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79화 (79/166)

〈 79화 〉 수상한 휴전

* * *

이오시스는 카산드라 공주의 의중을 파악해내지는 못했다.

다만 그녀가 생각보다 우호적인 태도를 보일 수도 있다고 귀띔을 하긴 했는데…….

그건 그다지 도움이 되는 정보는 아니었기에 이오시스는 잔뜩 풀이 죽어 어깨를 옴츠렸다.

“헌데 병문안이라니, 그건 카산드라 공주가 이미 백작님의 상황을 알고 있다는 뜻 아닙니까?”

타라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오의 그림자가 중앙의 지령대로 행동하는 것이 거의 확실하니, 내가 강독에 당했다는 사실을 공주가 아는 거야 당연하다.

내 상황을 압박하듯 굳이 병문안이라는 표현을 쓰는 게 아니꼽긴 하지만, 공주 입장에서도 무언가 원하는 게 있으니 이렇게 직접 찾아왔겠지.

“이유가 무엇이든 공주를 오래 세워둘 순 없어요. 돌려보낼 것이 아니라면 들여야 해요.”

마침 수혈 상황을 체크하러 왔던 마리안이 말했다.

“이미 전쟁까지 한 사이인데, 굳이 공주를 들일 필요가 있을까요?”

아마트리체는 부정적인 입장이었지만, 그렇다고 휴전을 제시한 공주를 그냥 보내기는 어렵다.

뭣보다도 공주의 의중을 파악하기에는 아주 좋은 기회다.

나는 고심 끝에 타라와 마리안이 공주를 맞이하도록 했다.

공주가 내 상황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침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꼴까지 보이는 건 영 좋지 않을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대신 천을 커튼처럼 둘러 막사 한쪽에 내 몸을 숨기고 회담을 엿듣을 생각이다.

결정대로 내 침상을 잘 숨기고 잠시 기다리자니, 곧 카산드라 공주가 타라, 마리안과 함께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들은 각기 인사를 마치고 의자를 끌어 자리에 앉았다.

“레시아르 백작이 보이지 않는군. 병세가 깊은 모양이지?”

카산드라는 대뜸 정곡을 찔렀다.

타라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지만, 마리안은 능숙하게 공격을 돌렸다.

“병세라니요... 고귀한 금혈귀족의 존체는 병세에 침탈되지 아니함을, 공주께서도 익히 알고 계실 텐데요.”

“하! 강독을 만들었음을 탓하려는가. 마이포흐 남작.”

공주는 의외로 시원하게 강독의 존재를 인정했다.

하지만 마리안은 더 몰아붙이지 않고 찻잔을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냈다.

결국 카산드라 공주가 다시 말을 이어 붙여야 했다.

“그걸 명예롭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공주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시려는 건가요?”

카산드라 공주는 탁자를 손톱으로 톡톡치다가 말을 돌렸다.

“연합군 내에서도 정무대신과 내통한 자들이 있었다. 물론 그대들도 잘 알고 있겠지. 그들은 중앙에 대적하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 여겼어.”

“그 이야기를 어찌...”

“사람이 모이면 의견이 나뉘기 마련이다. 그것은 서북연합과 중앙이 서로 다르지 않다. 중앙에서도 모두가 의견을 같이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중앙에서도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공주는…….

“물론, 나는 이번 전쟁이 무익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직설적으로 말하지. 이번 전쟁은 아바마마의 과욕과 초조함 때문에 벌어졌다.”

카산드라 공주는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게 말했다.

“아바마마는 늘 제국의 전제왕권을 부러워하셨다. 전하께서는 왕가는 금혈을 넘어선 신혈(?血)로 이어지며, 뭇 귀족들이 그 앞에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건 아바마마의 독단일 뿐이지. 나는 아바마마를 말리려 했지만, 아바마마는 듣지 않으셨다. 오히려 정무대신과 내 오라비들의 부추김에 넘어가 지독한 협잡을 꾀하기 시작하셨지.”

중앙의 권력과 재력으로도 십 년 넘게 준비한 그 철저함에는 나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아우럼 백작가와 비밀리에 손을 잡아 금혈귀족까지 중독시킬 강독을 만들고, 하이브를 양산해 마수를 풀어놓았다.

“그 여파로... 그대들이 검을 쥐고 여기 서 있게 된 것이지. 왕가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그대들만이 아니다. 남방의 귀족들은 납세를 거부하였고, 동방의 영주들은 용병들을 모집하고 있다. 무엇보다 북방의 변경백이 그의 아들과 내 동생인 유페리아 공주와의 약혼식을 미루겠다고 선언했다.”

역시. 중앙의 만행은 누가 보아도 선을 넘었다.

시기의 문제일 뿐이지, 다들 주먹을 치켜들고 일어설 것이 분명했다.

“허나 그대, 서북방의 영주들은 너무 빨리 일어섰어. 레시아르 백작이 지나치게 영민했던 것이 문제였던 것인지도 모르지. 다른 지역의 영주들은 사태파악에 급급할 때, 그는 홀로 진상을 꿰뚫어 보고, 지역의 영주들을 규합한 후에 병사를 일으키기까지 했으니. 아바마마는 각 지역의 영주들을 분열시켜 서로 의심케 할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레시아르 백작이 진상을 왕국 전역에 알린 탓에 계획이 완전히 비틀려버렸다.”

“저희가 밉보였다는 건가요?”

마리안의 물음에, 카산드라 공주는 얕게 한숨을 쉬었다.

“그대들을 징벌하려는 데에는 그런 감정적인 면도 있겠지만 실리적인 면도 있다. 중앙으로서는 다른 지역의 영주들에게는 양보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검을 거꾸로 쥔 서북방의 영주들에게는 본보기를 보여주지 않을 수 없다. 반란을 쉬이 용서한다면 왕가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 테니 말이다.”

침묵이 막사 안을 채웠다.

“공주께서 이리 찾아오신 것은, 다른 방법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 혜안을 청해 듣고자 합니다.”

마리안이 묻자, 공주는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레시아르 백작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만 보여준다면, 내가 온건파를 규합하여 사태를 종결시키도록 하겠다.”

“백작님이 왕도로 가서 국왕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단 말입니까?”

타라는 분개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공주는 곤란한 듯 차받침을 긁었다.

“생색낼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내가 양보한 것들을 떠올려 보라. 나는 병무대신과 레시아르 백작의 싸움을 말렸고, 휴전이라는 명목으로 그대들에게 정비할 시간을 주었으며, 이렇게 적진까지 찾아와 귀중한 정보를 내어주지 않았나.”

“제게는 그것이 생색내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그리 생각하라. 허나 내 제안은 결국 레시아르 백작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게 무슨...?”

“모습을 보이기도 힘들 정도라면 강독이 이미 레시아르 백작의 몸을 굳게 만들 정도까지 이르렀나보군. 이제 오일 후면 레시아르 백작은 혀가 굳어 말을 하지 못하고, 눈이 닫혀 보지도 못할 것이며, 심장이 둔해지고 피가 마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레시아르 백작은 살아있되 살아있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나무 같은 인간이 되고 말겠지.”

타라가 숨을 크게 들이켜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 속삭이는 소리가 오가고.

이번에는 마리안이 대신 입을 열었다.

“공주께서는 해독제를 가지고 계십니까?”

“물론.”

“그리고 조건에 따라서 그 해독제를 레시아르 백작에게 주실 의향이 있으시고요.”

“마이포흐 남작은 영특하군. 그 말대로다. 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나를 겁박하거나 억류해서 해독제를 탈취할 생각 따위로 내 기대를 저버리지는 말도록. 나도 마법사를 대동하여 왔으니.”

“그럴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공주께서 진정으로 이 싸움이 무용하다고 여기신다면, 조건 없이 해독제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미안하지만 레시아르 백작이 건강해진 몸으로 전쟁을 수행하겠다고 결심한다면, 나로서는 원치 않는 무익한 전쟁이 길어질 뿐이다. 그러니 내 조건은 간단하되 타협할 수 없는 것이다. 레시아르 백작이 왕도로 찾아와 용서를 빌 것을 맹세하라, 그러면 해독제를 줄 것이다.”

공주의 제안을 받아들이자면 나는 왕 앞에 무릎 꿇고 굴욕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게 될 거다. 그 속박은 한동안 레시아르 령의 발전을 억죌 테고.

정 방도가 없으면 그렇게 해야겠지. 목숨만큼 소중한 건 없으니까.

하지만 이번 전쟁이 그렇게 매듭지어진다면 오록스 단장은 개죽음을 한 게 된다. 패전의 전사자에게는 아무런 명예가 없으니까.

게다가 카산드라 공주의 말을 믿더라도, 중앙의 강경파가 나를 온전히 돌려보내줄 지도 의문이다.

왕도에 간 사이에 갑자기 중론이 바뀌어서 내 목을 치겠다고 한다면 나는 완전히 좆되는 거다.

다행히 내게는 공주가 모르는 해독제를 안다.

황금의 인간들이 먹고 마시는 황금사과와 꿀술, 아마 그 효능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해독제보다 훨씬 나을 터.

파샨을 보내서 그걸 가져 오라 했으니,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버틸 거다.

내 다짐과는 별개로 타라와 마리안은 꽤 길게 속닥거렸다. 어차피 당장 답을 필요는 없는데.

공주는 느긋하게 기다려주었지만, 그녀들은 결국 결론을 내지 못했다.

“죄송하지만 당장 답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럴 거라 생각했다. 오일 전에만 답을 주면 된다. 하지만 오일을 넘겨서는 안 된다. 그 후에는 해독제가 잘 들지 않으니까.”

공주는 경고를 남기고는 막사를 나섰다.

“백작님. 침대를 다시 옮기겠습니다.”

타라가 직접 천을 걷고 침대를 움직였다.

그녀는 이부자리를 정돈하면서 중얼거렸다.

“결정은 백작님께서 내리시겠지만... 저는 공주의 제안이 탐탁지 않습니다. 중앙은 늘 영주들을 견제해왔습니다. 공주가 레시아르 가문을 위해줄 리가 없습니다.”

그건 타당한 지적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리안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하지만 공주가 연합군 측에 온정적인 태도를 보인 건 분명해요. 휴전으로 아군이 이득을 본 건 분명하니까요. 게다가 해독제를 얻을 수 있다면, 레시아르 백작님 본인을 위해서라도 공주의 말대로 하는 게 낫겠죠.”

"마이포흐 남작님. 해독제라면 백작님께서 달리 얻을 방법을 강구하고 계십니다."

"타라 부관. 나도 알아요. 레시아르 백작께서 총애하는 친위대장을 직접 저택으로 보냈다죠? 나는 그 해독제가 뭘지, 어떻게 저택에서 찾아올 수 있는 건지 전혀 모르겠지만... 그래, 어찌어찌 해독제를 찾아서 레시아르 백작님이 기력을 회복했다고 쳐요. 그러면 다시 중앙과 전쟁을 치를 건가요?"

"그건 백작님께서 결정하실 문젭니다. 연합군의 총대장은 백작님이시니까요. 게다가 공주도 스스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다른 지역의 영주들도 들고 일어나고 있다고요."

"그들이 병사를 일으킬 때까지 버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과연 그게 가능할지..."

마리안의 말은 도중에 끊겼다.

막사 바깥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마수다!”

“마력병! 마력병!”

목청 터져라 소리치는 초병들의 외침에 타라가 언뜻 표정을 굳혔다.

“설마 속인 건가? 기사들을 내보내 카산드라 공주를 잡아야 합니다!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겁니다!”

“하, 하지만 공주가 마법사를 대동했다면...”

“그렇다고 이대로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망설이는 마리안에게 타라가 강하게 말했다. 금방이라도 기사들을 내보낼 기세였다.

원래 저렇게 경거망동하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오록스 단장의 죽음을 탓할 상대를 찾고 있는 건가.

나는 고개를 젓고 달달 떨리는 손가락을 간신히 움직여 막사 출입문을 가리켰다.

그걸 본 친위대원이 급히 문을 열었다.

거대한 괴조가 지평선 너머에서 날아오고 있는 게 보였다.

“아……. 고타마군요.”

타라가 맥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건 대머리 상인이 내게 예물로 바쳤던 괴조였다.

그 모습은 가까워질수록 커졌는데, 이전 이오시스가 동굴로 찾아왔을 때보다 덩치가 두 배는 더 불어난 것 같았다.

“무기를 내려라! 백작님의 애완조다!”

슬금슬금 모여들었던 병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흩어졌다.

괴조는 인간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날개를 펄럭이며 막사 위에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막사 위를 빙빙 돌더니, 그 옆의 공터에 흙먼지를 풀풀 날리며 착지했다.

“도련니임!”

고타마에서 뛰어내린 파샨은 어찌나 급한지 발발 네 발로 뛰어왔다.

“도, 도련님! 죽으시면 안 됩니다!”

“아직... 살아... 깩...!”

파샨은 나를 꽉 껴안아서 졸라 죽일 뻔 했다.

"니가... 죽였어...!"

"핫! 죄, 죄송합니다!"

"장난칠... 힘도... 없어... 얼른... 그걸..."

그러자 파샨은 뾰족한 여우귀를 늘어뜨렸다.

“그게... 황금사과와 꿀술은 이데트 아가씨께 이미 전부 드시게 했다고...”

“효... 험은...?”

“아! 혈색이 좋아지셨습니다! 가끔 몸을 뒤척이기도 하시고! 아직 눈을 뜨지는 못하시지만...”

그거라면 효험을 의심할 여지는 없다.

파샨과 체닐린에게 먹이고 남은 극소량을 이데트 누이에게 주었던 것이니, 양만 늘리면 강독을 완전히 해독할 수 있을 거다.

마리안의 말대로 해독만으로 모든 문제가 끝나는 건 아니지만, 강력한 마법사인 내가 기력을 회복한다면 좀 더 나은 조건으로 중앙과 교섭할 수 있을 거란 점은 분명하다.

교섭을 하건, 전쟁을 하건 간에 우선은 이 놈의 끔찍한 독을 털어내는 게 급선무다.

"어서... 화리메를..."

파샨의 뒤를 따라 온 화리메는 아직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를 불러와서 어쩌겠다는 거야? 나는 치유마법 같은 건 쓸 줄 모르는데.”

“아르토... 황금의 인간 중에... 호의적이었던... 그 여자...”

“황금의 시대로 돌아가서 그 분께 약이라도 받을 생각이야?”

나는 파샨과 체닐린을 가리켰다. 화리메는 작게 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사과와 꿀술. 그것만으로 다 죽어가던 파샨과 체닐린이 쌩쌩하게 살아났고, 혼수상태이던 이데트 누이의 병세가 좋아졌으니.

그야말로 만병통치약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공주가 주겠다는 해독제보다도 훨씬 나을 게 틀림없다.

“하긴 하겠지만, 저번처럼 전이될 거란 보장은 없어.”

화리메는 좀 자신이 없어 보였다.

시건방진 걸로 따지면 다툴 사람이 없는 여자가 갑자기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

그래도 화리메는 준비성 좋게 하이브의 마석과 함께 불의 속성석인 화석(火?)을 챙겨왔다.

동굴에서 황금의 시대로 전이했을 때와 똑같은 조건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막사 근처를 텅 비운 다음에 내게 돌아와 물었다.

“준비됐어?”

“얼른... 해...!”

“재미없게.”

화리메는 입을 삐죽이다가 하이브의 마석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굉음과 폭발이 우리 둘을 집어삼켰다.

#

사금 같은 모래사막도,

정수리를 구울 듯이 내리쬐는 황금빛 태양도,

거대한 피라미드와 오만한 황금의 인간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은 발을 디딜 때마다 종아리까지 푹푹 빠질 정도로 쌓인 눈과, 시릴 정도로 창백한 빛을 발하는 달.

“백은의 시대…….”

화리메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황금의 시대는 이미 빛을 다한 뒤였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