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 백탑의 두 늙은이
* * *
“쏴!”
우렁찬 함성과 동시에, 거대한 창이 우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고타마는 기겁해서 꽥꽥거리면서 날개를 틀었다.
파샨은 얼른 고삐를 쥐었고, 나는 파샨의 허리를 꼭 붙잡았다.
“대체 어디서 쏘는 거야?”
“도련님! 저깁니다!”
파샨이 예리한 눈으로 수풀 속에 숨겨진 발리스타를 찾아냈다.
기사 한 명이 검을 빼들고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좌로 15! 수정해서 다시 쏴!”
발리스타가 끼기긱 움직이더니 다시 한 번 파공음이 울렸다.
거창은 공기를 찢으며 강렬하게 날아온다.
피하려면 피할 수 있겠지만, 발끈 화가 나서 팔을 뻗었다.
불길이 내 손바닥에서부터 일자로 뻗어나갔다.
초고열의 화염은 거창을 완전히 잿가루로 만들어버렸다.
“중지! 사격 중지!”
화염마법이 쓰인 걸 본 기사는 허겁지겁 사격 중지를 외쳤다.
나는 파샨에게 시켜서 그리로 고타마를 내려앉게 했다.
거대한 괴조가 날개를 펄럭이면서 착지하자, 병사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각자 무기를 잡았다.
그래도 기사는 나름대로 용기 있는 자인지, 씩씩하게 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귀하는 누구신데 아우럼 가문의 영지에서 마수를 타고 다니시는 겁니까?”
“그러는 그대는 누구인가?”
“저는 뤼지냥 아우럼의 외삼촌인 태긴 비트만입니다. 조카인 뤼지냥의 부탁을 받고 아우럼 가문의 적법한 영지를 수호하는 데에 일조하고 있지요.”
삼촌이고 조카라고 해서 늘 항상 친밀한 관계인 건 아니다.
당장 이모인 로마니아 세제르도 나를 이용해먹으려 했으니까.
이 기사가 뤼지냥이라는 아우럼 가문 일원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겠지.
“나는 파티홀 연합의 일원이자 서북방의 맹주인 레시아르 백작이다. 그대의 주인이신 오스트 공작으로부터 나에 관해 따로 들은 바 없는가?”
“레시아르 백작님!”
기사는 급히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존안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스트 공작께서는 제 주군이신 피요르 백작님의 주군이십니다만, 레시아르 백작님을 만나 뵙게 되면 바라는 바를 모두 들어주시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건 고마운 일이군. 헌데 그대들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가?”
“그게...”
“말하기 곤란한 일인가?”
“아, 아닙니다. 요즘 중앙군 놈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 말입니다. 아우럼 가문이 잘못한 바가 없지는 않지만 멸문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 이렇게 지원을 온 것입니다.”
삼촌, 조카 운운한 건 파병의 명분 쌓기였나.
세제르 자작령에서 일어난 일을 생각해보면 명분 싸움을 할 때가 아닐 텐데.
“말해줘서 고맙네. 일단은 아우럼 가문의 저택으로 가려고 하네만, 길을 알려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백작님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직접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괜찮겠나? 그대도 그대의 임무가 있을 터인데.”
“임무보다도 백작님을 모시는 것이 먼저입니다.”
기사는 우거진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가, 급히 말을 한 마리 몰아왔다.
“그거한 마리뿐인가?”
“예... 여러 마리를 관리할 수가 없어서... 제가 말 구종을 할 테니 백작님은 이 위에 오르시지요.”
기사의 호의는 딱히 내키지 않았다.
이 말은 마구간을 나온 지 오래라 지저분하고, 냄새도 나니까.
이런 말을 탈 바에는 고타마를 타는 게 훨씬 낫다.
“길만 알려주게. 이 녀석을 타고 가면 금방이니까.”
기사는 송구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오솔길을 가리켰다.
“저 쪽으로 쭉 가시면 대로가 나옵니다. 그 길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 가시면 됩니다.”
“고맙네.”
나는 다시 고타마에 올랐다.
이렇게, 이 녀석이 발리스타에 공격당한 건 한 번의 해프닝으로 끝나겠거니 했는데...
아우럼 저택에 도착하기까지 우리는 똑같은 방식으로 열 번은 넘게 공격 당해야 했다.
그 때마다 파샨이 말리지 않았다면 화가 나서 전부 다 불태워버렸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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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도착한 아우럼 가문의 저택은, 저택이라기보다도 백탑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유서 깊은 마법사 가문답게 저 백탑 안에는 진귀한 유물들이 잔뜩 숨겨져 있겠지.
하지만 그 웅장한 자태와는 별개로, 흉흉한 분위기가 정문에서부터 풍겨 나왔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건 완전무장한 기사 무리였으니까.
그들은 고타마가 길 앞에 내려앉자마자 우르르 달려왔다.
이 자들이 한 번에 마력창을 던지면 나와 파샨은 그렇다 쳐도 고타마는 다진 새고기가 되었겠다.
고타마에게는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기사들 중에서 키가 작은 남자가 나왔다.
대충 기세를 보니 오록스 단장 이상은 되는 자 같다.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내게 인사했다.
“혹시 레시아르 백작님이십니까?”
“그렇네만.”
“저는 은표범기사단 단장인 판테라라고 합니다.”
“은표범기사단이라면, 오스트 공작을 섬기는가?”
“예. 공작님의 명을 받고 레시아르 백작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쪽으로 뫼시겠습니다.”
오스트 공작이 이렇게나 신경을 써주었을 줄은 몰랐는데.
나는 판테라 단장의 뒤를 따라 아우럼 가문의 저택, 백탑 안으로 들어갔다.
백탑 안에는 계단이 어지럽게 얽히고설켜 있었다.
계단 자체가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계단과 계단 사이에기계장치로 움직이는 승강기가 복잡하게 설치되어 있어서 더 정신이 사나웠다.
“판테라 단장. 저택 안으로 들어올 때는 미리 기별을 넣어달라고 부탁했을 텐데요.”
계단에 발을 딛기 전에, 특이한 색깔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애가 우리 앞길을 막아섰다.
정수리를 기준으로 좌측은 금발, 우측은 흑발로 색이 서로 달라서 굉장히 눈에 띄는 계집이었다.
그녀의 뒤에서 서른이 좀 넘어보이는 시녀가 안절부절 못 하고 있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큰일이 나지 않을까 말리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판테라 단장은 당연히 불쾌해하며 손을 뻗었다.
“뤼지냥 양. 이 분은 서부의 맹주이신 레시아르 백작님이시오. 함부로 그 앞을 막지 마시오.”
“그건 몰랐군요. 실례를 범한 점에 대해서는 사과드리겠습니다, 레시아르 백작님”
뤼지냥은 내게 고개를 숙이고는 판테라 단장을 향해 다시 턱을 치켜 들었다.
“하지만 그것과 판테라 단장, 당신이 약속을 어긴 것과는 별개의 사실이죠.”
“비키시오.”
“백탑 계단 안으로는 병사를 들이지 않는다. 병사를 들일 때에는 반드시 아우럼 가문의 적자 또는 적녀에게 먼저 기별한다. 이건 오스트 공작께서도 확약해준 사실이에요!”
“나는 병사가 아니오. 은표범 기사단장으로 준남작위까지 가진 귀족이지.”
판테라는 뤼지냥을 옆으로 홱 밀쳐버리고는 계단 쪽으로 팔을 뻗어 나를 안내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며 살짝 고개를 돌려보았다.
뤼지냥은 분한 표정으로 판테라 단장의 등 뒤를 쏘아보고 있었다.
오스트 공작을 위시한 동부 귀족들이 아우럼 가문을 지원하고 있다고는 해도, 그건 중앙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한 것.
강독이라는 원죄를 만든 자와 저택을 점거한 자들 사이에감정의 앙금은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는 건가.
사방에서 중앙을 조여들면 왕혈을 바꾸는 것도 어려울 것 없다고 생각했는데.
연합이라는 게 그렇듯, 다들 생각이 다르다보니 골머리 꽤나 썩일 것 같다.
일단 친중앙파 귀족들을 솎아내긴 했지만, 반중앙파 귀족이라고 딱히 생각이 같지 않은 게 문제다.
나도 파티홀 연합의 기둥 중 하나가 된 이상, 이게 남 일이 아니란 말이지.
"백작님. 이 쪽으로 오시지요."
"아. 알겠네."
지그재그로 놓아진 계단을 오르다가 승강기를 타고, 백탑을 올라갔다.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이 이따금 두루마리 스크롤을 읽으며 옆을 지나간다.
그러고 보니 여기도 마법사, 저기도 마법사.
역시 마법명가답기는 하구먼.
불화를 감수하고서라도 아우럼 가문을 포섭하기로 한 게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게 실감 된다.
이 많은 마법사들을 다 적으로 돌릴 순 없을 테니까.
“백작님. 이쪽입니다.”
“아. 여기인가?”
다른 방과 크게 다를 것 없이 간소한 방 앞에서, 판테라 단장은 나 대신 문고리를 두들겨 노크했다.
“어르신. 그 분이 오셨습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판테라 단장은 그대로 문을 살짝 열어주고는, 자신은 복도에 허리를 세우고 반듯이 섰다.
파샨도 눈치껏 그 옆에 바로 섰다.
나는 혼자 방 안으로 들어갔다.
두툼한 양모 카페트 깔려있어서 걸을 때마다 발이 쑥쑥 빠졌다.
무릎 빠진 늙은이들이나 좋아할만한 인테리어군.
“어서 와 앉게.”
아니나 다를까, 앞니가 불쑥 튀어나온 노인이 벽면을 마주한 탁자 앞에 앉아 있다가 나를 손짓해 불렀다.
나를 기다린 건 아우럼 백작이 아니라 오스트 공작이었다.
이 노인네가 여기까지 왔을 줄이야.
동부의 맹주가 이렇게 가볍게 움직여도 되는 건가?
서북부에서 여기까지 날아 온 내가 할 말이 아니긴 하지만.
나는 공작에게 인사하고 그 옆으로 나란히 앉았다.
탁자에서 마주 보이는 벽면은 거울처럼 보였지만, 거기에 비치는 상은 나와 오스트 공작이 아닌 아까 본 뤼지냥이었다.
그녀는 판테라 단장에게 당한 게 분했는지 씩씩거리면서 발을 구르고 있었다.
아까 본 시녀가 뤼지냥을 달래고 있었다.
“이게 뭡니까?”
“아우럼의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장난감이야. 이 백탑 안에 있는 걸 무작위로 보여주는 거지.”
“그런 마법이 있었습니까?”
“나도 처음 알았어. 이런 기물들이 백탑 안에 얼마나 더 숨겨져 있을까를 생각하면 이 나이 먹고도 가슴이 두근두근 한단 말이야.”
“신기하긴 하군요. 하지만 저는 이런 장난감을 보려고 여기까지 날아온 건 아닙니다.”
내 말에 오스트 공작은 혀를 찼다.
“아직 살날도 많은 젊은 놈이 그렇게 성급해서 뭐하려나?”
“원래 성급한 게 젊은이의 특권이라지 않습니까.”
“쯧. 알았네, 알았어. 마법사 게임이나 한 판 더 두자하려 했더니.”
“아우럼 백작은 어떻게 됐습니까? 죽었습니까?”
“죽기는. 몸은 진작에 추슬렀네.”
나는 좀 놀랐다.
병무대신의 정예기사단을 갈아버린 건 그의 대마법이었다.
내가 방해받지 않고 병무대신과 일기토를 벌일 수 있었던 것도, 끝내 중앙군을 꺾은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아우럼 백작의 공이 제일 큰 것이었다.
그만한 대마법을 썼다면 죽거나 마력탈진으로 불구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몸을 추슬렀다니.
그런데 왜 그 사실을 아무도 몰랐을까.
“소문을 막으셨군요.”
“당연하지. 폰세르크 국왕을 찌를 날카로운 비수가 될 텐데. 소매에 잘 숨겨놔야 하지 않겠어.”
“공작님이 그 자를 비수로 쓰시는 건 상관없습니다만, 저는 그에게 받을 것이 있습니다.”
“알아. 누이들이 잡혀 있었다지?”
“데려갈 겁니다.”
“데려가게. 안 막을 테니까. 정말로 여기까지 직접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오스트 공작은 나와 아우럼 백작 사이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했다.
내 저택의 연회에서 이미 한 번 이야기를 나누기도 해서, 그럴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아우럼 백작을 만나야겠습니다.”
“판테라 단장이 안내해줄 게야.참, 가기 전에 하나만 묻지.”
“뭡니까?”
“마법사 게임을 할 때 말이야.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나?”
오스트 공작은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 의도가 무엇일지 생각하느라 나는 장고에 빠졌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간단한 거니까.”
“그럼 마법사 카드를 쓰는지, 안 쓰는지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승패는 결국 마법사를 언제 쓰는지에 달렸단 말이야. 그래서 나는 아우럼 백작을 숨긴 게야. 백작, 자네는 어떤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가 이렇게 빨리 동부까지 온 걸 보니 그 괴조를 타고 날아온 것 같군.”
“예. 덕분에 습격 받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요.”
“그건 잘 된 일이지만 말이야, 습격 받을 것이 과연 백작의 몸 하나 뿐이던가?”
설마. 병무대신과 신사협정을 맺은 지가 반 년도 되지 않았다.
벌써 내 영지를 공격하려고 한다고?
"자네라는 마법사 카드가 빠진 레시아르 령이라면, 습격을 결심하는 것도 어렵지는 않겠지."
“중앙이 내전을 결심했다는 겁니까?”
“글쎄. 내가 장담할 수 있는 건, 이 싸움은 먼저 결심하는 자가 유리하다는 것뿐이야. 적은 세력이 좁지만 하나로 단합되어 있고, 우리는 세력이 넓기는 하지만 단합되지 않았으니.”
그 때였다.
복도에 서 있던 판테라 단장이 방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어르신. 정오의 그림자가 백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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