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 회유
* * *
미장센은 내게 충성을 맹세하고 먼저 식당을 빠져나갔다.
메이드장 세리야의 감시 하에 오페이아도 함께 나갔다.
이제껏 둘이 쌓인 이야기가 많겠지.
앞으로도 계속해서 미장센이 내게 충성을 바치기 위해서는 오페이아에 대한 연정이 남아있어야 한다.
그런 만큼 신체접촉이 없는 한도 내에서는 이따금 면회를 허락할 생각이다.
가끔 그 면회 자리에 내가 동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모순의 괴로움을 견디면서 하는 게 순애가 아닐까?
“백작님.”
헬무트는 성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왜 그런가, 헬무트 경. 아직 만찬은 끝나지 않았네. 이만 앉게.”
“저는... 저는, 백작님께서 이렇게 무도한 분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런가?”
“중앙에 연을 댄 귀족들을 척결할 때, 그들의 영지를 약탈할 때는 어찌어찌 이해해보려 했습니다. 그들의 죄는 분명했으니까요. 하지만 미장센 경은... 미장센 경은 아무런 잘못이 없지 않습니까?”
“글쎄.”
나는 석석 고기를 썰어 입으로 옮겼다.
헬무트는 울화가 터진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지만 끝내 나가지 않고 내 대답을 기다렸다.
“음……. 그냥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게. 아니면 정혼자가 있는 여동생을 내게 보낸 유라지아 상단주 때문이라고 생각해도 좋겠지.”
“백작님께서는 아무런 잘못도 없단 말씀입니까?”
“아니. 그렇게 생각해도 좋네. 내가 악덕 영주라 기사의 약혼녀를 빼앗았다고.”
“그런…….”
“올바르지 못한 일이란 말이지?”
나는 슬쩍 다리를 꼬았다.
“그래. 나는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한다네. 하고 싶은 대로, 내키는 대로 하면서 살지.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야.”
“... 알겠습니다. 백작님께 무언가를 기대한 제가 어리석었군요.”
헬무트는 씁쓸하게 고개를 떨어트렸다.
흉계를 꾸민 중앙과 맞선다고 해서 딱히 내가 정의로운 건 아니었는데 말이야.
어쩌면 헬무트는 내가 모은 서북방의 귀족, 기사들 중에서 유일하게 정의를 믿고 투신해온 자인지도 모른다.
나는 돌아선 헬무트에게 물었다.
“다시 방랑기사로 돌아갈 텐가?”
“그래야겠지요.”
“어디 있는 지도 모를, 고결한 주군을 찾아 떠돌며 말인가?”
“그게 백작님께는 우스운가 보군요.”
“우습고말고.”
내 말에 헬무트는 홱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에게 틈을 주지 않고 연신 질문을 던졌다.
“고결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의도인가, 결과인가? 고결한 주군을 찾아 헤매는 것과 고귀한 주군에게 신속(??)하여 고결함을 위해 싸우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나은가? 고결한 기사는 고결한 주군에게 더 필요한가, 아니면 타락한 주군에게 더 필요한가?”
“그것은…….”
헬무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대신, 순진하게도 내가 던진 질문을 열심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이미 덫에 걸린 것이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왜 나를 막지 않았나?”
“그게 무슨...”
“헤시아스에서 그대가 내 앞길을 막아서 약탈을 그치게 한 것처럼 말이야. 이번에도 그대가 나를 막아주었다면, 내가 악행을 저질렀겠는가?”
갑작스러운 남 탓에 헬무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지만 도덕적인 자 특유의 결병증적 습성은 헬무트가 스스로를 탓하게 만들었다.
이제 헬무트는 미장센을 위해 자신이 나서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듯 보였다.
사실 그는 몇 번이고 나를 막아서려 했지만 말이다.
나는 헬무트가 깊이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가끔은 나도 스스로가 역겹게 느껴질 때가 있다네.”
“백작님…….”
“하지만 나를 막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네. 자네도 알다시피 내 아버지는 뱀 같은 자였고, 내 어머니는 일찍이 돌아가셨어. 누님들은 중앙의 독니에 물려 다 내 곁을 떠났다네. 나는 야생마처럼 혼자 자랐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단 말이야.”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이자, 헬무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는... 백작님께서도 고결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마치 자신이 그렇게 바꿀 수 있다는 듯, 헬무트는 그렇게 말했다.
불량한 남자친구를 자기가 개과천선시킬 수 있다고 자신하다가 자기 인생마저 꼬라박고 마는 풋내기 처녀가 떠오르는 건 왤까?
나는 쾌재를 삼키며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의외로 땀 냄새가 아닌 좋은 향기가 풍겼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내가?”
“예. 저는 모든 사람이 선하게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백작님도 분명 그 성정의 본질은 고결하고 깨끗했겠지요.”
“그것이 지금은 더럽혀졌다?”
“그건...”
“하하하! 농담일세. 아니, 진담이기도 하지. 여하튼 그대 말이 맞네. 지금의 나는 악하기 짝이 없어. 그러니 누군가 나를 선하게 계도해줄 인물이 필요하단 말일세. 내가 엇나가면 막고 쓴소리를 해줄 그런 인물이 말이야.”
“그 역할을 제게 기대하시는 거군요.”
헬무트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이룰 수 있을지 모르는 이상을 찾아 방랑해야 한다면, 백작님 밑에서 그 이상을 쌓아 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나를 위해 검을 휘둘러 주겠는가?”
“그것이 고결함을 위한 것이라면 말입니다.”
“하하하! 고맙군! 고마워!”
나는 헬무트를 확 끌어안았다.
사내놈과 포옹이라니. 역겹지만 이런 제스쳐가 필요할 때도 있는 거지.
하지만 헬무트의 몸은 생각만큼 울퉁불퉁하지는 않았다. 조금 체구가 크긴 했지만, 이건...
“화, 황송합니다!”
헬무트는 급히 내 포옹을 풀고 무릎을 꿇었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내 인장반지에 키스하고 충성을 맹세했다.
“기사 미장센과는 선의의 경쟁을 해주길 바라네. 개인적으로는 미장센보다는 그대를 백여우 기사단장에 앉히고 싶군.”
“하지만 미장센 경에게 그 자리를 주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만한 공을 세우면 주겠다고 했지.”
“그렇게 되면 미장센 경의 바람이...”
“미장센의 바람은 미장센이 성취해야 하는 것이네. 그대는 그대가 기사단장으로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지를 생각해보게. 사백 명이나 되는 정예기사들을 데리고서 누구를, 무엇을, 얼마만큼 구할 수 있을지.”
내 말에 헬무트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선의의 경쟁이라면... 미장센 경도 이해해주겠지요.”
“그래, 무엇부터 할 생각인지 물어도 되겠나?”
“큰 전쟁이 이어지면서 도적들이 날뛰고 있습니다. 허락해주신다면 기사들과 함께 서북방 전역을 순회하려고 합니다.”
헬무트는 선의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선의를 이용하는 방법은 많다.
헬무트는 무력해진 서북방의 영주들에게 백여우 기사단을 통솔하는 자신이 어떻게 비춰질지 예상이 안 가는 모양이다.
나는 그가 대리해 줄 '무력시위'를 흔쾌히 허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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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의 아카데미. 남자 기숙사 모처.
두 남녀가 서로 엉켜 붙어 있다.
방금 전까지 격렬하게 움직이며 서로를 탐하던 남녀는 숨을 헉헉거리며 호흡을 골랐다.
"미체스, 나 너무 좋았어."
"나도야. 넬라."
소년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남자는 기가 세 보이는 여자를 꼭 끌어안았다.
미체스의 가슴은 여전히 벅찬 감동으로 가득했다.
반에서 가장 예쁜 넬라와 이런 관계가 된 게 고작 일주일.
미체스는 아직도 자신이 넬라와 이어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착하게 살다보면 이런 행운도 있는 것이리라.
넬라는 쿡쿡 웃더니 그의 뺨에 키스했다.
잠시 찾아온 정적 속에서, 그녀는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이 물었다.
“그 건은 생각해봤어?”
“아, 응…….”
“반응이 왜 그래?”
미체스는 갑자기 발기한 자지가 시무룩하게 죽어버리는 걸 느꼈다.
그걸 본 넬라는 미체스의 허벅지를 주먹으로 때렸다.
“아얏!”
“이 겁쟁이 같으니! 언제까지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숨어 살래?”
“하지만... 바이스 형님은 이미 계승식까지 열었잖아. 인장반지도 형님한테 있고. 솔직히 말해서 나랑 형님은 비교가 안 되는데 계승권으로 분쟁을 걸어봤자...”
“그러니까 정무대신님께서 밀어주신다고 하잖아!”
“아무리 그래도...”
“어차피 우리 같은 서자는 도 아니면 모야. 이런 기회는 다시는 없을 거라구. 중앙이 밀어준다는 의미가 뭔지 몰라?”
넬라는 독기 어린 눈동자를 번득였다.
그녀가 저럴 때면 무슨 말을 해도 먹히질 않는다.
미체스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넬라는 눈동자를 섬뜩하게 번득이며 다그쳤다.
“우리는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알았어?”
“알았어.”
넬라는 미체스에게 몇 마디를 소곤거리고는 다시 한 번 확답을 받았다.
그리고는 후련하다는 듯이 웃더니 갑자기 안절부절 못하며 일어섰다.
“읏, 잠깐...”
일어서려는 넬라의 손을 급히 미체스가 붙들었다.
“왜, 왜 그래? 어디 아파? 내가 뭐 잘못했어?”
“바보야! 화장실 간다고!”
넬라는 미체스의 뺨에 단풍잎 자국을 남기고는 가랑이를 오므린 채 급히 방을 뛰쳐나갔다.
약간 이상한 향기가 뒤에 남은 것 같기도 하지만, 미체스는 그런 세세한 것까지 신경쓰지는 않았다.
그보다도 뺨이 너무 아팠으니까.
“으윽... 그렇다고 때릴 건 없잖아...”
미체스는 뺨을 어루만지며 투덜거렸다.
그러자 구석에 놓여있는 장롱이 들썩거리더니, 그 안에 쪼그리고 있던 개 수인이 코를 쫑긋거리며 나왔다.
축 늘어진 눈가와 순둥하게 생긴 인상은 퍽 귀여워 보인다.
하지만 누런 듯 흰 듯 구질구질한 모피는 얼굴 밑부터 발끝까지 하나로 이어져 있고, 말을 하지 않을 때에도 혀가 입술 밖으로 죽 늘어지는 모습에서 대부분의 귀족들은 얼굴을 찌푸리고 말 것이다.
그녀는 누가 봐도 수혈의 피가 짙은 최하층민의 수인이었으니.
미체스는 기겁하면서도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코코! 거기 숨어 있으라고 했잖아! 넬라가 보면 어쩌려고, 아씨, 너 같은 수인을 곁에 뒀다는 것만으로 욕먹을 거란 말이야!”
“하지만 주인님, 정말로 넬라 님이 시키는 대로 하실 거예요? 바이스 도련님을 적으로 돌리면...”
“알아! 안다고! 형님은 강하고 그만큼 무자비하다는 거, 나도 질릴 만큼 알아!”
바이스 레시아르가 그를 직접적으로 폭행한 적은 없었다.
사실 둘은 데면데면하게 말 한 번 제대로 해본 적도 없었으니.
하지만 미체스는 바이스 레시아르가 자신의 여자에게 손을 대려던 마부를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패던 장면을 목격했다.
심약한 미체스의 기억 속에서 바이스 레시아르는 최악의 악당이었다.
하지만, 때때로 욕망은 공포를 뛰어넘는다.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자극된 욕망이라도 그렇다.
이상한 냄새가 미체스의 아랫배를 찔렀다.
넬라에게 이런 냄새가 나면 미체스는 자제심을 잃곤 했다.
그는 다시 발기하는 자지를 손에 쥔 채 중얼거렸다.
“... 넬라 말이 맞아. 이런 기회는 다시 없겠지. 나는 내 걸 되찾을 거야.”
서자로 태어나 기대를 버리고 존재감을 죽이며 살아오던 시절.
적장자인 바이스 레시아르의 의미 없는 시선에도 어깨를 움츠리며 구석을 찾았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고, 상냥한 누님들조차 형님과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가 빼앗아 간 여자.
“세리야…….”
미체스의 첫사랑.
자신은 너무 소중해 말을 거는 것도 주저하던 여성.
안경을 고쳐 쓰며 책을 읽는 이지적인 모습이 매력적이던 이상형.
그런 그녀를 바이스, 그 놈은...
‘세리야! 임신해! 임신하라고!’
‘아으읏... 도련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침대 위에 징그럽게 얽힌 다리.
질척거리는 물소리와 신음.
결국 끝까지 한 번도 그녀에게서 몸을 떼지 않고 부르르 허벅지를 떨던 그.
미체스는 그 때 얼마나 울었던가.
왕도까지 도망쳐서 아카데미에 진학한 데에는 실연의 아픔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세월이 묻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넬라가 불어넣은 바람은 그 세월을 먼지처럼 날려버리고 그 아래 숨겨져 있던 복수심을 드러냈다.
미체스는 저도 모르게 자지를 움켜쥐고 흔들며 중얼거렸다.
“그 놈 앞에서 세리야를 임신시킬 거야.”
“주인님! 절대 안 돼요!”
코코는 펄쩍 뛰며 미체스의 소매를 물어 당겼다.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미체스는 코코의 미간을 퍽 때렸다.
하지만 코코는 몇 대를 맞아도 안 된다며 미체스의 소매를 물고 늘어졌다.
“이 빌어먹을 개년이! 너 같은 년이 아니라! 세리야를! 데려왔어야! 되는! 건데!”
“끼잉...! 깽...! 깽!”
폭력에 이기지 못한 코코는 소매를 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미체스는 코코를 퍽퍽 걷어차서 다시 장롱 안에 들어가게 했다.
코코는 발길질에 걷어차이면서도 주인을 걱정하는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무슨 일 있었어?”
넬라가 가운을 입고 돌아오자, 미체스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 것도. 그보다도 그 계획 있잖아. 내가 해야 할 일이 정확히 뭐라고 했지?”
“후후훗. 이제 좀 관심이 생겼나 보네.”
넬라는 진한 냄새를 풍기며 그를 품 안에 껴안았다.
"잘 들어. 케인즈 레시아르 전 백작의 서자로서, 미체스 레시아르 네가 해야 할 일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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