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124화 (124/166)

〈 124화 〉 조작과 조작

* * *

“어, 어떡하죠? 조카님?”

이모는 눈물 젖은 얼굴로 내게 매달렸다.

하지만 눈가에서 매운 냄새가 나는 걸 보면 일부러 눈물을 낸 게 분명했다.

물론 그것만으로 이모가 자작을 암살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황이 수상한 건 사실이지.

하필이면 내가 온지 이틀 만에 자작이 죽었다?

평소에 세제르 자작이 몸이 안 좋았다고 해도 너무 공교로운 일이다.

“마님. 일단은 저택의 출입구를 모두 봉하고 주치의를 부르셔야 합니다.”

집사가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이모는 연기에 심취한 건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지 여전히 내게만 매달려 있다.

게다가 사촌 누이들은 자기 아버지가 죽었다는데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있다.

결국 내가 이모를 대신해서 사건 뒤처리를 지휘해야 했다.

“집사. 이모님께서는 충격이 크셔서 내가 대신 처리를 도와야 할 것 같네.”

“예. 백작님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일단 그대 말대로 출입구를 봉하고 주치의를 부르도록 해. 사용인들은 모두 메인 홀 앞의 복도로 집합시키고 점호하게. 이모님은 시녀를 불러서 안정을 취하시도록 해.”

“알겠습니다.”

잠시 후 의사가 와서 세제르 자작의 시신을 살폈다.

그는 자작의 입을 열고 그 안으로 얇고 길쭉한 은 막대를 집어넣었다.

나는 호기심이 들어서 물었다.

“세제르 자작은 은혈의 귀족이네. 독살을 의심하는 건가?”

의사는 송구해하며 두 손을 모았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여러 가능성을 모두 살펴보려 함이나...”

“탓하려는 게 아니야. 궁금해서 그러네.”

“요새는 강독이라는 것도 있고 해서, 귀족에 대한 독살도 드물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예, 일단은 독살인지부터 확인하려 합니다.”

“강독은 은으로 검출할 수가 없을 텐데?”

“맞습니다. 하지만 은 막대를 깊숙이 넣어서 식도 안쪽을 긁어내면...”

“강독이 묻겠군. 강독이 쓰였다는 전제에서 말이야.”

“맞습니다. 그 은 막대를 개나 토끼에게 핥게 하고 경과를 지켜보면 됩니다.”

나는 감탄했다.

“그대 발상이나 기술이 대단하군. 나중에 레시아르 령으로 오지 않겠나?”

“백작님께서 불러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빈 말이 아니네. 레시아르 령으로 오면 여기서 받는 대우의 두 배를 해주지.”

“감사합니다. 백작님. 이번 일이 정리 되는대로 바로 은혜를 받들겠습니다.”

나는 의사에게 쪽지를 한 장 써서 주고 돌아섰다.

결과는 곧 나올 테지만 그 동안에도 할 일이 있다.

내가 집사에게 시켜둔 대로 사용인들은 복도 앞에 길게 늘어서 있었다.

출입구를 지키는 경비병을 제외하면 모조리 불러놓은 것이라 그 수가 족히 백 명은 넘는다.

나는 그들 앞을 몇 차례 왔다갔다 걸어 다녔다.

내가 앞을 지날 때마다 사용인들은 제각기 움찔거렸다.

저택에서 모시던 주인이 죽었으니 불안하겠지.

“이 중에서 세제르 자작이 죽어 있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한 자가 누구냐?”

내 물음에 집사가 다가와 답했다.

“팔러 메이드인 요하나입니다. 요하나. 나와서 백작님께 인사 올려라.”

“요, 요하나입니다... 존귀하신 백작님...”

요하나는 반반한 메이드 사이에서도 특히 예뻐서 눈에 확 뛰는 여자였다.

팔러 메이드였다면 세제르 자작의 시중도 들었겠지.

“네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아침마다 자작님을 깨워드리고... 식사를 침실로 옮겨드리거나... 때로는 부축해드리거나...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세제르 자작이 죽어 있는 걸 어떻게 발견했나? 아니, 오늘 아침 일과를 말해 보도록 해.”

요하나는 긴장해서 눈을 꿈뻑이며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아침에 깨워드릴 때만 해도 별 이상은 없었습니다. 기침을 많이 하시긴 했지만 그건 평소에도 그러시니... 아침식사를 침실로 가져다 드리고, 접시를 치울 때까지도 괜찮으셨는데, 식후에 차를 가져다 드리고 나니...”

세제르 자작은 요하나를 내보내고 혼자 차를 마신 것 같다.

요하나가 차구를 정리하기 위해 다시 침실로 돌아왔을 때 세제르 자작이 죽어 있었다고 한다.

문과 창문은 닫혀 있었고 누군가 침입한 흔적도 없었다.

그렇다면 의심할 건 그 차뿐이다.

“차를 준비한 자는 누구인가?”

“키친 메이드인 파울라입니다. 파올라. 백작님께 인사 올려라.”

파울라는 벌벌 떨면서 내 앞으로 나왔다.

"조... 존귀하신 백작님..."

“네가 세제르 자작에게 올릴 차를 준비했느냐?”

“예... 예... 백작님, 하지만 저는... 저는 맹세코 독 같은 걸 탄 적이 없어요! 믿어주세요! 백작님!”

“범인이든 아니든 그렇게 말하겠지. 집사. 찻주전자와 찻잔은 남아있나?”

“예. 하지만 독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나?”

“파울라에게 핥게 했으니까요.”

집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무서운 놈이군. 아니, 저택의 주인이 죽었으니 이 정도는 예사인가.

그 쯤 의사가 복도로 달려와서 내게 고했다.

“백작님. 은 막대를 핥은 토끼가 즉사했습니다. 세제르 자작의 사인은 강독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집사는 찻주전자와 찻잔에 독이 남아있지 않다고 했네.”

“바꿔치기 했을 가능성도...”

“노이만.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건가?”

“죄송합니다. 그러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집사가 불쾌함을 표시하자, 의사는 고개를 숙였다.

“시끄럽군. 둘 다 입 닥치게.”

집사와 의사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나는 둘 다 믿지 않지만, 둘 다 의심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

이모, 사촌 누이, 요리사, 집사, 요하나와 파울라, 그리고 의사까지도 의심하려면 얼마든지 의심할 이유가 있으니까.

애초에 여기는 남의 저택이다.

내가 믿을만한 이는 파샨 뿐이란 말이다. 아, 고타마도 포함시켜 줄까.

어차피 내 목표는 세제르 자작의 사인을 밝히고 진범을 찾아내는 게 아니다.

최대한 괜찮은 모양새로 최대한 빨리 사건을 수습하고 저택을 뜨는 것.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쉽게 말해 조작이란 거지.

그럼, 사인은 강독을 이용한 독살로 하자.

범인은 차를 가져온 파울라... 아니, 파울라는 자작을 암살한 범인이라고 두기엔 지위가 너무 낮다.

파울라를 이용한 자를 하나 끼워 넣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마침 적당한 녀석이 하나 있지.

“요리사.”

“예? 예. 백작님.”

“잠시 할 말이 있으니 방으로 따라오도록. 집사는 사용인들이 딴 짓하지 않도록 잘 감시하고.”

나는 요리사를 데리고 방으로 돌아왔다.

파샨이 문을 닫았다.

“백작님? 어인 일로 저를... 흐아아악!”

놈의 눈썹이 붉게 타올랐다.

요리사는 손으로 탁탁 치고 방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눈썹에 붙은 불을 끄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마력의 불길은 그의 눈썹을 다 태운 후에야 꺼졌다.

“흐억... 흐억... 흐으윽... 백작님... 어째서...”

요리사는 고통에 익숙하지 않은 듯 힘겨운 신음소리를 냈다.

“네가 세제르 자작을 죽였지?”

“예? 아닙... 흐악!”

불길이 그의 요리모자에 옮겨 붙었다.

요리사는 급히 모자를 내팽개쳤다.

나는 손가락질로 불길을 거두었다.

다시 손가락질 한 번으로 불길을 낼 수 있으니까.

요리사는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미친 황소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좋게좋게 실토하지 그러나. 하급 메이드에 불과한 파울라가 뭐 때문에 자작을 암살하려고 했겠느냐 말이야. 자네가 찻주전자에 미리 강독을 묻혀놨던 거겠지. 안 그런가?”

“배, 백작님! 저는 아닙니다! 저 또한 세제르 자작님의 은혜를 입은 몸인데 어째서 자작님께 독을 넣는단 말입니까?”

“글쎄. 이모와 배를 맞추다보니까 간이 커졌나 보지.”

요리사는 엄청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하긴, 무슨 증거를 내보인 것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여러 부류의 유부녀들을 안아본 내게는, 다른 남자의 여자를 취한 자신감이 이 요리사 놈에게서 뻔히 들여다보였다.

“선택해. 재물욕심 때문에 자작을 암살한 걸로 하겠나? 아니면 자작부인의 정조를 빼앗기 위해 자작을 암살한 걸로 하겠나?”

“... 크흑...”

“전자를 택한다면 깔끔하게 목을 자르고 조리돌림하는 걸로 끝내주지. 하지만 끝내 고르지 않으면 후자를 선택하게 할 건데, 그건 장담컨대 전자처럼 신사적이진 않을 거야.”

요리사는 엎드린 채 계집애처럼 흐느꼈다.

선택하지 않으면 귀부인을 겁탈하기 위해 자작을 암살한 대역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데.

어쩔 수 없군.

판결을 내리려는데, 이모가 급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조카님! 이게 대체 무슨 행패입니까!”

“행패요?”

“이 사람은 내가 고용한 이에요! 아무리 백작님이라도 해도 이렇게 함부로 고문을...”

“이 놈은 세제르 자작을 죽인 범인입니다.”

내 말에 이모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어. 정말입니까?”

“아,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럴 리가 있는 것 같은데.”

“파울라가 차를 가져다주지 않았답니까! 범인이 뻔히 보이는데, 그 년만 목을 치면 되는데 왜 엄한 사람을 탓하는 거예요!”

떳떳하지 못하면 큰 소리를 치는 법이다.

이모는 큰 소리를 쳤다.

내가 조작하기 전에 사건은 이미 조작되어 있었군.

결국 돌고 돌아서 나는 진범을 찍었던 것이다.

재밌긴 하지만 더 파고들기는 귀찮은 일이다.

나는 손바닥을 툭툭 털었다.

“그래. 내가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 조카님?”

“애초에 내게는 권한이 없는 일이었지요. 이모님이 심신이 편치 않으신 듯하여, 임시로 저택의 일을 맡았으나... 이렇게 기운이 넘치시는 걸 보니, 이제는 원래 이 일을 맡으셨어야 할 이모님께 권한을 돌려드리겠습니다.”

“조, 조카님?”

“하이브는 사냥을 마쳤습니다. 곧 화전민들이 저택으로 마석을 들고 올 테니 그들에게 농지를 나눠주시고 마석은 레시아르 령으로 보내주세요. 나는 갈 길이 바빠서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수사와 징벌과 장례는 모두 이모님이 알아서 하세요.”

“조카님! 조카님!”

이모는 나를 따라 나와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왜 이러십니까.”

“얘기를, 얘기를 해요. 조카님.”

“무슨 얘기가 남았단 말입니까?”

“... 다 솔직하게 말할 게요.”

이모는 나를 데리고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나는 그녀의 침대에 걸터앉아서 다리를 꼬았다.

솔직하게 다 말하겠다는 이모는 한참이나 입을 열지 않아서, 결국 내가 먼저 물어야 했다.

“나를 배신하려 했습니까?”

“아니에요!”

“그럼, 나를 이용하려 했습니까?”

“그건...”

“솔직하게 말하겠다고 하신 분은 이모님이었습니다. 그 약속까지 깬다면 내가 저택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어요.”

“... 네. 조카님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이모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대귀족의 반열에 오른 조카님이 지아비의 죽음을 정리해준다면, 후에 다른 말이 나오는 일이 없을 테니까요.”

“내 권위를 빌려서 사건을 적당히 무마하려 했다는 겁니까? 요리사와 함께 세제르 자작을 암살한 일을 묻으려 했다는 말이지요?”

“예... 죄송해요, 조카님.”

“들킨 후에 하는 사과는 사과가 아니죠. 이모님.”

내 말에 이모는 무릎을 꿇었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조카님.”

“그건 사과가 아니라니까. 뭐 어쨌거나. 강독은 어떻게 구한 겁니까?”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침대 맡에 놓여 있었어요. 믿기 힘드시겠지만 정말이에요!”

그건 믿을 수 있다.

정오의 그림자라면 귀부인의 침대 맡에 병을 두고 오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닐 터.

중앙에서 아직도 강독을 뿌리고 있는 건가.

직접 귀족을 암살하는 게 아니라,욕망과 원한을 부추겨서 귀족들이 서로 암살하라고 판을 깔아주는 거다.

이거 세제르 령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겠지.

이모가 그러려고 했듯이 끝내 덮어진 일도 적지 않을 테고.

귀족들이 서로 번목하게 만드려는 의도겠지만, 우리도 바보는 아니다.

중앙에서 이렇게 영주들을 갈라 치려고 한다면 파티홀 연합은 결국 군사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계략만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는데.

국왕과 대신들로서는 강독에 엄청난 시간과 재물을 쏟아 부은 만큼, 이걸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는 거겠지.

이렇게 되면 일전은 피할 수 없게 된다.

날씨가 더 풀리면 큰 내전이 벌어질 거다.

그 전에 누이들을 데려오려면 서둘러야겠는데.

내가 생각에 잠겨있자, 이모는 무릎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아양을 떠는 암컷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카님. 죄송하다는 마음은 진실이에요. 그렇지만 이 이모가 조카님에게 보상할 것은 이 몸뚱이밖에는 없네요. 조카님만 괜찮으시다면 속죄를...”

이모는 내 허벅지를 잡았다.

커다란 젖가슴이 허벅지 안쪽을 문질렀다.

글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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