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레시아르 저택 방어전
* * *
방심할 이유는 많았다.
병무대신이 신사협정을 맺고 돌아간 지 반 년도 지나지 않았다는 점.
음험한 다키아 왕가라도 제국을 뒤에 둔 채 사방의 귀족들을 상대로 내전을 벌이기는 힘들 것이라는 점.
친중앙파 귀족들이 일소되었다는 점.
레시아르령은 중앙에서 멀다는 점.
레시아르 백작이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는 점…….
그렇지만 그것이 방심한 자신의 책임을 면해줄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타라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미 몇 번이나 씹었던 탓에 입술이 터져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부관님! 피가!”
“보고부터 다시 해. 간명하게.”
“옛! 중앙의 아네모네 기사단이 외성을 뚫고 들어왔습니다!”
“적여우 기사단은?”
“내성으로 후퇴하여 방비 중입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제트리 단장은 세 시간 정도라고 전했습니다.”
고작 세 시간이라니.
자신의 아버지인 오록스 단장이 있었다면 적어도 하루는 버텼을 테지만...
지금 와서 그런 걸 생각해봐야 의미 없다.
“백여우 기사단을 전부 몰아줄 테니까 여섯 시간을 버티라고 전해.”
“하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섯 시간은 벌어야 한다.”
타라는 전령을 내보냈다.
그녀 곁에 서 있던 이오시스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마님들을 내보내실 건가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분들이 인질로 잡히게 둘 순 없습니다.”
“하지만 금혈인 이데트 아가씨나 아마트리체 마님, 마법사이신 화리메 마님을 떠나보낸다면 아군 전력이 급감할 텐데요.”
“저택보다 중요한 건 그 분들의 안위니까요. 어쩔 수 없습니다.”
이오시스가 무어라 대꾸하기 전에, 응접실 문이 열렸다.
“나는 떠나지 않을 거예요. 나 또한 레시아르의 적녀로서 레시아르 가문의 저택을 지킬 의무가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것은 이데트 레시아르였다.
이오시스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타라는 조심스레 반문을 제기했다.
“아가씨. 저희들도 유서 깊은 레시아르 가문의 저택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저택이 적들의 손에 넘어간다면...”
“내가 사로잡힐 수도 있다는 거죠?”
“예.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레시아르 백작께서 굉장히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실 겁니다.”
이데트 레시아르와 마티란 루이사, 화리메 아우럼, 아마트리체 파티스트롬의 세 첩실들은 레시아르 백작에게 소중한 이들이다.
반대로 적들의 입장에서는 유용한 인질이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들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피난시켜야 한다.
하지만 이데트는 고개를 저었다.
“바이스는 내가 알아요. 그 아이에게 나나 첩실들이 소중한 것처럼, 그대들도 소중하기는 마찬가지에요.”
“백작님의 총애는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질로서의 가치는 총애와 비례하지는 않습니다.”
“그 아이가 소중하게 여긴다면 인질로서의 가치도 높은 거지요.”
“하지만...”
“그래요. 우리들을 피난시킨다고 해도, 이제 막 양수가 터진 마티란 자작은 어떻게 내보낼 생각인가요?”
그것도 막막한 문제였다.
갑작스러운 침공 소식 때문인지, 마티란 자작은 예정일보다 훨씬 이르게 양수를 터뜨렸다.
메이드장 세리야와 유리, 데이지 등 메이드들이 그 쪽에 몰려서 출산을 돕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산파는 금혈의 아이가 나올 것이라고 했다.
금혈의 아이를 낳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함부로 옮기려 하다가는 산모와 아이 모두 잃을 수도 있다.
타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만이라도 피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녀가 생각하기에 딱 한 명만 골라 피신시켜야 할 존재가 있다면, 그건 바로 이데트 레시아르였다.
레시아르 가문의 장녀라는 입장도 그렇고, 백작의 총애로 따져 봐도 그랬다.
하지만 이데트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나를 피신시키면 그대들은 저택을 방어할 금혈의 귀족을 하나 잃는 셈이죠. 아니, 나를 호위할 기사와 친위대까지 상당한 병력을 함께 잃겠군요.”
“만에 하나라도 아가씨께서 적들에게 사로잡히면, 저는 백작님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저택을 지켜야겠네요.”
이데트의 의지는 결연했다.
타라는 그녀의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의 숭고한 뜻을 받들겠습니다.”
“내 억지를 받아줘서 고마워요. 일단은 현재 상황부터 알고 싶은데요.”
“아네모네 기사단이 내성을 공략 중입니다. 거베라 기사단과 페튜니아 기사단도 수 시간 내로 아티아에 진입할 것으로 보입니다.”
“중앙의 기사단이 셋이나...”
“전력 차이는 심각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백작님이 오실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됩니다.”
대략적인 계산이기는 했지만, 고타마의 비행속도로 아우럼 백작령과 레시아르 백작령을 왕복한다고 따져보자면 내일 오후에는 도착을 기대할 수 있었다.
“하루만 버티면 된다는 거군요.”
“일단은 그 하루가 난관입니다.”
“좋아요. 그대는 내 동생인 레시아르 백작이 믿고 맡긴 부관. 저택 방어전에서는 나도 그대의 지시를 받도록 하겠어요.”
“송구합니다. 하지만 상황이 급박하니 감히 아가씨께 부탁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요?”
“일단은 저택에서 대기해주십시오. 곧 교전이 일어날 테니, 마력을 비축해두셔야 합니다.”
“알았어요.”
이데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갔다.
타라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까지 기다렸다가 한숨을 몰아 내쉬었다.
“정말 죽을 각오로 저택을 지켜야겠군요.”
“이데트 아가씨가 남기로 했다면 다른 마님들도 남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나는 내성을 좀 살피러 가야겠습니다. 그 때까지는 이오시스님이 저택 방어를 지휘해주세요.”
“몸조심하시길. 베티아를 붙여드리겠습니다. 그녀를 통하면 자정의 여명 단원들에게 지시 내릴 수 있을 거예요.”
타라는 이오시스에게 고개인사를 하고 복도로 나왔다.
그녀와 함께 전령들이 나와서 그녀를 앞서 급하게 뛰어갔다.
메이드들은 저택 이곳저곳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있었다.
비싼 가구들을 부숴서 담벽을 쌓는 걸 보면 울분이 치솟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이 저택과 그 안의 사람들을 지키는 일이니까.
정원에서도 저택을 요새화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전 집사장 뮌이 사람들을 불러 모아 급하게 참호를 파고, 뾰족하게 깎은 목창을 박고 있었다.
기사들을 상대로 얼마나 시간을 벌어줄 지는 모르겠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부관님!”
멀쑥한 소년이 멋들어진 코트를 입은 병사들을 데리고 달려왔다.
하이덴과 그 휘하의 친위대원들이었다.
타라는 그 수를 헤아려보았다.
칠십 명이 조금 안 되었다.
좀 전에 내보냈을 때는 분명 백 명은 되었을 텐데.
“나머지는?”
“전사했습니다.”
“... 전령은?”
“전부 참살했습니다.”
그나마 목표는 달성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외성 안에 들어온 아네모네 기사단과 외성 밖으로 집결 중인 거베라 기사단, 페튜니아 기사단은 당분간 합을 맞추지 못할 것이다.
아티아 인근의 지리에 익숙하고 충성심이 높은 친위대원들을 내보낸 성과였지만, 피해도 만만치는 않았다.
“수고했다. 그대들은 이제 저택에 들어가서 이오시스님의 지시를 받도록.”
“알겠습니다.”
타라는 하이덴의 말을 빌려 내성 쪽으로 달렸다.
집집마다 문이 꽉 닫혀 있었다. 그녀는 켈자르의 주도 카르마시아가 약탈당할 때의 일을 떠올렸다.
레시아르의 주도인 아티아가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이빨이 입술을 파고들었다.
딱지가 터지면서 다시 피가 새어나왔다.
내성에서는 막 백여우 기사단이 적여우 기사단과 합류한 참이었다.
그들은 잔뜩 긴장한 채 아네모네 기사단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주군인 레시아르 백작 없이 중앙의 기사단과 맞붙기에는 두려운 모양이었다.
백여우 기사단과 적여우 기사단 모두 흑장미 기사단과 싸우면서 갈려나간 적이 있고, 오록스 단장은 결국 병무대신 오록스에게 죽었으니.
“역시 레시아르는 백작님이 없으시면 안 된다...”
타라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알아본 적여우 기사단원이 그녀를 제트리 단장에게로 안내했다.
성벽 위에 선 제트리 단장은 피곤한 기색이 완연했다.
“여기까지 나오실 줄은 몰랐소.”
“전략을 바꾸겠습니다.”
“갑자기 말이오?”
“마님들이 저택을 떠나지 않기로 했으니, 어떻게든 오래 버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한 전략 변경입니다.”
타라는 자신의 계책을 제트리 단장에게 말해주었다.
그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가능하겠소?”
“가능하게 해야 합니다.”
“너무 위험하오. 그러다가 저택까지 단숨에 뚫릴 수도 있소.”
“거베라, 페튜니아 기사단이 아네모네 기사단과 합류하면 더 위험해집니다. 지금은 결단을 내려야 할 땝니다.”
제트리 단장은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께서 그대에게 부관직을 내린 이유가 있겠지. 부관께 따르겠소.”
“명예로운 싸움은 아닐 겁니다.”
“고향을 지키는 것이 명예로운 것이지.”
타라는 가슴에 손을 얹어 인사하고는 뒤로 돌아섰다.
밀집한 백여우 기사단원들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헬무트 경. 미장센 경.”
“부관님.”
“타라 부관님.”
젊은 두 기사는 타라에게 군례를 올렸다.
타라는 곧장 물었다.
“기사들의 사기는 어떻습니까?”
“좋지는 않습니다. 계속 밀리기만 했으니까요.”
“하지만 주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죽음으로 맞설 겁니다.”
“그거면 됐습니다. 두 분은 단원들을 둘로 갈라서, 동쪽과 서쪽으로 가십시오. 폭음이 들리면 다시 이 곳으로 와서 아네모네 기사단의 뒤를 치면 됩니다.”
미장센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헬무트는 의문을 제시했다.
“성벽을 내어주실 생각이십니까?”
“아네모네 기사단을 내성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여서 처리할 겁니다.”
“쉽지 않은 일일 텐데요.”
“합류한 세 개 기사단을 한 번에 맞서는 것보다는 어렵지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무운을 빌지요, 두 분 모두.”
백여우 기사단은 곧 양쪽으로 흩어졌다.
적여우 기사단은 성벽을 내려와 내성의 문을 활짝 열고 대기했다.
타라는 초조하게 밖을 내다보았다.
벌써 외성 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기사단이 굳이 서민 가를 약탈할 리는 없지만, 서민들이 전화에 휩쓸리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다.
병사들이 지연작전을 펼치고 있을 테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
곧 아네모네 기사단이 도착하겠지.
그녀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가 속삭였다.
“베티아? 여기 있나?”
“예. 부관님.”
박행한 인상의 여인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이 근처에 자정의 여명 단원들이 얼마나 있을까?”
“다섯 명... 입니다... 십 분... 이내로... 열 명을 더... 부를 수 있고요...”
“전부 불러.”
“알겠... 습니다...”
베티아는 다시 슥하고 사라졌다.
타라는 전령들을 이곳저곳으로 보내고는, 손톱을 이빨로 뜯으면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말발굽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진다.
곧, 적 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내성 문이 활짝 열린 것을 보고 잠시 멈추었다.
내성 안에 적여우 기사단원들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는 걸 보면 함정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함정인 걸 알면서도 들어올 것인가.
그건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장 먼저 내성을 뚫고 저택을 차지하였다는 전공은 아네모네 기사단에게 탐나는 과실일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여기서 적여우 기사단 전력을 소멸시켜두면 앞으로의 공략이 손쉬워지겠다는 계산도 서 있을 터.
아네모네 기사단은 이열종대로 진형을 바꾸었다.
적여우 기사단은 슬금슬금 반대편으로 돌았다.
“돌격!”
“퇴각!”
호령소리가 거의 동시에 떨어졌다.
성 안 쪽으로 퇴각하는 적여우 기사단을 아네모네 기사단이 맹렬하게 추격했다.
마력창이 어지럽게 날아다니며 살점을 꿰뚫었다.
그들이 내성 안으로 모두 들어왔을 때쯤.
콰쾅!
콰콰콰쾅!
땅을 뒤흔드는 진동과 굉음이 울렸다.
아네모네 기사단 대열의 후미에 있던 자들이 피투성이가 돼서 튀어 올랐다.
“계속 던져!”
타라는 검을 거머쥐고 아네모네 기사단의 정면을 향해 달렸다.
적여우 기사단이 반전해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성문 인근에 숨어있던 투척병들이 계속해서 폭류탄을 던졌다.
하이브의 마석으로 만든 값비싼 무기였지만, 이걸로 여기서 기사단 한 개를 지울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것이었다.
“전진! 흐트러지지 말고 전진하라!”
아네모네 기사단의 군기가 바로 섰다.
그들은 잠시 휘청거리는가 싶더니 곧장 진열을 재정비하고 앞으로 달렸다.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적들보다는 적여우 기사단을 먼저 섬멸하겠다는 의지였다.
적여우 기사단도 이번에는 지지 않고 돌격했다.
“레시아르를 위하여!”
제트리 단장과 타라는 나란히 말을 달렸다.
적들도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아네모네 기사단이 순차적으로 날리는 마력창에 근처의 기사단원들이 줄줄이 죽어나자빠졌다.
“단장님! 우리도 응사해야 합니다!”
“그래봐야 저들만 못할 거요.”
“그렇다고...”
“지금이다! 전개하라!”
제트리 단장은 아네모네 기사단과 격돌하기 직전에 손을 들어올렸다.
불투명한 색의 마력방어막이 말 머리 앞에 형성되었다.
그의 뒤를 따라 적여우 기사단원들도 마력 방어막을 이어 만들었다.
일사분란하게 만들어진 마력 방어막은 거대한 충각이 되어서 아네모네 기사단을 뒤흔들었다.
진동은 대열의 머리와 허리를 흔들고 꼬리까지 전해졌다.
그 탓에 아네모네 기사단은 잠시 멈추어 서야 했다.
그들도 마력 방어막을 형성해냈기에 피해가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사의 돌격이 멈췄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막대한 손해였다.
그제야 폭음을 들은 백여우 기사단이 돌아와서 아네모네 기사단의 양 옆구리를 노렸다.
기사 미장센과 헬무트가 각기 젊은 기사들을 데리고 좌우측을 후려갈긴 것이다.
전방에는 적여우 기사단, 후방에는 투척병, 양옆에는 백여우 기사단.
사면으로 포위되자 중앙의 정예 기사단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빠져나가야 한다!”
“하지만 어디로 말입니까!”
혼란을 틈타 자정의 여명 단원들이 잽싸게 도르래를 돌려 성문을 닫았다.
적 기사와 종자들이 몇 남아있었지만, 베티아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타라는 겨우 한숨을 돌리려다가 날아드는 검을 간신히 튕겨냈다.
아직도 전투는 한창이었다.
“조심하시오!”
제트리 단장이 그녀를 노린 기사의 목을 쳤다.
툭하고 떨어져서 데구르르 굴러간 머리는 누군가의 발길에 차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저 멀리서는 헬무트가 쌍검으로 춤을 추듯 날뛰는 게 보였다.
미장센은 반대로 동료 기사들과 어깨를 붙인 채 차근차근 포위망을 좁혀나가고 있었다.
“이대로만 밀어 붙이면...!”
타라는 검을 휘두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흔들리는 검의 궤적에 적 기사의 얼굴이 쪼개졌다.
그녀도 상당히 피곤했지만, 포위된 적들은 그보다 몇 배나 더 피로와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녀의 뜻대로 돌아가지만은 않았다.
계속해서 아네모네 기사단의 후미에서 터져 나오던 폭음이 어느 순간 멈추었다.
“부관 여사! 어떻게 된 거요?”
“단장님! 투척병들이 소지한 폭류탄을 다 쓴 겁니다!”
“그럼...”
“후미가 열리게 되는 거죠! 지금 놓치면 안 됩니다! 더 강하게 몰아쳐야 합니다!”
제트리 단장은 한숨을 내쉬고는 부하 단원들을 다독였다.
적여우 기사단원들의 기세가 다소 높아지기는 했다.
하지만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아네모네 기사단의 발악도 만만치는 않았다.
그들은 과감하게 선두를 희생양으로 남기고, 나머지 대열만을 후미로 반전시켰다.
“뚫어라!”
성문이 굳게 닫혀 있기는 하지만, 수백의 기사들이 마력창을 한꺼번에 던지니 그것도 호쾌하게 박살이 나버렸다.
“놓치면 안 된다!”
“외성으로만 나가면 아군 기사단이 기다리고 있다! 흩어졌다가 재합류한다!”
백, 적여우 기사들이 애써 추격했지만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치는 아네모네 기사단을 섬멸할 수는 없었다.
결국, 도주한 전력이 절반은 되어 보였다.
“절반이나 도망가다니...”
“절반이나 해치운 거요. 전부 정예한 기사들이었으니.”
초전에 휩쓸린 적여우 기사단원 십 수 명을 제외하면 아군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적은 기사단 하나가 반파 당했으니까당연히 승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결과였다.
하지만 이번 전투가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아는 타라로서는 가슴이 막막했다.
“아네모네 기사단 잔당이 거베라 기사단, 페튜니아 기사단에 합류할 겁니다. 한 번 당했으니 두 번은 당하지 않을 거고...”
“내성을 온전히 지키는 건 어렵겠군.”
“저택으로 물러나야 합니다.”
적들이 노리는 건 레시아르 백작의 여자들.
최종 방어선은 저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