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 악녀와 충견
* * *
지난 일로 중앙의 계략은 철저히 분쇄되었다.
놈들은 이복동생을 부추기고 아버지를 독살해서 나를 끌어내리려 했겠지만,오히려 친중앙파 귀족들이 쓸려나가고 반중앙파 귀족들이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특히 대귀족인 오스트 공작, 수드베리히 후작, 파타하 데어뷘터와 파티스트롬 공작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손을 모았다는 건 의미가 크다.
이제 연합은 사방에서 둘러싸고 중앙을 들이치면 왕관도 탈취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이 되었으니.
물론 제국의 눈치도 봐야하고, 연합 내에서도 이해관계가 다르니 그걸 현실화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중앙의 늙은 대신들이 불안해서 잠도 못 자겠지.
놈들이 전전긍긍하는 사이에 나는 아우럼 백작가로 가서 누이들을 구출해 올 생각이다.
그게 당장은 아니고.
당장은 승리의 과실을 즐겨야지.
나는 벌벌 떠는 미체스와 넬라, 그리고 코코를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우선 미체스 이 놈은 자존심도 없는지 넙죽 엎드려있다.
지하실로 끌려왔을 때부터 한 마디도 안하고 절을 올리는 자세로 바닥에 바싹 붙어있는 거다.
이래서야 괴롭힐 맛도 나질 않는다.
일부로 사내 놈을 괴롭히는 취미 따윈 없으니까.
미체스의 종복인 개 수인 코코도 엎드려 있기는 마찬가지다.
카산드라 공주의 방에서부터 발가벗져진 채로 왔던가.
약간 살집 있는 옆구리과 토실토실한 엉덩이가 그대로 드러나서 눈요기가 된다.
허리선을 따라 개털이 숭숭 나 있는 게 옥의 티지만.
그래도 코코는 인절미 강아지가 떠오르는 순둥한 외모로 꽤 귀여운 편이다.
그에 반해서 넬라 저 년은.
“어... 어, 어떡하지? 어떻게 좀 해봐! 미체스! 그래도 네 형이잖아!”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되는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뿐이다.
내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자기 목이 날아갈 거라는 걸 모르는 건가?
얼굴이 파랗게 질려있는 걸 보면 나를 두려워하긴 하는 모양인데...
그냥 지능이 모자란 걸 수도.
하긴. 그러니까 뻔한 계략에 홀라당 넘어가서 허수아비 춤을 췄겠지.
그래도 내가 넬라를 당장 죽이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앙칼진 년이 예쁘긴 하니까.
관자놀이 쪽으로 말려 올라간 눈썹과 오뚝한 콧날, 조그마한 입술만 봐도 성질이 독한 년이라는 인상이 전해져온다.
마침 복장도 그런 인상을 강화하는 승마복이다.
흰색 셔츠 위에 검은색 자켓을 걸치고, 허벅지에 꽉 끼는 흰색 바지를 입었는데 아래로는 무릎까지 올라오는 가죽장화를 신어서 채찍만 들면 사디스트 여왕님이 될 것 같다.
그런 여자가 내 앞에서 달달 떨면서 서 있단 말이지.
나는 흐뭇한 시선으로 넬라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넬라는 사시나무처럼 떨어대기 시작했다.
“사, 살려주세요. 백작님.”
“살고 싶었어? 살고 싶은 태도가 아닌데?”
“힉...”
넬라는 그제야 자기 처지를 깨달았는지 내게 기어와서 엎드렸다.
나는 다리를 들어 넬라의 머리를 잘근잘근 짓밟았다.
“내가 너희들 꾀에 넘어갔더라면 너희는 날 살려줬을까?”
“우브븟...”
넬라는 바닥에 얼굴을 짓눌리면서 괴롭게 버둥거렸다.
까칠해보이는 미녀가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는 게 귀여워서 몇 번 더 꾹꾹 뒤통수를 밟아주다가 발을 떼었다.
“켁, 켁, 하아... 하...”
넬라는 얼굴에 달라붙은 모래를 떼어내면서 눈물을 찔끔 짜냈다.
하지만 아직도 ‘나한테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지?’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얼굴에서 뻔히 드러난다.
욕심 많게 살아오면서 떠받들어지는 데에 익숙한 여자라 어쩔 수 없는 건가.
정말로 예쁘지만 않았으면 진작 죽었을 년이다.
나는 넬라를 일으키고서 얼굴을 털어주면서 말했다.
“넬라 양. 억울한가?”
“아으... 아, 아닙니다...”
“표정이 억울한 거 같은데?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나 싶은 얼굴이란 말이야.”
넬라는 황급히 자기 얼굴을 더듬어보았다.
나는 넬라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속삭이듯 말했다.
“미체스는 유약한 놈이야. 혼자서는 절대로 나한테 대적할 마음을 품을 리가 없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
“옆에서 바람을 불어넣은 년이 있다는 말이지.”
나는 넬라와 코코를 번갈아 둘러보았다.
미체스를 부추긴 게 넬라라는 건 누가 봐도 뻔한 사실이다.
하지만 넬라는 뻔뻔하게도 코코를 가리켰다.
“저, 저 년이 그랬을 거예요!”
“그래?”
“자기 몸에 강독을 숨겨서 공주의 호위기사에게 건네줬다죠? 저 년이 미체스를 꼬드긴 게 분명해요! 늘 주제넘게 나서더니, 결국은 백작님에게까지 해를 끼친 거라구요!”
넬라가 몰아가자 억울했는지, 아니면 제 주인을 이 지경에 빠뜨린 악녀가 미웠는지.
코코도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넬라를 노려보았다.
나는 넬라의 어깨에 걸친 팔을 풀고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들 노려만 본다고 뭐가 되나?”
“네에...?”
“정말로 억울하다면 미체스에게 바람을 불어넣은 년이 죽도록 미울 거 아니야.”
“네에...”
“그러니까 때려봐. 서로 때려서 순수를 증명해 봐.”
내 말에 넬라는 반색하더니 코코 앞으로 가서 섰다.
고개를 푹 숙이는 코코.
코코가 기죽은 모습을 보자 넬라는 반대로 의기양양해졌다.
“너 때문에... 네가 제대로 안 해서 이 꼴이 난 거 아니야!”
짝!
넬라는 거침없이 코코의 따귀를 때렸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코코의 머리가 휙 돌아갔다.
“캐앵!”
“이! 쓸모없는 년! 죽어! 너 같은 건! 죽어야 돼!”
넬라는 코코가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양쪽 뺨을 번갈아가며 후려쳤다.
가만 두면 그대로 때려죽일 기세다.
그래도 넬라에게 나쁠 건 없겠지. 자기가 미체스를 꼬드겼다는 사실을 입막음할 수 있을 테니.
물론 코코가 맞아 죽는 걸 그대로 두고 볼 생각은 없다.
“코코.”
내가 코코를 부르자 넬라는 손을 멈추었다.
코코는 퉁퉁 부은 볼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녀의 북슬북슬한 앞머리를 쓸어내리며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네 주인을 배신했니?”
코코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자기 의사를 잘 드러내지 않는 그녀로서도 그 말만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충성심 깊은 개 수인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것은 주인을 배신하는 것이니까.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럼 미체스가 혼자서 일을 꾸민 거야?”
코코는 급하게 붕붕 고개를 저었다.
“그럼 넬라가 꼬드겼다는 말인데. 왜 가만히 있는 거야?”
내가 부추기자 코코는 드디어 천천히 팔을 들어올렸다.
넬라가 노려보자 움찔하긴 했지만, 그래도 물러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코코의 입장에서도 넬라가 예뻐보일 리 없다.
한적하긴 해도 괜찮은 삶을 살 수 있었던 주인이 여자 하나 때문에 목숨을 위협 받게 생겼으니.
코코가 보기에는 넬라가 이 사달의 원흉인 셈이다.
넬라를 무섭게 노려보는 코코.
하지만 넬라는 보란 듯이 두 팔을 가로로 쭉 뻗으며 가슴을 내밀었다.
“하! 미천한 개 수인 년이? 그래, 너도 치고 싶으면 쳐 봐!”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코코는 넬라의 뺨을 후려쳤다.
짝!
흰 뺨에 단풍잎처럼 남은 붉은 손자국.
넬라는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눈을 부릅뜬다.
“비천한 수인 년이...”
넬라는 터진 입술을 앞니로 깨물더니, 손을 뒤로 쭉 뻗었다가 그대로 코코의 얼굴에 강스파이크를 갈겼다.
파앙!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그 한 방에 코코가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넬라는 코웃음을 치며 쓰러진 코코를 내려다보았다.
“역시 개새끼는 땅을 기는 게 더 어울리네.”
“그르르릉...”
드디어 코코도 화가 난 모양이다.
그녀는 전신의 털을 뻣뻣하게 세운 채로 일어서더니 넬라에게 달려들어 뺨을 갈겼다.
넬라도 지지 않고 코코의 뺨을 친다.
짝, 짝, 짜악, 짜악.
귀가 아플 정도로 뺨 때리는 소리가 몇 번이고 울렸다.
“넬라! 코코! 그만해! 그만하라고!”
더는 못 보겠는지 미체스가 일어서서 외쳤다.
하지만 넬라는 물론이고 코코까지 미체스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때리는 사이에 분노와 증오가 쌓여 멈출 수 없게 된 것이다.
두 여자는 점점 더 가열차게 서로를 후려치기 시작한다.
넬라의 입술이 터지고 코코의 얼굴이 퉁퉁 부어도 둘은 미친 듯이 할퀴고 치고 박았다.
“죽어! 죽으라고!”
“나쁜... 당신이... 주인님을...”
“너 때문에 망했어! 너 때문에!”
“크르릉!”
나는 적당히 지켜보다가 넬라와 코코가 너무 못생긴 얼굴이 되어버리기 전에 끼어들었다.
“그만.”
막 코코를 때리려던 넬라의 팔뚝이 허공에 그대로 멈추었다.
코코도 마찬가지로 넬라를 때리는 대신 가만히 내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
미체스가 그렇게 간청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던 여자들이 내 말 한 마디에 싸움을 멈춘 것이다.
이 자리를 지배하는 게 나라는 게 확연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미체스는 허탈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미체스.”
“... 아, 예! 형님.”
“누가 고개 들라고 했지?”
“죄송합니다!”
미체스는 다시 바닥에 이마를 박고 엎드렸다.
나는 적당한 높이의 와인통에 걸터앉아 두 여자들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넬라와 코코는 간격을 둔 채 내게로 다가왔다.
둘 다 얼굴이 꽤 상했다.
그래도 넬라는 귀족 출신이라 그나마 덜하지만, 코코는 붓기로 얼굴이 빵빵해졌을 정도다.
나는 두 여자의 턱을 당겨 내 허벅지 위에 올려두고 뺨을 어루만졌다.
내 손바닥까지 화끈화끈하게 열기가 올라오는 게, 아마 자고 일어나면 고생 좀 하겠지 싶다.
"그만큼 치고박고 싸울 정도면 둘 다 억울한 게 있는 모양이네."
내 말에 코코는 묵묵부답, 넬라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참 웃긴 년이란 말이야.
나는 실소가 터지려는 걸 참고 두 여자의 입술을 문질러보았다.
머리채까지 잡고 싸우는 와중에 입술이 성할 리가 없다.
코코는 물론이고 넬라도 입술이 붓고 터졌다.
하지만 보드라운 감촉은 여전했다.
잠시 입술을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하물이 고개를 드는 게 느껴졌다.
바지 위로 묵직하게 올라온 실루엣을 본 넬라의 눈동자가 환해졌다.
살 구석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걸까.
"백작님... 바지가 불편해보이는데, 제가 벗겨드려도 괜찮을까요?"
넬라는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머리는 헝클어져있고 얼굴에는 멍이 들어있는 여자가 그렇게 나오니까 묘한 끌림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넬라는 애써 미소 지으며 내 바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넬라!"
미체스가 황급히 넬라를 불렀다.
"뭐, 뭐하려는 거야?"
"닥쳐."
넬라는 내게 했던 사근사근한 목소리와는 정반대로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미체스를 노려보는 시선에는 애정이란 게 한 오라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미체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뜨고 되물었다.
"닥치라니... 넬라! 네가 어떻게..."
"닥쳐! 닥쳐! 닥쳐! 애초에 너 같은 병신 서출과 사귀는 게 아니었는데. 처음부터 백작님께 나를 바쳤어야 했는데."
넬라는 내 바지춤을 꽉 쥔 채로 미체스를 노려보았다.
마치 자기가 이런 꼴에 처한 게 다 미체스 때문이라는 양.
"네... 넬라..."
"함부로 내 이름 부르지 마. 이제부터 너랑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넬라는 미체스에게 중지를 세워보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더없이 공손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내 바지를 끌어내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