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 백탑의 두 늙은이(추가)
* * *
오스트 공작은 그다지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혀를 찼다.
“에잉. 그러게 커튼을 잘 치라니까.”
“외부에서 빛이 들어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도록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림자가 들어왔다면, 필시아우럼 가문의 식솔 중에 내통자가 있을 겁니다.”
“들었나,백작?칼은 중앙에서 먼저 뽑은 것 같은데 말이야.”
오스트 공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도 갑갑하긴 마찬가지였다.
하필 이 때 아우럼 가문을 들이친 건, 나와 오스트 공작의 행적을 중앙에서 읽고 있다는 뜻일 테니.
세제르 자작령에서 하루 쉰 게 실수였나?
아니, 정오의 그림자라면 고타마가 없어진 걸 보고 바로 내 뒤를 쫓았을 수도 있다.
여하튼 중앙의 개들이 지금 공격하고 있는 게 여기 백탑만은 아닐 터.
오스트 공작의 저택과 내 저택도 아마 동시에 습격하고 있겠지.
내가 카산드라 공주를 사로잡았듯이, 중앙에서도 내 소중한 이들을 사로잡아서 인질로 쓰려고 할 게 틀림없다.
결국 신사협정은 신사협정일 뿐. 전쟁은 피할 수 없다는 거겠지.
나는 손바닥에 여우불을 피웠다가 꺼뜨렸다가를 반복하며 오스트 공작에게 물었다.
“동부는 언제쯤 출병이 가능합니까?”
“아무리 짧게 잡아도 한 달은 걸리지.”
“서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병력을 동원하는 것도 문제지만, 우리끼리서로 못 믿는 것도 문제야.”
한날한시에 왕도를 들이칠 수 없는 이상, 먼저 나서는 놈이 먼저 두들겨 맞게 되어있다.
그래도 동부와 서부는 이 자리에서 뜻을 맞출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다 같이 믿지 않는다면 차례대로 각개격파 당할 뿐입니다."
“알아. 그러니 자네랑 나는두 달 후에 토캄 남작령에서 만나도록 하지. 거기면 왕도에서도 멀지 않고, 여차하면 남부를 압박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수드베리히 후작을 믿지 않으십니까?”
“변경백보다는 믿지.”
맞다. 가주 일족이 저택 안에 묶여버린 데어뷘터 가문의 문제도 있었다.
중앙이 아예 내전을 벌이기로 결심한 이상, 북부가 어떻게 움직여줄 지는 전혀 예상이 가질 않는다.
만에 하나라도 북부가 중앙에 붙는다면 굉장히 불리해질 텐데.
“어쩌겠나. 우리는 백 대로부터 계승되어온 귀족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울 뿐이야.”
“숭고한 싸움도 좋지만, 가급적이면 이기는 싸움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군요.”
“폰세르크 국왕도 제국에게 뒤통수를 내어주고 내전을 결심한 것일 테니까 목덜미가 시릴 터. 초전의 기습만 잘 막아내게. 어떻게든 연합군을 집결시키기만 하면 이길 수 있을 거야.”
오스트 공작이 시세를 읽는 눈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노회한 동부의 맹주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서부의 맹주로서 응답해주어야겠지.
“슈베른 궁성에서 근사한 만찬을 대접해드리도록 하지요. 왕비의 허리를 의자로, 왕세자비의 가슴을 목받침으로, 공주의 손을 와인잔으로 쓴다면, 퍽 즐겁지 않겠습니까?”
“와하하! 그래!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 서부의 패자라고 할 수 있지!”
오스트 공작은 껄껄 웃고는 판테라 단장에게 말했다.
“단장. 단장은 여기 백작을 저기 백작에게 데려다 줘. 어차피 그림자 놈들은 여기 백작의 발을 묶으려고 온 걸 테니.”
“알겠습니다, 어르신.”
나는 판테라 단장과 함께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기 전에 한 번 돌아보니, 오스트 공작 주위에 다섯이나 되는 남자들이 시립해있었다.
그 중 하나가 갑자기 양털 카펫을 질끈 밟았다.
우지끈하는 소리가 나더니, 흰 양모가 붉은 피로 물들었다.
바닥으로 스며들었던 그림자가 시체로 바뀌었다.
판테라 단장은 앞서 걸어 나가며 말했다.
“공작님의 안위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대대로 오스트 공작가를 섬기는 이들이 항시 지키고 있으니까요.”
이오시스가 기른 자정의 여명 단원들에 비할 수준이 아니었다.
암습에 대한 대처만 놓고 보자면 전 기사단장인 체닐린이나 황금마법사 화리메보다 낫지 않을까.
내 저택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를 떠올리니,마음이 좀 급해진다.
한시라도 빨리 누이들을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가야 한다.
“단장. 아우럼 백작은 어디 있나?”
“바로 아래층입니다.”
“그럼 얼른...”
“도련님!”
파샨이 내 앞으로 뛰어들며 검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나설 기회는 없었다.
판테라 단장이 발검과 동시에 그림자를 갈가리 찢어버렸으니까.
형체도 없이 찢겨나간 살점이 복도 사방에 흩뿌려졌다.
그 와중에 우리 쪽으로는 피 한 방울 안 튄 것이 더 놀라웠다.
“가시죠.”
꽤 탐나는 인재였다.
물론 포섭될 리가 없지만.
나는 판테라 단장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아우럼 백작의 방도 오스트 공작이 있던 방과 비슷하게 생긴 방이었다.
백탑 안의 방은 다들 비슷비슷하게 생긴 모양이다.
나는 파샨을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레시아르 백작.”
아우럼 백작은 어두운 방 안에 촛불을 켜두고 혼자 있었다.
오스트 공작처럼 충복들을 숨겨놓았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 기감에 걸리는 이는 없었다.
“다시 만나서 반갑다고 하기는 좀 애매하군요.”
“피차일반이지.”
“아우럼 백작께서 내게 기분 상할 일은 없지 않습니까?”
“황금의 시대로 전이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그것만 믿고 중앙을 배신했는데 대가를 받지 못했으니, 기분이 상할 수밖에.”
“그런 약속도 하긴 했지요. 하지만 그 전에 제 누이들을 받아야겠습니다.”
“믿고 뭘 주고받기엔 서로 신의가 없지 않나?”
“그거야 말로 피차일반이지요. 제가 병무대신 앞에서 백작을 살려드린 건 까맣게 잊으셨습니까?”
아우럼 백작은 팔짱을 끼고 나를 노려보았다.
“만약그대의 누이들이 여기에 없다고 한다면...”
“어쩌겠습니까. 황금과 화염 중 무엇이 더 우월한지를 겨루는 수밖에요.”
그는 수염을 쓸면서 한숨을 쉬고는, 벽면을 손등으로 두들겼다.
퍼즐이 맞춰지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더니 곧 천장에서 승강기가 내려왔다.
승강기는 수증기를 내뿜으며 열렸다.
그 안에는 커다란 관이 두 개 들어 있었다.
나는 그리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관을 열자, 잠들어 있는 두 여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데트 누이와는 조금 닮았지만 약간은 더 앳된 모습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모습과는 다르게 한껏 성숙한 모습들이었다.
차녀인 파레트 누이, 삼녀인 수잔느 누이.
드디어 저택으로 데려갈 수 있겠구나.
“파샨. 이제 돌아가자.”
“네, 도련님.”
파샨은 관을 닫고, 그걸 겹쳐서 들쳐 업었다.
그대로 나가려는 우리의 앞을 아우럼 백작이 슬그머니 가로막았다.
“그냥 가면 어떡하나? 나는 약속을 지켰으니, 그대도 약속을 지킬 차례.이제 그 아름다운 시대로 전이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게.”
“하이브의 마석에 왕족의 피를 묻히면 됩니다.”
“그것뿐이라고?”
“그것뿐입니다.”
“그럼 그대는 어디서 왕족의 피를 구한 건가?”
“카산드라 공주가 주었습니다. 그녀는 원래 저를 흠모하고 있어서 말이지요.”
아우럼 백작은 그다지 믿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당장 나와 드잡이를 할 수도 없어서 뒤로 물러났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가 주고받은 원한이 하나 더 추가되는 것 뿐 아니겠습니까.”
“믿겠네. 여하튼 왕족의 피를 구하는 일도 만만치는 않겠지.”
나는 인사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판테라 단장은 파샨이 관을 두 개나 짊어진 것을 보고 내게 말했다.
“인부를 붙여드릴 수 있습니다.”
“고맙지만 내 누이들을 맡길 수 있는 건 내 사람뿐이네.”
“그러시다면.”
“공작께 안부 전해주게.”
나는 판테라 단장이 보일 때까지는 느긋하게 걷다가,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얼른 뛰어 내려갔다.
“파샨, 서둘러야 해.”
“도련님! 저기 승강기가 옵니다!”
“얼른 타자!”
우리는 승강기와 계단을 옮겨가며 백탑을 내려갔다.
백탑 안에서는 어디서든 난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누가 누구의 편인지도 분명하지가 않은 난투였다.
은표범 기사단원과 아우럼 마법사가 정오의 그림자 단원과 싸우는 거야 당연하다.
하지만 바로 그 계단 밑에서는 아우럼의 식솔이 분명한 자들이 은표범 기사단원을 기습하기도 했다.
반대로 은표범 기사단원이 먼저 아우럼 가문의 사병을 후려치는 장면도 보였다.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건지 아우럼 가의 사용인들은 서로 싸웠다.
그 안에서 어떤 사투가 벌어지는지, 문이 닫힌 승강기는 좌우로 거세게 덜컹거렸다.
오스트 공작이 가주인 아우럼 백작의 생사를 숨긴 탓이겠지.
중앙에 대한 비장의 한 수를 숨기기 위한 거겠지만, 그 탓에 아우럼 백작가 안에서도 오스트 공작을 믿을지 말지에 관해서 파벌이 나뉘어버린 것이다.
아우럼 가문 입장에서는 점령군처럼 저택을 점거한 것에 대한 원한도 있을 테고.
판테라 단장 앞을 막아선 그 계집... 뤼지냥이라고 했나?
하지만 나는 오스트 공작이 아우럼 가문의 불순분자를 솎아낼 계산까지 마쳤다고 해도 그다지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적으로 돌리기엔 귀찮은 상대지만 아군으로 두기엔 든든한 늙은이라니까.
어쨌거나 남의 집 불 구경이다.
나와 파샨은 난장판이 된 백탑을 간신히 빠져나왔다.
"아, 참!"
"왜 그러십니까?"
"화리메의 유모! 유모를 찾아서 데리고 오겠다고 했었는데!"
"하지만 도련님, 저 난리통에서 어떻게 유모 하나를 찾아오겠어요?"
그건 그런가.
안 그래도 복잡한 백탑의 구조 속에서 마구잡이 살육전까지 벌어지고 있으니.
두고 온 저택이 걱정되기도 하고.
화리메에게는 미안하지만 유모는 포기해야겠다.
고타마를 묶어둔 마구간 쪽으로 향하는데, 그 쪽에서도 소란이 벌어진 듯 시끌시끌했다.
“타마야!”
파샨은 얼른 뛰어가서 고타마를 살폈지만, 녀석은 멀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묘하게 기름기가 좌르르 흐르는 모습에 맥이 빠질 정도다.
마구간 안에는 아무도, 심지어는 말 한 마리도 없었다.
고타마를 묶어두면서 미리 말들을 몰아낸 것이니까 그것 자체는 놀라울 게 없지만, 아까 전에는 분명 무슨 소리가 났는데.
파샨도 뭔가 꺼림칙한지 코를 킁킁거렸다.
“도련님. 이 근처에서 피 냄새가 납니다.”
“피 냄새?”
“고타마한테서 나는 것 같은데...”
“상처는 없던데. 일단은 급하니까 누님들부터 옮기자.”
“아, 알겠습니다!”
파샨은 관을 고타마 위로 옮겼다.
성인 여성 두 명에 관의 무게까지 더해져서, 고타마는 좀 힘겨워하는 눈치였다.
“미안해. 타마야.조금만 힘내자. 알았지?”
파샨은 고타마의 부리에 육포 조각을 대어주었다.
평소라면 끼룩끼룩 소리를 내면서 받아먹었을 녀석이 오늘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왜 안 먹어?”
“뱃살이라도 빼려고 하나 보지. 어서출발하자. 저택이 걱정이야.”
“알겠습니다. 타마, 가자!”
고타마는 마구간 바깥으로 달려 나가면서 날개를 파다닥거렸다.
태운 사람이 많아져서 그런지 평소보다도 달리는 시간이 길었다.
파샨은 이리저리 고민하면서 고타마의 목을 쓸어주었다.
고타마는 힘껏 날개짓을 하더니 텅하고 땅을 박차고 힘차게 날아오르며, 겨우 파샨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이제 이대로 레시아르 령으로 돌아가면 누님들의 일은 일단 끝이다.
가서 암브로시아와 넥타르를 조금씩 먹이면서 경과를 지켜봐야겠지만, 잘 나아서 기력을 회복한 이데트 누님의 선례가 있으니까 큰일은 없을 거고.
문제는 중앙과의 내전인데…….
“타마야. 왜 그래?”
갑자기 고타마가 한쪽으로 기우뚱하고 쏠렸다.
누이들이 들어관 관은 노끈으로 묶어두기는 했지만 혹시라도 떨어지면 대참사가 나기 때문에, 나는 깜짝 놀라서 주변을 살폈다.
또 눈치 없는 놈이 어디선가 바리스타를 쏘는 걸까?
그건 아니었다.
다만, 고타마의 왼쪽 다리에 무언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
“파샨. 저게 뭔지 보여?”
“저건... 사람입니다! 아, 피 냄새가 저기서 나고 있었습니다!”
파샨은 내게 고삐를 맡기고 고타마의 몸을 타고 내려갔다.
잠시 후, 다시 고타마의 등 위로 올라온 파샨의 등에는 특이한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와, 약간은 평범해 보이는 여자가 업혀 있었다.
“이거 좀 전에 본 여자 아닌가? 이름이...”
“뤼지냥 아우럼이라고 했습니다, 도련님.”
“아우럼 가문의 적녀라고 했던 것 같은데 왜 이러고 있는 거야? 난리통에 휩쓸렸나?”
직접 묻는 게 제일이겠지만 뤼지냥은 파리해진 얼굴로 기절해 있었다. 그녀와 함께 걸려 있던 시녀도 마찬가지.
“던져버릴까요?”
“너는 가끔 아무렇지도 않게 무서운 얘기를 하더라. 일단은 데려가자. 치료는 못 해줘도 굳이 죽일 필요는 없지. 손해 보는 것도 아니잖아.”
고타마는 자기가 손해를 본다며 부리를 딱딱 부딪쳤다.
하지만 이 중에서 연배로 보나, 출신으로 보나, 직위로 보나 제일 막내인 녀석에게는 발언권이 없다.
그래서 고타마는 나와 파샨, 두 누이, 그리고 군손님인 뤼지냥 아우럼과 그 시녀를 태우고 서쪽으로 날아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