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92화 (92/166)

〈 92화 〉 상견례

* * *

다음날 아침.

헤시아스 남작은 내게 아내를 범한 사실을 따져 물었다.

못생긴 얼굴에 분노가 그득한 걸 보니 어지간히 아내를 아꼈던 것 같은데.

“그게 그대의 아내였다고?”

“예! 아무리 백작님이라고 해도 귀족의 아내를 함부로 취한 일은!”

“잠깐만. 내가 미약에 취해서 누가 누구인지를, 음, 그러고 보니 그 방에 미약향을 피워두었지?”

“그... 그건...”

“그리고 내게 침실을 내어주겠다고 했으면서 왜 아내를 안으로 들인 건가? 뭔가 수작을 부리려고 한 건 아니겠지?”

“그건...!”

자기 꾀에 넘어간 헤시아스 남작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불의의 사고였어. 그렇지? 그러게 왜 미약을 푼 방에 아내를 집어넣었나? 그대가 다른 수작을 부리려고 한 게 아니라면 그냥 아내를 바친 것밖에 더 되냔 말이야.”

“... 후우... 후... 그렇... 지요...”

“서로 덮어두도록 하자고. 이 일이 알려지면 그대도 좋을 게 없지 않나.”

어깨를 다독여주자 헤시아스 남작은 어금니를 악 물었지만, 어쩔 거냐고.

그는 나를 어쩔 수 없지만, 나는 그를 괴롭힐 수단을 열 가지는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남작의 아내가 따라주는 차를 받아 마시며 느긋한 아침을 보냈다.

남작 부인은 나를 볼 때마다 허벅지를 비비적거리면서 안달을 못했다. 꽤 볼만한 광경이라 그걸 다과 삼아 차를 후루룩 마셨다.

“참. 그런데 아버지는 잘 계시나?”

“... 전 백작님 말이십니까? 유유자적하게 지내시지요. 배를 띄워서 낚시도 하시고, 가끔은 인근의 귀족들을 불러서 야회도 여십니다.”

“유유자적한 삶이라. 그거 부러운데.”

그럴 리가 있나.

중앙에서는 연합군 영주들에게도 회유와 협박으로 배신을 유도했다.

레시아르에 있어 더 큰 쐐기가 될 수 있는 아버지를 그냥 놔뒀을 리가 없다.

분명히 무슨 수를 썼다.

하지만 그 수가 뭐든 크게 상관은 없다. 어차피 이번에 다 해결하고 갈 생각이었으니.

“배 준비해.”

“배라니, 혹시...”

“아들로서 문안인사는 여쭈러 가야지.”

“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드디어 이 놈이 떠나는구나 싶어 헤시아스 남작은 안색이 밝아졌다.

“점심은 돌아와서 먹을 테니까 준비해놓고.”

“아... 그러시군요...”

“농담이야.”

남작 부인에게 차를 한 잔 더 청해서 마시고, 미련 없이 일어섰다.

“헤시아스 남작.”

“예. 백작님.”

“불만 있나?”

“어, 없습니다.”

“있어도 상관없어. 반기를 들고 일어나 중앙과 연계하는 것도 그대의 자유겠지. 허나 두 번은 없어. 알겠나?”

내 눈빛을 받은 헤시아스 남작은 바싹 엎드려 두 손을 뻗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손을 내밀었고, 그는 인장반지에 키스했다.

“조세는 지금까지 내던 것의 1.5배로 늘린다. 올해부터.”

“알겠습니다.”

“연합군에 참여해라. 보병 이천, 마력병 이백, 기사 이십 정도는 마련할 수 있겠지.”

“그, 그리 하지요.”

“헤시아스 가문에서도 사람을 보내. 은혈 이상. 가급적이면 여자가 좋겠는데.”

“백작님 뜻대로 하겠습니다.”

헤시아스 남작은 체념했는지 내 요구를 모두 받아들였다.

그는 나를 문 밖까지 배웅했다.

“귀하신 분. 저는 이제...”

페릴이 공손히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아. 이제 들어가야 할 시간인가?”

“예. 귀하신 분과 함께 보낸 시간은 평생 잊지 않고 소중히 기억하겠어요.”

“그럴 필요 없어.”

“예...?”

“거기. 너. 이런 일 담당하는 게 너였던가?”

“맞습니다. 백작님. 제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친위대원 중에서는 잡무를 담당하는 대원도 물론 있다.

그녀는 페릴에게 눈짓을 해서 자기 뒤로 붙도록 하고는 무어라고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택 메이드로 들어갈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출신이 출신이다 보니 내 소유의 창관인 초가을의 과실에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거기서 일하게 되면 멜론과 함께 내 전담 창부가 되겠지.

그런 세세한 건 친위대원들이 알아서 정할 테고.

페릴에게서 눈을 떼고 나가려고 하는데, 한 무리의 미녀들이 길을 막아선 게 보였다.

카산드라 공주, 마리안, 아마트리체, 화리메, 타라와 이오시스, 체닐린까지 이번 전쟁에 동행한 여자들이 모조리 저택 앞에 모여 있었다.

“뭐가 이렇게 많아. 왜들 모였어?”

“그대에게 전언이 있다. 시급을 요하는 일이다.”

“…….”

“전쟁이 끝나고 나니 약속은 까맣게 잊었나요?”

“가주님 소식은 아직도 없어?”

“결재해주셔야 할 일이 사흘 치나 밀렸습니다.”

“그, 그만 벌을 거둬주십사...”

“떼놓고 다닐 거면 왜 나를 호위기사로 들인 건가? 그리고 렌셀이라는 자는 왜 호위기사단에 넣은 거고?”

“아이고. 골이야. 그래. 일단 따라 와. 가면서 얘기하자.”

나는 일곱 명의 여자들이 한꺼번에 떠들어대는 걸 흘려들으며 부두까지 갔다.

거기서 다시 작은 배를 타고 부두 앞의 섬까지 향한다.

섬은 작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백작의 아버지가 유폐당한 섬이라 그런지 정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좀 심심한데.

나는 이오시스를 가까이 불러 엉덩이를 콱 쥐었다.

“으흐읏...”

그녀의 실눈이 더 가늘어지며 눈썹 끝에 눈물 한 방울을 매달았다.

엉덩이가 씰룩씰룩거리는 게, 그 안에 꽂혀 있는 나무막대기가 어지간히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백작, 님, 잘, 못, 했습, 니다...”

“뭘 잘못했지?”

“자정, 의, 여명... 사병, 을, 만들, 고, 보고, 를, 게을리 한, 죄를, 잘못, 했습, 니다.”

“좋은 뜻으로 한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말이야. 내 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내가 몰라서는 안 되지.”

“옳으신, 말씀, 이십, 니다.”

“그건 내일까지 끼고 있어.”

이오시스는 허리를 비척이면서도 고개인사를 했다.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움찔거리는 모습을 보니 내일까지도 고생 좀 하겠다.

이오시스를 가지고 장난치는 사이 저택 앞에 도착했다.

저택은 조용했고, 사용인들은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옅었다.

쨍그랑!

아니. 그 중에서도 망아지처럼 뛰노는 애가 하나 있기는 했다.

맞지도 않는 헐렁한 메이드복을 입은 여자애가 접시를 턱 밑까지 쌓아서 들고 뛰다가 넘어진다.

근처에 있던 사용인들은 그녀를 탓하지 않고 일으켜 준 후에 사금파리를 주워주었다.

그래도 여자애는 헤실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정신머리가 없는 년이군.”

“아직 어리니 그렇지요.”

늙은이 하나가 다가와 고개를 조아렸다.

“이름이 뭔가?”

“매크만이라 합니다. 백작님.”

“아니. 자네 말고. 저 여자애.”

“... 로자입니다.”

“음.”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리로.”

늙수그레한 노인은 나를 아버지에게로 안내했다.

아버지는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서 있었다.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

아버지는 묵묵히 바다만 보았다.

“아들이 인사하지 않습니까. 아버지. 늘그막에 귀가 먹으셨습니까?”

책장에 놓인 꽃병을 탁 쳐서 깨뜨린다.

유리 깨지는 소리에 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방자한 성품이 더 악화되었구나. 하기는, 저 좋은 대로 하고 사는데 바뀔 리가 있나.”

“아버지께서도 더 비겁해지셨습니다. 아들이 무서워서 다리가 벌벌 떨리면 이불 속에 숨어계실 것이지, 듣고서도 안 들리는 척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이런 후레자식.”

“다 아버지의 교육 덕분이지요.”

아버지는 팔짱을 끼고 혀를 찼다.

“한 마디도 지질 않는구나.”

“정겨운 인사는 서로 이쯤 하지요. 중앙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중앙이라니?”

아버지는 자연스레 모른 척 잡아뗐지만, 정말 아무런 접촉이 없었다면 아버지는 불쾌해하며 성을 냈을 거다.

나는 책장 근처에 의자를 끌어 와 앉고는 다리를 꼬았다.

“선택 잘 하셔야 합니다.”

“고얀...”

“아버지는 못 했던 일을 나는 해냈습니다. 켈자르를 꺾고, 파티스로부터 차관을 얻었으며, 이들과 연합해 중앙까지 이겼습니다. 내가 뭐든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쇼.”

잠시 고민하던 아버지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 네 말대로다. 또 한 번 틀린 선택을 했다가는 네가 나를 가만두지 않겠지.”

아버지는 두 손을 깍지 끼고 내 뒤에 선 여자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긴가민가 하는 표정으로 살피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붉은색 머리카락을 묶은 저 분...”

“카산드라 공주십니다.”

“하……. 그럼 백금색 장발을 땋은 아가씨는...”

“파티스트롬 가의 아마트리체 영애죠.”

“…….”

“은회색 머리를 단정하게 빗은 이 미인은 마이포흐 남작이고, 키 큰 여기사는 그 동생인 체닐린 마이포흐입니다. 황금처럼 빛나는 금발을 가진 여자애는 아우럼 백작가의 마법사인 화리메고요. 오록스 단장의 여식인 타라와 집사장 뮌의 손녀인 이오시스는 아버지도 아시겠지요.”

“내가 못한 걸 네가 했다는 걸 알겠다. 이 빌어먹을 난봉꾼 자식아.”

아버지는 깊이 한숨을 쉬고는 일어서서 여성진들에게 정중히 자리를 권했다.

잠시 의자를 내오고 앉느라 자그마한 소란이 일어났다.

소란이 정리되고 나서야 아버지는 운을 떼었다.

“이 분들과 네 관계는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데려왔으니 다 알아도 되는 사이라고 믿겠다.”

“예. 숨기는 것 없이 다 말하셔도 됩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중앙은 네 계승권을 흔들 생각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내가 계승한 백작위를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귀족은 혼자서 귀족인 것이 아니다. 영지를 가꾸는 농부와, 성을 지키는 기사와, 무엇보다도 서로의 고귀함을 인정하는 같은 귀족이 있어야 비로소 귀족인 것이다.”

“내게 충성하는 농부와 기사들이 흔들릴 것 같지는 않고. 귀족들에게 수를 쓸 생각인가 보군요.”

“추문은 그 자체만으로 악취를 풍기기 마련이지. 고귀함의 근간이 되는 계승권을 물고 늘어진다면 네 위신은 물론이고 연합군 전체가 붕괴할 수도 있다.”

가만히 듣던 카산드라 공주가 고개를 저으며 끼어들었다.

“전 백작께서는 중앙이 그대들을 계속 흔들 것이라 생각하시는군.”

“그럴 것입니다. 공주 전하.”

“내 생각은 다르다. 여기, 얼마 전에 정무대신이 보낸 서찰이다.”

그녀는 화려한 금박으로 장식된 종이를 흔들었다.

“적힌 내용은, 레시아르 백작 그대와 나 사이에 혼약을 주선하겠다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나 놀라운 소식이었지만 아마트리체가 제일 먼저 반응했다.

“그, 그런 건...”

하지만 왕가의 혼사에 불만을 털어놓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금방 입을 다물었다.

불만어린 시선이 내게로 향하기는 했지만.

나는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중얼거렸다.

“이 놈들이 뭐하자는 수작이지?”

“시간을 벌겠다는 것 아니겠느냐. 사방의 영주들이 불만을 토해내고 있으니, 회유책과 이간질을 병행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죽도록 싸워놓고 회유책을 쓴단 말입니까?”

아버지는 가소롭다는 듯 비웃음을 머금었다.

“아들아. 너는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하겠지만 왕국은 거대하다. 너는 그들에게 여러 골칫거리 중 하나일 뿐이야. 적수가 아니니 회유책도 쓸 수 있는 것이지.”

“아버지는 그 골칫거리도 되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 여하튼 중앙에서는 너를 안에서부터 잠식할 생각일 것이다. 피아가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서 화염은 타오를 수가 없을 테니 오히려 더 효과적일 수도 있지.”

“거만한 놈들.”

“그렇기는 해도 네게 손해될 것은 없지. 중앙이 다시 정벌군을 꾸려 레시아르를 침공해 온다면, 막을 수 있겠느냐?”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지만, 글쎄. 또다시 정벌군이 침공해온다면?

중앙과 레시아르는 전쟁수행능력이 현격하게 차이난다.

어찌어찌 격퇴해낸다고 해도, 중앙이 계속해서 정벌군을 보낸다면 레시아르는 전투에서 이겨도 전쟁에서 파멸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혼약은 일단 받아들여야 한다.”

“속셈이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말입니까?”

“아니까 받아들여야지. 아니까 대처할 수 있는 것 아니냐?”

“하지만 제가 공주와 혼약하면 다른 영주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분쟁이 봉합되었다고 생각하겠지. 왕가도 그걸 노리는 걸 테고. 하지만 이건 중앙과 레시아르 가문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다.”

아버지는 이번 혼약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나열했다.

첫째로 소모적인 전쟁의 종결.

둘째로 부마 지위 획득을 통한 가문의 품격 상승.

셋째로 강력한 금혈 여성의 편입.

넷째로 중앙과 왕가에 대한 소통 창구.

마지막으로 막대한 지참금.

듣고 보니 귀가 좀 솔깃하긴 하다.

나는 카산드라 공주에게 공을 돌렸다.

“공주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그것이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따르겠다.”

“이상주의자인지 현실주의자인지 모르겠군요. 어쨌거나 공주께서도 찬성이라면, 나로서도 받아들이는 게 좋겠지. 하지만 일단은 약혼하는 걸로 합시다.”

바로 혼인을 승낙하기에는 서로 흘린 피가 너무 많다.

게다가 대뜸 결혼식을 올렸다가 파기하기라도 하면 서로에게 추문이 퍼질 테고.

카산드라 공주는 떨떠름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그다지 거부감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도 왕가의 일원인만큼 자신이 정략혼의 대상이 될 거라는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 정실로 들어오려던 아마트리체는 인상을 팍 썼다.

자리가 파하면 바로 내게 따져들 투다.

첩실인 화리메도 좋은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나머지 여자들도 마찬가지.

나는 슬그머니 말을 돌리기로 했다.

“혼약에 대해서는 그렇게 정리하기로 하고, 계승권 분쟁은 중앙의 수를 보고 정하기로 하는 게 낫겠습니다. 아버지는 일단 돌아선 척하고 중앙에 대가를 요구하시죠. 뭘 받든 그대로 전달해주시고요.”

“그렇게 해서 내가 얻는 건 뭐냐?”

“아들의 존경... 아니, 그렇게 똥 씹은 표정을 할 건 뭡니까. 유폐를 풀어드리지요. 헤시아스까지는 나가서 돌아다니셔도 됩니다.”

“허. 고마워 죽겠구나.”

어차피 중앙에서 받은 대가는 자기 호주머니 속으로 쏙 들어갈 거면서.

그 점을 지적하려 하자, 아버지는 손을 내저으며 이야기를 마무리지어버렸다.

“내 알아서 하겠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연락하마.”

따분한 유폐생활에서 벗어나 할 일이 생기자, 아버지는 활기가 나는 모양이었다.

“신나하는 건 좋은데, 사람을 남기고 갈 테니 뭐하는지 일일이 보고하셔야 합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느냐?”

아버지는 자존심이 상한 눈치였다.

이대로 돌아가면 연락을 태만하게 할 게 뻔하다.

그러다가 백작위를 돌려주겠다는 중앙의 감언이설에 넘어갈 수도 있겠지.

나는 깨진 화병의 유리조각을 집어 들었다.

“여기 어린 메이드 하나가 있더군요. 로자라고 하던가.”

미간을 모으던 아버지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반응을 보니 꽤 아끼는 아이 같은데요.”

“... 숨길 수도 없겠구나. 어떻게 알았느냐?”

“비싼 접시를 깼는데 사용인들이 접시보다도 아이를 걱정하더군요. 마력은 미미하고 이름도 투박한데 말입니다.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저택의 주인이 아끼기 때문이겠지.”

나는 유리조각을 휙 퉁겨서 소리를 냈다.

그러자 문밖에서 기다리던 파샨이 로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나이는 겨우 열 살이나 됐을까.

작은 토끼 같은 게, 내 저택에 있는 메이드 유리와 비슷한 인상이다.

활기차고 천진난만해서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사람에게도 빛을 주는 유형의 소녀겠지.

지금은 자기가 뭘 잘못했나 싶어서 벌벌 떨고 있다만.

로자의 겁먹은 모습을 본 아버지가 내게 화를 내려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늘그막에 가까이 두고 재롱 피우는 거나 보며 시름을 달랬을 뿐이야. 그 아이에게는 잘못이 없다.”

“누이들에게도 잘못은 없었습니다.”

“... 그 애들은 레시아르 가문을 위한 일을 했다. 카산드라 공주께서 네 놈과 정략혼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이들은 대신의 첩실이 아니라 실험체가 되었던데요.”

“그게 무슨...”

“그것까진 모르는 모양이군. 뭐,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거라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나는 로자를 확 끌어다가 뺨을 후려쳤다.

“꺅!”

“바이스!”

아버지의 눈에서 불길이 확 튀어 올랐다.

그걸 보는 내 눈에서도 화염이 치솟았다.

“누이들은 금화 몇 푼, 이권 한 토막에 팔아놓고서 이 푼수데기 꼬맹이랑 소꿉놀이나 하고 있었습니까?”

“…….”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 미안... 하다...”

“아버지는 못한 일을 내가 했다고 했지요. 이데트 누님은 이미 데려왔습니다. 파레트 누이와 수잔느 누이도 곧 데려올 겁니다. 그게 레시아르 가문을 이끄는 가주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아버지는 풀이 죽어 고개를 숙였다.

진정으로 반성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런 인간이니까.

하지만 이만큼 쐐기를 박아두었으니 쉬이 배신하지는 못하겠지.

나는 쓰러진 로자를 일으켰다.

“이 아이가 얼마나 소중하십니까? 어차피 사용인들에게 물어보면 알게 되는 사실이니, 솔직히 말하시죠.”

“... 모든 걸 잃고 무기력해진 내게 빛을, 활력을 내려주었다. 손녀... 라고 생각한다.”

“허. 딸들은 팔아 치워놓고서 생판 타인과는 소꿉놀이라. 하여간 좋습니다. 그만큼 아끼신다니. 앞으로는 아버지가 허튼 짓을 하신다면 아버지 대신 이 아이가 고통 받을 겁니다.”

“데려갈 생각이냐?”

“아뇨. 근처에 두고 지금까지처럼 아끼십시오. 허나 자정의 어슴푸레한 여명 속에서 언제나 내 심복이 이 아이를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그러다 허튼 수작을 꾸민다고 판단된다면...”

내 손이 로자의 목을 둘러쌌다.

아버지는 주먹을 쥐고 으르렁거렸다.

“바이스...”

“그렇게 노려보실 것 없습니다. 저는 미인은 잘 안 죽여요. 이 아이도 커서 미인이 될 게 분명한데 왜 죽이겠습니까. 다만 군인과 어부를 상대로 하는 서비스업에 종사할 수는 있겠죠.”

“알았다! 알았어! 너는 하겠다고 하면 두 번이라도 할 놈이지! 맹세하마! 너를 배신하지 않겠노라고!”

아버지는 자신의 자존심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고개를 숙였다.

고귀한 여성이 일곱이나 모인 자리에서 자식에게 머리를 숙이는 게 보통 치욕스러운 일은 아니겠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했다.

“그럼, 시간 나면 또 들르겠습니다.”

“... 알았다.”

아버지는 뺨이 부어오른 로자를 끌어안고 지친 얼굴로 끄덕였다.

이 광경만 보면 내가 엄청난 악역이 된 거 같군.

그들을 뒤로 하고 방을 나서자마자 카산드라 공주가 한숨을 푹 쉬었다.

“내 지아비는 소녀의 뺨을 치고 아비에게 절을 받는 인간이었구나. 결혼생활이 벌써부터 걱정되기 시작했다.”

“의외로 내 여자에게만은 따뜻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대의 여자가 한둘이 아니니 그것이 더 걱정이다.”

공주는 은근히 허리를 휘어잡는 내 손을 탁 치면서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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