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 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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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이 들어와서, 간만에 창관 ‘초가을의 과실’에 들렀다.
마담이 버선발로 나와 맞이하기에 안으로 들어가니, 인테리어를 바꾸었는지 안을 온통 살색 벽지로 도배해 놨다.
“이거 좀 촌스럽지 않나?”
“이렇게 한 이유가 있답니다.”
“그래? 오... 이건가?”
잠시 걷다보니 벽이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창녀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게 하고 줄줄이 세워놓아 벽을 만든 것이었다.
살색의 벽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다.
나는 보드라운 살결로 구불구불 이어진 미로를 천천히 즐기며 나아갔다.
미로의 길목은 굉장히 좁아서 내가 지나갈 때면 양쪽 벽에서 튀어나온 젖가슴이 닿을 정도였다.
괜히 이리저리 몸을 기우뚱거리며 무게를 실어도 인간 벽은 안간힘을 쓰며 버텼다.
오른쪽, 왼쪽으로 몸을 튕겨가며 살결을 즐기는 게 상당히 묘미였다.
“이거 재밌는데.”
“그렇죠? 이 미로에는 색다르게 즐기는 방법이 하나 더 있는데...”
“그건 나중의 여흥으로 하자고. 일단은 일 하러 온 거니까.”
나는 젖가슴들을 제치고 나아가서 미로를 완주했다.
인간 벽의 끝에서 보인 것은 자그마한 별채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주먹코의 중년 남자가 넙죽 엎드려 있었다.
“간만이군, 게오르그.”
“다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백작님.”
“혹시 누가 따라붙진 않았겠지?”
“어제 들어와서 오늘 아침에 대역을 내보냈습니다. 감시자가 있다고 해도 제가 지금 백작님을 만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할 겁니다.”
“철저하구만. 좋아. 일단 앉으라고.”
내 말에 게오르그는 불편하게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럴 필요는 없지만 굳이 바꿔줄 필요도 없지.
나는 하마 수인의 커다란 품 안에 드러누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양쪽에서 멜론과 페릴이 나타나 내 어깨와 허벅지를 안마하기 시작했다.
“역시 전문적으로 배운 애들이 더 잘한단 말이야. 뭉친 게 다 풀리는 것 같네.”
“시원하시겠습니다, 백작님.”
“왜. 부럽나?”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농담이야. 표정 좀 풀지.”
내 말에도 게오르그는 이마를 땅에 박았다.
이미 한 번 예물 상납에서 물을 먹었던 상단주로서는 내 말투 하나하나에 살이 다 떨릴 지경이겠지.
“그렇게 얼어붙어 있을 필요 없다니까? 그대가 상납한 고타마는 잘 타고 있고, 이번에도 그대가 바칠 정보도 귀중하게 쓸 테니, 상을 줬으면 줬지 벌을 주진 않을 거란 말이지.”
“제가 어찌 감히 상을 바라겠습니까. 저는 단지 레시아르의 영민 중 하나로서 백작님께 성심과 충성을 다하는 것을...”
“그런 말은 됐고. 일단은 가져온 거나 꺼내 봐.”
“옛!”
게오르그는 품 안에서 금실로 장식된 화려한 편지봉투를 꺼냈다.
페릴이 그에게 다가가 봉투를 두 손가락으로 집어다가 내게 두 손으로 올려 바쳤다.
나는 손가락으로 작은 불꽃을 만들어내서 실링 왁스를 녹이고, 봉투 안에 든 초대장을 꺼냈다.
안에 적힌 것은...
“미체스 레시아르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를 연다는 거군. 그것도 내 저택에서 말이야.”
게오르그는 미리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듯 놀란 모습은 없었다.
물론 나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 보니까 좀 화가 나긴 하네.”
적자에 장자인 내가 뻔히 눈 뜨고 살아있는데 서자에 차남인 미체스 레시아르가 아버지의 생일연회를 주관한다?
그건 명백히 내 계승권에 대한 도전이다.
물론 심약한 미체스 놈이 혼자 이런 짓을 꾸밀 리가 없고 중앙에서 손을 얹었겠지만.
아마 이게 중앙의 술책 전부는 아니겠지.
연회에서도 간계가 난무할 거다. 연회 장소가 내 저택이니만큼 나는 방어자의 입장에 서야 할 테고.
상당히 귀찮은 수를 뒀단 말이지.
내가 다리를 꼬고 앉자, 뒤늦게 도착한 이오시스가 살그머니 다가와 속삭였다.
“그래도 이렇게 게오르그 상단주를 포섭해서 초대장을 미리 탈취했잖아요? 이제 중앙에서 무슨 수를 꾸미든 모두 백작님의 손 안에서 움직이게 될 거예요.”
“중앙의 술책을 전부 파악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미리 감지한 건 다행한 일이지.”
중앙에서 회유와 협잡에 나선다면 내 주변인물, 특히 약한 고리를 건드릴 가능성이 가장 높을 거라 판단했다.
그래서 반항적인 서북부 귀족의 영지를 순회하고 헤시아스에 들러 아버지를 얽어매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가장 취약한 고리라고 한다면 역시 나에게 원한이 있는 자겠지.
게오르그 상단주는 예물상납에서 내게 무시당해 상당한 손해를 봤던 자.
외부에서 보기에는 딱 이용하기 좋은 인간이다.
그래서 나는 미리 그에게 특혜를 몰아주고, 그 대가로 이중간첩이 되어달라고 언질을 해두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초대장은 얼마나 뿌려졌나?”
“제가 송달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아직 한 장도 보내지 않았지요.”
“내게 바로 온 거라고?”
“예, 백작님.”
“이 사람 이거 아주 진국이구만!”
내가 허벅지를 탁탁 치며 웃자 게오르그도 헤죽헤죽 웃었다.
“백작님이 명령만 하신다면 당장이라도 이 놈의 종이쪼가리를 전부 불태워버릴 수도 있습니다.”
“아냐. 그래봐야 초대장은 다시 보내면 그만이고.”
중앙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다시 초대장을 보내는 사이 아버지의 생일은 이미 지나 있겠지만, 연회를 열 핑계는 새로 만들어내면 그만이다.
그러니 차라리 이걸 이용하는 게 낫겠지.
“초대장 말미에 미체스의 서명 말이야, 그걸 내 서명으로 바꿀 수 있나?”
“물론입니다. 금화 한 푼만 주면 감쪽같이 해낼 문장사들이 널려 있지요.”
“그럼 그렇게만 하고 초대장을 원래 계획대로 송달하게.”
“그래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다른 영주들과도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했으니까 말이야. 오히려 잘 됐지.”
중앙에서 깔아준 판을 키운다.
중앙에서 초대장을 보내지 않은 각지의 수장들에게도 내 서명이 적힌 초대장을 보낸다.
수신인은 북부의 데어뷘터 변경백, 동부의 오스트 공작, 남부의 수드베리히 후작까지.
중앙에 불만이 쌓일 대로 쌓여있을 각 지역의 패자(者)들.
“귀하신 분들이 올 텐데, 여흥거리는 제대로 준비해놔야겠군.”
이오시스는 실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들을 공범으로 만드실 생각이시군요?”
“그렇지. 하는 김에 복수도 하고 말이야.”
“여흥거리는 많을수록 좋겠지요?”
“당연하지.”
나는 그녀가 임무를 달성할 수 있도록 베티아까지 내주었다.
자정의 여명단이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우럼 백작가 잠입에 실패해서 한 번 체면을 구긴 이상, 이오시스도 성과를 내려고 애를 쓰겠지.
여흥 건은 이오시스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럼 일은 이대로 마무리하기로 하고...”
내 말에 게오르그 상단주가 눈치 빠르게 인사를 올렸다.
“백작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저는 먼저 돌아가서 서명을 교체하는 작업을 시작하려고 합니다만.”
“그렇게 해. 비용은 이오시스 통해서 받도록 하고.”
“감사합니다. 백작님.”
그가 빠져나가는 걸 보고, 나는 바로 멜론의 커다란 젖가슴에 달라붙었다.
페릴은 농염한 미소를 지으며 내 하반신으로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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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부터 북적거리는구먼. 아직 연회까지는 날짜가 좀 남았는데도.”
나는 창가에 서서 저택 안으로 들어오는 봉신들의 행렬을 보며 중얼거렸다.
타라가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을 받았다.
“저들도 속이 많이 탈겁니다. 어느 쪽에 서든 피를 볼 게 뻔하니.”
“대신들은 몰라도 나는 두 번 용서하지 않아. 그걸 잘 알아듣게 전해.”
“알겠습니다. 저들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요.”
“연회 준비는? 잘 돼 가고 있나?”
“이데트 님이 일을 도맡아 하시는데, 덕분에 빠르게 준비가 마쳐지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쯤이면 파티홀에 계시겠군요.”
“병상에서 나은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렇게 일을 한데. 좀 가봐야겠어.”
나는 뜨거운 차를 후루룩 마시고는 파티홀로 내려갔다.
“다들 고생하는구나.”
이데트 누이는 서글서글한 눈매를 늘어뜨리며 파티홀을 돌아다녔다.
그녀가 말을 걸거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기라도 하면 메이드들은 황송해서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갑작스레 잡힌 연회까지 준비시간이 빠듯하지만, 언성을 높이거나 지적할 필요도 없다.
이데트 누이는 그냥 지나다니는 것만으로 격려와 채근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이런 게 기품이라는 걸까.
“역시 아가씨가 계셔야 저택에 활기가 도는군요.”
세리야가 안경을 들어 올리고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았다.
이데트 누이는 난처하게 웃고 말았다.
“이제 아가씨라고 불릴 나이는 아닌데…….”
“제게 아가씨는 언제나 아가씨세요.”
세리야의 말에 이데트 누이는 또 뭐라고 대답했고, 세리야는 다시 기쁘게 말을 받았다.
둘은 주종관계가 아니라 절친한 친구 사이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괜히 흐뭇하게 바라보던 메이드 몇은, 메이드장 모드로 돌아간 세리야에게 혹독한 질책을 받아야 했지만.
“언니와 비슷한 분이군.”
체닐린이 문뜩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언니? 마리안 말이야?”
“그래.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포용력 있고, 배려심이 깊고, 누구에게나 사랑 받으면서 그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 닮았다고 생각하는데.”
“음...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내 말에 체닐린은 짓궂게 웃으며 한 마디를 더했다.
“네게는 과분한 누님이시군.”
“그렇긴 하지.”
내가 솔직하게 받자 체닐린은 어색하게 어깨를 움츠렸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
“아니, 누님이 나한테 과분한 분인 건 사실이니까.”
환생했을 때의 기억.
누님들이 모여서 나를 껴안고 축복해주던 그 때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그 누님들이 쫓겨나듯 저택을 떠나가야 했던 것도 지금의 나를 만든 원인이었지만...
어쨌거나 누님들, 특히 이데트 누님은 내게 좀 특별하다.
잠시 회상에 빠져 있는데, 마침 이데트 누이가 내 쪽으로 왔다.
“바이스. 우리 아가.”
“누님. 저도 이제 아가라고 불릴 나이는 아닌데요.”
“그렇구나……. 이제 곧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될 테니까.”
이데트 누이는 기특하다는 듯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가슴이 간질간질해서 슥 고개를 돌리자, 이데트 누이는 쿡쿡 웃었다.
“재밌구나. 그냥 이렇게 지내는 것만으로도.”
“앞으로 즐거운 일은 더 많을 겁니다. 가끔은 이번처럼 좀 귀찮은 일이 생기긴 하겠지만...”
“알아. 중앙에서 함정을 판 거지? 미체스, 불쌍하게도.”
“누님.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중앙과 손을 잡은 시점에서 미체스는 자기 무덤을 판 겁니다.”
“그래.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겠지. 하지만 네가 동생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건 안단다.”
이데트 누이는 발돋움을 해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주방에라도 다녀왔는지 달콤한 과자와 고소한 우유 냄새가 났다.
그런 훈훈한 냄새를 맡으면 나라도 독기가 쏙 빠진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누님 얼굴을 봐서라도 미체스 놈은 적당히 벌주고 넘어가도록 하지요.”
그래도 죽이지만 않으면 되겠지.
뒷말은 삼켰지만, 이데트 누이는 내가 그저 십 년 전의 순진한 소년 같은지 까치발을 딛고서 몇 번이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정말 많이 컸어…….”
“에잇, 누님. 다들 보지 않습니까.”
“보라고 하지. 뭐 어떠니. 몇 살이든 얼마나 크든 너는 내 귀여운 동생인데.”
세리야가 이 모습을 보고 또 훌쩍훌쩍 손수건을 적시고.
이데트 누이는 난처하게 웃고.
루이사와 화리메, 아마트리체가 슬그머니 끼어들어서 서로 툭탁거리면서도 일을 돕고.
그래도 연회 준비는 착착 진행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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