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 만찬
* * *
시실라는 자신 때문에 공주가 치욕적인 첫 경험을 했다는 사실을 견디질 못했다.
가문을 위해 정무대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행위가 충성과 우정의 대상인 카산드라 공주를 더럽혔다는 게 엄청나게 죄스러웠던 모양이다.
“아... 아아아...”
그녀는 옷을 걸칠 생각도 못하고 맨몸으로 공주에게로 기어갔다.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눈매에는 굵은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
“죄송... 죄송합니다... 공주님... 으흐흑...”
발치에 엎드려 우는 시실라를 카산드라 공주는 복잡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녀 때문에 자신이 치욕적인 꼴을 당하긴 했지만 쌓인 정 때문에 바로 내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잘못이 명백한데 바로 감싸줄 수도 없다.
“피곤하군. 백작, 이후는 백작에게 맡겨도 되겠나?”
결국 공주는 공을 내게로 넘겼다.
물론 거절할 이유는 없다.
“예. 지치셨을 텐데 공주님은 푹 쉬시지요. 나중에 달콤한 레몬수라도 보내드리겠습니다.”
“그것 참 상냥한 말씀이시군.”
공주는 다리를 후들거리면서도 일어섰다.
축객령을 내리려는 거겠지만 허벅지 사이에 백탁액이 주르륵 흘러나와서 꼴이 좀 우습게 됐다.
나는 카산드라 공주의 손등을 잡아 키스하고 문을 나섰다.
시실라는 친위대원들에게 반쯤 끌려 나를 따라왔다.
“도련님. 어디로 갈까요? 고문실이 좋겠죠?”
파샨이 시실라를 죽일 듯 노려보며 물었다.
“고문실? 우리 저택에 그런 게 있었어?”
“없습니다…….”
“장난하냐.”
나는 파샨의 귀를 살짝 잡아당겼다.
“그렇게 고문할 필요도 없을 거야. 알아서 불 테니까.”
“그렇습니까?”
내 말이 믿기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하는 파샨.
하지만 당연한 일이다.
시실라의 약점이 공주라는 걸 알아냈으니.
공주를 인질삼아 살살 구슬리고 협박하기만 하면 술술 불 게 뻔하다.
나는 근처의 빈 방으로 시실라를 데려갔다.
내 예상대로, 공주에게 험한 꼴을 더 보이기 싫으면 자백하라는 협박 한 방에 시실라는 홀라당 넘어갔다.
그녀는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 비밀을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버지 술잔에 독을 넣으려고 했다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시실라를 노려보았다.
시실라는 엉덩이가 아픈지 굼실굼실 하체를 움직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존댓말.”
“입니다...”
나는 시실라의 어깨에 두 발을 올린 채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이 놈들은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포섭하려 했단 말이지.
이간질을 위해 아버지를 노릴 수도 있다는 것도 가능성 중 하나로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정말로 그럴 줄은…….
나도 정의롭다고는 못하겠지만 중앙의 대신들은 정말 상종 못할 개새끼들이다.
무심코 발을 꽉 누르자, 시실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렸다.
“정확히는 백작... 님이 올리는 술잔에... 말입니다...”
“그야 그렇겠지.”
중앙에서 꾸민 계략의 전모는 대충 이렇다.
만찬에서 내가 아버지에게 술잔을 올린다.
아버지는 그 술잔을 받아 마시고는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내가 졸지에 독배를 올린 패륜아가 된 상황에서, 미체스 레시아르가 백작위 승계과정을 헐뜯어 비난한다.
난장판을 틈 타 미리 포섭한 이들이 ‘레시아르 백작 각하 만세’를 외치며 반중앙파 귀족들을 마구 죽인다.
“너무 난잡한 계획이라고 생각합니다.”
타라는 그렇게 말했지만, 실제로 그런 난장판이 벌어지면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자는 몇 없을 거다.
당장 대귀족인 오스트 공작과 수드베리히 후작, 그리고 파타하 데어뷘터도 어떻게 나올지 장담할 수 없다.
최악의 경우라면 그냥 나를 배신자로 몰아서 그 자리에서 죽이려 들겠지.
당장 자기가 먹고 마신 음식에도 독이 든 건 아닐지 걱정이 될 테니까.
“설마…….”
“물론 그럴 가능성은 낮아. 그냥 최악을 가정한 거야. 물론, 그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는 말이 되지만.”
“바로 미체스를 잡아들일까요, 도련님?”
파샨이 검집을 딱딱거리면서 물었다.
충성심이 남다른 친위대원들도 분노로 몸이 달아오른 모습이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잡아들여봐야 증거는 시실라의 증언 밖에 없어. 꼬리를 자르는 동안 다른 놈들은 전부 달아나겠지.”
“그럼...”
“일단은 장단에 맞춰주자고.”
나는 은밀히 헤시아스 남작과 기사 미장센을 차례대로 불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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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간의 일정은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단지 어디 있을지 모르는 중앙의 첩자를 신경 쓰는 게 좀 귀찮았다고 할까.
대귀족들에게는 오찬 때 시실라에게 알아낸 사실을 슬쩍 귀띔해 주었다.
의외로 놀라는 이는 없었다.
“무슨 수작을 부려오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오스트 공작은 그렇게 말했다.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을까요?”
“백작도 나름대로 생각해둔 게 있지 않나? 여긴 백작의 저택이니까 백작의 마음대로 해.”
“그래도 충고 하나만 해주시죠.”
내 부탁에 오스트 공작은 턱을 쓸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충고랄 것까지도 없겠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깔끔하게 쓸어내는 게 맞지 않겠어?”
“깔끔하게 말이죠.”
“그래. 저번에는 백작이 너무 사정을 봐준 탓에 전장에서까지 소란이 있지 않았나.”
그건 사실이었다.
내 나름대로는 기강을 잡는다고 잡았는데도 서북부 연합군 내에서도 중앙에 연을 댄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마리안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병무대신과 싸우는 도중에 뒤에서 칼을 맞을 뻔했지.
“살생부를 괜히 만든 게 아니야. 그 정도는 죽여야 중앙에서도 허튼 수를 못 쓸 거라는 계산이 섰으니까 만든 거란 말이지.”
오스트 공작은 티슈를 북북 찢어서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훅 불어 한 번에 날려버렸다.
“흘릴 피는 흘러야지.”
그 말에 수드베리히 후작과 파티스트롬 공작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더 숨길 필요는 없다.
나는 그들과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상의했다.
누군가 낌새를 눈치챌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만찬 때까지는 별일 없었다.
세리야는 빈틈없는 메이드장답게 일정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도록 도와주었다.
덕분에 나는 편하게 상석에 앉아서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이데트 누이와 화리메, 아마트리체가 내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마티란 자작 루이사는 몸조리를 위해 방에서 쉬도록 했다.
각자 자리에 앉은 귀족들은 식전주를 주고받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풍만한 몸을 자랑하는 토캄 남작부인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른 귀부인들과 수다를 떨었다.
내 시선이 닿을 때마다 허벅지를 비비적거리면서 자세를 바꾸긴 했지만.
그 사이에 메이드들이 줄줄이 들어와 접시를 내려놓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은식기에 가지런히 담긴 일백 가지의 요리.
내가 크리스털 잔에 스푼을 두들겨 식사의 시작을 알렸고, 모두들 음식이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식기를 바삐 움직였다.
“바이스. 괜찮은 거니?”
그런데도 이데트 누이는 내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나는 어깨를 벌려 과장스럽게 누님을 껴안았다.
“괜찮냐니, 누님. 이 좋은 날에 그런 걸 왜 물어보십니까?”
“그냥... 표정이 좀 안 좋아 보이는구나.”
“티 납니까?”
“아니.”
이데트 누이는 내 코끝을 장난스럽게 살짝 쥐었다가 놓았다.
“그래도 알 수 있지. 너는 내 동생인걸.”
나는 괜히 부끄러워져서 코끝을 문질문질 닦았다.
“뭐... 그냥 번거로운 일이 좀 있는 거죠.”
“그렇구나.”
이데트 누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배려한다면 다툴 일이 없을 텐데…….”
“누님, 그건.”
“알아. 너무 순진한 생각이겠지.”
그녀는 내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두 손 사이에 겹쳐놓았다.
“그래도 네가 다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구나.”
“그건 걱정 마세요.”
“그래도 되겠니?”
“누님. 저는 병무대신까지 두들겨 쫓아냈습니다. 다키아 왕국에서 누가 감히 저를 다치게 하겠습니까?”
내가 호언장담하자 이데트 누이는 쿡쿡 웃었다.
“그래. 이렇게나 커버렸으니... 내 걱정이 다 주책이었구나.”
“다 나를 생각해주는 거니 고맙게 받아들이렵니다. 자, 이것부터 드셔보세요.”
“얘가. 부끄럽게.”
방울토마토를 쿡 찍어서 입에 가져다 대주자, 이데트 누이는 나를 흘겨보면서도 입을 벌렸다.
그녀가 샐러드를 오물오물 씹는 모습은 아주 흐뭇해서 쭉 바라보기만 해도 지루하지가 않았다.
“남매 사이에 우애가 돈독하군. 보기에 아주 좋아.”
오스트 공작이 큰 소리로 말했다.
저 작자는 공작위만 없으면 그냥 귀찮은 노인네였을 텐데 말이야.
나는 와인 잔만 살짝 올려 인사했다.
오스트 공작은 눈을 찡긋해 보이면서 입술을 오물오물 움직여 사인을 보냈다.
‘언제 시작할 건가?’
성질도 급하지.
나는 고개를 저어보였다.
명분을 쌓기 위해서는 놈들이 먼저 움직이게 해야 한다.
나는 일부러 자리를 돌아다니며 친중앙파 귀족들에게 음식과 술을 권했다.
돼지고기를 큼지막하게 썰어서 건네주고, 메추라기 다리를 손으로 찢어서 덜어주었다.
놈들은 굽실굽실하면서 잘도 받아쳐먹었다.
“많이들 드시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는 말이 있지 않소.”
“백작님께선 희한한 말도 알고 계시는군요.”
“새겨 듣는 게 좋을 텐데. 하여간 쭉 들이켜시오. 저 멀리 제국 남부에서 직접 공수해온 귀한 술이니.”
사근사근하게 대해주자 친중앙파 귀족들도 더 빼지 않고 허겁지겁 술을 받아마셨다.
그렇게 적당히 술이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말석 언저리에 앉은 미체스는 자꾸 잔을 입에 가져다댔다가 떼기를 반복했다.
다리를 달달달 떠는 게, 무언가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게 분명하다.
시선은 이곳저곳을 바쁘게 방황하고 있지만 가장 눈여겨보는 곳은 한 곳이다.
비어있는 내 옆 좌석.
나는 눈짓으로 세리야를 불렀다.
메이드장은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사뿐사뿐 다가왔다.
“예. 백작님.”
“아버지는?”
“준비를 마치셨습니다.”
“그럼 나오라고 하고, 누님은 방으로 모셔다드려.”
세리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데트 누이에게는 굳이 보이고 싶지 않은 광경이 펼쳐질 테니 따로 부탁한 것이다.
어떻게 구슬렸는지 몰라도, 이데트 누이는 세리야를 따라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그녀들과 엇갈리듯이 아버지가 걸어 들어왔다.
항구도시 헤시아스에 연금당한 동안 이마주름이 늘기는 했지만 허리는 곧게 펴졌고 눈길은 형형하게 빛난다.
아버지의 등장에 몇몇 귀족들이 의자를 끌었다.
파샨은 눈을 번뜩이며 수상한 자들을 점찍어두고 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자, 옆에 앉은 자와 귓속말을 속삭이는 자, 눈을 감고 심호흡하는 자, 어디론가 빠져나가려는 자.
잡다한 것들은 파샨과 타라가 알아서 처리하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와 포옹했다.
“아버지. 생신 축하드립니다.”
“고맙구나. 아들아.”
우리는 건조한 웃음으로 서로의 등을 두들겨주었다.
별 생각 없이 거나하게 취한 귀족들은 탁자를 두들기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내 옆자리에 앉혔다.
그리고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여주었다.
“올바른 선택을 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겁박하지 않아도 된다.”
“겁박이라니요. 저는 아버지께 배운 대로 행하고 있을 뿐인데요.”
내 말에 아버지는 표정을 찡그렸다가 이내 가식적인 웃음을 지어냈다.
보는 이들이 많은데 불화를 드러내는 건 아버지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인 귀족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다망하신 와중에 참석하여 이 자리를 빛내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아름다운 아가씨들께는 특별히 더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아직 꽃을 구하기 힘든 계절인데 아가씨들께서 꽃다발을 대신해주셨으니 말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과장스럽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장난기 많은 아가씨들이 까르륵 웃었다.
“자리도 무르익었으니, 존경하는 아버지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한 잔 올리겠습니다. 여러분도 다들 잔을 채워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미리 준비되어있던 황금 술잔에 새로 딴 와인을 따랐다.
아버지는 그것을 받아들어 어깨 위까지 올렸다.
다른 이들도 모두 제각기 술을 따라 잔을 채웠다.
“추웠던 겨울도 모두 지나갔습니다. 다가올 봄이 따사롭기를 바라며. 아버지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의 행운을 기원하며.”
나는 내 잔에 스스로 와인을 따르고 나서 아버지와 술잔을 부딪쳤다.
쨍하고 맑은 소리가 울렸다.
다른 귀족들도 근처에 앉은 이들과 술잔을 부딪치느라 여기저기서 청명한 유리 소리가 울렸다.
그들이 허겁지겁 술을 마시는 동안, 아버지도 천천히 잔을 들어 입술에 가져다댔다.
미체스의 눈동자가 커다래진다.
몇몇 수상쩍은 놈들이 엉덩이를 뒤로 내밀고 당장이라도 일어날 듯한 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목울대를 움직이며 술을 삼키고, 술잔을 내려놓기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잔에는 아무 것도 발려있지 않으니까.
밑작업을 해두었어야 하는 시실라는 밧줄에 꽁꽁 묶여 창고로 내려가 있다.
자정의 여명 단원들이 빈틈없이 감시하고 있을 테지.
“고맙구나, 아들아.”
아버지는 가식적인 웃음을 내게 향했다.
멀리서 입술을 질끈 깨무는 미체스.
계획이 일그러진 게 분명하니, 이대로 물러나고 싶겠지만, 순순히 돌려보낼 생각은 없다.
“레시아르 백작 각하 만세!”
헤시아스 남작이 갑자기 소리를 내지른 것이다.
난데없는 만세삼창에 다들 놀랐다.
개중에서도 특히 놀란 것은 미체스겠지.
그라고 해서 모든 첩자의 정체를 아는 것은 아니다.
미간이 찌푸려진 걸 보니 그도 열심히 골을 굴리고 있는 모양이다.
‘헤시아스 남작도 우리 편인가?’
‘형님에게 아내를 뺏겼다고 듣긴 했는데……. 그럼 믿어도 되는 건가?’
‘하지만 왜 만세만 하고 행동은 하지 않는 거지?’
‘계획대로 진행하라는 건가?’
‘정무대신이 따로 바람잡이를 심어둔 거라면, 어떻게 해야하지?’
미체스의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하지만 그의 결정에 쐐기를 박듯이 내 곁으로 기사 미장센이 다가온다.
헤시아스 남작과 같이 오쟁이를 진 것으로 알려진 남자다.
내게 원한을 품을만한 인간이 내 뒤에 서서 살그머니 칼집을 쥐고 있다.
그 흉흉한 기세에 미체스는 저도 모르게 결정을 강요당하고 말았다.
옆에 앉은 넬라도 다그치듯이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미체스. 알잖아. 우리는 서자 출신이야. 기회는 한 번 뿐이라구.”
“그건... 그렇지.”
미체스는 이내 결심을 굳힌 듯,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주먹을 몇 차례 쥐었다 펴더니, 나이프를 집어 들어 잔을 두들겼다.
크리스털 잔을 두들기는 청명한 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미체스에게로 쏠렸다.
그는 작게 심호흡을 하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르륵하고 의자가 바닥을 끄는 소리가 심하게 났기 때문에 모두가 미체스를 돌아보았다.
말석에 앉은 자가 그런 식으로 관심을 끄는 건 예법에 어긋나는 행위이기 때문에 눈살을 찌푸린 귀족들이 많았다.
그런 분위기를 불식하듯이 깡마른 사내가 나서서 미체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오?”
서남부의 맹주인 몰케 백작이었다.
그의 질문에 미체스는 조금 떨면서도 애써 대답했다.
“미체스... 레시아르입니다.”
“허면, 레시아르 가문의 일원이오?”
“그렇습니다.”
“고귀한 레시아르 가문의 일원인 그대가 이토록 예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이 자리에 계신 고귀하신 분들께 알리고자 하는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몰케 백작은 미체스가 딱딱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간결하게 질문을 던졌다.
미리 정해둔 답을 유도하는 건가.
매끄럽게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어지는 덕분에 끼어둘 틈이 보이질 않는다.
물론 이들이 제멋대로 떠드는 것까지가 내가 벌려둔 판이긴 하지만.
나는 이를 박박 가는 파샨을 진정시키며 미체스와 몰케 백작의 문답을 경청했다.
“알리고자 하는 사실?”
몰케 백작이 되물었다.
궁금증을 자극해 군중을 집중시키기 위한 스킬이었다.
그의 의도대로 다수의 귀족들은 미체스가 무얼 폭로할지 흥미롭게 지켜보기 시작했다.
“예.”
미체스는 짧게 대답하며 자리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분위기는 호의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오스트 공작, 수드베리히 후작, 파티스트롬 공작, 파타하 데어뷘터를 위시한 대귀족들.
아버지와 전 집사장 뮌.
친위대장 파샨과 부관 타라를 비롯해 내게 충성하는 메이드들.
이들의 눈총에도 미체스는 무너지지 않고 꿋꿋하게 준비해온 말을 내뱉었다.
“저는... 이 자리에서 패륜을 고발하고자 합니다.”
“패륜이라? 더 정확히 말해줄 수 있겠소?”
“예. 저는 제 이복형이자 레시아르 백작인 바이스 레시아르의 패륜을 고발합니다!”
미체스가 당당하게 외쳤다.
그 말에 좌중이 소란스러워졌다.
상황을 모르는 귀족들 중에서는 미체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항의하는 자도 있었다.
몰케 백작은 탁자를 두들겨 소란을 가라앉히고 미체스에게 다시 물었다.
“그대는 레시아르 가문의 적자요?”
“아닙니다. 서자입니다.”
“서자인 그대가 적자에 장남인 레시아르 백작의 패륜을 고발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소?”
“물론입니다.”
“증거가 있어야 할 거요.”
몰케 백작의 말에 미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꾸민 최선의 계획은 내가 아버지에게 독배를 내밀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입을 통해 내 패륜을 고발한다는 것 또한 대안책으로 들어있었으니.
헤시아스 남작과 기사 미장센이라는 숨김패를 본 미체스는 부디 중앙이 아버지를 제대로 포섭했기만을 기원하며 입을 열었다.
“전 레시아르 백작이신 제 아버지께서 레시아르 백작의 패륜행위에 관해 직접 증언해주실 겁니다.”
나는 여기서 일어났다.
“적당히 봐주려고 했더니 더 들어줄 수 없겠군. 미체스! 네 말을 네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내 호통소리에 미체스는 어깨를 움찔했다.
하지만 넬라가 뭐라고 속삭이자 그는 덜덜 떨면서도 가슴을 쫙 폈다.
“혀, 협박해도 소용없습니다. 형님. 진실은 밝혀지는 법이니까요.”
“좋아. 아버지께 직접 물어보지.”
“예?”
내가 어떻게든 입을 막을 거라고 생각한 미체스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지만 나는 귀빈들을 돌아보며 선언했다.
“제가 백작위를 계승한 데에 조금이라도 아버지를 불편하게 해드린 사실이 있다면, 이 자리에서 인장반지를 되돌려드리겠습니다.”
초강수였다.
아버지가 만에 하나라도 나를 배신한다면 내 정통성은 치명타를 입게 된다.
물론 백작위를 그냥 넘길 생각은 없지만, 내 패륜에 대한 이야기는 사교계에서 두고두고 회자되겠지.
하지만 나는 자신이 있기에 직구를 던졌다.
그리고 벽에 붙어 서 있는 메이드 중 하나에게 손짓했다.
이제 공은 아버지에게 넘어갔다.
“... 나는...”
아버지는 힐끗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서는 여전히 얄팍한 야욕과 욕심이 번득거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