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77화 (77/166)

〈 77화 〉 격돌

* * *

“뭐, 뭐지?”

통증이 위기감을 증폭시켰다. 이건 위험하다.

나는 바로 올드완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물러났다.

“흡!”

그러자 올드완은 검을 수직으로 그으며 두 마리 뱀을 땅에 내리쳤다. 펄떡이는 두 마리 뱀은 다시 올려친 검 끝에 갈려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올드완도 바로 공세에 나가지는 않고 잠시 숨을 골랐다.

서로 태세를 가다듬는 사이에, 나는 급히 고개를 둘러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내 허벅지를 찌른 놈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우럼 마법사들이 미쳐서 나를 공격했을 리는 없고. 그들은 자신들도 잘 모르겠다는 투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남정네 둘이 그러고 있으니 영 역겨운...

“윽!”

이번엔 옆구리가 시렸다.

나는 얼른 검을 뽑아 이리저리 휘둘렀다. 무언가가 검 끝에 걸린 것 같기도 해서 보니...

그건 그림자였다. 말 그대로 검은색 그림자.

검에 베인 그림자는 흐물거리다가 사라졌다. 아니, 전장에 널린 수많은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뭐, 뭐야? 그림자가? 윽...!”

다시 허벅지가 찌릿했다. 이번에는 갑주를 뚫고 송곳 같은 걸로 찌른 듯했다.

피가 줄줄 새어나오는 게 느껴진다.

나는 아우럼 마법사들을 내쫓고 내 근방 일 미터 안을 불길로 가득 메웠다.

하지만 내 상대는 이 괴상한 그림자만이 아니었다.

그 사이 기력을 회복한 올드완이 장검을 어깨 위로 견착한 채 칼 끝을 세우고 돌진해왔다.

“바이스 레시아르! 이제 이 싸움을 끝내자!”

“노인네가 기력도 좋아!”

“닥쳐라! 역도 놈!”

나는 뒤로 달려 거리를 벌리면서도 그를 향해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수십 개의 불덩이가 손아귀에서 생겨났다가 올드완을 향해 날아갔다.

올드완은 돌진자세 그대로 손목만 퉁겨서 칼끝으로 불덩이를 찔러 터뜨렸다.

“시간벌이도 안 되네! 황금방패!”

“지금 만들었소!”

아우럼 마법사 둘이 허둥지둥거리며 황금방패를 만들어내 올드완의 돌진을 방해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게 뻔하니, 나도 나대로 불길을 준비하려던 중이었다.

올드완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에, 멀찍이 떨어진 그림자가 쭉 늘어나더니 내 어깨를 꿰뚫었다.

“윽...”

뼈가 시큰할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 닥쳐왔다. 나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올드완이 당했던 양동작전을 이번에는 내가 당하고 있다.

올드완은 아우럼 마법사 둘의 방어를 뚫고 나와 맞서야 한다면, 나는 올드완을 막으면서도 괴상한 그림자를 신경 써야 했다.

이 그림자는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였다.

파샨이나 체닐린 같이 동체시력이 좋은 녀석이 하나라도 붙어있었더라면 그리 큰 위협은 안 됐겠지만, 공교롭게도 그들은 저 멀리 검은튤립 기사들과 혈전을 벌이는 중이다.

아니. 일부러 판을 그렇게 짜둔 걸지도 모르지.

여하튼 마법사만 셋이서 올드완을 간신히 상대하는 중에 튀어나온 이 그림자는 너무나도 상대하기 힘든 적이었다.

그래도 우선순위는 올드완이 훨씬 높다. 그림자의 공격은 몇 번 맞아줄만 하지만, 올드완의 공격은 단번에 내 허리를 잘라낼 테니.

나는 머릿속에 종을 뎅뎅 울리는 듯한 통증을 참아내면서 올드완을 향해 화염을 분사했다.

올드완은 검을 기묘하게 퉁겨서 화염을 반사해냈다.

내게 되돌아 온 화염을 처리하려는 사이, 나를 노린 그림자의 공격은 바로 연격으로 이어졌다.

날카로운 못 같은 것이 내 눈알을 향해 날아들었다.

“도련님!”

파샨이 저쪽에서 목 터져라 소리쳤다. 하지만 멀어서 도움이 닿을 수 없는 거리다.

나는 불길을 확 뿜어냈다.

하지만 그림자는 불에 타들어가면서도 대못을 놓지 않았다. 놈이 자신의 생을 건 일격이었다. 못의 끝, 예리한 첨단부가 불길을 받아 번쩍였다.

못은 줄줄 녹아내리면서 가까이 다가왔다. 제기랄. 저 조그만 것도 마도구였다.

죽음이 코앞에서 번쩍거렸다.

챙!

대못을 막아낸 건 어디서 솟아났는지 모를 친위대원이었다.

그녀의 생김새는 굉장히 낯이 익었다.

평범한 갈색 머리칼 아래의 얼굴은 베일로 묶어 숨겼지만, 그 아래로 비춰보이는, 행복이라곤 평생 누려보지 못한 듯이 박복해 보이는 얼굴.

아. 그렇지. 이건 프렌다, 토모와 함께 노예로 사들인 베티아였다.

한동안 안 보인다 싶었더니 친위대원으로 들어가 있었나보다.

혼신의 공격이 막힌 그림자는 못을 떨어뜨리고 불길 속에 녹아내렸다.

“백작... 님...”

여전히 흐린 눈으로, 하지만 약간의 열기가 담긴 눈으로 그녀는 나를 돌아보았다.

말을 늘어뜨리는 습관도 바뀌지 않은 듯했다.

“고마워. 베티아.”

“저는... 백작님을... 지킬 뿐... 이에요...”

베티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슥 사라졌다.

숨을 참고 기척을 최대한 숨긴 것뿐인데, 나는 분명 그녀가 사라졌다고 느꼈다.

그렇게 사라진 베티아는 내 뒤에서 불쑥 나타나서 다시 검을 휘둘렀다.

슬금슬금 다가오던 그림자가 검날에 북북 찢겼다.

암살자 교육을 받고 있다더니, 이제는 정말 훌륭한 어새신이었다.

나는 사방으로 도망가려는 그림자들을 향해 불길을 쏘아 태워버렸다.

사람인지 아니면 마수인지 도무지 모를 그 녀석들은 뼈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재로 화해 사라졌다.

“이상한 놈들.”

“정오의... 그림자... 에요...”

베티아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걸 베티아가 어떻게 아는지도 그렇지만, 그 놈들을 이런 식으로 맞닥뜨렸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정오의 그림자라면 켈자르 백작의 병세를 아버지에게 알림으로써 원정 전쟁을 사실상 촉발시킨 정보단체.

그들은 영주들의 정보는 사고팔지만, 중앙의 정보는 절대 내놓지 않는 놈들이었다.

원래도 수상한 녀석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나를 노릴 줄이야.

“걱정... 마세요... 제가... 백작님을... 지킬... 거예요... 목숨을... 걸고...”

베티아는 단검을 역수로 들고 내 등에 자신의 등을 붙였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베티아가 정오의 그림자 놈들을 견제할 수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물론 베티아가 내게 충성을 바친다는 것도 확실하지.

그렇다면 베티아가 그림자를 견제하는 동안 다시 한 번 올드완과…….

“큭...! 쿨럭!”

문뜩, 참을 수 없는 토기가 목구멍을 간질인다. 나는 뒤로 엎어지며 뜨거운 피를 울컥 토해냈다.

달면서 비린 피냄새가 지독하게 입 안을 맴돈다.

뭐, 뭐에 당한 거지? 배신인가? 베티아가?

“백작님...!”

베티아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회색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베티아는 아니다. 눈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녀는 단검 하나를 던져버리고 내 등을 받쳐 세웠다.

나머지 한 손으로는 단검을 쥔 채 사방을 경계하고 있지만, 그녀의 주의가 내게 쏠린 게 누가 봐도 확연했다.

잠시 멀어졌던 그림자가 슬슬 이쪽으로 다가온다.

그 수가 하나, 둘, 셋, 넷... 종잡아도 열은 넘는다.

“아, 그렇지. 독인가…….”

그림자가 남긴 상처가 화끈거린다. 거기에 독이 담긴 게 틀림없다.

이데트 누이를 중독시킨 것과 같은 강독이겠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터지려다가 분통이 먼저 터졌다.

“이게 늙은이가 말하던 명예인가! 명예니 개좆이니 떠들어대다가 독을 써!”

나는 더운 피를 울컥 토해내며 소리쳤다.

그 바람에 피거품이 입술 가로 번졌고, 베티아는 입을 가만히 벌린 채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면서도 열심히 내 입가를 닦아주었다.

올드완은 비스듬하게 고개를 숙인 채 내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도 수치심을 느끼는지 흰 눈썹이 구부린 송충이처럼 되어있었다.

“그것들은... 내 명을 듣는 것은 아니다.”

“그걸 변명이라고... 쿨럭!”

“그래. 나를 욕하여도 좋다. 허나 이 모든 것은 폰세르크 국왕 전하와 다키아 왕국을 위한 것이다.”

“의니 명예니 떠들어대는 것들이 그렇지, 뭐. 욱... 푸훅... 그들의 정의는 언제나 더러운 냄새를.... 윽... 풍기고 다니면서... 후욱... 남들에게는 그것이 대단한 것인 양 자랑하고 다닌단 말이야... 쿠후훅...!”

베티아는 맑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다가오는 올드완을 향해 단검을 치켜세웠다.

하지만 나와 아우럼 마법사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병무대신을 베티아가 어찌해 볼 수 있을 리가.

멀리서 파샨이 도련님! 도련님! 하고 소리치지만 검은튤립 기사들은 이때다 싶어 그녀를 몰아붙이고 있다.

내 쪽으로 정신이 팔린 파샨을 향해 검격이 쏟아진다.

멍청이 같으니. 네 쪽이나 신경 쓰란 말이야, 라는 말이 입술에 쩍 붙어서 떨어지질 않는다.

몸이 으슬으슬 춥고 손발 끝이 달달 떨린다. 눈이 자꾸 감기려 한다.

이렇게 죽는 건가.

독에 취해서, 허무하게.

억울하다. 억울해서 죽을 수가 없다.

나는 혀를 씹어 새로이 피를 내어서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렸다.

올드완은 딱하다는 듯이 베티아의 품에 안긴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우럼 마법사들은 무얼 하고 있나 돌아봤는데, 아우럼 백작을 들쳐 메고 허겁지겁 도망치고 있었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가주를 먼저 챙기기로 한 모양인데…….

그들로서는 상당한 위험을 무릅쓰고 이제껏 함께 싸워준 것이니 지금 도망간다 해도 탓할 수는 없겠지. 좀 좆같기는 하지만.

올드완은 내게 검 끝을 겨눈 채 말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나?”

“가족...”

“가족? 반역자의 가계는 멸문이 원칙이나, 마법사의 피는 귀한 것이니. 그대의 누이들은 살 것이다.”

“아니... 네 가족들... 남자는 모조리 죽이고... 여자는 전부 따먹고 말겠어... 크크크... 푸훅...!”

올드완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군. 레시아르의 탕아라는 소문이 옳았어.”

“네 엄마도... 무덤에서 꺼내서... 따먹어 주마... 크훅...! 크훅!”

“귀족으로서의 기품은 없나. 하긴, 이런 상황에서 기품을 찾는 것도 뭐하군. 더 추해지기 전에 보내주겠소. 바이스 레시아르, 화석의 마법사여.”

올드완은 검 끝을 내게로 천천히 내렸다.

베티아는 단검으로 그의 검을 쳤지만, 오히려 단검이 깨졌다.

“절대... 안 돼...!”

베티아는 검 끝을 맨 손으로 잡았다. 올드완은 눈을 크게 뜨긴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검이 그녀의 살을 자르며 내려감에 따라 베티아의 손은 찢어지다 못해 거의 너덜너덜해져서 갈라지기 직전까지 갔다.

“……!”

베티아는 고통보다도 증오와 저주가 담긴 시선으로 올드완을 노려보았다.

선인장 같은 올드완조차도 조금 놀라서 주춤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검을 내리 찔러, 결국 내 갑주를 뚫었다.

나는 올드완이 내 가슴을 가르는 것을 느끼고 베티아에게 명령했다.

“베... 티아. 푸훅...! 거, 검에서... 손... 떼.”

“백작님... 저는...”

“손 떼... 흐윽... 뒤로 물러나... 명령이다.”

“저는...! 백작님과...!”

“너는...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든... 윽... 여전히... 내 노예다... 명령에 따라!”

피거품을 물면서 또박또박 말하자, 베티아는 회색 눈동자 안에 내 얼굴을 담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알겠... 습니다... 제 추악한 몸과... 열등한 영혼과... 모든 것의 주인님...”

베티아는 떨어지기 직전의 달랑달랑해진 피투성이 손을 가슴으로 받친 채 뒤로 물러났다.

올드완도 그녀를 죽이기는 뭔가 부담스러운지 베티아가 물러나도록 내버려두었다.

“무서운 여자로군.”

“베티아는... 수많은 내 여자들 중... 하나일... 뿐이야...”

“그녀들이 복수라도 해줄 거라고 생각하나?”

“그럴... 리가... 내 복수는... 내가 한다... 이 빌어먹을 노인네야...!”

나는 베티아의 피가 뚝뚝 흐르는 칼날을 턱하고 잡았다.

아파 죽을 것 같다. 베티아는 이런 걸 어떻게 제 정신으로 잡은 거야?

하지만 이걸 놓으면 죽는다. 나는 살고 싶다.

“노예를 따라하려는가? 갑자기 죽음이 두려워진 모양이군.”

올드완은 나를 비웃었다.

나도 그를 비웃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어. 이 노인네야.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겠지.”

“무슨... 큭...!”

화르륵.

올드완의 칼날을 따라 불길이 차올라, 그의 몸을 덮쳤다.

제로거리에서 뿜어낸 화염. 내가 검을 잡고 있기에 올드완은 피하거나 벨 수도 없다.

불꽃은 올드완의 검을 가교 삼아 격렬하게 춤추며 올라가더니, 올드완의 머리와 목에 옮겨 붙었다.

“크하악!”

올드완은 괴로워하며 검을 움직이려 했지만, 나는 손이 갈라지는 걸 감수하고 칼날을 잡았다.

파샤샥!

기회를 노리던 그림자들이 뒤늦게 나를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내가 죽음을 각오하고 피워낸 불꽃을 뚫어낸 자는 없었다.

놈들은 내 근처에도 오지 못하고 줄줄이 녹아내리다가 재가 되었다.

하지만 역시 병무대신은 이런 잡스러운 놈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불길 속에서 전의를 더 불태웠다.

“이 역도 놈이...!”

올드완은 불길에 휩싸여 흰 수염을 거멓게 태우면서도 내 가슴에 박힌 칼날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

반대로 나는 기를 쓰고 칼날의 각도를 바꾸려 힘을 주었다.

이걸 빼내거나 쳐내는 건 기대도 안 한다. 그냥 심장만, 심장만 피하면 된다.

나는 계속 화염을 뿜어내면서 칼날을 잡고 옆으로 비틀었다.

“으그극...”

다키아 왕국 제일의 기사에게 내 완력쯤은 우습겠지만, 지금 그는 초고열의 화염을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불타고 있는 상태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각도를 비틀도록 밀고 당겨서...

푸욱...

칼날이 갈빗대를 가르고 살을 파고들게 한다.

피가 위로 푸슛 튀겼다가, 불꽃에 증발하여 사라진다.

하지만 내 몸에 가득 찬 마력은 사라지지 않고 심장 바로 옆에 박힌 칼날을 타고 올라 올드완의 몸을 태운다.

“으흐흐흐흑.”

올드완은 울듯이 웃었다.

다 죽인 놈이 자신을 지옥 길동무 삼으려니까 화가 나고 어이가 없겠지.

그의 눈썹과 눈알, 입술은 검게 타서 없어졌기 때문에 곧 표정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일자로 악 다문 치아가 드러난 게 끔찍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기괴한 생명력으로 내게 칼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크흐흐흐흐.”

나도 웃음과 울음이 터진다.

뭐가 좋아서 이런 빌어먹을 노인네와 껴안고 지랄을 해야 한단 말이냐고.

올드완은 칼날을 비틀어서 내 심장을 가르려 하고, 나는 그것을 칼날을 꽉 잡은 채 불길을 더 키웠다.

나도, 올드완도 서로가 먼저 죽기만을 기다리며 굼뜨게 서로의 무기를 박아 넣는 멍청하고 한심한 결투다.

누가 먼저 죽든 간에, 그 뒤를 다른 이가 따라갈 것은 분명했다.

죽음의 교착상태.

그 지루한 대치극을 깨뜨린 건 당당한 여장부의 외침이었다.

“병무대신과의 싸움은 비긴 듯하군! 레시아르 백작! 병무대신과 그대 모두 다키아 왕국의 동량(??)이니, 어느 한쪽이 죽기 전에 이만하고 서로 물리는 게 어떤가!”

이런 개싸움 도중에 누가 뭐라 하든 신경 쓸 여유가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나는 그 허스키한 목소리에서 묘한 끌림을 느꼈다. 그건 올드완도 마찬가지인지, 나와 그는 거의 동시에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은빛 갑주를 입은 여자가 말 위에 올라탄 채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어깨까지 간신히 닿는 새빨간 머릿결은 피와 먼지로 약간 떡져 있지만 전신에서 흘러넘치는 당당한 분위기는 그녀가 고귀한 신분임을 짐작케 했다.

그녀의 적보라색 눈동자는 집채만 한 불길을 뚫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지?

“나는 폰세르크 국왕전하의 장녀인 카산드라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공주 전하란 말인가. 그런 귀하신 분이 여긴 왜?

“무익한 싸움을 멈추고 서로 간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온 것이다! 허나 그대가 쉽사리 나를 믿을 수는 없겠지! 그러니 우선 내가 호의의 표시로 기사들을 물렸음을 확인하라!”

듣고 보니 정말로 그랬다. 어느새 검을 부딪는 소리는 사라져 있다.

파샨을 죽일 듯 몰아붙이던 검은튤립 기사들은 모두 검집에 검을 담은 채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내 수하들은 그들과 스무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서 간신히 숨을 돌리며 상처를 치유하고 있다.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면 병무대신을 먼저 물리겠다! 병무대신! 폰세르크 국왕 전하의 장녀로서 명한다! 레시아르 백작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당장 물러나도록 하라!”

올드완은 무어라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혀가 녹은 건지 알아듣기는 힘들었다. 그렇지만 공주가 다시 한 번 명을 내리자, 검에서 손을 딱 떼었다.

그는 뻥 뚫린 눈알의 빈자리로 나를 노려보더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면서 불길 속을 빠져나갔다.

방금 전까지 죽어라 싸우던 상대에게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다니.

저 노인네 뒤통수에 마법을 갈기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테지만...

“보라! 그리고 병무대신과 기사들을 물렸음을 확인하라!”

카산드라 공주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내게 계속 말을 걸었다.

그녀가 뭘 원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그녀의 뒤에 시중을 들듯이 서 있는 젊은 남자는 물과 얼음의 마법사.

내가 기력이 넘칠 때조차 그다지 상대하고 싶지 않은 상극의 마법사인데.

하물며 다 죽어가는 지금, 그녀가 원하기만 한다면 내 목을 치고, 연합군을 패주시키는 것 따위는 일도 아니겠지.

완전히 우위에 선 그녀가 이렇듯 호의를 보이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을... 원하지...?”

“휴전!”

공주는 걸걸한 목소리로 경쾌하게도 말했다.

“레시아르 군과 왕국군이 서로 적대행위를 멈추고 일주일간 휴전하기를 원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레시아르 군이... 아니라... 푸훅... 연합군... 이다...”

“미안하게 됐군! 허나 명칭이 어떠하든 상관없다! 나는 무조건적인 휴전을 원할 뿐이다!”

“정말... 아무런... 조건이 없다고...?”

“물론! 이는 믿어도 좋다! 왕실의 명예를 걸고 약속할 테니까!”

왕실의 명예.

지금은 그것만큼 믿기 힘든 것이 없기는 하지만…….

내게는 달리 선택권이 없다.

강독이 몸 전체로 퍼지는 게 느껴진다. 게다가 올드완의 검은 여전히 내 심장 바로 옆에 깊숙이 박혀 있다.

“제안을... 받아... 들이겠다.”

"그대의 결단에 감사를 표하지! 좀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아직도 전장 한편에서는 무익하게 칼을 맞대고 있는 자들이 있는지라!"

공주는 한 쪽 눈으로 윙크를 보내고는 부하들과 함께 등을 돌려 멀어져갔다.

올드완은 검은튤립 기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그 뒤를 따라가다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연기가 나오는 공허한 눈구멍이 잠시 나를 향했지만, 오래 가진 않았다.

그 또한 공주의 뒤를 따라 사라져갔다.

"백작님!"

"도련님!"

베티아와 파샨이 허겁지겁 달려와 내 몸을 살폈다.

"쿠훅... 큭, 거기, 검을... 크흐흐흑!"

"도, 도련님! 조금만 참으세요! 이이입...!"

파샨은 올드완의 검을 힘껏 잡아당겨 뽑아냈다. 불로 지져서 피를 멈추기는 했지만 가슴 한쪽이 뻥 뚫린 건 어쩔 수가 없다.

독은 독대로 퍼지고, 마력은 마력대로 피와 함께 흘러나오고 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나는 입 안을 메우는 침을 뱉어가면서 급히 지령을 내렸다.

"체닐린... 타라에게 기사를 보내서... 상황을 알리고... 휴전 소식을 전파시켜라... 경계 태세는 유지하라고... 하고... 파샨은... 급히 저택으로 가서... 이데트 누이에게 준... 황금 사과와 술... 남은 게 있으면 가져오고... 없으면 화리메를... 데려 와... 베티아... 친위대원 중에 내가 모르는 어새신이 또 있어...?"

"네... 백작님..."

"그걸 왜 지금까지 보고 안 했는지는... 쿨럭! 지금 따질 건 아니고... 여하튼... 그들하고 같이 가서... 연합군 귀족 중에... 수상한 놈들... 있으면... 전부 죽여..."

베티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숙이고는 친위대원 몇과 함께 사라졌다.

파샨이 조금 놀란 걸 보면, 친위대장인 파샨조차도 모르게 숨겨왔다는 얘긴데. 그래도 내게 충성을 바치는 건 변함없는 듯하니 이건 지금 손 댈 문제는 아니고.

"도련님! 차라리 제가 모시는 게...!"

"푸흑! 아니... 독... 해독하려면 네 역할이... 더 중요해... 어서... 가...!"

파샨은 울먹이면서도 나를 구하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갔다. 여기서 저택까지 갔다 오려면 아무리 서둘러도 며칠은 걸리겠지.

그 동안 정신줄을 꽉 붙잡고 있어야 하는데.

내가 혼절이라도 하면 이 수상한 상황을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릴 수가 있다.

연합군 내에는 중앙과 연통하는 자가 있고, 병무대신 올드완은 결국 살아서 돌아갔으며, 아우럼 백작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조차 없고, 그 와중에 공주가 내민 휴전 제안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으니.

어찌됐건 연합군의 총대장인 내가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한다.

이리저리 사람들을 보내고,내 옆에 남은 것은 이제 체닐린과 호위기사 셋, 친위대원 둘 뿐.

나는 점점 더 독해진 환각을 이겨내려 애쓰며 체닐린에게 손을 뻗었다.

"체닐린... 가자... 쓰러지더라도 지휘막사로 가서 쓰러져야..."

체닐린은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검을 내게 겨누었다.

"바이스 레시아르. 나는 너에게 복수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 권리를 바로 지금 행사하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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