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 세제르 자작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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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샨이 수인인 게 이렇게 고마울 줄이야.
나는 앞에 앉은 파샨을 꼭 껴안은 채 북슬북슬한 꼬리에 얼굴을 마구 비벼댔다.
“도련님! 운전 중에 그러다 큰일 납니다!”
파샨은 괴조 고타마에게 달린 고삐를 느슨하게 조이면서 기겁했다.
그렇지만 추워서 어쩔 수 없었다.
높은 고도에서 칼바람을 쐬며 날아간다는 건 보통 추운 게 아니었다.
처음에는 불꽃을 만들어서 둥둥 띄워봤지만, 고타마가 깃털을 일으키며 기겁을 하기에 화염마법도 쓸 수가 없다.
중앙군과 싸울 때는 고타마 위에서 화염마법을 마음껏 썼는데. 왜 지금은 안 된다는 거지.
아래로 휙휙 날려대는 거랑, 자기 몸 위에 올려두는 거랑은 다르다 이건가.
나는 간질간질한 코를 만지다가 시원하게 재채기를 터뜨렸다.
“엣취! 어흐. 파샨. 세제르 령까지 얼마나 남았어?”
“저기가 메네스 산맥이니까 이제 곧입니다.”
“얼어 죽겠네. 이럴 줄 알았으면 코코도 데려올걸 그랬어.”
“그런 개털은 여우털에 댈 게 아닙니다!”
파샨은 코코의 털에 비해 자신의 모피가 얼마나 따뜻하고 부드러운지에 관해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그렇지만 파샨의 여우털이 처음부터 이렇게 윤기가 자르르 흘렀던 건 아닌데.
잘 먹이고, 잘 재우고, 가끔 빗질도 해주면서 지금의 예쁜 모피가 완성된 거다.
여하튼 나는 파샨이 수인이라는 사실에 감사하며 다시 모피에 얼굴을 묻었다.
다행히 해가 지기 전에는 세제르 자작령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환영합니다. 레시아르 백작 각하.”
저택에 도착해서 인장반지를 보여주자, 문지기는 화들짝 놀라 안쪽으로 뛰어갔고, 세제르 자작은 곧바로 허겁지겁 뛰쳐나왔다.
그는 내 이모부지만, 작위나 영향력을 고려하면 내가 그보다 윗사람이라고 해도 좋다.
그래서 그는 깍듯한 태도로 나를 안내했다.
나도 그에게는 별다른 악감정이 없어서 정중하게 대해주었다.
하지만 세제르 자작은 저택을 안내하는 내내 손수건을 입에 대고 기침을 해댔다.
가끔은 손수건에 피까지 묻어 나왔다.
안내해준답시고 돌아다니면서 각혈을 하는데, 내가 부담스러워서 불편할 정도다.
“안색이 좋지 않아보이시는데, 들어가서 쉬시지요. 이만하면 저택 안내는 충분히 받은 듯합니다.”
“미안합니다. 콜록, 콜록! 그럼 염치불구하고... 아, 안사람은 근처 야외로 피크닉을 나갔으니 곧 돌아올 겁니다.”
“예. 편히 쉬시길.”
나는 저택 한 곳의 널찍한 방을 받아 그리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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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받은 것은 해가 떨어진 후였다.
그녀는 두 딸과 함께 내 방으로 찾아왔다.
“바이스! 내 귀여운 조카님!”
이모는 활기찬 여인이었다.
이제 슬슬 눈 옆에 주름이 생길 나이지만, 아주 자세히 살펴보지 않는 이상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옅은 화장으로 미세한 주름살을 숨기기만 하면, 그녀는 몸을 그리는 둥근 곡선이 꽤나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이리 오세요. 이모가 한 번 안아보고 싶어서 그래요.”
이모는 괜히 친한 척을 했다.
우리가 이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포옹해준다는데 마다할 필요도 없지.
나는 이모의 푸근한 몸을 세게 안았다가 놓았다.
“오랜만입니다. 이모님.”
“그래요. 삼 년? 아니, 사 년만인지도 모르겠어요. 엔디 자작의 결혼식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것 같으니까 말이에요.”
“자주 연락 못 드려 죄송합니다. 아, 이건 이데트 누님이 이모님께 써드린 편지입니다.”
나는 파샨에게 편지를 받아 이모에게 드렸다.
이모는 편지를 받아 빨리 읽고는 미소를 지었다.
“이데트, 그 아이는 늘 속이 깊었지요. 쫓기듯 결혼한 게 안타까웠는데 이렇게 레시아르 가문으로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올해 가을, 추수가 끝나고 나면 저택에 방문하도록 할게요.”
“예. 그 때는 꽃길로 환영해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그래요. 참. 너희들은 왜 그렇게 멀뚱멀뚱하게 서 있는 거니? 어렸을 적에는 백작님과 잘 놀곤 했잖아? 어서 인사하렴.”
이모는 두 딸들을 앞으로 내밀었다.
비슷하게 생긴 미녀 자매다. 나이는 한 살 터울.
언니는 로자리아, 동생은 로잘린.
둘 다 곱슬곱슬한 분홍색 머리에 장미꽃 장식을 달고 있다.
얼굴은 동글동글해서 귀엽지만 입가는 위로 말려 있어서 제멋대로일 거라는 인상을 주게 한다.
실제 성격도 크게 다르진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어렸을 적에는 둘이서 나를 꼬집고 밀치고 했던가.
가슴은 꽤나 커졌지만, 얄미운 얼굴은 그대로다.
“오랜만이에요. 백작님. 후후훗.”
“픗, 맞아. 오랜만이네요. 백작님.”
두 자매는 쿡쿡거리면서 내게 인사했다.
꿀밤 마렵군.
더블유자로 올라간 입술을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꿀밤을 갈겨버릴 것 같아서, 나는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이모님. 피크닉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아. 피크닉 말이지요.”
이모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은 피크닉이 아니라 마수 사냥이었어요. 요새 영지에 마수들이 날뛰고 있어서…….”
“세제르 자작은 피크닉을 나간 걸로 알고 계시던데요?”
“그 사람은 몸이 안 좋으니까요. 요양 중인데 이런 일로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서 말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영지의 주인에게 그런 일을 속이는 게 괜찮은 건가?
하지만 내가 끼어들 일은 아니어서 그냥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내가 침묵하자, 이모는 빙그레 웃고는 말했다.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 귀여운 조카님에게 이모가 부탁을 하나 해도 괜찮을까요?”
“어떤 부탁 말이십니까? 미리 말씀드리지만 여기 세제르 령에 오래 있지는 못합니다. 저도 오스트 공작령 쪽에 일이 있는지라.”
“조카님이라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에요.”
“일단 들어보고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모의 부탁이란 건 간단했다.
영지에 날뛰는 마수들을 처리해달라는 것이었다.
“기사단은...”
“이미 한계까지 움직이고 있어요. 병사들도 마찬가지구요.”
“마수가 그렇게나 많습니까?”
“상인들이 성문을 나가지 않으려고 할 정도에요.”
영주의 성이 있는 곳에서, 이문을 밝히는 상인이 그 정도라면 마을 단위의 촌에서는 지옥이 펼쳐졌겠군.
세제르 령은 원래 마수가 많은 지역이 아니었다.
이건 마수를 낳는 마수, 하이브의 소행이 분명하다.
“이모님도 하이브, 혹은 네스트에 관해서는 들어보셨죠?”
“그래요. 중앙에서 정말 악독한 짓을 해줬어요. 어떻게 우리 영주들한테 그런 짓을... 자작께서 조금만 더 건장하셨다면 백작님께 제일 먼저 가서 충성 맹세를 올렸을 텐데요!”
이모는 남편을 은근히 헐뜯었다.
유약해서 나서야 할 때 나서지도 못했다는 투였다.
부부관계가 좋지는 않은가 보군.
하긴, 몸이 약한 남편과 기가 센 아내라면 그 조합이 어찌 될지는 자명한 일이다.
나는 모른 척하고 말을 계속했다.
“여하튼 세제르 령에 갑자기 마수가 나타난 건 하이브 탓일 가능성이 큽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하이브가 어디 숨어 있는지를 알 수가 없어서요.”
“마수가 출몰하는 곳을 역으로 추적해보시면 될 텐데요.”
“이 곳은 계곡과 골짜기가 너무 많아서요. 한 줌 밖에 없는 기사들을 보내서 찾기는 힘들어요. 그렇다고 병사들을 넓게 풀면 마수들에게 당할 뿐이고요.”
지형 때문에 하이브의 은신처가 어딘지 모르겠다는 건가.
하긴, 어디 있는지만 안다면 하이브 자체를 죽이는 건 손쉬운 일이니까.
고타마를 타고 오길 잘 했다.
하늘에서라면 지형과 상관없이 하이브를 찾아낼 수 있겠지.
이모는 내 손을 꼭 잡고 흔들었다.
“무리한 부탁이란 건 알아요. 백작님께 만족할만한 대가를 드릴 수도 없어요. 하지만 이 이모는 기댈 게 우리 조카님 밖에 없는 걸요. 꼭 좀 도와줄 수 없을까요?”
글쎄. 어쩐지 마수를 물리쳐달라는 게 전부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일단은 이모님 부탁이고.
이데트 누이도 이모한테는 잘 대해 달라고 하셨고.
내가 힘을 쓰면 하루, 이틀이면 해결 될 문제기도 하고.
부탁을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러도록 하죠.”
“고마워요! 조카님이 그래주실 거라고 이 이모는 믿었어요.”
“대신 여기 머무르는 시간은 모레까지만으로 하겠습니다. 그 후에는 하이브를 못 찾더라도 떠나야 합니다. 저도 제 일정이 있는지라.”
“그걸로 충분해요. 그리고 백작님이라면 하루면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이모는 생글생글 웃고는 내 손등을 살살 두들겼다.
“그럼 오늘은 푹 쉬시고, 내일 다시 뵙기로 해요. 아침은 근사하게 차려드릴게요.”
“내일 봬요, 백작님~”
“프히힛. 안녕히 주무세요~”
이모는 두 딸과 함께 방을 나갔다.
나는 불을 켜 놓고 잠시 기다렸다.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주인의 책무.
내가 좋아하는 게 여자라는 건 다키아 왕국 내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다.
세제르 자작이 정상이라면 메이드나, 하다못해 고급창녀라도 넣어주겠지.
하지만 아무도 내 방을 찾아오지 않았다.
역시 세제르 자작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 대신 이모가 주인 노릇을 대신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녀가 조카에게 뚜쟁이 일을 해주길 기대할 수도 없고.
나는 그냥 파샨의 입에 정액 몇 발을 쏘아주고, 폭신한 여우 모피를 끌어안은 채 잠을 청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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