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격돌
* * *
말을 후려치듯 달려 도착한 곳에는, 다행히도 아우럼 백작이 있었다.
그리고 올드완 또한 광분한 표정으로 수염을 휘날리며 서있었고. 도대체 대마법이 직격한 현장에서 어떻게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나온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올드완의 발목을 마지막까지 붙잡던 오록스 단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부디 크레이터 안에 살아있기를 바랄 수밖에.
“레시아르 백작! 왕국을 배신하더니 이제는 군 안에 배신자를 심기까지 해!”
올드완은 자기 키만큼이나 큰 장검을 살벌하게 휘두르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나보다도 말이 놀라서 히히힝 울며 앞발을 높게 쳐들었다.
나는 간신히 말을 달래 파샨과 함께 땅에 발을 디뎠다.
“배신자, 배신자하지 마시오. 듣는 배신자 기분 나쁘니까. 그리고 따지고 보면 먼저 배신한 건 중앙이지. 가만히 잘 살던 우리한테 왜 갑자기 마수를 뿌리고 지랄을 했냔 말이야.”
나는 말을 늘이면서 빠르게 상황을 살폈다.
아우럼 백작은 눈과 코, 귀, 입, 그리고 바지가 벌겋게 젖은 걸보니 항문과 생식기에서까지 피를 줄줄 흘리며 기절해있다.
마력탈진인가.
그만한 타격을 줄 대마법을 썼다면 마법명가의 당주라도 마력탈진에 빠질 수밖에 없겠지.
오히려 죽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그리고 기절한 그를 지키듯이 마법사 둘이 서 있다.
눈이 다 아플 정도로 선명한 황금색 망토를 두른 걸 보니 아우럼 가문에서 함께 보낸 마법사겠지.
그들은 손을 한 데 모으고 기를 쓰며 마력을 뽑아내고 있었다.
그들의 마력으로부터 형성된 황금방패가 지면에서 약간 떨어진 채 둥둥 떠다닌다.
그 크기는 화리메가 만들었던 것과 비슷하게 성인의 몸뚱이 정도 크기였다.
이들이 아우럼 백작이 대마법을 쓴 직후 지금까지 그를 지켜왔겠지. 그 증거로 근처에 적 기사나 마력병이 무더기로 죽어있다.
그 실력은 역시 마법명가의 마법사답게 만만치 않을 듯 했다. 느껴지는 마력량도 상당했고.
화리메보다 더 강한 것 같은데, 아마 아우럼 백작가의 직계 마법사가 아닐까.
하지만 올드완이 아우럼 백작을 찾아온 후로부터는 그들의 실력은 의미가 없어진 듯했다.
그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황금방패를 계속해 만들어냈지만,
“이 역도들을 내가 모조리 척살하고 말겠노라!”
올드완은 황금방패 쪽으로 달려들더니, 날이 무척이나 긴 장검을 슥 휘둘러 그것을 무 자르듯 간단하게 잘라버렸다.
서걱!
“속성마법을 검으로 벤다고?”
아무리 병무대신이 괴물이라지만 저런 기예가 가능할 줄은 몰랐다.
아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나는 급히 올드완의 등 뒤로 화염을 내뿜었다.
마법사 둘을 단번에 베어내려던 올드완은 어쩔 수 없이 등을 돌려 자신의 몸을 휘감으려는 불길을 잘게 잘라내야 했다.
“마스터를 지원하라!”
근처에서 기회를 엿보던 검은튤립 기사들이 내게로 달려들었다.
그러자 내 쪽에서는 체닐린이 이끄는 호위 기사들이 출진했다.
“파샨! 너도 가! 쟤들만으로는 안 된다!”
“하지만 도련님...”
“어서!”
내 호위가 없음을 걱정하던 파샨도 결국은 체닐린과 합류해 적 기사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서로 검격을 교환하며 살과 피를 노렸다.
“흣... 하압!”
체닐린은 솜씨 좋게 적 기사의 일격을 피하고는 아래에서 위로 사선을 긋듯 마력파동을 발했다.
쨍! 철을 망치로 두들기는 것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상당히 근접한 상태에서 파동을 받아낸 적 기사는 피를 토해내며 상반신을 앞으로 숙였고, 체닐린은 그의 머리통을 내려쳐서 세로로 잘라냈다.
하지만 내 호위 기사들은 전 기사단장이었던 체닐린만은 못해서, 조금 밀리면서 친위대원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검은튤립 기사들과 맞섰다.
“빨리 빨리 해치워! 에잇!”
파샨은 작은 체구를 이용해 몸을 숙인 채로 적 기사들의 하반신을 노렸다.
적들은 이 작은 친위대장을 몹시 성가셔 해서, 쉽게 나서지 못하고 번번이 몸을 물렸다.
“부하도 저를 닮아 비겁하군.”
올드완은 여전히 분노로 붉어진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싸움에 비겁한 게 어디 있어?”
“기사는...”
“그 기사정신이란 게 귀족의 적법한 영지에 마수를 뿌리고 독을 만드는 것이던가?”
올드완은 콧김을 내뿜더니 대답하지 않고 검을 휙휙 휘두르며 달려왔다.
나는 급히 뒤로 물러나며 있는 힘껏 앞으로 불길을 분사했다.
어마어마한 고열로 땅이 녹아내릴 지경이었지만, 올드완은 가볍게 지면을 박차고는 화염과 연기를 단번에 베어냈다.
“이런 씨...”
칼날이 반짝이며 그 면에 당혹스러워하는 내 얼굴이 비쳤다.
캉!
다행히 칼날이 내 몸을 베는 일은 없었다.
아우럼의 마법사 둘이 빛나는 검을 여러 개 만들어내서 올드완의 배후를 노리고 쏘았기 때문이다.
캉! 카카카캉!
하지만 빛나는 검은 올드완의 갑옷을 뚫지 못하고, 바위 깨지는 소리만 내며 부서졌다.
도대체 얼마나 좋은 갑주를 입었기에 흠집 하나 나지 않는 건지.
그래도 아우럼 마법사의 협공은 올드완의 진로를 바꾸어 내가 빠져나갈 시간을 주기엔 충분했다.
나는 허겁지겁 자리를 피하고는 발자국마다 열기를 남기며 아우럼 백작 쪽으로 내달렸다. 아우럼 마법사들과 합류하기 위해서다.
“귀족이라면 비겁하게 도망치지 말고 싸워라!”
“좆까!”
올드완은 내가 뒤에 남긴 열기를 몸으로 그대로 받아내면서 나를 쫓았다.
그는 나를 노리고 마력창을 여러 번 쏘았는데, 다행히 그의 기묘한 검술에 비해 마력창은 별 것이 없었다.
그래. 암만 대단해도 기사가 마력만으로 마법사를 대항할 순 없는 법이지. 속성마법을 베어버리는 기묘한 검술만 조심한다면 승산이 있다.
나는 손쉽게 올드완의 마력창을 불로 태워버리고는 계속해서 뛰었다.
올드완은 한숨을 쉬고는 결국 검을 휘두르며 나를 쫓아 달렸다.
아우럼 마법사 둘이 나를 지원하기 위해 계속해서 빛나는 검을 만들어내서 차례대로 쏘았다.
칵! 카캉! 카캉카캉! 캉!
빛나는 검은 올드완의 갑주에 맞을 때마다 산산조각 나며 부서졌다.
도움이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아주 없는 것보단 나은지, 나는 간신히 올드완의 검격을 피해 아우럼 마법사 둘 앞에 설 수 있었다.
“레시아르 백작님.”
둘 모두 남자였는데, 그 중 나이가 좀 더 든 중년 남자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소. 반가운데, 인사는 나중에 합시다. 미친 늙은이가 칼 들고 쫓아오는 중이니까.”
“병무대신이 이리 강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떻게든 당주님은 안전한 곳으로 보내드려야 하는데...”
“저 노인네가 아우럼 백작을 곱게 보내줄 것 같소? 어떻게든 여기서 꺾어놔야 하오. 이크, 바로 오네. 준비! 아니, 그 좆같은 검 말고 황금방패나 만들란 말이오!”
아우럼 마법사들은 급히 마력을 짜내어 올드완의 진로 앞에 황금방패를 만들었다.
올드완은 장검을 치켜들어 사선으로 그었고, 방패는 예리한 단면을 보이며 잘려나갔다.
그래도 빛나는 검보다는 황금방패가 올드완을 성가시게 하는 게 분명했다. 적어도 황금방패는 올드완이 검을 휘두르게는 했으니까.
“계속 만드시오! 어떻게든 발을 묶어야 해!”
내가 닦달하자, 마법사 둘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황금방패를 계속 만들어냈다.
갈수록 크기와 형태가 뒤죽박죽이 되긴 했지만, 어쨌든 황금방패가 생겨날 때마다 올드완은 성질을 부리며 검을 휘두르는 탓에 그의 발은 점점 느려졌다.
나는 그들이 올드완을 묶어두는 사이 급히 마력을 이끌어냈다.
몸에 화기가 돌면서 근방의 공기가 후끈하게 데워졌다.
아우럼 마법사들은 뜨거운지 이마에 땀방울을 매단 채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아니, 올드완이 달려들고 있어서 그런가.
저 노익장은 대추처럼 얼굴을 벌겋게 익힌 채로 장검을 치켜들었다. 황금방패 다섯 개가 동시에 잘려나갔다.
“이런 쓸데없는 수작을...”
“받아라!”
검을 내리긋느라 무방비 상태가 된 올드완의 맨 얼굴을 노리고 수십 마리의 화염뱀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달려들었다.
올드완은 이를 악물고서 화염뱀 무리를 이마로 받아쳤다. 미친 놈!
이마가 울긋불긋 달아올라 화상을 입긴 했지만, 그는 그럭저럭 멀쩡해보였다.
올드완은 내 화염마법을 맨 이마로 받아내면서도 검을 치켜들어 나머지 화염뱀의 몸통을 모조리 잘라버렸다.
“저런 괴물이... 빨리 황금방패! 더!”
나는 기절한 아우럼 백작의 다리를 붙잡아 뒤로 끌면서 외쳤다.
아우럼 가의 마법사들은 급히 황금방패를 줄줄이 만들어 세웠고, 올드완은 이번에는 진로를 바꾸어 달리려 했지만 황금방패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의 앞길을 막아 세웠다.
결국 올드완은 분통을 터뜨리며 다시 검으로 황금방패를 잘라내야 했다.
“하찮은 수작이다!”
“그럼 또 받아봐!”
그가 황금방패를 자른 순간, 나는 다시 불길을 쏘아냈다.
올드완은 대비하고 있었던 건지 칼자루를 빙글 돌려서 검날을 회전시켰지만, 그가 벤 것은 작은 여우 모양의 불장난에 불과했다.
불여우는 잘려나가면서 퐁 하고 작게 불트름을 뱉었다.
올드완은 얼떨떨하게 그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무슨...?”
“이게 진짜다!”
그의 발아래서 불길이 폭죽처럼 위로 팟 치솟았다.
뒤로 물러나면서 발자국 안에 떨어뜨려놓았던 작은 불덩이가 마력을 전해 받아 크게 일렁였다.
내 발자국을 무심코 밟은 올드완의 하반신은 삽시간에 불길로 휩싸였다.
“흡...!”
올드완은 격통을 참아내며 발로 지면을 쿵 눌러 불길을 짓밟았다.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지만 어쨌거나 그의 기력과 체력을 깎은 건 분명했다.
나는 또다시 아우럼 백작을 질질 끌며 물러났고, 아우럼 가의 마법사 둘은 열심히 황금방패를 만들어 올드완의 추격을 방해했다.
당장 얼마 전에 마법사 하나가 기사 이천을 궤멸시켰는데, 이번에는 마법사 셋이 기사 하나를 당해내지 못해서 이런 꼴이라니 좀 우습긴 하지만…….
그래도 올드완을 빙빙 돌리면서 지연전에 끌어들이는 건 확실히 효과를 보고 있었다.
올드완은 매번 한 발 차이로 우리를 잡지 못했고, 반대로 우리는 조금씩 올드완에게 피해를 누적시키고 있었다.
아우럼 마법사들이 방어하고, 틈이 생기면 내가 공격한다.
비록 올드완이 치명타를 허용한 적은 없었지만, 가랑비에 젖듯이 피해를 누적시키면 언젠가는 스스로 무너지겠지.
그도 그걸 예상했는지, 올드완은 결국 먼저 승부수를 띄웠다.
“역도 놈들아! 이것도 막아낼 수 있는지 보이거라!”
그는 장검을 원형으로 휘리리릭 돌리면서 달려들었다. 손목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빨랐다.
풍차처럼 돌아가는 칼날이 줄 지어 선 황금방패를 모조리 갈아버렸다.
나는 그를 향해 불길을 쏘아냈다.
올드완은 여전히 칼날을 돌리며 불길까지 석석 잘라냈다.
그의 발밑과 양옆, 심지어는 머리 위에서까지 온 사방에서 화염이 치솟았지만 올드완은 칼날을 상하좌우로 움직여가며 화염을 모조리 쳐냈다.
그가 검으로 쳐낸 화염은 성게 가시처럼 사방으로 죽죽 뻗어가며 화려한 불놀이로 변해버렸다.
타라는 검의 극한에 다다르면 마법과도 같아진다고 했던가.
그녀의 말이 절실히 이해된다. 굳이 이런 상황에서 이해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올드완은 칼날풍차를 돌려가며 성큼성큼 간격을 좁혀왔다.
“레, 레시아르 백작! 뒤로 물러납시다!”
“그래요! 일단 물러나요!”
아우럼 마법사들은 불길에 비친 올드완의 서슬 퍼런 모습을 보고 겁에 질린듯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한 번 간격이 좁혀진 채로 술래잡기를 하다보면 또 간격을 내어줄 수밖에 없고, 그러다가 무심코 올드완의 검격 내의 범위에 들어가게 되면 마법사 셋의 목이 서걱하고 잘리고 말겠지.
여기서 올드완에게 치명타를 입혀서 좁혀진 거리를 도로 벌려놔야 한다.
“황금방패! 준비!”
“레시아르 백작! 도망가야 한다니까요!”
“닥치고 준비하시오! 내가 하란대로 해!”
“이런, 제기랄! 이번 일만은 당주님께서 잘못하신 게 분명해!”
아우럼 마법사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잽싸게 황금방패를 출현시켰다.
나는 줄 지어 선 열 개의 황금방패가 나와 올드완의 사이에 직선으로 놓이게 한 후, 올드완이 충분히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이런 애들 놀이는 이제 질렸다!”
올드완은 버럭 소리를 치고는 검을 엑스 자로 휘둘러서 황금 방패를 서너 개씩 한 번에 잘라냈다.
줄지어선 황금방패가 엑스 자로 잘려 사라지기 전에, 나는 황금방패의 잘린 틈새 사이로 실을 잇듯이 불길을 발사했다.
“지금! 협격하시오!”
내 호령에 아우럼 마법사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황금방패를 풀어냈다.
열 개의 황금방패는 흐물흐물 녹아내리면서 내 화염과 합쳐져서 두 마리 뱀이 서로 엉키는 듯한 모습을 만들어냈다.
올드완은 긴장하며 검을 내리쳤지만, 화염과 황금의 두 마리 뱀은 그의 검신을 타고 올라 더 뜨거운 열기를 발했다.
“크윽...”
두 가지 마법을 동시에 받아내는 올드완의 얼굴에 검버섯이 피었다.
그는 서서히 뒷걸음질 치려 했지만, 조금이라도 서투르게 몸을 빼치는 순간 화염과 황금이 그의 몸을 뒤덮을 것이 분명했다.
“으극...!”
어지간한 상처에는 까딱도 하지 않던 올드완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어금니를 부서져라 깨물었다.
그는 검을 현란하게 8자로 휘둘렀지만, 이미 검신을 타고 오르는 두 마리 뱀을 떨어뜨리지는 못했다.
붉은색의 화염뱀과 누런색의 황금뱀이 그의 얼굴을 노리며 혀를 날름거렸다.
승리의 추가 기울어진 순간이었다.
이 틈을 타서 밀어붙인다면...
푹!
근처에서 무언가가 꾸물꾸물 움직인다 싶었는데, 갑자기 허벅지 뒤쪽이 화끈해졌다.
그것은 갑옷까지 뚫고 내 살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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