈틈마다 단검을 찔러 넣었다.
“도... 백작님을 모욕한 것들이다! 모조리 죽여!”
파샨이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기력을 남겨 놓았던 친위대원들이 한 덩이로 뭉쳐서 기사를 물어 뜯었다. 흡사땅에 떨어진 매미 위에 달라붙은 개미 떼 같았다.
“이, 이, 비천한 레시아르 촌것!”
“촌것의 칼은 배에 안 들어가나 봐라!”
“아악!”
“놔라! 나는 청장미 기사단의 기사다!”
“여자네. 백작님께 바칠 것이니 다치지 않게 사로잡아.”
“켁! 이 놈이 혼스를 찔렀습니다!”
“내가 가마! 이 독한 년!”
“꺅!”
“뭐야! 남자잖아! 꺅 같은 소리 하네!죽어!”
적이고 아군이고 한데 엉켜서 혼란이 벌어졌지만, 더 피곤하고 지친 건 적 기사들이었다. 말도 잃고 갑주도 벌겋게 익은 차에 당한 기습이다. 제대로 무기를 쥐고 있는 자도 드물었다.
기사들은 멀리 가지 못하고 하나둘씩 죽거나 사로잡혔다.
기사들에게 벌어진 참극을 모르고, 불타오르는 숙영지로 접근하던 마력병과 보병들은 잠시 휴식을 취한 아군 기사들에게 학살당했다.
레시아르 기사들은 중앙 기사들에게 당했던 앙갚음이라도 하듯 날뛰었다.
“더러운 수혈이 감히 기사에게 덤비느냐!”
오록스는 말발굽으로 적병을 짓밟으며 사방으로 도끼를 휘둘렀다. 그 뒤를 따르는 백여우 기사들이 마력창으로 보병을 서넛씩 관통할 때마다 피바람이 불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피해를 감당하지 못한 데픈 후작이 결국 퇴각을 알리는 뿔나팔을 불었다.
그건 자신의 병력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적에게 당해 기사 전력을 모조리 잃은 지휘관의 울음처럼 처연하게 들렸다.
"이겼다!"
"레시아르 백작 각하 만세!"
"레시아르 백작 각하께 경배를!"
아군 기사부터 마력병, 친위대원, 그리고 연합군 기사들까지 모두 입을 모아 승리를 찬미했다.
아직도 불타고 있는 숙영지에서 내가 나와 불길을 하늘로 뿜어내자, 환호성 소리가 더 커졌다.
"중앙의 쥐새끼들은 허명 뿐이다! 기사 수백, 수천 명을 데려오더라도 레시아르의 기사를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와아아아아!"
"나는 제군들과 함께 싸우겠다! 레시아르를 위하여!"
"화석의 마법사! 바이스 레시아르! 전승영웅!"
기사와 병사들은 무기를 들어올리며 목이 터져라 승리를 노래했다.
나는 그들에게 술과 고기, 그리고 금화를 넉넉하게 나눠줄 것을 약속했다.
이제 숨 좀 돌릴 겸 부서진 울타리 위에 앉아 쉬고 있는데, 타라가 찾아왔다.
“무탈하셔서 다행입니다.”
“무탈하긴. 여기 다쳤어. 좀 봐줘.”
고간을 가리켰지만 타라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사상자 수부터 읊었다.
마음 같아서는 몸으로 가르치는 정훈교육을 실시해주고 싶지만, 저 쪽에서 적의 피로 범벅이 된 오록스가 도끼날에 붙은 살점을 손으로 떼어내고 있어서 참기로 했다.
"대충 알았어. 데픈 후작은 어디까지 물러났나?"
"아예 숙영지를 버리고 초원지대 바깥까지 달아났습니다."
"기사를 모조리 잃었으니 그럴만하지. 백여우 기사단을 보내서 추격하는 건 안 될까?"
"적 기사를 상대로 한 번, 적 보병을 상대로 또 한 번 돌격했으니 기력이 남아있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적 마력병 전력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기사단을 궤멸시킨 것만으로도 굉장한 승리를 거둔 것이니..."
"알았어. 그럼 다들 편히 쉬게 하자고. 아군 숙영지는 무너졌으니까 적 숙영지를 대신 쓰면 되겠군."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백작님도 잠시 쉬시는 게..."
타라와 이야기 중에 친위부대장 하이덴이 다가왔다.
“백작님. 포로를 잡았습니다.”
“포로. 그래. 잡았겠지. 내가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
“그게... 여기사입니다.”
“필요한 정보를 제대로 전달할 줄 아니 네가 잘 컸구나. 좋아, 당장 가보자.”
나는 헐레벌떡 뛰어서 포로들을 모아둔 곳으로 달려갔다.
수혈 출신 병사들도 꽤나 잡혀 있었지만, 털 수북한 여자들은 됐다. 내가 원하는 건 체닐린 같이 잘 빠진 여기사뿐이다.
“여깁니다. 백작님.”
“오……. 오.”
가리킨 곳에는 여기사 둘이 꿇려 앉혀 있었다.
하나는 주황색 머리칼을 어깨 길이로 친 여자였는데, 활달해 보이는 인상으로 꽤나 귀엽게 생겼다. 아주 미인은 아니지만 은근히 인기를 끌 상이다.
반면에 다른 여자는 어깨 넓이가 오록스 단장 못지않았다. 이건 털만 없지 순 고릴라처럼 생겼는데, 솔직히 여기사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그게 더 신기할 지경이다.
그년은 내가 도착하자마자 뻣뻣이 고개를 세우고 나를 노려보았다.
“나를 어떡할 셈이지?”
“글쎄…….”
못생기긴 했지만 굳이 포로를, 그것도 기사가문의 여식을 죽여서 원한을 살 필요는 없다.
적당히 몸값만 받고 풀어주면 소소하나마 금전도 챙기고 내 명예도 칭송받겠지. 대뜸 반말부터 하는 게 띠껍긴 하지만 고작 그런 걸로 포로를 벌할 정도로 나는 또라이가 아니다.
하지만 고릴라 여자는 무슨 광증이 돌았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죽여라!”
“그래 씨발년아 죽어!”
나는 바로 검을 들어 그 년의 목을 쳤다.
못생긴 주제에 바락바락 대드는 꼴을 봐줄 수가 없었다.
잘린 머리가 덩그렁 땅을 굴렀다. 단면이 드러난 목에서 튄 피가 옆에 꿇려진 여기사의 얼굴에 그대로 튀었다.
단발머리 여기사는 숨을 멈추고 얼어붙었다.
“사, 사, 살려, 주, 주, 주세요.”
여기사는 벌벌 떨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꽤 귀엽다.
“이름이 뭐지?”
“그, 그, 그게... 큭... 아우우...”
그녀는 입이 말라서 그런지 말을 더듬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상냥하게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울 것 없어. 나는 예쁜 여자들에게는 아주 관대하거든.”
“흐읍... 흡... 아흡...”
그 말에 여자는 별로 안심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쩄거나 울음을 삼켜냈다.
“저, 저는... 피트로 가문의... 렌셀입니다...”
“피트로 가문이라.”
그게 당연히 어딘지 나는 모르고. 타라를 쳐다보았더니, 그녀가 귓속말로 알려주었다.
“데픈 후작의 봉신가문 중 하나입니다.”
“귀족가는 아니란 말이지?”
“예. 대대로 기사로 서임해온...”
“그럼 됐어.”
나는 렌셀을 데리고 승자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