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73화 (73/166)

〈 73화 〉 약간의 유희

* * *

전쟁터에서는 성욕이 커지기 마련이다. 삶의 끝자락에서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다고 몸이 아우성을 치는 거다.

그런 유전자의 명령에 내가 반대할 이유는, 전혀 없지.

포로로 잡은 여기사 렌셀은 지휘막사 대들보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허벅지와 겨드랑이, 배와 젖가슴 위아래를 둘러 굵은 밧줄로 묶여있는 것만 제외하고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

밑에서 바라보자니 전체적으로 매끈한 몸이다. 음부 위에만 주황색 털이 약간 나 있을 뿐.

팔다리는 길쭉한 편이고 가슴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한 손에 들어갈 정도는 있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지휘봉을 들어서, 풀잎에 맺힌 이슬 같은 젖꼭지를 톡 건드렸다.

“햐으으윽...!”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렌셀은 목소리가 꽤 귀여웠다.

피가 몰려서 빨개진 유두 옆으로 젖살이 빵빵하게 내려와 있다.

지방이 많았다면 호리병처럼 젖이 축 쳐졌겠지만 이 여자는 그래도 기사 출신이라 그런지 가슴 근육이 적당히 있어서 흉할 정도로 젖이 망가지지는 않았다.

“사, 살려주세요... 백작님...”

“누가 죽인대?”

“매달려 있으니까 어지러워요... 우욱...”

렌셀이 헛구역질을 하는 통에 급히 자세를 바꿔 누웠다. 아무리 미녀의 몸에서 나온 거라도 토사물은 좀.

“파샨. 통 좀 가져와. 아, 아니지. 체닐린. 네가 가져와.”

체닐린은 심통이 난 표정으로 나무통을 들고 와 렌셀의 턱 아래에 받쳤다.

렌셀은 욱, 욱 하는 소리를 내며 구역질을 했지만 나오는 것이라곤 투명한 침 밖에 없었다.

“침 밖에 안 나오는구만. 됐다. 가 봐.”

“적이라고는 해도 기사에게 이런 짓을...”

궁시렁거리는 체닐린의 엉덩이에 세게 손바닥을 갈겨주고 쫓아냈다.

“으흣!”

“저리 가서 보지나 적시고 있어. 다음은 너니까.”

“…….”

체닐린은 정말로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서 검집으로 허벅지 사이를 비벼대기 시작했다. 은근히 말 잘 듣는다니까.

나는 자위를 시작한 체닐린과 대들보에 묶인 렌셀을 보면서 슬슬 자지를 만졌다.

딸감이 될 미녀가 둘이나 있으니 곧 요도구 끝에 투명한 액이 맺혔다.

“헥, 헥, 헥, 헥...”

꼬리가 붕붕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파샨은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작은 혀를 내밀고 헥헥거리고 있다. 뺨이 붉어진 걸 보니 내 자지 냄새를 맡고 흥분한 모양인데.

나는 일부러 모른 척 하고 다른 명령을 내렸다.

“파샨. 줄 좀 내려 봐.”

“네! 도련님!”

파샨은 그래도 서운해하는 기색 없이 영차영차 소리를 내며 밧줄을 조금씩 풀었다.그러자 도르래 장치가 움직이며 대들보에 묶여있던 렌셀이 아래로 내려왔다.

하지만 아직 침대에서는 꽤나 거리가 벌어져 있다.

나는 지휘봉을 세워둔 채로 렌셀이 내려오기까지 기다렸다.

파샨은 내가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자 계속해서 줄을 풀었고, 결국 렌셀의 젖가슴과 내 지휘봉 끝이 서로 맞닿았다.

그 상태에서도 멈추지 않고 줄을 풀자 렌셀의 가슴은 지휘봉에 눌려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아, 아파요, 백작님!”

“아프다고? 네가 죽인 육십 억 레시아르인의 복수다!”

“레시아르 사람이 그렇게 많을 리가... 그리고 저는 칼 한 번 휘두르지도 않았다구요... 히으응...”

렌셀은 급기야 눈물까지 뚝뚝 흘렸다.

여자라고는 해도 기사가 고작 이 정도 고통도 버티지 못하다니. 나는 렌셀의 한심함에 화가 났다. 내 자지도 화가 나서 분기탱천했다.

“이 년 이거 안 되겠네. 파샨! 줄 더 내려! 아니! 세워서!”

“네! 도련님! 영차. 영차아...”

파샨은 렌셀의 젖가슴 위아래로 묶인 줄을 잡아당겨 그녀의 자세를 똑바로 세우고는 허벅지에 묶인 밧줄을 조금씩 내리면서 흔들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렌셀은 허벅지를 바짝 벌린 기승위 자세로 천천히 내려오게 되었다.

“우으으...”

톡.

렌셀의 질구가 내 귀두 끝과 닿았다.

물론 그 상태로 바로 삽입되지는 않았고, 렌셀의 몸은 흔들리며 그 자리를 지나갔다. 하지만 파샨이 줄을 흔들 때마다 렌셀의 질구가 내 귀두와 닿아 스쳐가기를 서너 번이나 반복했다.

그러자 렌셀의 음부도 이내 촉촉한 습기를 머금었다.

귀두 끝에 미약한 자극이 반복되니 자지가 위로 더 커지는 듯하다. 나는 당장이라도 엉덩이를 치켜들어 저 처녀지를 관통해버리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참았다.

간만에 재밌는 놀이를 떠올렸는데 평범하게 처녀를 따는 건 너무 아까우니까.

파샨이 밧줄을 교묘하게 튕겨냈고, 그에 따라 렌셀의 몸뚱이가 진자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위치와 각도를 아주 세밀하게 조정한 결과로, 렌셀과 나는 다른 부위는 전혀 맞닿지 않은 채 질구와 귀두만을 마주 붙였다가, 떨어뜨렸다가, 다시 마주 붙이기를 반복했다.

“으으응...”

렌셀은 질끈 눈을 감은 채로 약한 신음소리를 흘렸다. 그녀도 적잖이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 귀두가 이렇게 질액으로 번들번들해지진 않았을 테니.

이 정도면 예열은 할만큼 한 거지.

내 눈짓을 받은 파샨은 한 번 크게 밧줄을 휘저어 렌셀의 몸뚱이를 흔들다가, 팟하고 밧줄을 놓았다.

푸츱.

단단하게 발기한 자지는 단숨에 렌셀의 처녀막을 꿰뚫고 자궁구까지 닿았다.

“아... 파아...!”

렌셀의 보지는 꽉 조이고 뜨거웠다. 체닐린도 그랬는데, 역시 여기사의 몸은 단련이 되어서 그런지 조임이 좋다. 허벅지에 느껴지는 엉덩이살의 무게감도 딱 알맞다.

나는 팔베게를 베고 누운 채 렌셀을 올려다보았다.

같이 자라온 소꿉친구도, 함께 단련해왔을 동료 기사도, 은근히 동경의 대상이었을 무도희의 젊은 귀족도 보지 못했을 찌푸린 얼굴.

그녀가 누굴 위해 처음을 남겨두었건 그건 내가 차지했다. 그렇게 생각하니,그렇잖아도 단단히 발기한 자지에 혈관이 도드라지게 올라오며 보지를 꾸역꾸역 넓혀간다.

“... 흐윽...”

렌셀의 질내는 파르르 경련하다가 이따금 강하게 수축하며 자지를 휘어 당겼다. 입으로 빨리는 듯한 기분에 등골이 오슬오슬하다.

파샨은 내 표정을 살피며 조금씩 줄을 풀었다가 다시 당겼다. 그에 따라 렌셀의 몸뚱이도 위로 올라갔다가 아래로 내려가며 자동적으로 방아를 찧어댔다.

“아읏... 앙... 읏...”

렌셀은 신음소리를 삼키며 몸을 비틀고자 했지만 전신이 꽁꽁 묶여있는 그녀로서는 고작해야 발가락이나 꼼지락거릴 수 있을 뿐이다. 커다란 자동 오나홀이나 다름없는 모습.

뭐 나쁘진 않지만 약간 감질 난다.

“파샨. 밧줄을 완전히 풀었다가 당겨 봐.”

“네엡!”

파샨은 밧줄을 잡아당겨 내 귀두가 아슬아슬하게 렌셀의 질구 끝에 걸치도록 했다가, 줄을 완전히 놓았다.

“아극!”

렌셀은 내 허벅지 위로 쿵 떨어지며 자지를 순식간에 몸 안쪽으로 모두 삼켰다. 자지가 좀 휘어서 들어가긴 했지만 역시 자극은 강한 게 좋다.

“영! 차! 하나! 둘! 영! 차!”

파샨은 입으로 구호까지 붙여가면서 렌셀을 올렸다가 내 위로 떨어뜨리기를 반복했다.

여기사의 탱탱한 엉덩이가 내 허벅지에 뭉개지며 살이 부대끼는 소리가 막사 안을 울린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보지로 대딸을 받는 기분이다.

아직 사정에 이르기까지는 멀지만 아득한 쾌감이 차근차근 기둥뿌리에서부터 올라온다.

나는 눈을 감고 가만히 렌셀의 몸 안의 촉감을 즐겼다.

꽉 물어주는 질내가 파샨의 줄다리기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다보니 살이 집히는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았다.

“흐으읏... 어, 어지러워요...”

눈을 떠보니, 파샨이 밧줄을 꼬고 있었다. 그에 따라 렌셀의 몸뚱이가 왼쪽으로 빙빙 돌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짓거리냐고 물어보려던 차에, 렌셀의 질내도 몸을 따라 돌아가면서 자지를 마찰시켰다.

황홀감에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차원이 다른 쾌락이었다.

그러다가 파샨이 밧줄에서 손을 탁 놓자, 렌셀의 몸뚱이는 반대편인 오른쪽으로 홱 돌아갔다.

“으브브브브...”

렌셀은 침을 줄줄 흘리면서 회전했다. 소담한 젖가슴이 원심력에 의해 바깥쪽으로 쭉 늘어나는 게 퍽 볼만했다.

온 몸이 밧줄로 묶인 채 매달려서 희롱당하는 그녀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보지를 조이는 것 외에는.

렌셀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 즉 보지를 조이는 일에 안간힘을 썼고, 그렇잖아도 조이는 여기사의 질내는 더 심하게 조여들었다. 거기에 회전력까지 더해지니.

“읏...”

뷰우웃!

조절할 수 있을 정도였던 사정감이 한순간 치솟아 올라, 나는 그만 렌셀의 질 안에 정액을 울컥 토해내고 말았다.

뷰읏! 뷰으읏!

휘리릭 돌아가는 렌셀의 몸 안으로 정액이 계속해 빨려 들어간다.

그 사이 렌셀의 몸뚱이는 회전을 잠시 멈추었다가, 이번에는 다시 왼쪽으로 돌아갔다.

사정하는 도중 잔뜩 예민해진 자지가 회전하는 렌셀의 질압을 이기지 못하고 또 한 번 정액을 내뿜었다.

뷰릇! 뷰르릇!

뷰읏!

나른한 한숨을 뱉어내며 랜셀의 엉덩이를 두들겨보았다. 역시 탄탄하군. 운동을 한 여자가 좋긴 좋단 말이야.

“파샨, 청소.”

파샨은 밧줄을 기둥에 묶어두고 내게 달려왔다.

대들보에 바싹 붙어서 허우적거리는 렌셀은 안중에도 없다는 투다.

“킁킁... 후아앙...”

파샨은 내 사타구니에 얼굴을 묻고 깊숙이 호흡을 들이켰다. 표정이 헤실헤실 풀어지는 게 무슨 마약이라도 한 것 같다.

“부으읍... 쭙...”

그녀는 여우 귀를 쫑긋거리면서 내 자지를 깊게 물었다. 조그마한 얼굴에 비해 커다란 자지가 단숨에 입 안으로 사라진다.

파샨은 빵빵해진 얼굴을 풀었다가 조이면서 혀로 기둥뿌리와 불알 사이를 살살 긁었다.

“부브브브...”

소리 내어 떠는 아랫입술의 진동이 불알을 간지럽힌다. 입과 혀와 입술을 총동원한 정성스러운 펠라치오에 몸 깊숙한 곳에서 사정감이 또 한 번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나는 파샨의 얼굴을 아래로 꽉 눌렀다. 스위치가 눌린 것처럼 북슬북슬한 여우꼬리가 핏하고 서는 게 보인다.

“... 쯥... 쯔읍... 쯥...”

파샨은 다리를 파닥거리면서 길게 소리 내어 내 자지를 빨았다.

“뷰브브븝...”

파샨은 나를 올려다보며 더 깊게 머리를 사타구니 안으로 묻었다.

나는 파샨의 뒷머리를 쓸어내리면서 쭉 짜내듯이 사정했다. 청소라고 시키고서 항상 파샨의 입 안에 싸버리는 게 버릇이 되어버렸단 말이야.

자지가 맥동하며 정액을 내뿜을 때마다 파샨은 목울림 소리를 내면서 그걸 매번 삼켜냈다. 입 안에 정액을 머금을 새도 없이 바로바로 목으로 넘겨버리는 기술이었다.

“... 끅... 읍... 끅...”

약간 버거워하기는 했지만 역시 오랫동안 내 자지를 빨아온 파샨답게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내 정액을 모두 배로 흘려 넣었다.

물론 그러고서도 파샨의 입은 내 자지에 찰싹 붙은 채로 떨어지지 않았다.

파샨은 아직 경도를 잃지 않은 자지를 쭙쭙 빨면서 내 허벅지를 주물주물 마사지했다.

잔뜩 사정한 후에 자지를 빨리면 기까지 빨려나가는 느낌이지만 그게 또 좋단 말이지.

나는 기분 좋은 노곤함을 즐기며 꾸벅 졸았다. 파샨은 작아진 자지를 입 안에 머금은 채 가끔씩 혀로 굴려댔다. 완벽한 사후처리였다.

“세상에... 백작님!”

타라가 문을 두들기고 들어오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전투가 바로 내일 개시될지도 모르는데 여자를 안으시다니!”

첫눈처럼 흰 얼굴이 분노로 붉게 물들어있다. 저런 모습도 매력적이니까 미인은 신기하다.

하지만 미인의 잔소리라도 듣기 싫은 건 마찬가지.

나는 파샨의 말랑말랑한 볼을 만지작거리면서 타라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오늘 낭비한 마력이 부족해서 전투에 지게 된다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대체!”

“설마 그러겠어.”

“어쩜 그리 무책임하십니까!”

“아오, 시끄러워. 체닐린, 적실만큼 적셨으면 이리...”

“안 됩니다! 정양하세요!”

“아... 그...”

“체닐린 양! 설마 아쉬워하는 건 아닐 거라 믿습니다!”

“다, 당연하지. 누, 누가 아쉬워한다고.”

결국 타라는 나를 강제로 눕히다시피 해서 재웠다.

사정관리라고 생각하면 꼴리는 건가? 잘 모르겠네.

그래도 섹스하는 대신 타라를 껴안고 잘 수 있게 해달라고 해서 요구를 관철해낸 게 성과라면 성과였다.

“만지지 마세요.”

“아얏.”

“내일 아침부터 할 일이 많으십니다. 일찍 주무세요.”

“잠이 안 와.”

“안 와도 눈 감고 가만히 계세요! 또 만지려고 하지 마시고!”

아직은 가드가 만만치 않다는 걸 확인한 것도 성과라면 성과고.

#

아군 진영은 새벽녘부터 타라가 들쑤시고 다니면서 정리한답시고 부산스러웠다.

나는 하품을 삼키면서 어슬렁어슬렁 주변을 돌아다녔다.

정오쯤 되어서 적과 아군의 본대가 차례대로 도착했다.

가장 먼저 온 건 파티스트롬 공작이 보낸 기사단이었다.

“파티스트롬 공작 각하의 명에 따라 레시아르 백작님께 지휘권을 바칩니다.”

대나무처럼 멀찍하게 키가 큰 중년 남자가 막사 안으로 들어와 내게 장검 하나를 올렸다.

그가 파티스트롬 공작 직속 사향노루 기사단의 단장인 토루만이었다.

“공작께는 내 따로 감사드리지... 그런데 아마트리체 영애는?”

고개를 슬쩍 돌려, 마치 제 자리인양 내 침대 위에 걸터앉은 아마트리체를 흘겨본다. 바로 어젯밤에 렌셀과 뒹굴었던 자리인데.

아마트리체는 싱긋 웃으며 다리를 꼬았다.

“파티스와 레시아르는 우방이잖아요? 금혈의 일족이 우방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려는 거죠.”

“마음만으로도 고마웠을 텐데.”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어요. 이번 전쟁이 끝나기까지는 기다리겠다고 했잖아요.”

“그런 문제가... 뭐 있기도 하지만. 마수를 사냥하는 것과 인간의 전쟁은 달라. 그대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저라도 못 할 게 뭐 있어요. 마이포흐 남작도 왔잖아요?”

그녀의 말대로 마리안은 직접 켈자르 보병대를 이끌고 참전했다. 수는 만 이천.

고급 병종이 없으니 수로 땜빵한 거겠지. 개중에서도 갑옷과 무기를 제대로 갖춰 입은 건 이천 정도고, 나머지 만 명은 농민에게 창만 들려 세운 거다.

그만큼 군기도 엉성해서, 마리안은 땀을 빼며 손수 보병들을 정렬시켜야 했다.

여하튼 아마트리체는 그런 마리안에게 경쟁심을 느껴서 여기 전장까지 온 건가.

용케도 파티스 공작이 허락해줬다 싶다.

“일단은 알았어. 그래도 조심하도록 하지. 이 전쟁터란 곳은 청춘남녀에게 그리 좋은 곳은 아니라서 말이야.”

나는 토루만 단장에게 들키지 않게 입가에 손가락을 올렸다.

아마트리체는 키득키득 웃고는 내 손동작을 따라했다.

가장 마지막에 온 건 나머지 연합군 소속 중소귀족들.

그들이 각기 규합해 합류한 병력을 세면 기사 오백, 마력병 오백에 보병이 또 만 명 정도.

깃발이 어지럽게 섞여있기는 하지만 이 또한 나름대로의 전력이다.

이에 대항하는 적은 일단 데픈 후작의 패잔병 마력병 오백과 보병 육천 가량.

이것들은 사실상 보조에 불과하고, 주전력은 병무대신 올드완이 통솔해 온 기사 이천, 마력병 삼천 오백, 보병 만 오천이다.

이들은 데픈 후작의 숙영지를 내게 빼앗긴 탓에 초원지대 끄트머리에 간신히 새로 숙영지를 차렸다.

지세가 험하고 곳곳에 웅덩이가 파여 있어서 영 좋지 않은 곳이다.

지형만 놓고 보면 아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지만, 병무대신이 굳이 저런 곳에 진영을 차린 건 결전 한 판에 형국을 뒤집을 수 있다는 자신이 있는 거겠지.

“백작님. 적진에서 전령이 오고 있습니다.”

“아니... 저건 병무대신 올드완이야.”

멀리서도 허리를 꼿꼿이 세운 노익장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호위기사도 대동하지 않고 혼자 왔다. 기량만 따지고 보면 그를 호위할 수 있는 기사는 다키아 왕국 내에 없겠지만.

“레시아르 백작.”

그는 말에 탄 채로 내게 눈인사를 보냈다. 나도 목례하지 않고 눈인사만 받았다.

“병무대신.”

“말이 짧아졌군.”

“이제 존대할 사이는 아니지 않소?”

올드완은 고개를 끄덕이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대가 난리를 피운 바람에 다키아 왕국 전역이 소란에 휩싸였소.”

“그것 참 고약한 일이 되었군. 하지만 애초에 중앙에서 헛짓을 하지 않았다면 벌어지지도 않았을 일이 아니오.”

마수를 풀어 영지를 농락하고, 심지어는 고위 귀족까지 중독시킬 수 있는 강력한 독을 만들어냈다. 지방 영주로서는 경악할 패악질이다.

나는 그런 패악질을 참아 넘길 만큼 속 좋은 놈이 아니라서, 중앙이 한 짓을 사방팔방에 소문냈다.

다른 지역의 영주들이 이걸 다 믿진 않더라도 중앙에 대해 불신을 가지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애초에 중앙과 지방은 서로 으르렁대던 사이니까.

올드완도 내게 따져 물어서 뭘 얻겠다는 기대는 없는지 가볍게 물었다.

“일전에는 발설을 자제해주겠다고 약조해주지 않았소.”

나는 가볍게 어깨만 으쓱하고 답했다.

“병무대신께서도 내게 예물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소.”

올드완은 창대를 쥔 채 껄껄 웃었다.

“과연 걸물이시군.”

그가 작게 어깨를 들썩일 때마다 마력이 일렁이는 게 눈에 보인다. 마법사도 아닌데 마력이 이렇게 가시화될 정도로 농축되어 있다니.

당장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글쎄. 확신하지 못하겠다는 것만 확신할 수 있을 뿐이다. 가급적이면 맞대결은 피하고 싶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진 않겠지.

올드완은 슬슬 말고삐를 잡아채며 말머리를 돌렸다.

“피차 대화로 해결될 단계는 지난 듯하니.”

“그렇겠지.”

“보중하시오. 내 손으로 금혈을 베고 싶진 않군.”

“배웅 나가지 않겠소. 뒤통수 조심해서 가시오.”

올드완은 마른 웃음을 짓고는 말머리를 돌려 바로 진영 쪽으로 돌아갔다.

완전히 무방비한 모습이었지만, 공격할 틈이 보이질 않았다.

“과연 병무대신이군요.”

타라도 뭔가 느끼는 게 있는지 중얼거렸다.

“왕국의 검이라 불리는 자니까. 우리는 우리대로 준비해야지. 참, 고기는 충분히 쟁여뒀지?”

“예. 말단 보병들에게도 조금씩 배급할 정도로는 비축해뒀습니다.”

“남기지 말고 전부 풀어.”

“알겠습니다.”

저녁 식사시간이 되자 귀족들은 따로 내 막사 앞으로 모두 모여들었다.

식사를 대접하는 것은 주인의 도리. 연합군의 총대장인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모인 귀족들만 기백 명을 헤아리는 수준이라 정식으로 작위를 받은 자만 내 식탁으로 초대하고, 나머지는 적당히 테이블을 둘러서 앉게 했다.

이내 향신료와 섞은 버터를 껍질 안으로 밀어 넣어 바싹 구운 닭요리, 맵게 튀긴 가지요리, 일곱 가지 치즈를 차례대로 쌓아올린 양파수프, 진흙에 넣어 익힌 통돼지구이가 나와 귀족들의 찬탄을 자아냈다.

“자, 많이들 드시오.”

나는 로스트치킨을 나이프로 잘라 아마트리체와 마리안의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 고마워요,”

마리안은 살짝 목례하고 고기를 썰었고, 아마트리체는 눈에서 불똥을 튀기며 내게 어깨를 붙였다.

사향노루 기사단 토루만 단장이 나와 아마트리체 사이를 심상치 않게 보는 듯해서, 오록스와 제트리 단장에게 시켜 그에게 술을 잔뜩 먹이게 했다. 그래도 기사단장끼리 통하는 게 있는지 곧 흥겨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헬무트은 멀찍이 기사들과 둘러앉아 양다리를 통째로 쥐고 뜯었고, 파샨과 하이덴을 비롯한 친위대원들도 슬그머니 섞여서 요리를 나누었다.

초전의 승리를 전해들은 연합군 영주들은 이미 다 이기기라도 한 듯 전략 공유보다도 충성경쟁에 열중이었다.

“초전의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레시아르 백작님. 역시 전승영웅이십니다.”

“이 기세로만 가면 오만한 중앙의 대신들도 높은 코가 꺾이겠습니다. 아차, 이 초상화는 제 여식을 담은 것인데, 제 여식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원체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이 사람아. 자네 딸은 소문난 박색 아닌가. 그에 비하면 제 딸은, 여기...”

전쟁터에 딸을 데려온 건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잘 모르겠다. 예쁘면 모를까, 저건 눈이 단추 구멍만하잖아.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더니.

나는 적당히 말을 돌리다가 타라에게 테이블을 맡기고 잠시 나왔다. 책사 이오시스가 뒤를 따라 나왔다.

“그래도 잘 됐어요. 공을 원하는 이들이 많으니 병사를 앞에 세워도 불평하지는 않겠네요.”

이오시스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렇긴 하지. 저런 놈들을 주인으로 둔 병사들만 불쌍하게 됐군.”

“그 덕에 레시아르는 번영할 테지요. 레시아르 령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전방에 배치하는 것이 좋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올드완의 맹공을 받은 귀족들은 세력이 꺾여나갈 테고, 이 전쟁이 끝난 뒤에 레시아르의 입지는 더욱 굳어지겠지.

그것도 연합군이 승리했을 때 이야기지만. 나는 언제나 이겨왔고, 앞으로도 이길 것이다.

연회는 달이 하늘 정중앙에 떠오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다음날, 올드완은 바로 회전을 걸어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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