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83화 (83/166)

〈 83화 〉 넥타르를 찾아서

* * *

“눈바람이 잦아들었군. 달이 도로 커지기 전에 움직이는 게 좋겠소.”

아바르는 눈길을 주저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표식이 될 만한 것도 없는 허허벌판의 눈밭에서 그가 어떻게 길을 찾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래도 화리메와 둘이 헤매는 것보단 나을 테니, 그의 뒤를 바로 따라붙었다.

“어딘지 알고 움직이는 거요?”

“물론이오. 자세히 보면 지표가 보인다오. 예를 들자면, 저기 저 뾰족하게 솟아오른 얼음탑이 보이시오? 원래는 오아시스가 있던 곳이지. 용오름이 그대로 얼어붙으면서 저렇게 변했다오.”

그는 눈과 얼음이 단단하게 얼어붙은 곳으로만 발을 디디며 우리를 인도했다.

덕분에 눈 사이로 신발이 푹푹 빠지거나 미끄덩 넘어지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추위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황금의 시대로 올 거라고 생각하고 옷을 가볍게 입었던 터라, 화리메는 홑옷을 당겨 입으며 부르르 떨었다.

“읏... 추워...”

“자. 입어.”

“흥…….”

내 겉옷을 벗어서 덮어주자, 화리메는 고맙다는 소리도 없이 날름 제 옷 위에 껴입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얼어 죽게 생겼는걸.

넥타르를 좀 마셔서 몸이 덥혀졌다고는 하나, 눈보라를 맨살로 맞고 있자니 피부가 찢어질 것처럼 아프다.

“자. 입으시오. 아무리 건장한 사내라도 이 추위에 벌거벗고 있으면 얼어 죽을 거요.”

아바르는 내게 자신의 털가죽 외투를 벗어주었다.

나는 냉큼 그걸 덮어썼다. 사실 화리메에게 옷을 벗어주고 바로 후회했거든.

오, 이거 상당히 따뜻하다.

“…….”

화리메는 말없이 나를 빤히 노려봤다.

나는 슥 중지를 올렸다.

“줬잖아. 내 옷.”

“쩨쩨하게 그러기야?”

“나 몰래 황금의 시대로 전이하려고 했던 주제에...”

“그건...! 애초에...!”

씩씩거리면서도 할 말이 궁해진 화리메.

그래도 백은의 시대로 막 온 다음에는 살뜰하게 챙겨줬으니까, 내가 져주기로 했다.

“이리 와.”

“응?”

“업히라고.”

우선 화리메를 등 뒤에 업은 다음 그 위에 아바르가 준 두꺼운 털외투를 덮었다.

털옷 아래 서로의 체온이 맞닿아 꽤나 뜨끈해진다. 커다란 젖가슴이 등 위로 뭉개져 흐뭇한 촉감을 남기는 건 덤이다.

“사이도 좋으시군. 준비 됐으면 움직입시다.”

아바르는 앞서 나가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나는 눈보라 속에서 그의 뒷모습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또 얼어붙지 않기 위해서라도 몸을 바삐 움직여야 했다.

눈 속의 여정은 고단했지만 아바르는 길잡이로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다.

한 번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는 법이 없었고, 눈 아래 파묻힌 길을 솜씨 좋게 찾아내서 파고들었다. 얼어 죽기 전까지 우리를 방치하다가도 정말 죽을 것 같으면 넥타르를 탄 물을 딱 한 모금씩 넘겨주었다.

이를 박박 갈면서도 그 덕분에 이 광대한 눈밭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단조롭게 이어지는 거대한 빙판길을 지나, 황무지 언덕을 건너, 꽁꽁 얼어붙은 숲 위를 걷고, 급하게 흘러가는 유빙 사이로 뛰고, 얼음꽃이 만개한 산을 타며, 우리는 거의 하루를 꼬박 새어 움직였다.

화리메는 내 등 뒤에 편하게 업혀서 갔지만, 나는 팔이고 다리고 근육이 찢어질 것 같아 죽을 맛이었다.

게다가 얼굴을 때리는 칼날 같은 눈바람이란.

눈물과 콧물이 찔끔찔끔 나올 때마다 얼어붙어서 굉장히 불편하고 아팠다.

“조금만 참으시오. 이제 거의 다 왔소.”

아바르는 반대편 벼랑을 가리키며 말했다.

산 정상을 거대한 도끼로 내려쳐서 절반으로 가른 듯한 벼랑이다. 저길 건너간다고?

날개 달린 새도 쉬어갈 곳이 없어서 뚝 떨어질 것 같은 협곡인데.

“너무 걱정할 필요 없소. 한 번 다녀 본 길이 있으니.”

“한 번?”

화리메가 등 뒤에서 중얼거렸다.

아바르는 들은 척도 않고 주변을 살피다가 얼음꽃 덤불로 숨겨진 곳을 가리켰다.

그 쪽으로 가보니, 길이 있긴 했다.

이런 것도 길이라고 할 수 있다면 길이겠지.

벼랑 사이에 내린 우박과 눈이 얼어붙어서 기적적으로 다리가 놓인 것이었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여기 위를 걸어서 간다고?

“여기밖에는 길이 없나?”

“다른 길이라면 며칠은 더 돌아가야 하오. 시간이 없다고 하여 이쪽으로 안내한 것인데, 더 안전한 길을 원한다면 돌아가지 못할 것도 없지.”

“아니... 여기로 갑시다.”

휴전이 끝나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이틀.

무조건 그 안에 암브로시아와 넥타르를 찾아내서 마력을 회복시켜야 한다. 그래야 현재로 돌아가서 휴전협정을 맺든, 다시 전쟁을 벌이든 할 테니.

“먼저 갈 테니까 잘 따라오시오.”

아바르는 눈과 얼음으로 만들어진 다리 위에 발을 올렸다.

너비는 겨우 발을 디딜 수 있을 정도지만, 그는 능숙하게 오른발과 왼발을 번갈아가며 디뎌서 다리를 나아갔다.

벼랑 사이에 산바람이 쌩쌩 부는데도 그는 흔들림 없이 눈다리를 걸었다.

한 번이라도 미끄러졌다가는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할 텐데.

저 밑은 얼마나 깊은지 끝도 보이질 않는다. 무한한 어둠 속에 숨겨진 게, 이런 걸 무저갱이라 표현하나 싶을 정도.

“나, 나는 못해…….”

등 뒤에 업힌 화리메가 오들오들 떨며 혼잣말을 했다.

그 사이 그는 반대편 벼랑에 도착해 손을 흔들었다. 이쯤 별 거 아니란 투다.

슬며시 호승심이 치솟는다.

나는 눈다리 위에 살짝 발을 디뎌보았다. 그 다음에는 툭툭 쳐보고, 아예 체중을 실어서 꾹 눌러보기도 했다.

눈다리는 의외로 튼실하게 버텨준다.

아바르도 체격이 큰데, 그가 무리 없이 건넜다면 나도 건널 수 있겠지.

화리메가 내 어깨를 손바닥으로 탁탁 치면서 말했다.

“가, 가자!”

“뭐가 가자야. 내려.”

화리메는 가벼운 편이지만, 그래도 위험은 줄이는 게 나으니까.

업고 업힌 채로 가다가 중간에 눈다리가 무너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화리메는 툴툴거리면서도 내 말이 옳다고 생각했는지 등에서 내렸다. 약삭빠르게 털외투는 자기가 가져갔지만.

“그럼, 어디…….”

나는 조심조심 발을 디뎌가며 눈다리를 나아갔다.

벼랑 끝에서 눈다리로 몸을 옮기자, 다리가 절로 후들거린다. 밑을 보지 않으려 했지만 시선이 절로 아래를 향한다.

슬쩍 아래를 보니 눈다리가 흔들거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아니, 진짜 흔들리고 있는 거 아니야?

“고개를 너무 숙이면 안 되오! 적당히 앞을 보며 걸으시오!”

아바르가 반대편에서 소리쳤다.

그래. 턱을 좀 내밀고, 두 보 앞을 바라보면서 조심스레 전진한다.

쒸익. 쒸이이익.

귓가를 째는 듯한 바람 소리.

시퍼렇게 날선 칼바람이 얼굴을 벨 듯 스치고 지나간다.

바람을 맞아가며 무게중심을 잡는 게 쉽지 않다. 나는 두 팔을 넓게 벌리고 바람을 막아 버티려 했다.

“그 곳의 바람은 멈추지 않소! 맞서려 하지 말고 바람을 따라 걸으시오!”

바람이 옆구리를 치는데 어떻게 바람을 따라 걸으란 말이야.

휘청휘청 움직이는 상체를 최대한 낮춘 채 바람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아바르의 말대로 벼랑 사이에 부는 계곡바람은 쉴 새 없이 불어 닥쳤다.

“씨발…….”

어쩔 수 없이 발을 조금씩 밀어 나아가야 했다. 그대로 있다가는 몸이 얼어버릴 테니.

아바르는 저 앞에서 뭐라고 계속 훈수를 두고, 뒤에서는 화리메가 투덜거림인지 빈정거림인지 모를 응원을 쏟아내고 있다.

“그래, 간다. 간다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걷는다.

찬바람은 나를 후려쳐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 넣으려 하지만,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쓰러질 생각은 없다.

마력은 독 때문에 흩어졌지만, 그게 없어도 충분히 단련된 신체가 남아있다.

나는 전신을 잔뜩 긴장시키며 천천히 나아갔다.

너무나도 비효율적인 움직임이지만 그래도 나아가고는 있으니까 언젠가는 반대편에 도착하겠지.

얼마나 집중했는지 상체 위로 열기가 훅훅 뿜어져 나온다. 곧바로 서리로 변해버리긴 하지만.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바람의 흐름이 바뀐다.

바람이 오른쪽 옆구리를 치고 나가 등을 쓸고는 다시 왼쪽 옆구리를 받쳐준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성큼성큼 눈다리를 밟아 나갔다.

어차피 지면에서 발이 딛는 부분은 딱 발이 닿는 부분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가느다란 눈다리와 지면이 서로 다를 게 없다.

한 번 자신감이 붙자 나는 그 좁은 눈다리를 거의 경보 수준으로 거닐기까지 했다.

중간에 바람이 부는 방향이 바뀌기는 했지만, 이미 기술을 체득한 내게는 그다지 큰 장애가 되지 못했다.

“고생하셨소.”

앞쪽의 벼랑 끝에서 아바르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다리를 쭉 뻗어서 벼랑 위에 발을 옮겼다.

“후.”

눈다리도 단단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제야 땅을 밟았다는 느낌이 든다.

긴장해서 잊고 있던 통증과 추위가 한 번에 몰려왔다. 힘이 쭉 빠지며 한숨이 절로 나왔다.

“목이나 좀 축이시오.”

아바르는 내 어깨를 툭 치고는 희석한 넥타르를 딱 한 모금 따라서 주었다.

그래도 몸을 녹이기엔 충분했다.

등을 돌려 반대쪽 벼랑에 선 화리메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야! 얼른 와! 별 거 아니야!”

“흐이이익...”

화리메는 바보 같은 신음소리를 흘리면서도 조심스레 눈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현지인인 아바르라면 몰라도, 나까지 건넜으니 자신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사실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나와는 달리 화리메는 지금 마력을 쓸 수 있는 상태니까, 여차하면 황금방패로 건너오겠지.

…….

그냥 처음부터 황금방패를 타고 날아오면 되는 거 아니야?

나도 그걸 타고 왔으면 됐을 텐데?

갑자기 헛고생을 한 게 억울해진다.

화리메에게는 말해주지 말아야지.

“히이익...”

화리메는 달팽이와 좋은 승부를 이룰 정도의 속도로 눈다리를 건넜다.

오들오들 떨면서 발을 질질 끄는 게, 영 좋은 꼴은 못 볼 것 같은데.

파삭.

화리메가 새로 발을 내딛은 부분의 얼음이 깨졌다.

“꺅!”

화리메의 몸이 눈다리 아래로 쑥 빠졌다.

하체와 상체 중반까지 단숨에 사라지다가, 불균형하게 큰 가슴이 빙판에 턱 걸쳐서 간신히 추락이 멈추었다.

“도와줘! 도와줘어!”

화리메가 손을 휘저으며 난리를 치자 가만히 지켜보던 아바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냥 오면 될 걸. 엄살이 보통이 아니오.”

“거야 뭐…….”

나는 좀 낯이 화끈해져서 눈다리를 밟아 돌아가기로 했다.

그래도 한 번 왔던 길이라 이전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발이 나아갔다.

눈다리 중간보다 조금 덜 나아간 지점에 화리메가 딱 박혀 있었다.

“얼른 올려줘! 꺅! 부서지잖아! 가까이 오지 마!”

“뭘 어쩌란 거야.”

나는 그냥 뚜벅뚜벅 걸어서 화리메에게 다가갔다.

눈다리가 부러지면 그냥 황금방패를 띄우라고 하면 되니까.

“흣차.”

“어딜 만져! 어딜 만지냐고!”

“가슴.”

“미친놈아!”

“콱 놔버린다.”

“꺄아악!”

나는 엎치락뒤치락하면서 화리메를 눈다리 위로 올렸다.

숨을 몰아쉬고 있는 화리메에게 한 마디 해주었다.

“그냥 마법을 쓰지 그랬냐.”

“아...?!”

화리메는 그걸 왜 이제 얘기하냐는 듯이 나를 노려보다가, 뒤늦게 황금방패를 꺼내 그 위에 자신이 타고 쌩 가버렸다.

나는 털레털레 걸어서 갔다.

그런데 벼랑 반대편에 돌아와 보니, 아바르가 화리메의 황금방패를 유심히 관찰 중이었다.

“이게 무슨 조화요?”

“그냥 황금마법인데... 음...”

화리메는 아바르가 우리 정체를 알아차리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화리메 곁에 붙어서 황금방패를 지워버리게 했다.

“아... 아쉽군.”

“그냥 묘기일 뿐이오.”

“묘기라기엔 상당히 혼돈스러운 조화던데. 당신들이 그만큼 원류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거겠지. 하지만 창의적이긴 하군. 이런 걸 타고 움직일 생각은 아마 누구도 안 해봤을 거요.”

아바르는 아우럼 가의 황금마법에 상당히 관심을 가진 모양이었다.

나는 그의 주의를 돌릴 게 없나 주변을 살피다가 저쪽에서 다가오는 형체들을 발견했다. 놈들은 오르막길을 올라오던 터라 우리는 그것들이 아주 가까이 오기 전까지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이런.”

아바르는 낭패한 눈초리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덩치가 황소만한 늑대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몸통은 얼음으로 되어 있었고, 턱과 가슴 아래로 뾰족한 고드름이 열 개 넘게 자라나 있다. 저 밑에 깔리면 피부가 갈가리 찢겨나가겠지.

“언제 이 놈들이... 물러나라!”

아바르의 외침에 놈들은 꼬리를 가랑이 사이로 말아 넣었지만, 바로 도망치지는 않았다.

녀석들은 괘씸하게도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입을 쩍쩍 벌렸다.

내가 맛있는 햄처럼 보이는 모양인데.

“물러나라고 했다! 이 놈들!”

아바르가 발을 구르며 앞으로 나설 태세를 취하자, 그제야 늑대들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놈들이 모습을 감추고 나서도 아바르는 한동안 자세를 굳힌 채 기다렸다.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그는 한숨을 내쉬며 다리를 털었다.

“흉폭한 괴물들. 혼돈의 자식들이지. 조화로운 태양께서 떠나신 후에 생긴 것들이오.”

“죽이면 되는 것 아니오? 흉측하게 생기긴 했지만 아주 강해보이진 않던데”

“달이 떠 있는 동안 놈들은 불멸이오.”

나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파란 달이 전혀 움직이지 않고 같은 자리에 붙박여 있었다.

백은의 시대. 태양의 빈 자리를 차지한 달.

“그럼 저 늑대들은...”

“이 시대가 다하지 않는 한 죽지 않는다는 말이지.”

그런 말도 안 되는 괴물이 존재해도 되는 건가? 황금의 시대도 어지간했지만, 백은의 시대는 훨씬 더 끔찍한 시대란 말이야.

그래도 놈들이 아바르에게는 좀 겁을 먹은 모습이던데.

“글쎄…….”

아바르는 말끝을 흐렸다. 뭔가 숨기는 눈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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