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 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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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 당일.
다키아 왕국 각지에서 화려한 마차가 몰려들었다.
외성에서부터 저택 안까지 마차가 빡빡하게 들어찰 정도였다.
“토캄 남작님이십니다.”
잘 차려입은 시종이 마차 밖으로 나와 초대장을 건네자, 전(?) 집사장 뮌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인장을 확인했다.
귀족 전범(??)과 인장 문양을 교차해서 확인하는 속도가 귀신같다.
“용맹한 코뿔소와 향기로운 적포도주. 토캄 가문에서 오셨군요. 귀한 발걸음을 해주셨습니다.”
시종은 뿌듯한 표정으로 허리를 세웠다.
마차 안에서 헛기침 소리가 나는 걸 보니 토캄 남작도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뮌은 시종과 몇 마디를 더 나누고는 마차를 저택 안으로 들였다.
저렇게 노회한 능력을 갖춘 사람은 내 공신들 중에서는 안타깝게도 없다.
그래서 이오시스의 청을 받아 연회 동안 뮌을 임시 집사장으로 쓰게 된 건데, 일하는 모습을 보니 이대로 맡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테라스에 기대서 귀빈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잠시 구경하다가 돌아섰다.
복도에서는 메이드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들을 지나쳐 일층으로 내려가자, 이데트 누이가 빈객들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굳이 나와서 인사할 필요까지는 없는데 그냥 누님의 성격상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던 거겠지.
적당히 모시고 들어가게 할 요량으로 세리야를 찾고 있는데.
“뭐야. 왜 안 보이지?”
“메이드장 말입니까? 주방이나 정원에 있지 않을까요?”
“아니야. 세리야라면 어지간해서는 누님 곁에 딱 붙어있을 텐데.”
근처를 두리번거리면서 세리야를 찾는데, 이제 막 변성기가 온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세리야!”
나는 곧장 소리가 들린 쪽으로 향했다.
복도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확인해보니, 곤란해 하는 세리야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반대편에 있는 인간은 미체스 레시아르. 내 이복동생이었다.
유약해 보이는 얼굴에 비실비실한 체구는 여전하다.
그렇지만 놈은 어깨를 쫙 펴려고 애쓰며 세리야에게 말을 붙였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미체스 님. 인사라면 이미 드렸습니다. 저는 이 저택의 메이드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
“그냥 반가워서 그래. 잠깐, 몇 분 정도는 시간 내줄 수 있잖아.”
“하지만...”
세리야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안경을 올려 썼다.
그러자 미체스는 몸이 달아오르는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그 사이에도 음흉한 시선이 세리야의 몸을 철저히 훑고 지나간다.
이놈 봐라?
“형이 그렇게 혹사시키는 거야? 고작 몇 분 쉴 시간도 없을 정도로?”
“그건 절대 아닙니다!”
“그럼 괜찮잖아. 응? 잠깐 차라도 마시면서 얘기라도 하자고.”
미체스는 손을 뻗어 세리야의 팔목을 잡으려 했다.
저기까지 용서해줄 수는 없지.
나는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드러냈다.
미체스는 나를 본 순간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한껏 숨을 들이켠 상태에서 호흡을 멈추었다.
“혀, 혀, 형님…….”
“반갑다, 아우야.”
“자, 잘 지, 지내셨습니까...?”
“글쎄다. 귀찮은 일을 만드는 머저리들만 없으면 살만할 텐데.”
시큰둥한 대답에 미체스는 다리를 후들후들 떨었다.
관자놀이를 타고 땀이 주르륵 흐르는 모습을 보면 한심하기까지 하다.
나는 팔짱을 끼고 이 놈이 어쩌나 지켜보았고, 미체스는 꾸역꾸역 숨만 들이켜면서 눈동자를 굴렸다.
보다 못 참겠는지 미체스 옆에 서 있던 여자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제서야 미체스는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아, 그, 그렇지. 이, 인사 드려. 이 분이 레시아르 가문의 가주... 아, 아니, 혀, 형님이신...”
미체스가 횡설수설한 탓에 결국 여자가 스스로 나서 인사했다.
“넬라 포투치아에요.”
미인이긴 하지만 콧대가 뾰족하고 눈매가 사나워서 독하게 생긴 여자다.
미체스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거의 노예 다루는 상전 같은데.
이런 여자는 기를 확 꺾어놓는 게 제맛이긴 하지.
“넬라 양. 반갑군. 내 저택에 미인은 언제나 환영이야.”
나는 그녀의 손을 살포시 잡아들어 그 손등에 키스했다.
그러자 미체스가 까득 어금니를 깨물었다.
둘이 사귀는 사이인가? 조종하기에는 연인관계가 되는 게 가장 쉽긴 하지.
나는 괜히 넬라의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내려놓고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사관복을 입은 개 수인이 납작 엎드려 있었다.
낯이 좀 익는데.
“이건 뭐지?”
“…….”
“이거, 뭐냐고.”
“코, 코코입니다. 형님. 제 전속 메이드였던...”
기 싸움을 하려던 건지 잠시 버티던 미체스는 꼴사납게 바로 꼬리를 내렸다.
나는 개 수인의 등판을 발로 꾹 눌러보았다.
사관복 안에 털이 복슬복슬하게 들어차있는지 잘 만든 솜이불을 밟는 기분이었다.
“끼잉... 끼이잉...”
“... 형님... 그...”
“뭐?”
“아... 아닙니다...”
제 주인이 꼴사납게 물러나도 개 수인은 혀를 내민 채 헥헥거리며 내 체중을 버텼다.
미체스의 미간에 점점 더 깊은 골이 패는 게 꽤 재밌다.
넬라보다 이 개 수인을 괴롭힐 때 더 반응이 좋은 거 같기도 한데. 그건 차차 알아볼 기회가 있겠지.
“흣차.”
나는 개 수인 위에서 내려와 미체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가 바르르 떨며 내민 손을 맞잡아, 바스라뜨릴 듯이 힘을 주었다.
“……!”
미체스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러댔다.
나는 그를 턱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마지막 기회를 주마.”
“그게 무슨...”
“무슨 수를 꾸몄는지 지금이라도 다 털어놔. 그럼 다 용서해줄게.”
“혀, 형님. 저는...”
“미체스!”
넬라가 그를 홱 잡아채가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와 함께 미체스의 마지막 기회도 날아갔다.
“저런. 큰누님이 슬퍼하시겠어.”
“... 형님, 저는...”
“넌 더 말하지 마. 미체스. 레시아르 백작님? 미체스도 레시아르 가문의 일원이에요. 그런 식으로 윽박지르는 건 상당히 무례한 행동이라구요.”
“내가 그랬나? 그렇게 느꼈다면 사과하지.”
“연회 중에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넬라는 미체스와 팔짱을 끼고 그를 끌듯이 해서 가버렸다.
코코는 바짝 엎드려 내게 절하고는 그들의 뒤를 급히 따라갔다.
“꿍꿍이가 있으니까 들어왔을 텐데. 그게 뭘까?”
“중앙파 귀족들을 선동해서 도련님을 탄핵하려는 게 아닐까요?”
파샨이 조심스레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 정석적이야. 음험한 놈들은 음험한 수를 쓸 거란 말이지. 일단은 저 연놈들한테 친위대원을 붙여놔. 특히 코코는 네가 직접 감시하고.”
“넬라라는 여자가 성격이 더럽던데, 사고를 친다면 그 여자가 아닐까요?”
“자기보신적인 년이야. 스스로 위험을 무릅쓸 리가 없지. 흉계를 꾸미는 건 그 년이라도 직접 손을 더럽히는 건 코코일 거다.”
“알겠습니다!”
파샨은 몇 번 코를 벌름거리더니 코코의 냄새를 좇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파샨과 반대로 파티홀 쪽으로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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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홀에는 간단히 식사를 마친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진작 식사를 끝내고 파티홀로 이동한 것이었다.
파티홀 안에는 편히 쉴 수 있도록 소파와 흔들의자가 배치되어 있어, 귀족들은 각자 마음 맞는 사람끼리 모여 앉거나 누웠다.
그들은 술잔을 주고받으며 흥미로운 가십들을 속삭였다,
“제국의 번영제(???)는 자식이 오백 명이나 된다지요?”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수인들만 품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그게 참 놀라운 게, 자식들이 전부 은혈 이상이랍니다. 금혈만 세어도 백 명은 된다던데요.”
“이 사람이 허풍을...”
“사정 밝은 상인에게 물어보시오. 내 말이 맞나, 틀리나.”
왕국 사교계가 얼어붙어서 그런지 반대로 제국의 화제가 꽤나 많은 주목을 끌었다.
한참 분위기가 달아오르는데, 얼굴이 불콰해진 뚱뚱한 남자가 성을 내듯 말했다.
“에잇, 제국의 일은 입에 꺼내지도 마시구려. 그 놈들은 죄다 이상성애자요. 손님이 오면 아내를 내어주는 정신 나간 머저리들이란 말이요.”
“어머!”
귀부인들은 부채로 입을 가리고는 저들끼리 눈짓을 하며 웃었다.
생각보다 반응이 좋자, 뚱뚱한 남자는 씩 웃고는 음담패설을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젊었을 적에 제국으로 유학을 간 일이 있었는데, 저택을 내어준 베어루트 경의 아내가 글쎄...”
다들 알아서 잘 놀고 있구먼.
별 건 아니지만 호스트로서 손님들이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면 왠지 흐뭇하단 말이지.
그대로 다른 쪽도 둘러보려는데, 귀부인 중 하나가 내 얼굴을 알아보고 외쳤다.
“레시아르 백작님!”
“저 분이 그?”
“소문만 들었는데 정말 그러실 만 하군요.”
“얼굴만 아니라 하체도 그렇게 튼실하시다고.”
“어머머머머!”
한 마디 뒤에 또 한 마디가 이어지고, 정신없이 말이 쏟아져서 어지러울 지경이다.
귀부인들은 꺄르르 웃다가 내게 손짓을 했다.
“이리 오셔요!”
“재밌는 이야기 해주세요!”
“제 옆에 앉으세요!”
그녀들은 시끌시끌하게 떠들어대며 나를 유혹했다.
귀부인들의 관심을 단숨에 빼앗긴 뚱뚱한 남자는 혀를 차며 못마땅한 기색을 내보였지만 자기가 어쩔 건가.
나는 귀부인들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나이는 대략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중반 사이.
이미 한두 번씩은 아이를 낳은 몸이라 골반이 벌어지고 젖가슴은 약간 늘어졌지만 그래서 도리어 야한 냄새를 풍겨댄다.
그 중에서도 한 여자가 특히 눈에 들어왔다.
윗가슴을 드러낸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 한쪽 귀에 진주 귀걸이를 하고 손톱에는 분홍색 꽃물을 들였다.
얼굴에도 약간 살집이 있지만 딱 보기 좋을 정도로 육덕진 수준이다.
그보다도 매력적인 건, 껴안으면 기분 좋게 가슴을 주물럭댈 수 있는 풍만한 여체.
나는 그녀의 옆에 끼어들어 앉았다.
“레이디의 곁에 자리할 영광을 빌려주시겠습니까?”
“이미 앉으셨으면서. 제이엔 토캄이에요.”
토캄 가문이라면 마침 뮌이 접대하는 걸 지켜본 덕에 기억하고 있다.
운이 좋군.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손등에 키스하고 말했다.
“토캄이라. 용맹한 코뿔소와 향기로운 적포도주의 고향이군요.”
“레시아르령에서는 한참 먼 곳에 있는 한촌(??)인데. 잘 아시네요.”
“아름다운 레이디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기억하지요.”
내 말에 귀부인들이 소름 돋는다고 꺅꺅거리며 난리를 쳤다.
못생겼다면 그냥 기분 나쁠 말이지만 잘생겼다면 능청스러운 게 된다.
나는 능청스럽게 받아넘기며 적당히 화제를 돌렸다.
"재미있는 이야기라... 그러고 보니 마침 적당한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에 양념을 쳐서 내놓았더니 여자들은 엉엉 울고 남자들까지 눈시울을 붉혔다.
이렇게 반응이 좋을 줄은 몰랐는데.
다들 결말이 너무 비극적이라고 울먹거려서 대충 꾸며낸 해피엔딩으로 외전까지 만들어줘야 했다.
그래도 귀부인들은 훌쩍거리며 손수건으로 눈을 닦았지만.
“으흑... 흑... 줄리엣이 너무 불쌍해요...”
“가문의 원한 때문에 연인이 헤어져야 한다니...”
“아니, 따지고 보면 비극의 원인은 그 요상한 독이 아니겠어요?”
누군가가 던진 말에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다들 독이라는 단어에 민감해져 있었던 탓이다.
조금만 더 충동질하면 중앙의 패악질을 성토하는 분위기로 이끌어갈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너무 서두를 필요도 없겠지.
어차피 연회는 며칠간 이어진다.
나는 목이 마르다는 이유로 발언권을 뚱뚱한 남자에게 넘기고서 뒤로 물러나 앉았다.
소외당했던 뚱뚱한 남자는 신이 나서 다시 음담패설을 떠들어댔다.
좌중은 시큰둥했지만 그래도 분위기는 그럭저럭 전환되었다.
토캄 남작부인은 음담패설을 귓등으로 흘리며 슬그머니 내게 몸을 기댔다.
“너무 비극적인 이야기였어요.”
“하지만 그만큼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게 누구나 금지된 사랑에 끌리는 이유겠지요.”
그녀의 무릎을 살짝 어루만지자 토캄 남작부인은 배시시 웃으며 내 손을 쳐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만 나에게는 줄리엣만한 딸이 있어서요. 그런 불타는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어버린 거죠.”
그녀는 내게 기댄 자세를 고쳐 앉으며 은근히 벽을 세웠다.
아쉽네.
귀부인을 공략하는 게 그렇게 쉬울 리가 없지만.
나는 그녀에게 눈인사를 하고 일어섰다.
마침 친위대원이 내게 다가오는 게 보여서, 파티홀을 나와 복도로 나섰다.
친위대원은 당연하다는 듯 나를 따라 나와 귓속말로 속삭였다.
"백작님. 방금 전 데어뷘터 가문의 장녀가 도착했습니다."
"변경백의 딸이? 늦게 온 데다가 변경백 본인도 아니라니. 무슨 문제가 있나?"
"아직 무어라고 밝히지는 않았습니다만... 알아볼까요?"
"됐어. 직접 물어보지 뭐. 그 작자들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테고."
나는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나갔다.
곧 이데트 누이와 인사를 나누고 있는 장신 거구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변경백의 장녀, 파타하 데어뷘터겠지.
명가의 아가씨였지만, 여전사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여자였다.
짙은 청색 머리카락은 어깨 위로 짧게 잘라 운신에 방해되지 않도록 했다.
눈 밑에 길게 흉터가 있고, 반대편 뺨에도 자상이 남아있다.
어깨는 넓고 팔은 두껍다. 덩치도 어지간한 성인 남자보다 커서, 나와 비슷할 정도다.
얼굴만 떼놓고 보자면 미인이라고 하지 못할 것도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전사라는 인상이 너무 강하다.
총평. 주변에 다른 여자가 없을 때나 안고 싶은 여자다.
나는 탐색을 마치고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내 저택에 온 걸 환영하오. 데어뷘터 경."
"레시아르 백작님. 부디 파타하라고 불러주십시오. 제가 아직 가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럼 파타하 경이라고 부르지. 파타하 경, 먼 길 오느라 피곤하겠지만 잠시 시간을 내어 얼굴만이라도 비춰주시겠소? 오스트 공작과 수드베리히 후작께서 한참을 기다리셨다오."
"물론입니다. 늦은 만큼 바삐 움직여야겠지요."
파타하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허리춤에서 데어뷘터 가문을 상징하는 마체테가 앞뒤로 달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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