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격돌
* * *
부관 타라는 내 옆에서 눈을 찌푸린 채 적의 군세를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보병이 적군요.”
“어차피 주력은 검은튤립 기사단이니까.”
“관건은 병무대신의 돌격을 막아내는지가 되겠네요.”
“그렇지. 쉽지 않을 거야. 보병들 전진배치시켜.”
“알겠습니다.”
타라는 그들의 운명을 짐작했는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명령을 하달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병무대신 올드완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 자리를 검 하나로 지킨 자. 그가 직접 키운 검은튤립 기사단의 예봉을 마주 돌격해서 꺾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오록스 단장이 이끄는 백여우 기사단은 데픈 후작의 기사단을 상대로도 상당한 손해를 감수해야 했으니, 이번에 맞돌격을 시킨다면 그야말로 녹아내리고 말 테지.
보병들을 갈아서 검은튤립 기사단의 창끝을 둔하게 하고, 마력병과 기사들을 차례대로 배치하여 반격의 기회를 노리는 것밖에는 수가 없다.
고수(?手)가 큰 북을 둥둥 두들겼다.
보병들은 거기가 사지인 줄도 모르고 우르르 몰려나가 빼곡하게 진을 짰다. 공에 눈이 먼 소귀족 중 일부는 제가 이끌고 온 보병부대 앞에 서서 알짱거리기까지 했다.
저런 놈들까지 신경 써줄 수는 없지.
나는 홱 고개를 돌렸다.
“이오시스. 그에게서 연락 온 것 있나?”
“없어요. 감시받고 있는 걸지도...”
“그럴 수도 있지. 돌아선 것만 아니면 되는데, 그걸 확인할 방법이 없군.”
“너무 초조해하실 필요 없어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셨다면서요?”
“그렇긴 한데. 사람 속이란 건 모를 일이니까.”
이오시스는 말로 나를 북돋는 대신에 슬그머니 제 엉덩이를 내 고간에 대고 문질렀다.
결 좋은 비단치마 안에 숨겨진 탄력 좋은 엉덩이가 느껴졌다.
“어때요. 좀 기운이 나시나요?”
“그래. 고마워.”
이오시스의 엉덩이를 두들기고 나니 근거 없는 자신감이 막 솟아오른다.
“정 안 되면 나 혼자서 다 불태워버리지, 뭐.”
“그러셔야 레시아르의 군주이신 각하답죠.”
“백작님. 검은튤립 기사단이 전개하고 있습니다.”
타라가 손가락으로 전장 저 편을 가리켰다.
이천을 헤아리는 검은튤립 기사단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진형에 어긋남이나 튀어나온 부분이 하나도 없는 게 마치 하나의 거대한 생물 같았다.
이천이라는 수도 무지막지한데 그만한 기사들이 하나처럼 움직이고 있으니 위압감이 어마어마했다.
사실 막연히 내가 나서면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전장에 나서니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위용이 보통이 아니다, 이거.
오판한 게 아닐까 뒤늦게 후회가 되기는 하지만 지금 와서 발 동동 거려봐야 어쩔 수 없지. 나는 눈에 힘을 주어 놈들을 노려보았다.
검은튤립 기사단은 전원이 같은 갑주를 갖춰 입고 흑마를 몰았다. 무기와 군마의 규격화도 아군에서는 이뤄내지 못한 위업이다.
저런 기사단을 이천이나 양성해내려면 금화를 얼마나 쳐발랐는지 상상하기도 힘들겠군.
적은 말을 규칙적으로 뛰게 하는 트롯(trot)으로 주행하며 서서히 속도를 높여갔다. 그 과정에서도 진형이 거의 무너지지 않았다는 게 검은튤립 기사단의 훈련도를 짐작케 했다.
“각하. 소관들은 이만 맡은 자리로 가보겠습니다.”
오록스와 제트리, 토루만 단장이 내게 다가와 무릎 꿇고 말했다.
“오록스. 그대는 언제나 내게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이번에도 그리하기를 기대하지.”
“각하의 승리는 언제나 각하로 인한 것입니다. 소관은 그저 각하의 영광의 아주 작은 부분을 뒷받침할 따름입니다.”
“말이 늘었군. 타라가 미리 알려주었나?”
“예, 그렇습니다.”
오록스는 씩 웃으면서 솔직하게 밝혔다. 정작 아버지에게 귀띔을 해준 타라가 볼을 붉혔다.
“단장으로서 언변을 능숙히 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 이번에 중앙을 제압하고 나면 오록스, 그대는 위대한 레시아르의 기사단장으로서 다른 귀족들과 접할 기회가 늘어날 터. 필요하다면 웅변 교사라도 붙여주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각하.”
이미 승리를 자신한 듯한 나와 오록스의 대화에 제트리와 토루만도 긴장감을 덜은 듯 굳어진 어깨를 풀었다.
“제트리 단장. 적여우 기사단은 내가 레시아르 백작이 된 후 늘 공적을 원했지. 이번 전투만큼 공적이 넘쳐흐르는 기회는 없을 것이다. 가서, 공적을 쟁취하라.”
“예! 위대하신 레시아르 백작 각하!”
“토루만 단장. 파티스트롬 공작의 우의는 그대의 용맹으로써 만방에 드러날 것이네. 사향노루 기사단의 분전을 기대하지.”
“연합군, 파티스, 그리고 레시아르의 명예를 위하여 싸우겠습니다.”
“이제 가서 기사단을 지휘하도록. 적이 멀지 않았다.”
세 단장은 척 소리 나도록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에 각기 휘하 기사들을 지휘하기 위해 떠나갔다.
이에 비해 급이 떨어지는 중소영주 휘하의 기사단장들은 나를 알현할 기회를 얻지는 못하고, 대신 초전에서 연합군 기사들을 이끌었던 노딘과 헬무트가 대신 내게 검을 받아갔다.
그 사이 검은튤립 기사단은 스치면 닿을 정도로 가깝게 초원지대까지 접근했다. 적 기사 선봉과 아군 보병 선봉이 서로 눈으로 상대를 분별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
올드완은 가장 선두에 서서 기수에게서 깃발을 뺏어들고는 그것을 세차게 펄럭였다.
“폰세르크 국왕 전하의 충실한 기사들이여! 저 무도한 반역자들을 징치하기 위해 우리는 이 낙후한 시골까지 왔다! 이제 레시아르의 탕아를 격살하고 서북방의 기강을 되세울 때까지 우리는 멈추지 않고 맹진하리라! 자! 맹진하라!”
올드완의 꾸짖는 듯한 호령이었다. 노인네 목청이 얼마나 좋은지 전장의 반대편에 있는 내게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맹수 같은 그의 울부짖음에 기사들이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흑마는 뜨거운 콧김을 뿜어내며 오르막길도 거침없이 주파해냈다.
“이랴랴랴랴랴!”
“맹진! 맹진하라!”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울린다. 약간의 장애물과 웅덩이 따위는 적의 발목을 조금도 잡아주지 못했다. 적과 아군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후방에서 지켜보고 있을 뿐인 나까지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린다.
“창 들어! 창 들라고!”
사관은 바락바락 소리쳤다. 누가 봐도 겁에 잔뜩 질린 모습이다.
사관이 그 모양이니 보병들이 제대로 무기를 치켜들 리가. 아군 보병들은 흔들리는 눈동자에 검은 해일처럼 몰려드는 적 기사들의 모습을 담은 채 엉거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으으으…….”
여기저기서 패배를 예감하는 침음성이 흘러나와 하나로 합쳐진다.
켈자르 보병 만 이천과 영주연합군 소속 보병 일만을 합쳐 도합 이만 이천.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만 해도 전장을 가득 메운다.
그 낮은 침음성이 장송곡처럼 느껴지는 건 나만은 아닐 터.
“안 되는데…….”
불길한 예감을 느낀 타라가 손을 꽉 쥐었다. 반면 이오시스는 태연자약한 모습이다.
“오네요.”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검은튤립 기사단은 가볍게 보병 방진을 통과했다.
투콰가가각!
뼈가 부러지는 소리.
피가 흩뿌려지는 소리.
살이 갈려나가는 소리.
비명은 없다. 검은튤립 기사를 마주한 보병은 입을 벌릴 틈도 없이 죽어나갔다.
보병 이만 이천 명을 오로지 목책의 역할만 하라고 내보냈다. 잠시 머뭇거릴 정도의 저지력은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날카로운 장창의 벽으로도 마력 방어막을 둘러싼 검은튤립 기사들의 일제 돌격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투투투툭.
장창은 마력 방어막에 닿는대로 부서져 나가며, 도리어 아군의 얼굴에 날아가 박혔다.
버터를 뜨거운 나이프로 가르듯 진영을 부드럽게 쪼개는 적 기사단의 위용에 아군 진영에서는 피안개가 생길 지경이었다.
“읍...”
아마트리체는 얇은 레이스 장갑을 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다가 끝내는 고개까지 돌리고 말았다.
금지옥엽 자라난 그녀에게 이런 모습은 너무 잔혹했던 건가.
하긴. 전장을 꽤나 누비고 다녔던 내게도 쉽지 않은 장면이다.
비릿한 혈향이 코끝을 찌르고 입 안에 맴돌았다.
두두두두두두.
이 와중에도 올드완의 검은튤립 기사단은 보병들을 짓밟으며 나아가고 있다.
그들은 오만하게도 창과 검을 위로 들어 올린 채로 말을 달리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질주가 곧 학살이다. 아군 보병은 적 기사들에게 창날 한 번 박아 넣지 못하고 차례대로 다진 육편이 되어 땅에 눌어붙는다.
“펼쳐라!”
올드완의 호령이 다시 한 번 울리고, 검은튤립 기사단의 대형이 바뀌었다.
멀리서보면 아군 보병 진영 안에 검은색 튤립이 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흉측하기 그지없는 죽음의 꽃이다.
그 죽음의 꽃이 아군 보병을 거름삼아 시시각각 커져가고 있다.
“역시 병무대신이 이끄는 기사단은 만만치 않군.”
마음이 급해지는 걸 숨기느라 애먹었다. 내가 흔들리면 군 전체가 흔들린다.
나는 애써 느긋한 척하며 체닐린의 엉덩이를 두들겼다.
내가 호기로운 척을 하자 근처에 모인 기사들도 간신히 안심한 모습이었다.
무슨 수라도 있겠지. 전쟁터에 나서면 진 적이 없는 전승영웅이라는데. 우리는 생각도 못할 기발할 수로 이 형국을 뒤집으시겠지.
그런 식의 기대가 귓가로 들리는 듯하다.
아니. 적 기사단의 돌격을 저지하기 위해 보병은 내줄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몰살시킬 예정 따윈 없었다.
중앙의, 아니, 올드완의 기사단은 그냥 차원이 달랐다. 그들은 파죽지세로 아군 보병을 갈아버리며 내게 진격해들어오고 있다.
“내가... 나 때문에...”
떨리는 목소리.
슬쩍 보니 마리안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서 시녀의 손을 꼭 잡고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자책하고 있나.
켈자르의 부흥을 위해서라곤 해도 만 이천 명을 헤아리는 보병들을 전장으로 데려와 죽게 한 건 결국 그녀의 결단이었으니까.
가엾기는 하지만, 그녀를 동정해줄 여유는 지금 내게 없다.
지금도 시시각각 보병들은 기백 명씩 죽어나가고 있으니까.
“배, 백작님. 뭔가 수를 취해야하는 거 아닙니까?”
성질 급한 소귀족 하나가 내게 달려들다가 친위대원에게 막혔다. 그는 거의 반쯤 꿇어앉혀 지면서도 끈질기게 내게 애원했다.
“저기 제 동생이 나가 있습니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이 된 앱니다. 백작님, 저들을 다 죽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오.”
“백작님!”
“기다리시오.”
당장 기사단을 내보낸대도 기세를 탄 검은튤립 기사단의 먹잇감으로 던져질 뿐이다.
지금은 적 기사단의 말발굽이 아군 보병의 살과 피로 무거워지기를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 소귀족은 눈을 뒤집고 발악을 하다가 결국 파샨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기절하고 나서야 끌려 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분위기가 좋을 리가 없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게 간과 쓸개는 물론이고 딸이며 부인까지 바치려들던 귀족들은 이제 내게서 멀찍이 떨어진 채 불신의 눈초리를 향하고 있다.
애초에 신뢰보다는 공포와 이해관계로 맺어진 관계다. 연합군의 결속력은 고작 이 정도란 거지.
그래서 주저 않고 저들의 병력을 전방에 배치할 수 있었던 거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불신을 보일 줄은 몰랐는데. 이거 잘못하면 전투가 끝나기도 전에 내분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
파샨은 긴장한 눈으로 친위대원들과 함께 나를 감쌌고, 체닐린은 살그머니 검을 뽑아들었다.
살기를 느낀 귀족들도 제각기 파벌대로 뭉쳐서 내 쪽을 노려본다. 아니, 그들에게서도 만만찮은 살기가 뿜어져나온다.
전투가 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빌어먹을 개판이 벌어질 줄은.
이들은 모두가 동혈 이상의 귀족들. 마력량만 따지면 어지간한 기사보다 훨씬 낫다.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상대들이 아니란 말이다.
게다가 지휘관끼리 내분이 일어났다는 게 전방에 전해지면 아군은 우르르 무너져내릴 테고, 나는 비장의 한 수를 꺼내볼 새도 없이 올드완의 칼을 막아내야 하겠지.
아니. 이건 아무래도 이상하다.
아무리 그래도 전투가 개시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벌써 내분의 조짐이 드러날 리가. 게다가 보병은 귀족들로서는 크게 신경쓰지도 않는 병종인데.
무언가가 걸린다.
“백작님. 방금 끌려나간 자가 중앙의 간자가 아닐까요?”
이오시스가 속삭였다.
아. 그런건가? 내가 중앙에 수작을 부렸듯, 중앙에서도 수작을 부렸을 수 있다는 걸 깜빡했다. 서북방의 귀족들이 모조리 끌려 들어온 연합군의 특성상 간첩이 없을 수가 없는데.
술책을 부리는 것도 어려울 게 없겠지. 불만분자에게 중앙의 위용을 보여주고, 너그러이 용서하겠다는 언질만 해주어도 간첩 역할을 해줄 자는 넘쳐날 테니.
그럼 저 중에 누군가가 중앙의 간자라는 건데.
지금 그걸 구분해낼 수는 없고, 구분한다고 해도 의미가 없다.
차라리 절반쯤 태워서 기선제압을 해야하나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던 차.
“이길 수 있는 거죠, 백작님?”
마리안이 다가와 잔뜩 충혈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팔을 부여잡았다. 팔을 조여드는 손가락은 꽤 아팠지만 그 의중은 헤아리기 어렵지 않았다.
나는 목을 꼿꼿이 세운 채로 대답했다.
“아군의 승리는 확정적이오. 그대들이 이 정도의 피해에 흔들린다는 게 나로서는 실망스럽군. 나는 언제나 이겨왔고, 오늘도 그 역사는 깨지지 않을 것이니. 고작 이만한 수 싸움에 겁이 나서 계집애처럼 울고 싶은 자가 있다면, 연합군의 기강을 더럽히지 말고 이 자리에서 물러나 도망치도록 하라!”
내가 냉철한 모습을 보이자 귀족들은 서로 수군거리더니 조금씩 나와의 거리를 다시 좁혔다.
저들이 모두 간첩일 리는 없다. 그저 불안하던 차에 간첩의 선동에 휘둘린 자가 대다수겠지.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보병은 그들로서도 많이 아쉬울 건 없는 하급병종이다. 수혈 평민들이 얼마나 빨리 아이를 낳고 키우는지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다.
게다가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전승영웅이라는 레시아르 백작에게 무슨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런 기대를 되새긴 거겠지.
흐름이 뒤집어질 것 같으니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내게 다시 붙은 것이다.
“켈자르는... 켈자르는 레시아르의 전력을 믿습니다. 다름 아닌 켈자르가 직접 당해본 힘이니까요.”
마리안은 대놓고 내게 신임장을 던졌다. 그러자 켈자르의 영향력 하에 있는 중소귀족들이 내 편을 들었고, 대세가 기울자 모두들 우르르 내게 다가와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이 안에 중앙과 내통한 자가 몇이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대세를 거스르면서까지 나를 배신할 자신은 없는 모양이다.
물론 전투가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돌아간다면 내 등에 칼을 꽂겠지만 일단의 상처는 봉합된 걸로 봐도 좋겠지.
이번에는 마리안이 나를 도왔군.
나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정말 고맙다고 느끼신다면, 부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기 전에 이 전쟁을 끝내주세요.”
마리안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없는 일인데.
하지만 마리안의 체향에서는 남자가 폼을 잡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나는 그녀가 뿌린 시트러스 향수에 아득해져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피에 질려 창백해진 안색으로도 여전히 정숙한 여인의 모습이 눈에 담겼다.
“그리하지.”
“감사... 합니다.”
마리안은 시녀와 함께 물러났다.
나는 귀족들을 한 번 둘러보고는 타라를 가까이 불렀다.
“독전대를 물려라. 보병에 한정하여 산개하여 퇴각할 것을 명하라.”
“아직 적의 기세가 날카롭습니다. 계획대로라면...”
“보병을 더 던져줘 봐야 의미가 없다. 게다가 자중지란에 빠져서 무질서하게 각자 도망치면 그게 더 좋지 않아.”
“알겠습니다.”
퇴각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영주연합군 보병들은 사방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검은튤립 기사단의 맹진으로부터 살아남은 자의 수효는 많이 잡아봐야 오천을 넘지 않을 듯싶었다.
“넷에 하나나 살아남았을까요?”
마리안이 침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전부 갈아 넣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들을 저만큼이라도 살린 건 그대야.”
“변함없이 징그러운 사람.”
마리안은 힘없이 웃고는 시녀의 팔을 부여잡았다. 긴 치마 아래로 빠져나온 얇은 발목은 갓 나온 아기사슴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집결! 흩어지지 마라!”
올드완의 노호성이 다시 한 번 울렸다.
검은튤립 기사단은 정예 기사단답게 뿔뿔이 흩어지는 보병들을 쫓지 않았다. 그들은 올드완에게 조그마한 흥밋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그 대신 검은튤립 기사단이 평정한 길을 따라 마력병과 보병의 연합제대가 행진하며 아군 패잔병을 차근차근 사냥했다.
마리안의 간절한 청에 아군 보병을 조금이라도 살려내기로 했지만, 아무래도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자는 수백이나 될까 싶었다.
한편, 올드완은 패주한 아군 보병 후열과 대기 중인 아군 마력병 전열 사이의 기다란 틈에서 말을 잠시 쉬게 했다.
“방심이 없구먼. 늙은이가.”
“백작님. 적이 돌격력을 잃은 지금, 기사단을 돌격시키면...”
“안 돼. 아군 기사전력은 적을 돈좌시키는 수세전력으로만 사용한다.”
“하지만...”
“검은튤립 기사단과 충돌한 후에 아군 진영으로 퇴각할 수 있는 기사가 있을 것 같나?”
타라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되면 아군은 약간의 전공을 대가로 기사단을 통째로 잃는 거지. 그건 곧 패전으로 이어질 테고.”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죄송할 건 없어. 생각해볼만한 방법이긴 했지. 적이 올드완의 검은튤립 기사단만 아니었다면 말이야. 여하튼... 다시 오는군.”
검은튤립 기사단은 기력을 회복한 후, 혈육이 잔뜩 묻은 말발굽으로 초원을 헤집으며 다가왔다.
먼지가 부옇게 일어나서 피안개와 섞였다.
고기방패가 되어줄 보병은 이제 없다. 최전선을 지키는 건 이제 마력병 전대(戰?)다.
피안개를 들이켠 마력병들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각자의 무기를 꽉 쥐고 있다. 피안개 너머로 희끗희끗 비치는 적의 형체가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마력병들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보인다!”
“씨발!”
“입 다물어! 방어막 전개!”
선임 마력병이 비명과도 같이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수백 명에 달하는 마력병들이 이를 악물고 마력을 하나로 엮었다.
검붉은 안개의 장막에서 희끗한 형체가 서넛씩 보였다. 아니, 그건 수십, 수백으로 순식간에 불어났다.
기사들은 코뿔소처럼 무섭게 돌진했다. 그 돌진을 받아내야 하는 마력병들은 눈물이 말라 뻑뻑해진 눈을 애써 홉뜨며 전신의 마력을 쥐어짰다.
퉁! 투웅! 퉁!
선두에서 달리던 검은튤립 기사 몇이 방어막에 부딪혀 낙마했다. 그들은 곧 동료 기사의 말발굽 아래로 사라졌다.
예기치 못한 사태에 다른 기사들은 방어막 앞에서 말을 달래며 멈추어 서서, 처음으로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됐다!”
“헛소리 하지 말고 버텨!”
여기서 발을 조금이라도 묶을 수 있으면... 하고 작은 희망을 피워내고 있는데,
올드완이 방어막을 향해 사선으로 깃대를 그었다.
그를 노리고 이따금 마력창이 날아들기도 했지만, 마스터를 둘러싼 검은튤립 기사들은 매섭게 공격을 쳐냈다.
결국 올드완이 이끌어낸 흑색 파동이 방어막 위로 넓게 퍼져나갔다.
마력병들은 불길한 예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죽을 각오로 마력을 뽑아 올려 방어막에 충당했다.
지나친 마력소모를 이기지 못하고 마력탈진에 빠져 쓰러지는 마력병도 여럿이었다.
적과 아군 진영 모두 올드완과 마력병 전대 간의 힘 대결에 주목해 숨을 죽였다. 승패는 머지않아 갈렸다.
올드완은 깃대를 빙글빙글 휘두르면서 무식하게도 방어막으로 돌진했다. 아직 방어막은 건재한데.
그를 따라 검은튤립 기사단은 와아아 소리를 치며 맹진을 개시했다.
“레시아르 촌놈들아! 네놈들의 역심을 징치하기 위해 나, 올드완이 왔노라!”
올드완은 방어막을 깃대로 강하게 후려쳤다. 타격을 받은 방어막은 앞뒤로 크게 일렁이더니,
지직...
콰지지직...!
직...
콰콰콰쾅!
결국 터져버렸다.
파동을 몸으로 받아낸 마력병들은 줄줄이 쓰러졌다. 마력탈진에 빠져 눈을 까뒤집고 팔다리를 기괴하게 꺾어내는 모습이 기괴하기 그지없다.
방어막으로 돌격한 기사들은 그들을 가볍게 밟고 지나갔다.
그나마 보병에 비하면 타격을 입히는 데에 성공했다고 자위해야 하나. 그러기엔 내던져진 마력병의 가치가 너무 크다.
“악! 안 돼!”
마력병이 허무하게 학살당하는 걸 본 귀족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나도 입맛이 쓰다. 마력병은 기사보다는 약하지만 그래도 쉽게 양성할 수 있는 병종이 아니다. 수혈 평민 중에서 마력을 가진 이는 지극히 적기 때문이다.
이제 그 뒤는 적, 백여우 기사단이다.
여기서까지 레시아르 소속의 기사들을 후방에 배치한다면 연합군의 신뢰를 완전히 잃고 말 테니까. 내가 총대장을 맡은 이상 레시아르 병력만을 아낄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미 초전에서 꽤나 소모한 내 기사단을 여기서 또 소모해야 한단 말이야?
손발이 덜덜 떨리고 머리가 띵해진다.
“차, 차라리 내가 나가서...”
“적 마법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타라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당연한 반대였다. 중앙에서도 나를 상대할 물과 얼음의 마법사를 하나둘 정도는 데려왔겠지. 아우럼 백작은 종군 마법사가 아니라 참모로 참전한 것이고.
꼭 그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이번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한 안배는 이미 정해져 있다. 나는 당장 나가서는 안 된다.
"크... 알았어."
"제 아버지, 오록스 단장을 믿으세요."
타라는 자기에게 다짐하듯이 내 손을 살짝 쥐었다가 놓았다.
"백여우 기사단! 레시아르 백작 각하께 자랑스러운 모습만을 보여라!"
마침 오록스의 우렁찬 외침과, 뒤이은 백여우 기사들의 함성이 들렸다. 그 소리에 전 백여우 기사단 소속이었던 타라와 파샨 모두 귀를 쫑긋 세웠다.
백여우 기사단은 마력병 패잔병을 구원하고 적의 기세를 늦추기 위해 전략적 돌격을 감행했다.
하얀 여우가 그려진 깃발이 펄럭이며, 그 밑으로 용맹한 아군 기사들이 검을 들어 올렸다.
"쏴라!"
마력창이 적진을 향해 날아들었다. 마력병을 사냥 중이던 검은튤립 기사 십수 명이 몸통을 관통 당해 쓰러졌다. 이번 전투를 통틀어 처음으로 유의미하게 적에게 준 타격이었다.
올드완은 사냥을 중지하고 진형을 다시 짰고, 그 틈을 타서 마력병들은 급히 뒤로 물러났다. 물론 절반 이상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다시 쏴라!"
검은튤립 기사단의 진형이 완전히 갖춰지기 전에 백여우 기사단은 또 한 번 마력창을 투사했다. 하지만 하나로 모여든 검은튤립 기사단은 손쉽게 그 공격을 튕겨냈다.
백여우 기사단이 쏘아낸 마력창이 전부 튕겨나가기도 전에, 올드완은 깃발을 삼각형 모양으로 크게 흔들었다.
그 신호에 맞추어 검은튤립기사들은 몸에 두른 마력 방어막을 해제하고 손을 들어 올렸다.
이천이나 되는 기사들이 마치 짠 것처럼 한 번에 건틀렛을 하늘로 치켜드는 모습은 남자의 로망을 자극하는 데가 있었다. 그 모습에 나도 잠시 넋을 잃었지만, 곧바로 이어진 공격은 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천여 개를 훌쩍 넘는 마력창이 반대로 백여우 기사단을 노리고 쏟아진 것이다.
“막아라!”
제트리 단장이 백여우 기사단을 구원하기 위해 급히 뛰쳐나가 직접 적여우가 그려진 깃발을 휘두르며 아군 진열을 뛰어다녔다.
여기저기서 동그란 마력 방어막이 피어났다. 그리고 그 위로 적의 마력창이 쏟아 내렸다.
여름 소나기가 철판 슬레이트 지붕을 두들기는 것처럼퉁퉁퉁 하는 소리가 귀청이 찢어질 정도로 크게 울렸다.
방어막 중에는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도 있지만, 부서지는 것도 있다. 그리고방어막이 뚫릴 때마다 레시아르의 기사가 무참히 죽어나간다.
"투사 중지! 마력 방어막으로 전환하라!"
적이 방어막을 해제한 틈을 타서 마력창을 쏘아내려던 백여우 기사단은 끔찍한 피해를 입었다. 뒤늦게 그것이 오판임을 깨달은 오록스가 피끓는 목소리로 외쳤으나, 이미 살아남은 백여우 기사들은 열에 한둘 수준이었다.
아버지와 레시아르 백작위를 다툴 때부터 내 측근이었던 백여우 기사들이 저렇게 무더기로 죽어나가는 꼴을 보고만 있어야한다는 사실이 나를 참담하게 만들었다.
"밀어내라! 이제 적은 모든 역량을 소진하였다!"
올드완은 교묘하게 공세와 수세를 이어나가며 거의 일방적으로 백, 적여우 기사단을 난타했다. 아군은 그저 수그리고 방어막을 펼친 채 그것이 뚫리지 않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토루만이 이끄는 사향노루 기사단이 뒤늦게 달려나가 적의 측면을 두들기려 했지만, 적 마력병 연합제대는 능숙하게 그 공격을 막아내고는 오히려 사향노루 기사단을 밀어붙이는 저력까지 보여주었다.
노딘과 헬무트를 비롯해 초전에서 나와 함께 싸웠던 기사들은 출격해서 레시아르 기사단을 구원하고 있으나, 이번에 합류한 중소귀족들의 기사들은 각기 주군의 명이 없다면 움직이지 않겠다는 사실상 항명에 나섰다.
그리고 그들의 주인인 연합군 귀족들은 반으로 갈려 출격이냐 아니냐고 싸우고 있다. 이제 누가 중앙에 연줄을 댔는지 대충 알겠군. 이제 알아도 늦지만.
마리안과 아마트리체는 켈자르와 파티스의 영향력 내에 있는 귀족들을 설득해 전장으로 내보냈지만, 그들도 검은튤립 기사단을 피해 빙 둘러서 적 보병 쪽으로 돌격했다. 사실상 의미 없는 보여주기 식 출전이었다.
결국 전장에 오롯이 남겨진 건 오록스와 제트리 단장이 이끄는 적, 백여우 기사단 뿐.
"사수하라! 물러나서는 안 된다! 백작 각하의 대계가 곧 펼쳐진다! 목숨을 걸고 현위치를 지켜라!"
오록스 단장은 피에 젖은 불곰처럼 날뛰며 이리뛰고 저리뛰고 있지만 이미 그를 중심으로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검은튤립 기사단은 그나마 단장을 예우한다는 차원에서 하나씩 나서 오록스와 검을 맞대주었다. 치욕적인 은혜였다.
그는 갑주가 찢어지고 말을 잃은 상태에서도 무려 여섯 명의 중앙 기사들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레시아르 백작 각하 만세!"
무섭게 포효하며 적 기사의 목을 도끼로 찍어버린 오록스 단장 앞에, 올드완이 나타났다.
"미친 곰처럼 날뛰는군. 기세와 무예가 나쁘지 않으나, 주인을 잘못 둔 죄로 허무하게 죽겠구나."
"내 죽음은 허무하지 않을 것이다. 병무대신을 길동무로 할 테니까."
광오하기까지한 오록스의 대답에, 올드완은 껄껄 웃었다.
"이 지위에 오르고 나니 함부로 내게 덤벼드는 이가 없어 적적하던 차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기개가 부럽다. 어떤가, 그 충심을 폰세르크 국왕 전하께 향하여 볼 생각은 없느냐?"
"레시아르는 내가 나고 자란 땅. 레시아르 백작 각하는 그 땅을 다스릴 적법한 적통을 이으신 분이다. 나의 충성은 오직 그 분을 향한다."
"그래, 그렇게 말해야지. 충심은 오가서는 안 되는 것. 그것 하나만은 그대와 나의 마음이 통하는구나."
올드완은 깃발을 빙글빙글 돌리고는 말 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럼, 서로의 충심을 무로써 겨뤄보자꾸나!"
이번 전투에서 가장 빛나던 두 사람이 격돌한다니,모두가 분위기에 취해 잠시 검을 집어넣고 오록스와 올드완의 결투에 시선을 향했다.
이미 향방은 중앙군의 승리로 굳어지는 듯하다는 것도 한몫 했겠지. 오록스가 올드완에게 패하면 연합군이 백기를 올릴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터.
결국 모두가 향후 십 년은 구전될 결투를 지켜보기 위해무방비해지는 바로 그 순간.
별똥별이 마른 하늘에 궤적을 그렸다.
“운석인가?”
파샨이 중얼거렸다.
“아니... 저건, 대마법이이에요!”
이오시스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별똥별이 이쪽으로 가까워질 수록 그것의 정체는 확연해졌다.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방패. 그것은 황금마법의 종주인 아우럼 백작가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기적의 발현이었다.
하지만 저런 규모라고는 말 안 했잖아, 시발.
“도망쳐!”
피아를 가리지 않고 공포가 피어올랐다. 저만한 규모의 대마법은 맞선다고 해서 맞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해일이나 지진과 싸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올드완은 급히 검은튤립 기사단을 물리려고 했지만 이미 너무 깊이 들어온 상황. 게다가 오록스 단장은 곰 같이 포효하며 올드완에게 사력을 다한 일격을 날렸고, 그 일격은 결정적으로 올드완의 발목을 잡았다.
검은튤립 기사단은 마스터를 두고 도망치는 대신 오록스에게 분노에 찬 집중공격을 가했고, 그와 거의 동시에거대한 황금방패가 적 기사단 진영 한 복판에 떨어졌다.
둥...!
땅거죽이 뒤집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