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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105화 (105/166)

〈 105화 〉 힘의 정리

* * *

먼지가 자욱이 일어나는 연병장.

“앞으로, 앞으로! 오와 열을 맞춰서 전진!”

보병대장의 지위에서 물러나 제1 대대장을 맡고 있는 무산토가 한창 병사들에게 호령하고 있었다.

그도 나름 공신이지만 연대를 만들어야 그를 연대장으로 올려줄 텐데, 당장은 보병을 쓸 데가 없어서 확충을 미뤄두고 있었단 말이지.

결국 좌천 아닌 좌천을 당한 무산토는 분풀이하듯 보병을 굴렸고, 그 결과 보병은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정병으로 거듭났다.

“제1소대! 반전!”

대대에서 한 무리의 소대원들이 빠져나와 반대편으로 방향을 돌린다.

그들은 무산토가 지시하는 대로 직진만 했는데, 연병장 한 복판에 세워둔 깃발을 한 끝 차이로 비껴나갔다.

“역시 훈련도가 높군요.”

부관 타라가 내 곁에서 중얼거렸다.

그녀는 아버지 오록스 단장의 장례식을 마친 후 잠시 가족들과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마음정리가 되었는지 새하얀 얼굴에는 다시 꿋꿋한 의지가 엿보인다.

“백작님?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내가 빤히 바라보고 있자, 타라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보병들의 쓰임새를 좀 생각하고 있었지.”

“그런 거군요. 모두 정병입니다. 어느 전장에 투입해도 제 역할을 하겠지요.”

“화살받이로?”

“... 공세를 돈좌시키는 역할 말입니다.”

“그게 그거지.”

이 정병들을 중앙과의 전장에 데려가지 않은 이유는, 정예기사를 상대로 보병의 한계가 너무 뚜렷하기 때문이다.

검은튤립 기사단 앞에 이들을 세워놨어도 켈자르의 농민병과 다른 결과가 나오진 않았을 거다.

일 분 버틸 걸 오 분 버티는 걸로 늘린다고 해서 무슨 차이가 있겠냔 말이지.

앞으로도 중앙과 분쟁이 이어질 텐데. 그럴 때마다 다른 영주들에게서 보병을 빼와 방패역을 시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애써 키운 내 보병들을 갈아 넣을 수도 없고.

결국 혈통의 한계는 어쩔 수 없는 건가?

고민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아 이만 등을 돌리려는데,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가 달려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백작님! 백작님!”

그는 내 앞까지 와서야 헐떡이며 숨을 골랐다.

대장장이 달반이었다.

“간만이군. 그간 잘 있었나?”

“물론이지요. 백작님께서 신경 써주신 덕분에 연구에도 진척이 있었습니다.”

달반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반짝한 시선을 보냈다.

“연구?”

“하이브 마석의 쓰임새를 알아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랬지! 그래, 뭔가 쓸 데가 있던가?”

“이게 그 결과물입니다. 아직 시제품이지만 곧 더 나은 녀석들이 나올 겁니다.”

달반은 수염 덥수룩한 얼굴로 씩 웃으며 상자 하나를 대뜸 내밀었다.

안을 열어보니, 솔방울처럼 생긴 물체가 솜에 쌓여 있었다.

수류탄처럼 생겼는데.

“혹시 이걸 던져서 터뜨리는 건가?”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럴 거 같더군.”

나는 그걸 쥐고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안전핀과 안전손잡이 비스무레한 것까지 달려있는데, 이런 것도 수렴진화라고 할 수 있나?

손에 쥐고 던지는 폭탄이라면 비슷한 구상을 거쳐서 만들어졌겠지.

“백작님, 거기는 잘못 건드리면 터집니다.”

달반이 안절부절 못하며 한 마디를 했다.

“이 핀을 뽑고 손잡이를 꽉 쥐고 있다가 던지는 거 맞지?”

“맞습니다. 손잡이를 꾹 누르면 안에서 작은 바늘이 튀어나오는데...”

“바늘?”

“예. 안을 비워서 피를 안쪽으로 빨아들일 수 있는 구조로 설계했습니다.”

“그럴 이유가 있나?”

“마력을 불어넣어야 폭발하는 구조니까요.”

달반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작은 마석에 엄청난 마력이 응축되어 있다는 점에 착안했습니다. 평소에는 안정적이다가도 마력을 불어넣으면 급격히 불안정해진다는 점도 흥미로웠지요.”

“그래서 일부러 마력폭주를 유도하고 폭발시킨다...?”

“예, 바로 그겁니다, 백작님!”

달반은 흥분해서 수염을 콧김으로 불어 날렸다.

당장이라도 이게 터지는 걸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런 위험한 물건을 들고 뛰다가 내게 대뜸 넘기는 건 좀 어떤가 싶긴 하지만, 발명가는 괴짜라니까.

“파괴력이 어느 정도던가?”

“하나의 마석을 열 개로 나누었으니 원래의 마력폭주보다는 위력이 상당히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석조건물이 날아갈 정도니까, 기사의 마력 방어막도 충분히 뚫을 겁니다!”

“그건 대단하군.”

나는 수류탄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결국 마력을 불어넣는 거라면 말이야, 수혈 보병은 쓸 수가 없는 거 아닌가?”

“그 반대입니다. 백작님. 마력이 적은 보병만 이 무기를 제대로 쓸 수 있지요.”

“어째서지?”

“마력이 많은 기사나 마력병이 마력을 불어넣으면 폭탄이 적에게 날아가기도 전에 마력폭주에 이르러서 펑하고 터져버리고 마니까요.”

아, 그런가. 내무대신 바리보예즈가 그렇게 시체도 못 남기고 죽었지.

고개를 끄덕이며 듣자, 달반은 더 신이 나서 손짓발짓을 해가며 설명을 했다.

“마력이 거의 없는 수혈 평민이 써야 체공시간 동안에 폭발하지 않고 버티다가 적에게 도달할 때에 맞춰 딱 터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늘로 피를 빨아들이게 한 거군?”

“예, 맞습니다.”

수혈 평민이라도 거슬러 올라가면 조상 중에 한 명의 마력을 보유한 자가 있다.

마력량이 너무 적고 자기가 다룰 수 없어서 그렇지, 누구에게나 미량의 마력은 있는 셈.

특히 혈액에 그 미량의 마력이 흐르고 있으니, 그 미세한 마력량을 이용해 이런 수류탄을 만들었다고.

이거라면 정예 보병을 제대로 이용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바로 보병 하나를 불러오게 했다.

그는 달반에게서 설명을 듣고서는, 친위대원의 안내에 따라 내게서 상당한 거리를 벌렸다.

나를 등지고 반대편으로 어깨를 향한 자세.

“백작님이 보시고 계신다! 제대로 해야 된다, 이 놈!”

“옙!”

달반의 협박 아닌 협박에 보병은 어깨가 딱 굳었다.

“너무 겁주지 말아. 그러다 오히려 사고 나는 법이니까.”

“알겠습니다. 백작님……. 자, 일병. 이제 핀을 뽑고, 그렇지, 손잡이를 눌러.”

“아얏!”

“임마! 손 떼지 말라고!”

“예, 옙!”

“피가 충분히 스며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진동이 느껴지나?”

“예!”

“그럼 저쪽을 향해 힘껏 던져!”

병사는 수류탄을 투구하듯 휙 던졌다.

수류탄은 빙글빙글 돌아가다가 포물선의 고점에 위치한 순간, 딸깍하는 소리를 냈다.

나는 얼른 귀를 막았다.

콰아앙!

귀를 틀어막았음에도 징징 울릴 정도로 커다란 굉음이 울렸다.

병사는 물론이고 달반까지 펄쩍 엎드렸다. 달반은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지만.

약간의 연기가 가시고 나자, 연병장 한 쪽에 커다란 스푼으로 떠낸 듯한 구멍이 생겨난 게 보였다.

정말로 상당한 위력이다.

“이 정도 위력이면 어지간한 기사들은 갑주째로 날려버릴 수도 있겠어.”

“그 뿐이겠습니까? 보병이라고 방심하고 마력 방어막도 없이 다가온다면 기사단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릴 수도 있을 겁니다!”

아무래도 그 말은 허풍에 가깝겠지만... 그래도 대단한 신무기임은 변함이 없다.

나는 달반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는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

“대단한 일을 해줬어. 그대가 내게 들어온 게 정말 큰 행운이 되었군.”

“허허, 이만한 마석을 모아다 주신 것도 백작님이고 그 특성을 알려주신 것도 백작님이 아니십니까. 저는 그저 망치나 조금 두들겼을 뿐이지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달반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철철 넘쳤다.

“이제 시연을 보셨으니 명명을 부탁드립니다. 저희들끼리는 마탄이라고 불렀지만, 백작님께서 정식으로 이름을 붙여주시지요.”

“그럼 수류탄... 아니, 폭렬탄이라고 하겠네.”

“폭렬탄. 좋은 이름입니다! 아주 무자비하고 강해보이는군요.”

“그래. 폭렬탄을 만들어줬으니 그대의 노고에 보상을 해야겠지.”

“보상을 바라고 한 것은 아니나...”

달반은 힐끗힐끗 시선을 던졌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나는 통 크게 뿌리기로 했다.

“금화 천오백 닢을 하사하겠네. 앞으로는 호위할 병사도 붙여주지. 그대가 편한 대로 부려도 좋네. 사실상 그대의 사병이라고 생각해.”

“감사합니다!”

“그대의 이름을 내건 병기창을 새로 만들고 그대를 그 장(?)에 임명하려는데, 그건 어떤가?”

달반은 넙죽 엎드리려다가, 내가 손을 잡고 있자 황송해하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대장장이로서는 가장 큰 꿈입니다, 그건.”

“다행이야. 그대가 앞으로 해줘야 할 일이 아주 많네.”

하이브의 마석은 꽤 재고를 모아놨지만 그래도 수량이 정해져 있다.

그걸 다시 모을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으니, 마석 하나로 만들 수 있는 수류탄을 늘려야지. 효율화와 최적화.

달반이 달성해야 할 목표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수고해.”

나는 그에게 바로 금화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하사금과는 별도로, 이런 때에는 바로 술집에 가서 쓸 수 있는 격려금이 필요한 법이다.

“그래도 오늘은 들어가서 쉬고 내일부터 해. 고생한 대장장이들도 같이 데려가서 술이라도 하지.”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시니…….”

눈물을 글썽이는 달반에게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고 돌아섰다.

부관 타라가 바로 따라 붙어 물었다.

“백작님. 달반이 괜찮은 무기를 만들기는 했지만, 보상이 과한 게 아닙니까?”

“나는 저것도 모자라다고 생각하는데.”

“저 무기가 그 정도로 가치가 있을까요?”

“생각해 봐. 타라. 일개 수혈 보병이 잘 맞추기만 하면 은혈 기사를 죽일 수도 있다고. 이건 전장에 혁명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어.”

물론 이전 세계의 총기와 같은 파급력을 가지지는 못할 거다.

폭렬탄의 재료가 되는 하이브의 마석은 수량이 무척 제한되어 있으니까.

타라도 바로 그 점을 지적했다.

“하이브의 마석 하나에 폭렬탄이 열 개가 나온다면, 하이브의 동굴에서 거둔 마석들을 전부 폭렬탄 제조에 쓴다고 해도 천 개를 만들 수 없을 겁니다.”

“그렇겠지.”

“결전무기로서의 효용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결국은 소모품이라는 게 너무 큰 단점 아닙니까?”

“그러니 적절하게 잘 써야지.”

폭렬탄을 소지한 척탄병 하나를 중심으로 그를 보호할 보병들을 붙여 척탄병 소대를 만들고, 척탄병 소대를 운용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타격을 준다면 어떨까.

교착된 전선을 밀어붙일 수도 있고, 구조물을 파괴할 수도 있고, 때로는 요인을 암살할 수도 있을 거다.

“귀족, 기사들은 보병을 위협적으로 보지 않아. 보병은 화살받이, 마력창의 표적일 뿐이지. 하지만 그 인식이 그들의 목을 죌 거야.”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력으로 타격하는 듯한 폭발이 일어난다면?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귀족들이 대처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들도 폭렬탄과 척탄병이 위험하다는 걸 알아챌 겁니다.”

“그 때는 그 때의 방식을 써야지. 예컨대 일반 보병 소대를 척탄병 소대로 위장해서 허장성세를 쓴다던가, 반대로 척탄병 소대를 일반 보병 소대로 위장해서 기습을 노린다던가.”

“그런 방식도 있는 거군요.”

타라는 놀라운지 눈썹을 치뜨다가 미간을 좁혔다.

“기사의 방식은 아닙니다만...”

“이기는 방식이지.”

“예, 그러네요.”

타라의 어조는 약간 씁쓸했다.

기사 가문 출신인 그녀로서는 내키지 않을 지도 모르지.

“탐탁지 않으면 이 건은 이오시스에게 넘겨.”

“아닙니다. 백작님의 부관으로서 군병에 관한 사무는 제가 맡는 게 맞고, 또... 저도 이기는 방법이 상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다행이고. 백여우 기사단 쪽에는 가 봤나?”

“예. 코티지 부단장이 그럭저럭 수습을 하고 있는 모양이더군요. 마이포흐 양도 손을 거들어서 불화 문제는 거의 해결 됐습니다. 기사 미장센이 연합군 소속이었던 기사들을 어우르고, 헬무트 경이 실전 경험을 쌓게 해주는 방식으로...”

나는 타라와 이야기를 나누며 레시아르의 힘을 다시 정리했다.

우선은 가장 큰 무기. 화염마법의 천재이자, 이제는 아바르의 얼음송곳 덕에 다른 속성 마법까지 다룰 수 있는 사기적인 마법사. 나 자신.

그리고 황금마법사 화리메.

그 다음으로 새로운 피를 대거 수혈한 백, 적여우 기사단.

마력병은 제대로 양성될 때까지는 최소 십 년은 봐야겠지만, 일단은 척탄병을 중심으로 재편될 보병도 중요한 전력이 될 테고.

파샨의 친위대와 이오시스의 자정의 여명단은 특수 임무에 따라 움직이겠지.

믿음직스럽진 않지만 화염마법사인 아버지나 금혈인 아마트리체나 이데트 누이 등도 일단은 비상전력에 포함된다.

마티란 자작, 기돔 자작, 부게른 남작을 포함한 봉신들과 켈자르, 파티스의 전력도 우방전력으로 합류할 것이고.

이만하면 영지전에서는 상대를 찾기 힘들 정도의 전력이지만, 아직도 중앙을 상대하기엔 부족하다.

만에 하나 중앙에서 레시아르에 대한 전쟁에 소집령을 내리기라도 한다면 승산은 0에 수렴하게 될 거고.

결국은 다른 영주들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강독 문제 때문에라도 몸이 달아올랐을 놈들인데 이렇게 미적대고 있으니, 내가 가서 엉덩이라도 걷어 차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판을 깔아준 건 중앙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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