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넥타르를 찾아서
* * *
설산 늑대를 만난 이후로 아바르의 말수가 확 줄어들었다.
뭔가를 숨기는 듯한 분위기에 화리메는 불안해했지만,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거나 당장 우리에게는 아바르가 필요하다.
저 유능한 길잡이가 떠난다면 우리는 눈과 얼음과 서리 속을 빙빙 돌다가 얼어 죽고 말겠지.
그러니 암브로시아와 넥타르를 찾을 때까지는 아바르와 어울려줘야 한다.
아바르가 무슨 꿍꿍이가 있건 없건 간에 어떻게든 넥타르를 마시기만 하면, 그를 때려눕히지는 못하더라도 도망칠 기회 정도는 낼 수 있겠지.
“발밑을 조심하시오.”
아바르가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새 우리는 그 높은 설산을 다 내려와서 지면에 발을 딛고 있었다. 아니, 지면이라고 하기엔 뭔가 다른가?
“우리는 지금 태양의 도시 위를 지나고 있소. 위대한 성탑과 아름다운 저택 위로 눈이 쌓이고 덮여서 커다란 언덕이 되어버린 거지. 발 디딜 곳을 잘못 택한다면 눈 아래로 쑥 빠져버릴 테니 조심해야 하오.”
설산과 태양의 도시는 거의 맞닿아 있었다.
딱 한 번 왔을 뿐이지만 태양의 도시의 전경은 대충 기억하고 있는데, 그럼 방금 지나온 그 설산이 피라미드였던 게 아닐까?
무엇 때문에 절반으로 갈라져서 벼랑을 만들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저갱처럼 보이는 벼랑 아래에는 피라미드 속에 봉안된 보물들이 숨어있을 지도 모르겠다.
지금 그걸 꺼낼 방법이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아바르의 뒤를 따라 걷는다.
그는 배낭에서 길쭉한 지팡이를 꺼내서는 그걸 이리저리 눈 아래로 찔러보면서 진로를 잡았다.
“눈이 덜 언 곳이 있소. 발을 잘못 디디면 눈 틈 사이로 사라질 테니, 조심하시오.”
아바르는 새하얀 눈 위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며 먼저 나아갔다.
화리메는 잽싸게 다시 내 등 뒤에 올라타서 속삭였다.
“뭔가 수상하지 않아? 그 늑대들이 나타나고 나서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는데.”
“수상해도 뭐, 어쩔 수 없잖아. 일단은 따라가야지.”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밌게 하시오?”
“배고픈데 식사는 언제할지, 뭐 그런 얘긴데. 밥은 언제 먹을 거요?”
내 물음에 아바르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저 앞에 피뢰침처럼 삐죽 솟아난 얼음 조각을 가리켰다.
“저기 어디쯤에 창고가 있을 거라고 예상하는데……. 여기서 잠시 휴식합시다.”
“가까운데? 바로 근처인데 저기까지 가서 쉬는 게 낫지 않겠소?”
“달이 커지고 있소. 눈과 바람의 시간은 피하는 게 상책이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배낭 밑에 매달아 놓은 삽을 쥐더니 후다닥 눈을 파냈다.
작업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눈 사이로 파묻힐 정도였다.
화리메는 아바르가 만들어낸 구덩이 아래를 슬쩍 내려다보다가 그가 삽으로 퍼내서 던진 눈 무더기에 얼굴을 맞았다.
“캭!”
“아, 미안하오.”
아바르는 별로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화리메를 슬쩍 보고는, 반대편으로 눈 무더기를 던졌다.
“어디까지 파려고 그래요?”
화리메가 잔뜩 성질이 난 모습으로 물었다.
“몸을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아바르의 대답은 깡깡거리는 소리에 반쯤 묻혔다.
그는 눈을 다 파내고 그 밑에 깔린 얼음층을 삽으로 부수고 있었다.
“눈 두더지도 아니고. 뭐하는 짓이람.”
화리메는 투덜거렸지만, 나는 그녀를 업은 채로 구덩이 아래로 내려갔다.
지금껏 아바르가 이유 없이 한 일은 없었으니까 이것도 무슨 의미가 있겠지.
그가 던져놓은 배낭에서 짧은 곡괭이 같은 걸 찾아내서 집어 들고는 그를 따라 얼음을 두들긴다.
아바르는 나를 휙 보더니 한 번 고개만 끄덕이고 계속해서 얼음을 파냈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진짜.”
화리메는 짜증을 내면서도 우리를 따라 눈을 옮기고 얼음을 부쉈다.
얼음을 파내는 건 눈을 파내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들었다. 그래도 셋이 힘을 합치니 꽤나 속도가 붙었다.
그 사이에 눈보라는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눈보라는 거의 폭풍이라고 해도 좋을 기세로 휘몰아치며 우리가 퍼낸 구덩이 아래로 눈을 쏟아 부었다.
“아얏!”
화리메가 위에서 굴러온 눈덩이에 뒤통수를 맞고는 성질을 냈다.
“우릴 생매장시킬 거면 그냥 편하게 묻어주지 그래요!”
“재밌군.”
아바르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삽을 움직이면서 대꾸했다.
그가 파낸 얼음 구덩이는 이제 우리 셋이 들어갈 정도로는 커져 있었다. 위에서 계속 눈이 굴러 떨어져서 구멍을 메우려고 하긴 했지만.
“좀 좁을 테지만, 일단 들어갑시다.”
그가 먼저 구덩이의 한쪽에 자리를 잡고 쪼그려 앉았다.
나는 씩씩거리는 화리메를 안고 그 반대편에 웅크렸다. 목을 구부리면 간신히 구덩이 위로 머리가 넘어가지 않을 정도의 깊이였다.
아바르는 이번에는 배낭을 풀어헤쳐서 널찍한 천으로 만들더니, 그것을 위로 펼쳐서 구덩이를 아예 덮어버렸다.
“어두운데.”
“기다리시오.”
그는 작은 수정을 꺼내서 손톱으로 긁고는 구덩이 중앙에 내려놓았다. 수정에서 나온 푸른빛이 어두운 구덩이 안을 밝혔다.
“이제 식사합시다.”
우리는 육포와 눈 녹인 물을 조금씩 먹고 마셨다.
짧은 식사 후에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천 위로 무언가가 후두둑 떨어졌다.
“뭐, 뭐야?”
화리메는 겁이 났는지 내 품 안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나는 살짝 천을 들어 올려 바깥을 살폈다.
쏴아아아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두껍게 쌓인 눈이며 얼음꽃 덤불이며, 심지어는 바위와 빙석까지 모조리 빨려 들어갔다. 어지럽게 휘날리는 눈와 얼음, 자갈 따위 때문에 달빛이 가려질 정도였다.
“천을 꽉 잡으시오. 자칫 잘못해서 날아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아바르의 말에 나는 천을 다시 내렸다.
그 위로도 눈덩이가 후두둑 떨어지기는 했지만 대개는 위로 올라가 회오리바람에 흩날렸다. 살벌할 정도의 바람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오?”
“글쎄. 달이 도로 작아지기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소. 그래야 눈과 바람도 잦아들 테니.”
재주 좋은 아바르도 이 무지막지한 회오리바람에는 손 쓸 방도가 없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조그마한 수정을 둘러싸고 앉아 묵묵히 시간을 흘려보냈다.
살벌한 바람소리도 계속 듣다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라.
지루함에 지친 화리메가 가장 먼저 꾸벅꾸벅 졸다가 결국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아바르를 슬쩍 보았으나, 그는 예의 덤덤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 참에 그들의 이야기를 더 물어보기로 했다.
나와 아르토의 자식이라는 오누이.
나로서는 한 번 만나본 적도 없으니 잘 실감도 나질 않고, 좀 불편한 소재기는 했으나 그들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일전에 말해주었던 남매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려줄 수 있소?”
“글쎄……. 그다지 유쾌한 이야기가 아닐 텐데.”
“내가 그들과 인연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오.”
“하기는. 모든 후손들은 원류를 알 권리가 있지.”
내가 자세히 들을 자세를 취하자, 아바르는 결국 입을 열었다.
“일전에 말해주었듯 그들은 금기를 어기고 몸을 맞대었소. 고귀한 황금의 인간들은 아무도 그들을 상대해주지 않았으니. 외롭고 고단했지. 멸시와 천대에도 질렸고.”
그럴 만 하지. 나 같아도 세상에 둘 밖에 없다고 느낀다면 서로 사랑을 나눴을 거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바르는 반대로 고개를 저었다.
“허나 그렇다고 하여 그들의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오. 당연하지 않소? 피를 나눈 남매끼리 교합한다니. 그야말로 천벌이 내려 마땅한 일이지.”
나는 괜히 이데트 누이의 몸을 떠올리며 뜨끔해했다.
“그게 천벌까지 받을 일인가? 서로 좋아서 몸을 겹쳤다면 누가 뭐라 하겠소? 내가 그럴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럴 자격이 있다면 나라도 그들을 용서하겠소.”
“용서라.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다니. 당신이 그만큼 원류에서 멀어졌다는 거겠지. 조화를 넘어선 행위를 옹호한다면 그것이 혼돈과 다른 것이 무엇이오?”
“혼돈스러운 것이 죄인가? 조화랄 게 별 게 있소?”
내가 본 황금의 인간들은 아르토를 제외하고는 모두 시시하고 따분한 인간들이었다.
게다가 특권의식까지 가지고 있었지.
그들이 떠받드는 조화라는 것도 딱딱하고 무의미했다. 그래야 하기 때문에 그리한다는 게 얼마나 한심한 일인지.
태양이 배정한 의무를 일개미처럼 이행할 뿐인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라면 심심한 천국에서 지내느니 차라리 자유로운 지옥으로 가겠다.
내 말에 아바르는 드물게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이 넓은 눈의 대지를 다 뒤져도 당신 밖에 없을 거요. 모두들 겪어보지도 못한 태양의 시대를 그리워하는데. 당신은 굉장히 특이한 사람이군 그래.”
“그건 아마…….”
내가 그 시대와 그 이후의 시대를 겪어봤기 때문이겠지.
나는 뒷말을 삼키고, 다른 말을 꺼냈다.
“여하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요. 그 남매는 잘못한 게 없다고. 서로 동해서 몸을 겹쳤다는데 누가 뭐라고 해? 막말로 그들의 아버지라도 그들을 용서했을 거요.”
“그 원숭이가?”
“원숭이라니... 꼭 그렇게 원숭이라는 말을 써야 하나? 그 원숭이가 듣고 있으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냐 이 말이오.”
아바르는 또 픽 웃고는 내게 사과했다.
“미안하군. 그래, 당신의 말대로 그들이 용서를 받았다면 좋으련만.”
아바르는 무언가를 어렴풋이 추억하는 듯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가, 이내 그 웃음을 지워버렸다.
“그들은 용서받지 못했지.”
“어떻게 되었소?”
“천벌. 천벌이 내렸소.”
아바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해가 뜬 동안 낳은 아이는 인간이 되었소. 그나마도 조화로운 진짜 인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인간의 형체를 본뜬 아이들이었지. 하지만 태양께서 떠나고 난 후, 달이 뜬 동안 낳은 아이는 인간의 형상조차 띄지 못한 것들이었소. 그들은...”
“늑대가 되었겠군.”
내 말에 아바르는 고개만 끄덕였다.
늑대를 봤을 때부터 무언가를 계속 숨기는 것 같았는데, 바로 이거였나.
백은의 인간과 설산 늑대가 형제지간이라니.
그러니까, 다시 정리하자면…….
나와 아르토의 사이에 어떤 오누이가 태어났고, 그 오누이가 근친상간으로 낳은 아이가 백은의 인간과 설산의 늑대라는 건데.
그 흉측한 늑대가 내 손자뻘이라는 게 묘하기는 하지만 어찌 생각하면 인간과 괴물, 그리고 신은 그리 먼 사이가 아닐 지도 모르겠다.
그리스 신화의 주신인 제우스는 티탄과 친척지간이었고, 북유럽 신화의 프레이는 거인족 게르드와 결혼했다니까.
힌두교 주신 브라흐마의 손자인 가루다는 성정이야 선하지만 괴물 새이기도 하고.
침묵이 길어지자 아바르는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어떻소. 듣기에 그다지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그렇긴 하더군.”
“저 설산 늑대를 만들어낸 게 그 오누이라는 거요. 그래도 그들이 죄가 없다고 생각하시오?”
“그렇소.”
“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소. 죄를 지으면 벌을 받기 마련이고. 무녀는 원숭이와 교합한 죄로 모두에게 무시당하는 오누이를 낳았고, 오누이는 근친상간의 죄로 더 열등한 인간과 흉측한 늑대를 낳았소. 그런 끔찍한 벌을 받았는데도 그들에게 죄가 없다고? 진정으로 그리 생각하시오?”
아바르는 간청하듯 물었다. 마치 그가 듣고자 하는 답을 구하는 듯이.
다행히도 내가 들려주고 싶은 말과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서로 다르지 않았다.
“저들이 좋아서 함께 했다는데 누가 감히 그들을 벌한단 말이오?”
“그야 조화로운 태양께서...”
“옹졸하기도 하군. 그 태양의 권위라는 게 예정조화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리고 모든 것이 미리 예정되어 있다면 무녀가 순결을 잃은 것과 오누이가 서로를 위로한 것 또한 그 안배 속에 포함되어 있을 터인데.”
“허나 태양께서는 우리를 벌주셨소.”
“그러니 옹졸하다는 것이지. 실로 속 좁은 놈이 아니오? 제가 펼친 판에 비극의 주인공들을 던져놓고 자기 좋을 대로 벌을 주니 마니.”
그들 남매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태양은 모든 것을 예정하지 아니한 것이고,
그들 남매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태양은 자기가 안배한 것을 스스로 부정하고 처벌하는 광대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존재가 제멋대로 내린 것이라면 그건 벌이 아니라 저주일 뿐이지. 그러니 반성하고 뉘우칠 필요가 없소. 그깟 저주란 이겨내어 극복할 대상일 뿐이오.”
솔직히, 내 일이 아니니 쉽게 말하는 거긴 하다.
밤하늘에 붙박인 달, 거대한 눈보라, 얼음으로 뒤덮인 대지, 넥타르를 조금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버티지 못하는 추위, 그런 것들을 어떻게 이겨낼지 나는 전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남매의 후손들이 스스로가 징벌의 결과물이라고 여기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생각지도 않았지만 어쨌거나 내 피를 이은 자손들. 그들이 불합리한 저주에 맞서 싸우기를 바란다.
죄책감까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책임감 정도는 느끼고 있다.
다음에 다시 백은의 시대로 전이할 수 있다면 도움이 될 만한 물건들을 챙겨올 수도 있겠지.
그 때는 내가 아바르를 도와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가…….”
아바르는 대답하지 않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에게 대답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기에 가만히 빛을 발하는 수정만 바라보았다.
머잖아 바람소리가 잦아들었다.
나는 여전히 사념에 빠진 아바르를 한 번 돌아보고는, 천을 슬쩍 들추어 바깥을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무거운 분위기도 단숨에 잊힐 정도의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회오리바람이 모든 것을 쓸어간 뒤에 남은 것은 빙판뿐이었다. 두껍게 쌓인 눈은 모조리 날아가고, 그 밑에 단단하게 응결된 얼음층만 남은 것이다.
얼마인지 상상도 못할 시간 동안 눈이 겹치고 겹쳐서 만들어진 빙판은 불순물 하나 없이 맑아서 그 밑에 있는 것들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와아아!”
화리메도 어느새 잠에서 깼는지 천을 들추고 나와서 감탄사를 쏟아냈다.
빙판 아래로 도시의 정경이 드러나 있었다.
바지런한 성벽과 높은 탑, 화려한 정원과 아름다운 신전, 도시의 모든 것이 수정얼음 속에 갇혀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게다가 빙판은 달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우리가 밟고 선 얼음 위로도 별무리가 비추었다.
그것들은 수정 얼음 아래 도시의 정경을 비추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정신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화리메가 팔소매를 잡아당겼다.
“바이스! 봐! 저거!”
“뭔데? 어... 어?”
두껍게 쌓인 눈이 싹 다 날아간 후의 설산을 돌아보니, 그건 역시 피라미드였다.
황금의 시대에서 보았던 그 거대한 규모는 그대로였지만, 무언가로 인해 반으로 딱 쪼개져 있었다.
놀라운 건, 우리가 건너온 눈다리가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거였다.
화리메가 건너다가 도중에 푹 빠진 구멍도 작게나마 보였다.
그 회오리바람도 견뎌낸 다리를 도대체 어떻게 부숴먹은 건지가 미스터리다.
하여간 얼음의 대지 위에 우뚝 선 피라미드는 장엄한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기에 나와 화리메는 그것을 구경하느라 넋을 놓았다.
“봉안탑을 아시오?”
아바르가 다가와 물었다.
이전보다 좀 상쾌해진 표정이었다.
“봉안탑이라니?”
“당신들이 보고 있는 저 거대한 삼각뿔 말이오. 이전에는 저렇게 둘로 갈라져 있지 않고 하나였다오. 무녀가 저 위에서 제물을 태워 그 연기를 태양께 공양하곤 했지.”
“그럼 뭣 때문에 저렇게 쪼개진 거요?”
“태양께서 떠나며 부수었소. 더럽혀진 대지 위에 그 분의 상징을 남겨두고 싶지 않았겠지.”
“거국적인 투정을 부리고 떠났다 이 말이군.”
“으학.”
아바르는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다가 휙 표정을 바꾸었다.
“자, 이제 목적지에 다 왔소. 어서 갑시다.”
그는 삐죽 나와 있는 얼음조각을 향해 걸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 얼음조각은 석탑의 꼭대기가 빙판 위로 나와 있는 거였다.
빙판 밑으로는 탑의 나머지 부분들이 깨끗한 얼음 속에 묻혀 잠들어 있었다.
“이게 태양의 도시의 창고탑이오. 수천, 수만의 시민들이 여기서 암브로시아와 넥타르를 받아갔지. 감히 신들의 음식이라 불린 것들 말이오.”
아바르는 다시 배낭에서 삽을 꺼내고 내게 괭이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구덩이를 파냈을 때와 마찬가지로 얼음을 쪼개고 부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래도 한 번 했던 일이라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마침내 꼭대기의 창문 높이까지 얼음을 파냈을 때,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휘가 눈을 어지럽게 했다.
“드디어!”
화리메가 지팡이를 휘둘러 창문을 부쉈다.
석탑 안에는 눈이 그득히 쌓여 있기는 했지만 그걸 퍼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터.
게다가 그 밑에 숨겨져 있을 암브로시아와 넥타르는 우리를 유혹하듯 두텁게 쌓인 눈 너머로도 황금빛 광채를 발했다.
곧바로 석탑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아바르가 내 어깨를 잡았다.
“왜?”
“이 소리가 안 들리시오?”
크르릉…….
낮게 깔리는 맹수의 울음소리.
그것들은 석탑을 둘러싼 사방에서 울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하나의 긴 하울링으로 합쳐졌다.
그리고 곧바로 늑대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