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수상한 휴전
* * *
“그래서... 그 검으로... 다 죽어가는... 날... 쿨럭! 찌를... 거냐...?”
울컥 치솟는 피를 옆으로 토해내며 물어보자, 체닐린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럼 그렇지.
나는 한숨을 삼키고는 반쯤 찢어진 손을 내저었다.
“떼쓰지 마라... 네 장난에... 어울려 줄... 시간도... 기력도... 없으니까...”
“그렇지만! 들었어! 들었단 말이다! 언니가 마이포흐 남작이 된 이유!”
지금껏 모르고 있던 게 더 놀랍다.
지난 카르마시아 전투에서 켈자르의 깃발 아래 참전한 마이포흐 가문의 남자들은 전부 죽었다.
아니. 그 소식을 들은 마이포흐 부인까지 심장마비로 죽었으니까 정확히는 가문이 텅 빈 거지.
마리안과 체닐린 두 자매만 빼고.
마리안이 마이포흐 남작이 된 건, 당연히 공도 공대로 세웠기 때문이지만, 일차적으로는 마이포흐 가문의 남자들이 싹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리안 성격에 그걸 체닐린에게 말하진 않았을 테지. 오히려 숨기려고 했을 거고.
마리안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마이포흐 남작가의 몰살을 체닐린에게 말해주었을 거다.
마리안을 따라온 켈자르의 시종인들 중에 중앙에 연을 댄 자가 있었나.
그래서 체닐린은 격동시켜 차도살인이라도 하려 했다고.
우습지도 않군.
나는 입 안에 차오르는 핏물을 퉤 뱉고 말했다.
“그래... 마이포흐의 귀족들은... 전장에서 죽었다... 앞서 싸우다가... 가슴팍에 칼을 맞고 죽었지... 그런데... 정작 살아남은 너는... 만신창이가 된... 내 등에... 칼을 꽂겠다고...?”
“너는 내 원수란 말이다!”
“너는... 그 원수를 위해... 검을 들어왔다.”
“그건...!”
“마리안이... 퍽이나 즐거워하겠군... 제 동생이... 한때나마 모셨던... 주인의 등에... 칼을 꽂는 걸 알면... 말이야...”
서로에게 서로를 위해 약점이 된 자매.
체닐린은 의젓한, 그러나 마리안을 닮아 단정하게 예쁜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울상을 짓다가 검을 내팽개쳤다.
“기사는... 검을 던지지... 않는다... 주워...”
“싫어!”
“애처럼 떼쓰지 말라고... 했다... 너는 이제 나의 검이다... 검을 주워!”
“... 으흑...”
체닐린은 입술을 앙 물고 울음을 참았다.
남은 호위기사와 친위대원들은 그 틈을 타서 슬금슬금 체닐린의 뒤로 돌아갔다. 기회를 보아 불충한 호위기사장의 목을 칠 생각이겠지만.
나는 그들에게 눈짓을 보내 물러나라고 전했다.
체닐린이 끝내 나와 대적하겠다면, 이 상황에서는 그녀를 죽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그러지 않을 거란 걸 안다.
체닐린은 명예를 아끼는 기사고, 언니를 존경하는 동생이고, 저택 메이드인 유리와 데이지의 친구이자,
무엇보다도 이미 내게 애정을 품고 있는 여자니까.
체닐린은 등을 돌려 어깨를 들썩이며 잠시 울다가, 검을 주워 검집에 넣었다.
눈시울과 코끝이 빨개진 게 귀여웠다. 키 큰 여자가 귀여운 것도 매력적이란 말이야.
흐뭇하게 웃다가 갑자기 손발이 덜덜 떨려서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통증이 몰려왔다.
체닐린은 내게 달려와 이마와 가슴을 만지며 증상을 살피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 뭐라 할 말이 없다. 돌아가면 처벌을 달게 받겠다.”
“자지로... 귀싸대기... 오백 번 형이다...”
“천박한 말을 하는 걸 보니 죽지는 않겠어.”
체닐린은 코를 훌쩍이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나를 들쳐 업었다.
원체 키가 큰 여자라 업혀도 발이 끌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친위대원들이 좀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그들에게 이번 일을 묻으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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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님!”
타라는 너덜너덜해진 내 몰골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어쩌다가...”
“부관님. 일단은 백작님을 막사로 모셔야죠.”
“아, 그, 그래요.”
이오시스의 말에 타라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체닐린에게서 나를 받아들어 막사 안의 침대에 눕혔다.
나는 베게를 높여주는 타라에게 손을 휘저었다.
“상황은...? 보고부터... 해...”
“백작님. 일단 휴식을 취하시고...”
“어서.”
“알겠습니다. 우선은 휴전소식이 전파되면서 적과 아군 모두 각 진영 쪽으로 물러나고 있습니다. 산발적으로 교전이 벌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해가 지기 전까지는 소규모 교전도 정리될 걸로 보입니다.”
무슨 함정을 파놓은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일단 휴전 자체는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그 휴전의 경위는 수상쩍기 그지없다.
올드완이 나와 동귀어진했다면 중앙군은 어렵지 않게 연합군을 궤멸시킬 수 있을 텐데. 전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굳이 휴전을 제의한 저의가 있을 거다.
“카산드라 공주의... 흉중을... 파악해야 한다...”
이오시스가 바로 나서서 그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녀 혼자서는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인데. 그야말로 직속으로 부리는 기관이 있지 않고서야.
나는 슬쩍 운을 띄웠다.
“친위대원 중에... 어새신이 있더군... 누가 보고도 올리지 않고... 사조직을 만들었나...?”
이오시스가 어색하게 입가를 끌어올렸다.
“백작님.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상황이 복잡해져서 바로 말씀드리지 못한 건 제 불찰이지만, 정말로 숨기려고 한 건 아니에요.”
이오시스는 공명심 때문에 공을 세울 때까지 어새신 조직의 존재를 비밀로 했다며 해명했다.
베티아가 친위대원에 녹아들어가 있지 않았다면 이번 싸움에서 내 목숨이 위험했을 테니, 그녀도 나름대로 공을 세운 건 틀림없는 사실.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어새신 조직을 주군인 내게 숨긴 건 죄가 크다.
이오시스도 제 죄는 아는지, 그 조직의 비밀을 술술 털어놓았다.
조직의 이름은 ‘자정의 여명’
명칭부터가 정오의 그림자와 맞서는 대항조직임을 암시하고 있고, 실제로 그러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충성심 높은 부하들을 각 기사단, 친위대, 보병대대 등에서 뽑아서 따로 훈련시켰다고 한다.
베티아가 그 중 하나였고.
충성심 높은 자를 따로 편성했다면서 정작 그 존재가 내게 숨겨진 게 이상하긴 한데.
이오시스는 타라와 함께 내 최측근이니까, 그녀가 하는 일에 의심하는 자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암중혈투를 통해 레시아르 령 내의 정오의 그림자 정보원들을 밀어내고, 중앙의 간첩들을 솎아냈으며, 반대로 역공작을 가하기도 했다고 한다.
듣고 보니 유용하긴 하겠지만 퍽 위험한 조직이다.
무엇보다 이런 조직을 만드는 데에 집사장 뮌의 손이 닿지 않았을 리가 없다.
“지금까지 그 존재를... 숨겨왔다면... 네가... 사병으로 쓰려던 거... 아닌가...?”
“배, 백작님! 절대 아니에요! 제 충성을 믿어주세요!”
이오시스는 정색하며 두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측근이었던 집사장 뮌의 손녀인데다가, 나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독자적으로 마더 하이브를 수색한 전적도 있다.
가문의 복권을 위해 따로 꿍꿍이를 꿰찼다고 보기엔 충분하다.
그게 내게 반기를 들 정도는 아니더라도, 중앙과 전쟁 중인 지금, 몹시 거슬리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거슬린다고 당장 이오시스를 쳐낼 수도 없다.
지금도 독기가 올라와서 머리가 흐물흐물해질 것 같은데, 만에 하나라도 내가 혼절하게 된다면 연합군을 맡길 건 타라와 이오시스 밖에 없으니.
일단은 신임하고, 보고를 게을리 한 벌은 나중에 생각하는 수밖에.
“공주를 조사하는 일은... 맡기지... 하지만... 잘 해내야 할 거야.”
“오,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백작님!”
이오시스는 전에 없이 바짝 군기가 든 자세로 경례를 올리고 막사를 빠져나갔다.
눈치 빠른 친위대원 둘이 그녀를 감시하듯 따라붙었다.
“타라... 이오시스는 머리가 좋지만...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는 여자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절대로 그녀에게 전권을 주어서는 안 된다...”
“... 알겠습니다.”
“피해상황... 마저 보고 해...”
타라의 안색이 좀 어두워졌다.
“보병은 이만 이천 명 중 팔백 명만 복귀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중상자가 많습니다. 마력병은 그래도 절반이 복귀했습니다. 사향노루 기사단과 연합군 귀족들 중에서는...”
“그들은 됐어... 레시아르 군 위주로... 백, 적여우 기사단은... 어찌 됐나?”
“적여우 기사단은 기사 백 명 중에서 마흔 명이 복귀했고, 백여우 기사단은...”
타라는 입을 몇 번이고 뻥긋하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전멸... 입니다...”
“... 오록스 단장은?”
“수색 중이지만... 아직...”
나는 타라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타라...”
“배, 백작님! 제게 사과하실 필요는!”
“아우럼 백작의 대마법은... 올드완과 검은튤립 기사단을... 한 곳에... 묶어두어야...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오록스 단장은... 그걸 알면서... 가장 위험한 임무에... 자원했다...”
“그건 아버지가 원한 일입니다! 아버지는 레시아르를 위해 충정을 바치신... 바, 바치신 겁니다!”
타라는 애써 당당하게 말하려 했지만, 그녀의 아랫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청초한 얼굴이 일그러진 모습은 양심 없이 이번 생을 살아 온 내게도 죄책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되짚어보면 오록스는 나를 백작위에 올린 공신이면서도 정작 그에 알맞은 보상을 받은 적이 없다.
마티란 자작은 내 첩실이 되었고, 부게른 남작은 봉신 중 이인자로 올라섰으며, 파샨은 친위대장이 되었음에도 오록스는 정변 전에도 후에도 그저 백여우 기사단장이었을 뿐.
내심 불만을 가질 법도 한데 오록스는 내게 묵묵히 충성을 바쳤다.
그런 그에게 정당한 보상을 내리지 않은 건, 주군으로서 실책이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띄엄띄엄 고백하듯 타라에게 말했다.
“오록스 단장은... 그럼에도... 언제나... 내 명에 따랐다... 그래서... 그의 충정을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걸지도... 그가 공을 세우고... 돌아올 것이라고... 당연하게 여긴 것이다... 어찌됐든 내, 내 실책이다... 미안하다.”
타라는 몇 번이고 손으로 얼굴을 덮어 마른세수를 하며 울음을 숨겼다.
나는 그녀가 울음을 그치기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그래도 타라는 금방 씩씩한 얼굴을 드러내고는 내게로 말을 돌렸다.
“백작님……. 일단은 뭐라도 드셔야 합니다. 마력을 소모하신 만큼의 영양은 섭취하셔야…….”
“내가 지금... 뭘...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이젠 씹을 힘도 없다. 말을 많이 하면 독이 더 빨리 퍼진다든가.
벌써 손발이 굳어서 움직이질 않는다. 이대로 더 있으면 이데트 누이처럼 식물인간이 되고 말 테지.
그 전에 파샨이 해결책을 들고 와야 할 텐데.
“일단... 아마트리체 영애를... 데려 와.”
“알겠습니다. 백작님.”
타라는 이유는 묻지도 않고 병사를 보냈다.
나는 떠나가는 병사의 모습이 흐릿해지는 걸 느꼈다.
“으프...”
눈이 자꾸 감긴다. 이대로 자면 다시는 못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혀를 집고 이를 갈아대며 버티려고 애를 썼다.
그러자 타라는 내게 모포를 가슴팍까지 올려서 덮어주고는, 바구니 안에서 연두색 사과를 꺼내 그것을 베어 물었다.
아삭아삭.
타라는 입을 손으로 가린 채 턱을 바삐 움직였다.
배가 많이 고팠나. 내 앞에서 갑자기 사과를 먹을 줄은. 타라가 이런 모습을 보일 줄은 예상치 못해서 좀 당황스럽다.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타라를 지켜보려는데, 그녀는 갑자기 허리를 숙여 침대 맡으로 얼굴을 가져다댔다.
뽀얀 우유 같은 피부에 투명한 눈동자가 가까워진다.
그녀는 점차, 점차 가까워지더니 이내 내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포개었다.
“읍...”
잘게 씹은 사과 과육과 타라의 타액이 뒤섞여 새콤달콤하면서 뜨뜻미지근한 죽 같은 것이 내 입 안으로 들어온다.
좀 당황스러웠지만,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타라에게 무어라 할 수도 없고.
뭣보다 타라는 눈을 꼭 감고 있다.
윤기 나는 백발이 내 뺨 위로 흘러내려서 조금 간지럽다.
나는 조용히 타라가 씹어준 사과를 아기 새처럼 받아먹었다.
타라는 잠시 내게 사과를 씹어 넘겨주다가 입을 떼었다.
그리고는 다시 사과를 베어 문다.
아삭아삭.
사과를 씹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린다.
타라는 내게 입을 맞추어 잘게 씹은 사과죽을 조금씩 혀로 밀어서 넘겼다.
“으음...”
타라는 그렇게 몇 번이고 내게 사과를 씹어 먹여주었다.
먹고 나니 아주 약간이지만 기력이 돌아오는 듯하다.
그게 사과 때문인지, 타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내 입술을 손가락으로 닦아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작님. 감사합니다.”
“감사... 하다니...?”
“아버지는... 언제나 기사였습니다.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검을 휘두르는 기사. 그러니 백작님께서 아버지의 죽음이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고 하신다면... 저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것이 충성의 길, 아버지가 걸어 온 그 길이었으니까. 아버지의 길을 딸인 제가 부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까.”
타라는 잠시 말을 쉬었다가 내 입술을 살짝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백작님께서 제게 사과해주셔서... 아버지의 희생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지 않아주셔서... 기사단장과 부관이 아니라 아버지와 딸로 대해주셔서... 제가 아버지를 애도할 수 있게 해주셔서... 저는 그것이 감사합니다.”
타라의 감사를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충성의 무게를 나는 잘 모르니까.
하지만 아까운 사람을 잃었다는 아쉬움과, 그 사람의 딸은 잃지 않겠다는 다짐만은 내 안에서 뚜렷이 굳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 눈빛을 받은 타라는 후다닥 도망치듯 막사를 나갔다.
“그, 그럼 저는 적 동태를 확인하러 잠시 나갔다오겠습니다.”
“흐...”
묘한 웃음을 삼키다보니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미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뜨겁다 못해 쿡쿡 찌르는 듯한 것이었다.
“쿨럭, 쿨럭! 쿠우욱...!”
타라의 간호로 잠시 고통을 잊기는 했지만, 몸 상태는 여전히 만신창이다.
올드완과 싸우느라 마력을 잔뜩 쓴데다가 피를 흘리면서 마력도 같이 흘려버렸다.
가뜩이나 부족해진 마력은 정오의 그림자가 쓴 강독으로 시시각각 오염되고 있다.
파샨이 해결책을 구해 올 때까지 버티려면, 독을 해독하지는 못하더라도 중화는 해야 한다.
이미 체내에 들어온 독을 묽게 만드는 방법은...
“수혈(?血)이란 거군요!”
어느새 지휘막사 안으로 들어온 아마트리체가 눈을 밝히며 말했다.
보병들이 죽어나갈 때는 구역질하고 난리를 치더니, 그래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겨 기쁜 모양이다.
“백작님께 제 마력을 섞는다는 거죠?”
아. 이 아가씨는 수혈을 그런 의미로 받아들인 건가.
타고난 피로 마력량이 결정되는 세계.
피는 근원이고, 능력이며, 아주 내밀한 것이기에, 피를 주고받는 수혈은 상당히 선정적인 행위였다.
영애들이 읽는 연애소설에서는 수혈을 섹스의 은유로 표현하기도 하던데.
이걸로 아마트리체가 착각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수혈은 물론이고 동혈, 은혈로도 내 마력량을 보충하기에는 부족할 테니까.
그런 저급한 피는 통째로 들여놓아도 강독의 농도를 조절할 수 없을 거고.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 금혈은 아마트리체 뿐이고. 그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겠지.
“부탁...”
“맡겨만 주세요!”
정작 아마트리체는 수혈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손을 걷어붙이고 나선 건, 여전히 핼쑥한 안색의 마리안이었다.
귀부인으로서 근 십 년 가까이 일가의 대소사를 챙겨온 마리안은 은근히 아는 게 많았다.
“아마트리체 영애께서는 이쪽 침대에 누워주세요. 조금 높일게요. 레시아르 백작님은 아래쪽 침대로.”
마리안은 불에 살짝 달군 쇠침으로 나와 아마트리체의 팔 안쪽에 작은 구멍을 내고는, 그 사이를 속이 빈 갈대로 연결했다.
곧 아마트리체의 팔에서 내 팔로 갈대를 타고 피가 옮겨가기 시작했다.
“아핫... 제 피가 백작님과...”
아마트리체는 마리안을 흘낏흘낏 보면서 은근히 도발했지만, 마리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갈대를 들었다가 내렸다가하면서 혈액이 넘어가는 속도를 조절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다행히 아마트리체의 피가 넘어오면서 조금은 몸이 편해지는 듯했다.
이제는 파샨이 올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된다.
나는 매 여섯 시간 단위로 아마트리체에게 수혈을 받았다.
갈수록 아마트리체가 빼빼 말라가고, 그 사이 마리안의 시종 중 하나가 변사체로 발견되어 난리가 나고, 체닐린이 조용히 피 묻은 검을 숨기기는 했지만, 그 외는 별 다른 사건 없이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이틀 정도 버텼을까.
이오시스가 낭패한 표정으로 보고를 올리러 왔다.
“백작님. 카산드라 공주가... 직접 병문안을 왔다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