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전쟁의 끝
* * *
“도련님!”
따사로운 햇빛에 눈을 적응시키기도 전에 파샨이 달려들었다.
폭신폭신한 여우 털은 따끈한 봄 햇살을 잘 쬈는지 좋은 냄새를 풍겼다.
“잘 있었지? 내가 시간을 넘기진 않았나?”
“딱 맞춰서 오셨습니다! 어... 이건 뭡니까?”
“아. 이게 딸려왔네.”
손에 딱 맞아서 쥐고 있는 줄도 몰랐다.
아바르가 준 얼음송곳이 내 손바닥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마도구인가요?”
“글쎄…….”
그냥 얼음을 쪼개서 집히는 대로 준 거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다른가?
자세히 살펴보니 꽤나 정교한 삼각형 문양이 앞뒤로 새겨져 있었다.
아바르에게서 느꼈던 존재감이랄지, 아우라 같은 게 스멀스멀 풍기기는 하는데... 아바르가 준 거니까 나쁜 건 아니겠지.
나는 파샨의 뾰족한 귀 끝을 살짝 잡아당겼다가 놓는 손장난을 치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공터 주변에서는 병사들이 병장기를 끌며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군기가 바짝 들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축 늘어진 분위기도 아니다.
총대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 정도로 유지되고 있었다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고 본다.
잠시 서서 기다리고 있자니 타라와 이오시스가 찾아왔다.
“무탈하게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백작님.”
“존체를 회복하셨군요!”
안부 인사가 길어지려고 하기에 끊고 바로 물었다.
“내가 당장 알아야 할 게 있나?”
“전황은 가시기 전과 크게 달라지진 않았습니다. 적은 진영을 조금 물렸고, 아군 측에서 탈주병이 약간 나온 것만 빼면, 특기하실만 한 점은 딱히 없습니다.”
“오록스 단장은?”
“... 유해를 찾았습니다.”
“... 그렇군.”
타라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전쟁 중에 기사가 죽거나 다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왕국 제일의 기사와 싸우다 명예롭게 전사하셨으니, 아버지도 만족스럽게 눈을 감으셨을 겁니다.”
"내가 아는 제일의 기사는 오록스 단장이었어. 최대한의 예우를 약속하지."
그는 정말 우직하게 자기 책무를 다하는 기사였다. 그런 그에게 나름대로 도움도 많이 받았는데.
안타까운 죽음이다. 내가 더 강했더라면 그가 죽는 일은 없었겠지.
인근에서는 상대할 적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중앙에 비하면 나의 힘은 아직도 미력했던 것이었다.
무거운 침묵이 드리우자, 참을성 부족한 화리메가 성질을 부렸다.
“거기, 아무나 와서 이것 좀 받아.”
지목당한 친위대원이 얼른 와서 그녀에게서 묵직한 자루를 받아 들었다.
자연스레 시선이 그리로 쏠렸다.
“저게 뭔가요?”
이오시스가 실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저번에 파샨과 체닐린에게 먹인 거.”
“황금사과와 꿀술 말씀이시군요. 죽어가던 사람도 살릴 정도의 명약이었죠?”
그걸 약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나와 화리메는 그걸 먹고 마력을 절반 가까이 불렸는데.
그렇다고 마력 포션이라고 하기엔 뭔가 다르단 말이지.
아바르가 뿜어낸 존재감을 머릿속에서 되새겨본다.
그 아우라는 완전했다.
불투명한 마력은 물론이고, 다섯 가지 속성의 마법과도 달랐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아우르는 듯한 힘의 원천이었다.
그 아우라가 암브로시아와 넥타르에는 조금씩이나마 담겨 있었다.
치유나 마력을 늘리는 건 그것들이 지닌 여러 효능 중 한 단면에 불과한 거고, 본원적인 기능은 무언가 다른 데에 있는 게 아닐까?
예컨대, 이걸 계속 섭취하면 황금의 인간들처럼 된다든지?
“저, 백작님?”
내가 딴 생각에 빠져 있자 타라가 헛기침을 해서 주의를 주었다.
“아, 미안하군.”
“아닙니다. 백작님께서도 고민이 깊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만, 카산드라 공주가 제안한 휴전기간이 금일 자정을 기해 끝나게 됩니다.”
“연합군의 향방을 정해야겠군. 항복이냐, 항전이냐.”
“예. 백작님.”
“항복은 그들이 해야 할 거야.”
나는 팔뚝 위로 불길이 따라 흐르게 했다.
얼음송곳은 화염 속에서도 녹지 않고 오히려 시퍼런 빛을 발했는데, 그 빛을 화염이 감싸면서 굉장히 독특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내가 마력을 전부 회복한 것을 본 타라의 표정이 밝아졌다.
“다행이군요. 백작님과 달리 병무대신은 지난 전투에서 얻은 부상을 다 치유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니. 그 늙은이와 다시 붙을 생각은 없어.”
이전에 비등하게 싸웠다고 하지만, 그 때는 올드완이 아우럼 백작의 대마법에 직격한 후였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나와 싸우면서 얼굴 거죽이 녹아내릴 정도로의 부상을 입었다고는 하지만... 그 노인네가 보여준 경이로운 능력을 떠올려보면 당분간은 다시 맞붙고 싶지는 않다.
게다가 그가 검은튤립 기사단의 절반 정도를 수습해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아우럼 백작이 전장에서 이탈했고 오록스 단장과 백여우 기사단이 궤멸한 지금, 그의 기사단을 막아낼 전력이 내게는 없다.
“허면 어찌할 생각이신지요?”
백은의 시대에서도 내 나름대로 고민을 했었다.
마력을 회복하고 돌아간대도 도대체 어떻게 적들을 몰아내야 할지.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내가 올드완을 붙잡고 있는 사이에 아군이 검은튤립 기사단에게 박살나고 적 마력병 제대에 포위당하는 장면만 떠올랐다.
전력 차이가 너무 커서 무슨 전략을 쓰던 이기기가 힘든 것이다.
결국 떠오른 건 기책이다.
아우럼 백작의 배신처럼 적 진영을 뒤흔들 수 있는 기책.
다행히도 한 번 써봄직한 기책이 떠올랐다. 이걸 기책이라고 해도 될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당하는 올드완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겠지.
“카산드라 공주를 다시 불러. 핑계는 뭐든 좋아. 휴전 조건을 논의하겠다고 하면 되겠지.”
“공주가 다시 오겠습니까?”
“이미 한 번 왔다 갔는데 두 번 못 올 건 뭐야. 나와 올드완의 혈투를 말렸을 때도 그랬고, 카산드라 공주는 직접 나서는 걸 좋아하는 게 분명해. 자기가 무익하다고 생각하는 전쟁을 멈출 수 있다면 흔쾌히 찾아오겠지.”
타라와 이오시스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전령을 내보냈다.
그리고, 카산드라 공주는 정말로 아군 진영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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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예상치 못했는데.”
카산드라 공주는 멀쩡히 서 있는 내 모습을 보고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해독제를 찾은 건가?”
“아들놈이 보약이라고 가져다줬지 뭡니까.”
“... 대답하고 싶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아도 좋지만... 이제 내 제의를 수락할 생각은 없다는 건가?”
“공주님. 나도 좋아서 전쟁을 계속하려는 건 아닙니다.”
카산드라 공주는 붉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눈을 반짝였다.
“허면 내 조건을 받아들이겠다고?”
“서로 타협하자는 겁니다. 듣자하니 중앙도 사방에서 견제를 받고 있다는데, 저희 쪽에만 여력을 쏟아서야 되겠습니까?”
“그 문제는 그대가 신경 쓸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대의 대리인들에게 이미 전하라 말했을 텐데. 레시아르 백작, 그대의 항복. 그것은 타협이 불가능한 조건이라고.”
“그럼 어쩔 수 없지.”
내가 손을 치켜들자, 막사가 사방으로 찢겨나가며 기사와 친위대원들이 들어왔다.
“레시아르 백작!”
카산드라 공주는 의젓한 얼굴을 엉망진창 찌푸리며 이를 갈았다.
“호의를 이런 식으로 갚으려는가! 레시아르 가문의 명성이 땅에 떨어질 것이다!”
“이미 탕아로 유명한데 거기에 악명 하나 더해진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괜히 반항하다가 예쁜 얼굴 상하게 하지 말고 항복하시죠.”
“그대는 지나치게 방자하구나! 그 오만함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
카산드라 공주가 소리치자, 공주를 수행해온 여기사들이 동시에 각자의 무기를 빼 들었다.
금세 공주를 중심으로 하는 원형진이 완성되었다.
그 안에서 들어간 게 카산드라 공주와, 웬 남자 하나.
“공주의 애인이냐?”
괘씸하게도 애인이라면 죽이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데프르트 가문의 요리헤다.”
곱상한 얼굴에 냉기가 서려있는 걸 보니 공주의 호위 마법사인 모양이다.
수석의 마법사라면 화석의 마법사인 나로서는 좀 불리한 싸움이 되겠다. 공주의 호위 마법사인만큼 실력도 만만치 않겠지.
하지만 다키아 왕국의 제일기사인 올드완과도 비등하게 싸웠던 나다.
신들의 음식을 잔뜩 먹고 마력을 강화한 지금, 저깟 샌님에게 질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런데 공주를 호위하는 여기사들의 용모가 꽤 괜찮다. 실력이 아니라 용모만 보고 뽑았나 싶을 정도.
싸움에 휘말려서 죽게 하긴 아깝단 말이지.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요리헤. 여자 치맛자락 사이에 숨어서 싸울 테냐?”
“기사를 잔뜩 숨겨둔 그대가 할 말은 아닐 텐데. 레시아르 백작.”
“그런가?”
나는 손을 내저어 기사들을 뒤로 물렸다.
요리헤는 미심쩍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뭐 하자는 거지?”
“굳이 아랫것들이 피를 흘리게 할 필요는 없지. 결투를 신청한다. 요리헤.”
“둘만의 승부로 끝을 내자는 건가?”
“그래.”
요리헤는 가타부타 대답하기 전에 우선 카산드라 공주에게 허락을 청했다.
잠시 고민하던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 허락한다.”
어차피 요리헤가 내게 진다면 다른 여기사들이 한꺼번에 덤벼봐야 몰살당할 뿐이다.
카산드라 공주는 요리헤가 결투에서 이기는 데에 패를 걸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게 강요당한 결과가 좋을 리가 없지.
어쨌거나 요리헤는 원형진 안에서 나왔다. 그는 왼 손에 푸른색 수정이 달린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나, 요리헤 데프르트는...”
“죽었다!”
마법사 간의 전투에서는 무조건 선수필승.
같잖게 결투의 예식을 취하려는 요리헤에게 뜨끈한 불덩이를 선사해주었다.
“비겁한!”
카산드라 공주와 여기사들이 성을 내며 발을 굴렀지만 싸움에 비겁함이고 뭐고 없다.
어차피 공주를 인질로 잡으려던 시점에서 명예는 물 건너갔다. 여기서 조금 더 티가 묻더라도 크게 달라지진 않겠지.
“흡!”
요리헤는 급히 수정 지팡이를 곧추세웠다.
그래도 공주의 호위마법사라는 직책은 곱상한 얼굴로 따낸 게 아닌지, 요리헤는 거센 물줄기를 뿜어내 불덩이의 궤도를 비틀어 떨어뜨렸다.
하지만 한 번 수세에 처한 그에게 공세권은 돌아오지 않는다.
연이어서 돌아오는 나의 턴.
나는 계속해서 화염을 불러일으켜 요리헤의 전후좌우를 마구 들이쳤다.
“이런...! 잠...! 이...! 큿...!”
요리헤는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불덩이를 막아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남자의 신음소리라니. 기분 더럽군.
“죽어라!”
지면을 향해 내던진 화염구.
요리헤는 자신의 발치 앞에 떨어지는 불의 궤적을 보고는 의아해하지만, 그것이 땅에 퉁겨서 자신에게 날아오는 것을 보고는 경악한다.
“이, 이런...”
그게 요리헤의 끝이었다.
아차 한 순간 불덩이가 그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컥!”
그는 뒤늦게 마력 방어막을 만들어냈지만, 이미 화염이 피부를 자글자글 태워버린 후였다.
요리헤는 비틀거리다가 수정 지팡이를 놓치고 쓰러졌다.
“왕족의 호위마법사라는 것도 별 거 없군.”
흥얼거리면서 돌아선다.
“웃기지 마!”
요리헤의 외침과 함께 날카롭게 벼린 빙결마법이 날아들었다.
그야말로 기력을 짜낸 듯한 일격.
하지만 이 정도도 막아내지 못할 내가 아니다.
곧바로 화염의 벽을 세우려고 하는데, 허리춤에 매달았던 얼음송곳 거세게 진동하더니 요리헤가 쏘아낸 빙결마법을 쓱 빨아들였다.
요리헤는 눈을 번쩍 떴고, 나도 좀 놀랐다.
놀란 건 놀란 거고. 감히 내 뒤통수를 치려한 죗값은 치러줘야지.
등을 되돌려 요리헤를 향해 걸어간다.
그는 비척거리면서 도망치려 하지만, 나는 단번에 달려가서 놈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이런 비겁한 새끼!”
내가 비겁한 건 참아도 적이 비겁한 건 못 참는다.
여자라면 좀 봐줬겠지만,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남자 놈이라 그냥 죽여 버리기로 했다.
마침 손에 잡힌 얼음송곳을 그대로 요리헤의 목에 내리 찍으려는데,
“그만!”
카산드라 공주가 끼어들었다.
한 번 정도는 공주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나는 궤적을 바꾸어 요리헤의 목이 아닌 어깨에 얼음송곳을 팍 찍었다.
“끄흑...!”
요리헤는 펄떡이며 괴로워했다.
얼음송곳이 그의 견갑골을 부수고, 피를, 피를... 그래, 피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전면에 그려진 삼각형 문양의 오분의 일 정도가 연한 청색으로 물들었다.
이게 무슨 조화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얼른 그걸 소매 사이로 숨겼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카산드라 공주에게로 돌아갔다.
그녀를 둘러싼 여기사들은 불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일단은 무기를 내렸다.
“나는 그대를 선의로 대했다. 레시아르 백작.”
카산드라 공주는 여전히 의연한 자세로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패자였으니, 나는 너그러이 대답해주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지요.”
“그대는 그리 판단할 수도 있겠군. 허나 그대 연합군과 중앙군이 계속하여 다툰다면 그 분쟁의 끝에 있는 것은 확실히 지옥일 것이다.”
“우리를 그리 걱정해주면서 군대를 이끌고 우리의 터전을 짓밟으러 오셨습니까?”
“…….”
“이제는 내가 묻지요. 결투의 결과를 존중하여 항복하겠습니까? 아니면 끝까지 싸우다가 부하들을 개처럼 죽게 할 겁니까?”
“... 항복하겠다.”
“현명하시군. 모셔라.”
포로라고는 해도 공주니, 체닐린이 직접 그녀를 호위하듯 데려갔다.
“아, 공주님. 이건 잠시 빌리겠습니다.”
나는 공주의 허리를 쓰다듬듯 해서 옆구리에 찬 검을 가져갔다.
카산드라 공주는 머리색처럼 붉어진 얼굴로 나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여기사들은 모든 무장을 해제당한 채 감시를 받게 되었다.
요리헤는 그냥 질질 끌려 나갔다. 목숨이라도 건진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지. 가문에 몸값은 청구하겠지만.
파샨은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공주를 잡았으니까 이렇게 전쟁이 끝나는 겁니까?”
“아니. 군을 이끌고 온 건 병무대신이야. 그의 전쟁의지를 좌절시켜야지.”
“그럼 공주를 인질로 삼아서 물러나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 늙은이가 그런다고 쉽게 물러나겠어? 내가 아직 독에 당해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전투를 벌여서 공주를 되찾아가려고 할 수도 있어.”
“그렇다면...”
“그럴 생각도 못하게, 내가 건재하다는 걸 알려야지.”
나는 파샨이 저택에서 타고 날아온 괴조를 불러오게 했다.
일전에 대머리 상인에게서 예물로 받은 녀석.
놈은 진영 뒤편에서 고기를 뜯고 있다가 불려 와서 그런지 기분이 영 안 좋아 보였다.
“고타마.”
“하푸르르르”
이게 내 말에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콧방귀를 뀐다.
“이 나쁜 새!”
파샨이 부리를 탁 때리자 그제야 나를 본다. 동글동글한 검은 눈동자가 나름대로 귀여워 보이기도 한다.
덩치가 너무 커서 그렇지.
“저는 얘가 너무 빨리 커서 징그럽습니다.”
“그렇긴 해. 알에서 깬지 이제 고작 반 년 정도일 텐데.”
만 나이로 따지면 0살인 녀석이 사람 네다섯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태우고 날아다닐 정도로 크니.
그 덕분에 유용하게 쓰고 있긴 하지만... 내 말은 영 안 듣는다. 벌써 반항기인가?
저번에 보니 이오시스는 잘만 조종하던데. 파샨도 그렇고.
“혹시 수컷인가?”
해서 보니, 암컷이었다.
어쩔 수 없이 파샨의 도움을 받아 고타마의 등 위에 안장을 올리고 목에 줄을 걸었다.
파샨은 내 앞에 착 앉아 줄을 당겼다.
“도련님!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좋아, 출발!”
“출발합니다!”
파샨이 목줄을 잡아당기자, 고타마는 푸르르 울며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각력이 얼마나 센지 한 번의 도약으로 십 미터는 뛰어오른 듯했다.
고타마는 날개를 쫙 펼치고 몇 차례 더 허공에서 발길질을 하더니, 그대로 기류에 올라 활강에 나섰다.
“와하하하하!”
파샨은 기분 좋게 고타마를 몰아 적진으로 향했다.
슬슬 해가 저물던 참이었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던 적병들은 석양을 등지고 날아오는 고타마를 보고 혼란에 빠졌다.
“마수다!”
고타마는 낮게 날며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나는 좌우로 손을 뻗고 길게 화염을 뿜어냈다.
화르르르륵.
고타마가 지나가는 길마다 양쪽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불길이 막사와 장작더미를 덮친다.
겨우내 바싹 마른 나무는 불씨가 옮겨 붙자 엄청난 기세로 불타올랐다.
“물! 물 떠와!”
“아니, 저 마수를 격추시키는 게 먼저다! 기사단 호출해!”
역시 정예군이라 대응이 빠르다.
불에 달군 창을 내던져 호루라기를 부는 사관들 몇 놈을 저격했지만, 이 넓은 숙영지를 한 번에 다 제압할 수는 없다.
결국 갑주를 챙겨 입은 검은튤립 기사단원들이 우르르 달려오기 시작했다.
“격추시켜라!”
약식화된 명령에 따라 기사들은 한쪽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마력창을 투척한다.
고타마는 얼른 위로 떠올랐지만, 촘촘히 형성된 화망을 전부 벗어나진 못하고, 결국 마력창에 꽁지깃을 맞아서 눈물을 찔끔 흘렸다.
“더 올라가자!”
“넵!”
파샨은 목줄을 고타마의 부리 밑까지 올려서 잡아당겼다.
고타마도 아픈 건 싫은지 열심히 날갯짓을 하며 고도를 높였다.
“마수가 도망친다!”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렀지만, 나는 아직 돌아갈 생각이 없다.
파샨을 시켜 고타마가 상공에서 맴돌도록 하면서 천천히 마력을 끌어 모은다.
확실히 이전보다 마력량이 풍부해지고, 그 흐름도 원활해진 게 느껴진다.
개고생을 하긴 했지만 백은의 시대에 다녀온 보람이 있단 말이야.
그대로 주먹을 꽉 쥐고 마력을 응축시키는데, 소매 안에 숨겨둔 얼음송곳이 빛을 내며 또 한 번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걸 손아귀에 넣으니 서늘하고도 묵직한 감각이 느껴진다.
요리헤와 결투할 때도 그렇고, 역시 보통 물건은 아닌 듯 싶다.
즉흥적인 착상에 따라 얼음송곳의 뾰족한 첨단부를 아래쪽으로 향하게 한다.
웅...
모아둔 마력이 쭉 빨려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더니, 얼음송곳이 내가 쥔 것 외에도 수백, 수천 개로 늘어난다.
나는 그것들이 더 이상 늘어나지 않을 때까지 마력을 끌어 허공에 잡아두었다가, 한꺼번에 떨어뜨렸다.
대기를 가르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린다.
칼날 같은 우박이 우수수 떨어지자 지면에서는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도망쳐! 산개했다가 재집결한다!”
“대체 어디로 도망치란 말입니까! 하늘에서 칼날이 쏟아지고 있는데!”
“커헉...”
기사나 마력병이라면 재주껏 마력으로 방어막을 만들어내지만, 보병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정수리가 쪼개져 쓰러졌다.
하늘에서 받은 공격이라는 게 대응을 더 어렵게 했다.
게다가 병사들이 몸을 사리자, 낮게 날며 던져두었던 불똥이 기세를 올리며 더 커졌다.
땅에서는 불길이 치솟고 하늘에서는 얼음이 떨어져 내리는 끔찍한 상황.
군기정연한 중앙의 군병들도 결국에는 넋을 놓았다.
애쓰고 지어둔 숙영지는 박살이 났고, 소와 말은 난리 통에 날뛰며 그렇지 않아도 개판인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마법사다! 마법사가 새로 변해서 불과 얼음을 뿌리고 있다!"
"유언비어를 퍼뜨리지 마라!"
"레시아르의 탕아가 돌아왔다! 데픈 후작의 기사단을 통째로 구워버린 화염의 악마가 돌아왔다고!"
"저 놈 잡아! 간자가 틀림없... 컥...!"
나는 기사들의 마력창이 날아들지 않는 고도에서 화염과 우박을 뿌려 댔다.
갈수록 혼란이 커진다.
그 혼란을 가중시키며 적 진영을 빙빙 돌면서 불과 얼음을 내리는데,
“바이스 레시아르!”
올드완의 노호성이 들렸다 싶더니, 기다란 창대가 휙 날아왔다.
한 순간 점으로 보였던 것이 선으로 늘어나더니 어느새 고타마의 날갯죽지 사이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피하기는커녕 반응할 새도 없었다.
지상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만데... 저 괴물 같은 노인네.
창대가 나나 파샨을 꿰뚫지 않은 게 천운이었다.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고타마의 목줄을 잡은 파샨도 부르르 떨었다.
“도, 도련님...”
“그래. 저런 놈은 상대 안 하는 게 상책이야.”
그래도 이 정도면 내가 건재하다는 걸 중앙군 말단 병사들까지 충분히 알았겠지.
목표는 충분히 달성했다.
나는 파샨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파샨은 고타마를 크게 선회시켜서 아군 진영으로 돌아가게 했다.
아니, 마지막으로 불꽃을 크게 피우고는 용케 무너지지 않은 망루 위에 잽싸게 카산드라 공주의 검을 던져놓았다.
“바이스! 레시아르! 이 교활한 놈아!”
올드완의 분통 터지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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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와 이오시스는 불과 얼음의 폭격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며 적들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을 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내 생각에 전날의 폭격이 적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진 못했을 것 같다.
워낙 적이 많은데다가 정예하기까지 해서 말이지.
하지만 심리적인 타격은 확실히 주었을 거다.
병사와 기사는 물론이고 지휘관인 올드완에게까지.
1. 카산드라 공주는 인질로 잡혔다.
2. 나, 레시아르 백작은 건재하다. 게다가 더 강해졌고 이제는 괴조를 타고 날아다니며 얼음 마법까지 쓴다.
3. 다른 지역의 영주들은 점점 더 불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올드완이 취할 수 있는 수는 그리 많지 않다.
그는 결국 부단장을 보내 신사협정을 제안했다.
부단장은 깔끔한 인상의 중년 남자였다.
그는 흠 잡을 데 없는 착실한 태도로 협정안을 읊었다.
“어떠십니까, 레시아르 백작님?”
“음... 내용은 괜찮은데, 형식이 신사협정이라는 게 마음에 영 안 드는데.”
“병무대신께서도 고심 끝에 내린 결정입니다. 그 분께는 그 이상의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으니까요.”
“신사협정이라는 건 강제성이 없다는 거잖아? 뒤돌아서면 바로 파기하는 거 아니야?”
“병무대신께서는 명예와 의리를 숭상하시는 다키아 왕국 제일의 기사십니다. 신사협정이라고 해서 파기한다는 식의 주장은... ”
“글쎄.”
스스로 협잡질에 나서지는 않았더라도 그걸 알면서 묵인한 건 똑같다.
그래도 그가 협정을 굳이 깰 이유는 없을 듯하다. 만에 하나 그러더라도 내게 손해랄 건 딱히 없고.
올드완이 제시한 신사협정의 내용은 간단했다.
하나. 병무대신은 일 년 간 레시아르, 파티스트롬, 켈자르 가문의 직할령 및 그 부속령을 침범하지 아니한다.
둘. 레시아르 백작은 카산드라 공주의 안위 보전을 위하여 최대한의 성의를 다하며 카산드라 공주의 조속한 왕도 귀환을 위해 노력한다.
셋. 포로는 조건 없이 일대일로 교환한다.
넷. 병무대신은 레시아르, 파티스트롬, 켈자르 가문에 각 3천 골드씩을 사교비 명목으로 지급하기로 하고, 데프르트 가문을 지급보증인으로 한다.
내가 부담하는 의무는 공주의 안전보장에 관한 거고, 그나마도 추상적인 것뿐이다.
언제까지 어떤 방식으로 카산드라 공주를 억류하건 그건 내 마음에 달렸다는 거지.
반대로 올드완은 서북방의 강역에서 물러나 보상금까지 지급해야 할 의무를 진다.
지급보증인인 데프르트 가문의 요리헤를 내가 인질로 잡고 있으니, 올드완이 돈을 내지 않으면 그 놈들이 제 주머니를 털어서라도 금화를 대령하겠지.
대외적으로 공표할 수가 없어서 그렇지, 이 정도 조건의 신사협정이라면 사실상 중앙의 패전을 인정한 거나 다름없다.
“좋아. 내 넓은 마음으로 병무대신의 청을 받아들이지.”
“청이라니요, 신사협정...”
“그게 그거 아닌가? 하여간 올드완에게 전해. 다음에 싸우게 되면 이렇게 좋게는 안 끝날 거라고.”
나는 벌레 씹은 표정을 한 부단장의 어깨를 후려치고는 자기 진영으로 돌려보냈다.
“전승을 경축 드립니다.”
아군 진영의 모두는 밝은 표정이었다.
전쟁 목적을 달성했다고 보기는 애매하지만, 어쨌거나 중앙을 상대로 이겼다는 데에 의의를 두는 걸까.
아니면 그냥 전쟁이 끝나서 좋은 건지도 모르지.
신사협정이 체결되고 바로 그 다음날.
중앙군은 막사를 모두 거두고 물러났다.
솔직히 말해서, 힘겨운 전쟁이었다.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도 아니었고.
그래도 이제는 좀 쉴 수 있겠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