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99화 (99/166)

〈 99화 〉 각자의 길

* * *

내 물음에 이오시스는 눈치를 살피다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정기보고가 들어오지 않고 있는데, 아마도 잠입에 실패한 것 같아요.”

“그래?”

“송구합니다…….”

실패한 거야 어쩔 수 없다. 정오의 그림자에 비하면 자정의 여명은 이제 막 만들어진 신생기관이니까.

하지만 실패했으면 실패했다는 보고라도 들어와야 하는데.

아직 미숙한 건 어쩔 수 없는 건가.

“잠입에 실패했다는 건 말이야, 중앙에서 이미 아우럼 가를 멸문시켰다고 보는 게 맞을까?”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하지만 그 반대로...”

“아우럼 가가 예상 외로 건재할 수도 있다?”

“예. 백작님.”

나는 손가락을 꼽아보며 가능성을 점쳐보았다.

베티아의 역량을 보면 자정의 여명 단원들의 기량도 만만치는 않을 터.

중앙과 아우럼 가문 간에 비등비등한 싸움이 이어지고 있다면 그 틈을 노려 내 누이들과 화리메의 유모를 구출해왔을 거다.

그런데 그들이 정기보고조차 보내지 못할 정도로 당했다면, 그건 중앙이나 아우럼 가문이 지역의 지배권을 공고하게 틀어쥐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게 중앙이냐? 아우럼 가문이냐?

그걸 영 모르겠단 말이지.

“이거 골치 아프네.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파악을 해야 대책을 세울 텐데.”

“막무가내로 단원을 더 보내면 피해만 더 늘 수도 있어요.”

“그렇긴 하지.”

내가 이마를 짚고 다리를 쭉 펴자, 이오시스는 자연스레 종아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책사라고는 하지만 그녀도 내 여자.

이렇게 마음이 동하면 일을 물리고 배를 맞추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몸을 겹쳤다.

격렬한 정사는 금방 끝을 맞이했다.

“응... 읏... 하으으... 백작님... 안에, 안에 싸주세요...”

이오시스는 내 아이를 낳기를 원하는지 늘 질내사정을 조르지만, 사람 마음이 꼭 하라고 하면 하기 싫은 법이라.

나는 마지막 순간에 빼서 이오시스의 둥근 엉덩이에 흰 자국을 남겼다.

이오시스가 울상을 지으며 흩뿌려진 정자를 주섬주섬 자신의 가랑이 사이에 집어넣는 광경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한 번 더 할까 생각 중인데, 친위대원이 다가와 알현을 원하는 자가 있다고 알려왔다.

어지간한 자라면 파샨의 선에서 끊었을 테니, 만나볼 가치가 있는 자겠지.

나는 이오시스가 자리를 정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에게 들어오라고 전했다.

이내 파샨이 먼저 들어와 내 곁에 서고, 꾀죄죄한 옷을 입은 중늙은이가 따라 들어와서 넙죽 엎드렸다.

말끔하게 옷차림을 정돈한 이오시스가 나 대신 그를 추문했다.

“너는 무슨 일로 백작님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냐?”

“나으리. 쇤네는 프렌다의 친구라는 자가 보냈습니다요. 이 종이 쪼가리를 전달해드리라고 들었습니다마는...”

“프렌다의 친구?”

이오시스는 가늘게 미간을 좁혔다.

나도 그게 누군지 가늠이 안 가는데.

가만히 서 있던 파샨이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도련님. 프렌다의 친구라면 토모 아닙니까?”

“아, 그 애 말인가.”

프렌다와 함께 노예로 사들인 단발머리의 조숙한 소녀,

그녀의 이름이 토모였다.

친구인 프렌다를 아끼는 마음이 보통이 아니라서 정오의 그림자에 묻어두고 나중에 첩자로 쓸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아직 그림자에 잠입시킨 지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입지를 확보하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었을 터인데.

“쯧. 경거망동하지 말라니까.”

공을 세울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다.

혹시라도 정오의 그림자 녀석들에게 뒤를 밟혔다면 토모는 그냥 죽은 목숨이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지. 운이 좋기를 바랄 수밖에.

그래도 토모가 신경을 좀 썼는지 저 중늙은이는 아무 것도 모르는 전달책에 불과했다.

그것도 중간에 몇 번이나 다른 연락책을 거쳐서 쪽지를 전달 받은 듯 했다.

자세한 건 이 늙은이도 모르는 것 같고.

나는 은화 몇 닢을 튕겨 중늙은이를 내보내고는 쪽지를 펼쳤다.

[정보를 팔겠습니다. 금화 천 닢에 사시겠다면 아래쪽을 펼치시고, 사지 않으시겠다면 이대로 쪽지를 불태워주세요.]

“이런 맹랑한 년을 봤나.”

나는 그만 픽 웃고 말았다.

토모가 되도 않는 협상안을 제시하는 이유는 뻔하다.

그녀가 아끼는 친구를 내게서 도로 사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토모는 만 골드에 프렌다를 되사겠다고 했다.

토모 자신의 몸값까지 더 하면 이만 골드.

카르마시아 전투에서 진 켈자르가 배상한 금액이 사만 골드였다는 걸 생각해보면, 노예 출신의 여자아이로서는 도무지 마련할 수 없는 금액이다.

그러니 이렇게 정보를 팔려고 애를 쓰는 거겠지.

그래도 이 멀리서 토모를 움직일 수 있는 건 그런 실낱같은 희망뿐일 터.

나로서는 모쪼록 토모가 그 희망을 오래토록 갖고 있길 바랄 뿐이다.

나는 주저 없이 쪽지 아래쪽을 펼쳤다.

정보가 정말 금화 천 닢짜리라면 프렌다의 몸값에서 제하면 되고, 그렇지 않다면 그냥 무시하면 되는 일.

어찌됐건 내게 손해는 없으니까.

[약속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문장의 밑에는, 아우럼 가문의 현황에 관한 기밀정보가 줄줄이 쓰여 있었다.

이오시스가 궁금한 표정을 하고 있기에, 나는 빠르게 쪽지를 훑어보고 그녀에게 휙 던져주었다.

이내 속독을 마친 이오시스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어떻게 정오의 그림자에 이런 아이를 꽂아 넣으셨나요?”

“토모? 글쎄. 운이 좋았던 거지.”

토모 본인의 능력도 뛰어났겠지만 상황이 아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내가 지난 전투에서 그림자 단원들을 많이 태워 죽이기도 했고, 또 각지의 영주들이 들고 일어서니까 그만큼 인력난도 가중되었을 터.

그 틈새를 토모가 잘 파고든 것이다.

이 정도 정보라면 프렌다의 몸값에서 천 골드 정도는 제해줘도 되겠지.

나는 이오시스가 고이 돌려준 쪽지를 다시 한 번 죽 읽고서 그대로 불태웠다.

“여하튼 아우럼 가문은 아직 건재하다는 말인데…….”

“그런 듯 하네요. 제가 오판했어요.”

아우럼 가문이 곧바로 멸문할 것이라 점찍은 이오시스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지금까지 무사할 수 있는 거지?”

“아우럼 가문의 힘만으로는 중앙을 막기 어려웠을 텐데... 아마 다른 영주들이 아우럼 가문에 지원을 보낸 게 아닐까요?”

“영주들이? 어째서?”

아우럼 가문은 지금껏 중앙에 붙어서 강독을 제조해낸 원흉이다.

다른 영주들도 아우럼 가문에 원한이 있을지언정 호의가 있지는 않을 텐데.

“백작님 말씀대로 강독은 아우럼 가문이 중앙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낸 것이에요. 그렇다면 그 해독제의 비법 또한 아우럼 가문에 있을 테니까요.”

“해독제를 얻기 위해서……. 아우럼 가문을 지원했다?”

“아우럼 가문이 멸문되고 나면 해독제를 중앙이 완전히 독점하게 되니까요. 아, 백작님께서 가지신 암브로시아와 넥타르는 제외하고요. 다른 영주들은 해독제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아우럼 가문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 테지요.”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원한이 있어도 이득에 따라 움직인다는 거지. 이런 걸 귀족답다고 해야 되나.

그래도 나로서는 잘 된 일이다.

아우럼 가문이 아직 건재하다면 누이들도 죽지는 않았겠지.

아직 혼수상태에 빠져 있더라도, 목숨만 붙어있다면 살릴 수 있다.

암브로시아와 넥타르를 이용한다면 이데트 누이와 마찬가지로 눈 뜨게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이 토모라는 아이와 어떻게 연락할 수는 없을까요?”

이오시스는 정오의 그림자에 꽂아 넣은 정보원의 존재가 몹시 탐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쪽에서 보내는 거라면 몰라도 이 쪽에서 접하는 건 들킬 위험이 너무 커.”

“그건 그렇지요.”

“그래도 잘 됐어. 아우럼 가문이 건재하다면 중앙에서도 골칫거리를 안고 가는 셈이고. 우리 쪽에 신경 쓸 여력은 더 적어지겠지.”

“그럼 백작님께서는 아우럼 가문을 어떻게 하실 계획이신가요?”

“음…….”

누이들을 실험체로 쓴 원한은 여전히 남아있다.

하지만 아우럼 가문이 버티며 중앙의 뒷목을 잡아당겨줘야 나로서는 편하다.

이거 나도 귀족 같이 생각하고 있었네.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원한과 이득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탁 멈추었다.

“일단은 지원하는 걸로 하자. 복수는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까.”

아직 잡혀있는 누이들 문제도 있다.

당분간은 유령 상단을 통해 자금을 지원하는 걸로 하고, 가급적 이른 시일 내에 내가 직접 아우럼 가로 향하는 걸로 방향을 정했다.

“그런데 프렌다는 어떻게 지내고 있어?”

바쁘게 지내다보니 저택 안에 휙 던져두고 영 신경 쓰질 못했다.

토모를 앞으로도 잘 써먹으려면 그녀가 건강하게 지내줘야하는데.

이오시스는 잘 모른다는 투라, 파샨에게 물어보니 그녀가 대신 대답했다.

“기사들에게 검을 배우고 있답니다.”

“아. 맞아. 검의 재능이 있다고 했었지.”

체닐린과 함께 강철의 손아귀 소속 기사와 맞서 싸운 적도 있었다.

지금쯤이면 더 성장 했으려나?

간만에 프렌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어떻게 지내는지 보러 가볼까.

#

백여우 기사단 병영.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키가 땅딸막한 남자가 급히 달려와 경례를 올렸다.

코티지 에스케이.

파샨의 후임으로서 백여우 기사단의 부단장 직을 맡고 있는 자였다.

오록스 단장의 빈자리를 메우기에는 부족한 자지만 행정 능력과 조직력은 괜찮은 편이라 임시로 단장 대리직무도 수행해내고 있다.

“한창 바쁠 텐데 이거 미안하군.”

“아, 아닙니다. 백작님. 저희는 언제나 백작님의 검으로서...”

“그래. 늘 고생하고 있지.”

금화 주머니를 넘겨주자 코티지는 손을 싹싹 비비면서 고개를 숙였다.

기사라기보다는 상인 같은 자지만, 그래서 부단장 직위가 더 맞을 수도 있지.

그래도 단장직을 맡을 자는 아니니, 오록스의 후임을 빨리 구해야 할 텐데.

두서없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병영 근처를 살펴보았다.

코티지가 눈치 빠르게 물었다.

“찾는 자가 있으시다면 불러오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고, 내가 가겠네. 프렌다라고, 혹시 아나?”

“아! 물론입니다. 체닐린 경이 잘 부탁한다고 신신당부를 하고 맡겼지요. 지금쯤이면 헬무트 경과 대련을 하고 있을 겁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코티지를 따라가자, 기사들이 한 곳에 우글우글 모여 있는 게 보였다.

하루 일과를 모두 마쳤는지 기사들은 대체로 편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흉갑을 벗은 건 기본이고 웃통을 훌러덩 깐 놈도 있다.

그들은 뭐라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척척 경례를 올렸다.

“그러지 말고 편하게들 있게.”

“예! 백작님!”

우렁차게 대답하는 건 대개 군기가 바짝 든 신입들이었다.

연합군에서 될성부른 기사들을 새로 뽑아 백여우 기사단에 합류시켰다. 덕분에 평기사의 수는 이전보다 오히려 늘어났다.

한편, 나를 어릴 적부터 보아온 선임 기사들은 경례를 마치고는 자연스레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연무장 한복판에 소녀와 청년 기사가 서로 마주하고 있었다.

분홍빛 머리카락을 돌돌 묶어서 올린 프렌다는 얼굴이 작고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해서 마치 서양인형 같다.

그녀와 검을 맞대고 선 헬무트는 검은 머리칼을 말총머리로 묶은 미남자였다.

헬무트도 거구라고 할 수는 없지만 프렌다가 워낙 작은 탓에 그녀 앞에 서자 거인처럼 보인다.

“지금 저 둘이 뭐 하는 건가?”

내 물음에 노기사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대련입니다. 백작님.”

“상대가 되는가? 프렌다는 수혈 평민인데.”

“물론 상대 기사는 마력을 금제하고 싸웁니다. 허나 마력을 쓴다고 해도 저 아이가 많이 밀리지는 않습니다. 검의 요체를 익혔더군요.”

“그래?”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말에 내가 이상한 표정을 짓자, 노기사는 허허 웃었다.

“크게 될 아이입니다. 백작님께서 중히 써주십시오.”

“그러지.”

내 대답은 기사들의 환호성에 묻혔다.

프렌다가 헬무트의 검 끝을 쳐냄과 동시에 대련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프렌다! 이번에는 꼭 이겨라!”

“헬무트 경! 너무 정 없이 몰아붙이지 마시오!”

“저번처럼 프렌다 얼굴에 상처라도 냈다가는 나와 결투하기요!”

누군가 던진 농지거리에 기사들은 와하하 웃었다.

땀 냄새 나는 거구의 남자들 사이에서 인형 같이 조그마하고 귀여운 여자애가 조막만한 손으로 검을 휘둘러대니.

그야 인기 있을 법도 하다.

먼저 공격을 개시한 건 프렌다.

그녀는 작은 체구를 이용해 헬무트의 안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노리는 곳은 헬무트의 왼쪽 옆구리.

검격은 날카로웠다.

하지만 헬무트는 가볍게 프렌다의 검을 쳐냈다.

체격 차이에서 나오는 중량감에 프렌다는 급히 뒤로 물러나며 사선으로 검을 그었다.

헬무트는 약간 고민하다가 그녀의 검로에 자신의 검을 밀어붙였다.

카카캉하고 강철이 우는 소리가 귓가를 따갑게 했다.

비틀거리던 프렌다는 갑자기 땅 위를 미끄러지듯 이동하며 헬무트의 뒤를 잡았다.

“헛!”

깜짝 놀란 헬무트는 얼른 허리를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프렌다가 그의 검로를 끊어버렸다. 검을 서로 맞물리게 하면서 반동을 이용해 다시 안쪽으로 파고든 것이다.

“잇!”

프렌다는 짧게 기합을 내지르며 헬무트의 무릎을 걷어찼다.

헬무트는 약간 미간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크게 타격을 입은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는 힘주어 얽힌 검을 튕겨내고는 반대로 프렌다에게 달려들었다.

프렌다는 검을 쥐고 흔들다가, 겁도 없이 헬무트의 검격을 맞받아쳤다.

“저런!”

대련을 지켜보던 기사들이 놀라 소리쳤다.

헬무트와 프렌다의 체격 차이를 고려하면 받아친 프렌다의 손목이 부러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뭔가 부러지는 소리 대신 철을 긁는 소리가 울렸다.

프렌다는 몸을 날리며 미세하게 검날을 비껴 흘리고 있었다.

스스로를 비수로 쓰는 것이나 다름없는 뒤가 없는 살수였다.

그녀의 검 끝이 헬무트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아이쿠. 전에는 이렇게 무리하게 싸우지 않던 아이인데…….”

노기사가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진검싸움. 찰나의 간격이 생사를 가를 수 있는 대련이다.

헬무트는 자루를 만지작거렸다. 그대로 검날을 뒤집으면 반대로 프렌다가 그의 검 끝에 꿰이고 말 터.

당연히도 그건 그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고민의 순간은 삽시간에 지나갔다.

프렌다의 검 끝이 그의 목에 닿은 순간, 헬무트는 낭패한 얼굴로 빈 손바닥을 들어 프렌다의 복부를 후려쳤다.

미약하나마 마력의 파동이 일어났다.

펑!

마력 파동에 얻어맞은 프렌다는 하늘로 붕 떴다가 그대로 털썩 떨어졌다.

“끄윽...!”

하지만 그녀는 괴로운 얼굴로 배를 부여 쥐면서도 검을 놓지 않았다.

한 손으로 배를 쥔 채 다른 손으로는 검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 한다.

그 모습을 본 동료 기사들이 헬무트에게 야유를 쏟아냈다.

"우우우!"

“이런 양심도 없는 놈!”

“애민기사라더니 애 패는 기사 아니냐고!”

헬무트는 멋쩍은 표정으로 검을 집어넣고는 프렌다를 일으켰다.

프렌다는 고개를 저으며 더 싸우겠다고 했지만, 헬무트는 반강제로 그녀의 검을 회수했다.

하지만 동료 기사들의 야유는 더 커질 뿐이었다.

결국 내가 먼저 나서서 손뼉을 쳤다.

“훌륭한 대련이었다!”

내가 박수를 치자 다른 기사들도 마지못해 헬무트에게 박수를 보냈다.

헬무트는 꾸벅 인사하고는 내게로 다가왔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역시 그대의 명성은 헛되지 않았어. 아주 감명 깊은 경기였네.”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제 실력이 모자라 프렌다 양을...”

“그대는 쌍검도, 마력도 모두 봉인하고 싸우지 않았나. 게다가 프렌다를 봐주며 싸운 것쯤은 문외한인 내가 봐도 알 수 있었네. 저 아이가 괜한 욕심을 부려서 다친 거지.”

"하지만..."

"여기 서서 이야기하기도 뭣하군. 마침 저녁 때니, 식사라도 하면서 이야기하도록 하세."

나는 헬무트를 만찬에 초대하기로 했다.

그렇게 그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가려는데, 어쩐지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잠깐, 거기. 돌아서려고 하는 자네 말이야. 잠깐 이리로 와 봐."

"... 백작님."

힘없이 경례를 올린 건 오페이아의 전 남자친구인 미장센이었다.

"그대가 왜 백여우 기사단에 있나? 분명히 적여우 기사단 소속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번에 백여우 기사단에 연합군 출신 기사들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조장 역할을 할 선임기사들이 적여우 기사단에서 따로 차출되었습니다."

"그런가? 뭐, 잘 됐어. 그대도 저택에 들러서 식사나 하고 가게."

"... 백작님. 저는..."

"간만에 오페이아 얼굴도 봐야지?"

"알겠... 습니다."

미장센은 고개를 숙였다.

식사는 늘 넉넉히 준비되기에 갑자기 기사 둘을 초대했다고 해서 문제 될 일은 없었다.

게다가 이데트 누이는 아프다고, 카산드라 공주를 비롯해 두 첩실과 아마트리체는 오전 중에 말다툼한 게 어색하다고 저녁 식사를 거르기로 했으니.

결국 널찍한 테이블에 둘러앉은 게 나와 헬무트, 미장센까지 세 남자 뿐이었다.

내가 말을 하지 않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파샨은 내 뒤에 서서 두 남자를 가만히 흘겨보았다. 반대로 체닐린은 나를 '무슨 수를 꾸미고 있는 거야' 하는 시선으로 흘겨보고 있고.

그러자 파샨이 체닐린을 흘겨보면서 분위기가 더 어색해졌다.

헬무트는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술을 벙긋거렸지만 도저히 화제가 생각나지 않는지 번번이 입을 다물었다.

미장센은 처음부터 마음이 꺾여 있는 것처럼 보였고.

기껏 백작의 만찬에 초대해줬는데 보람이 없구만.

"백작님. 식사 준비가 마쳐졌습니다."

세리야가 들어와 알리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작은 핸드벨을 들어서 울렸다.

종소리가 마치자 문이 열리고 식사 시중을 드는 메이드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귀여운 토끼 같은 인상의 유리, 시골 처녀 데이지, 활발한 하일라, 수다스러운 루카, 어느새 메이드복으로 갈아입은 프렌다, 그리고...

"... 오페이아."

미장센이 중얼거리자 오페이아의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미장센을 돌아보지 않고 꿋꿋이 접시를 나르고 잔에 물을 채웠다.

"자. 그럼 들지."

나는 포크로 접시를 두들겨 경쾌한 소리를 냈고, 그로써 즐거운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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