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129화 (129/166)

〈 129화 〉 레시아르 저택 방어전

* * *

거베라 기사단과 페튜니아 기사단, 그리고 흩어졌다가 다시 모인 아네모네 기사단까지.

중앙의 세 개 기사단이 레시아르 저택 앞으로 천천히 진군했다.

주변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 살기가 숨어있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정오의 그림자는? 잠입 보고가 아직 안 들어왔는데.”

거베라 단장이 정문을 노려보며 말했다.

“정오의 그림자도 예전의 그 단체가 아니지. 요새 워낙 많이 죽어나자빠져서 단원들을 몇 번이나 교체했다지 않아.”

페튜니아 단장이 대답했다.

“그럼 정보도 없이 저 마굴 안에 뛰어들라는 건가?”

“그래야지. 그게 명령이니까.”

“그랬다가 저 자 꼴이 나면 어떡하나?”

거베라 단장은 아네모네 기사단장을 가리켰다.

모욕적인 발언이었지만, 자기 욕심에 기사단을 반이나 갈아버린 아네모네 단장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페튜니아 단장은 그를 옹호하는 듯하면서 넌지시 떠밀었다.

“그래도 그가 한 번 맞붙어봤으니 더 잘 알지 않겠나?”

“아니, 그게 무슨?”

“선봉을 탐내시어 그러셨으니, 이번에도 선봉을 양보해 드리지. 걱정 마시게. 병무대신께는 그대의 군공을 세세히 적어서 알려드릴 테니.”

과오를 덮을 만한 군공을 내지 않으면 그 꼿꼿한 병무대신에게 무슨 벌을 받을지 모른다.

결국 아네모네 단장은 자신의 기사단을 먼저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건장한 평기사가 먼저 나아가서 대문을 흔들었다.

당연히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는 검을 뽑아들어 문고리를 후려쳤다.

마력을 담은 검이 자물쇠를 내려치자, 꽝하고 굉음이 터졌다.

연기가 걷힌 후에 남은 것은 그의 두 발목뿐이었다.

그 위로는 전부 연기와 함께 바람에 날아가버린 듯 했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

그 모습에 아네모네 단장은 분노해서 발을 굴렀다.

하지만 한 발 떨어져 있는 거베라 단장과 페튜니아 단장은 느긋하게 신무기를 평론했다.

“특이한 폭탄이군. 저런 걸 본 적이 있나?”

“아니. 처음이네만. 마력과 부딪히면 작동하게 되어 있는 폭탄인가.”

“아네모네 기사단과 싸울 때는 저걸 던져서 터뜨렸다는군.”

“레시아르 백작이 재밌는 걸 만들었구먼.”

그들이 뭐라고 하건 아네모네 단장은 계속 기사들을 전진시켰다.

적어도 저택 안까지는 들어가야 선봉을 넘길 수 있었다.

아름다운 정원은 참호와 온갖 함정들로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기사들을 해치기보다도 발목을 잡아 시간을 끌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전투에 앞서 마력을 펑펑 쓸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아네모네 기사단원들은 오물과 흙덩이를 뒤집어쓰며 나아갔다.

사기가 뚝뚝 떨어진 것은 물론이었다.

본채까지 도착했을 때는 시간이 꽤 흐른 다음이었다.

활짝 열린 문 앞에 키가 큰 여기사와 그 종자로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나는 체닐린 마이포흐. 전 하늘기린 기사단장이자, 지금은 레시아르 백작의 호위기사를 맡고 있는 자이다.”

체닐린이 나서서 말했다.

아네모네 기사단장이 나지막이 대꾸했다.

“이 앞에서 결투라도 벌이자는 거요? 마이포흐 양?”

“그대들은 이 저택의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정원을 짓밟고 흙 묻은 발로 타일을 더럽히려 하니 부끄러움을 알 지어다.”

“그래서 결투를 청하는 거냐고 물었소. 원한다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소.”

“내 제자인 프렌다를 먼저 꺾는다면.”

아네모네 기사단장은 으득하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존심이 깎여있는데, 이런 꼬맹이를 상대하라고 하니 분노가 솟구쳤다.

처음부터 말을 받아주지 않았다면 차라리 나았을 터.

이제는 상대를 해도, 상대를 하지 않아도 명예에 흠집이 가게 생겼다.

혹시라도 고귀한 출신이 아닐까 노려봐도 딱히 그런 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기껏 해봐야 동혈 출신일 터.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의 종자를 대신 내보냈다.

출신은 한미하지만 검의 기본은 익힌 자다.

그는 자신의 종자가 한낱 계집애에게 밀릴 리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 계집도 내 종자를 먼저 상대해야 할 거요.”

프렌다는 말없이 종자 쪽으로 다가갔다.

종자는 검을 빼들고 까딱까딱 손짓했다.

체구가 작고 어려보인다고 무시하는 게 분명했다.

프렌다는 숨을 한껏 들이켜고는 풀쩍 뛰어올랐다.

검 끝은 예리하게 종자의 목울대를 노렸다.

“흣!”

종자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치며 검을 휘둘렀다.

검이 서로 맞붙어 불똥을 튀겼다.

종자는 눈썹을 찡그리며 손잡이에 힘을 주었다.

그로서는 힘 싸움으로 가져가는 게 유리했다.

하지만 프렌다의 검은 종자의 검을 맞받지 않고, 뱀처럼 타고 넘어갔다.

“허억...”

어느새 그녀의 검이 종자의 가슴팍을 찔렀다.

종자는 믿기지 않는 듯 크게 눈을 떴지만, 검은 더 깊숙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크억...”

커다란 몸이 풀썩 쓰러졌다.

프렌다는 검을 휘둘러 핏방울을 털어냈다.

아네모네 단장은 수치심과 분노로 얼굴이 붉어졌다.

“쥐방울만한 계집이...”

“다음.”

프렌다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네모네 단장은 손등에 핏줄이 튀어나오도록 검을 쥐었다가 힘을 풀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직접 나설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번에도 종자를 내보냈다가 지기라도 하면 감당할 수가 없다.

결국 제일 말단의 신입 평기사가 나섰다.

수십 번의 검격이 오갔다.

서로의 갑주에 아슬아슬하게 검날을 퉁겨낸 것도 여러 번이었다.

처음에는 시큰둥하게 지켜보던 기사들도 이제는 손에 땀을 쥐고 결투를 응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네모네 단장은 이 결투가 저 작은 여자의 손에 좌우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그녀는 일부러 화려하게 검을 부딪쳐 시간을 끌고 있었다.

“감히 아네모네 기사단을 우롱하는가!”

단장의 호통 소리에 놀란 것은 프렌다가 아니라 말단 기사였다.

그가 움찔하고 놀란 순간, 프렌다의 검이 그의 손목을 갈랐다.

“흐윽...”

“다음.”

프렌다는 그를 걷어차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들은 잘린 손목을 쥐고 신음하는 막내를 끌어당겨 오고는, 프렌다에게 경의를 표했다.

적이지만 훌륭한 솜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분위기가 아네모네 단장의 성질을 긁었다.

결국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직접 나섰다.

전조도 없이 쏜살같이 쏘아진 검격.

프렌다는 어깨를 찔려 비틀거리다가 뒤로 넘어졌다.

아네모네 단장은 부하들의 시선이 등 뒤에 콕콕 박히는 걸 느끼면서도, 그녀의 목숨을 거두기 위해 다가갔다.

그러자 체닐린이 급히 끼어들어 검 끝을 겨누었다.

아네모네 단장은 씩씩거리며 호통쳤다.

“마이포흐 양! 신성한 결투에서 이게 무슨 짓이오!”

“결투는 신성하지 않아. 일단 살아서 이기는 게 신성하지.”

체닐린은 백작이 자신을 망쳐놨다고 웃으면서, 프렌다를 들쳐 안고 저택 안으로 도망쳤다.

“쫓아라!”

아네모네 단장은 분통을 터뜨리며 제일 먼저 뛰어 들어갔다.

기사단원들도 우르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홀에는 화려한 장식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비싼 도자기와 그림들이 물욕을 자극했다.

아네모네 단장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물건을 함부로 만지지 마라! 함정일지도 모른다!”

“그야 물론입니다. 단장님.”

“계집들은... 사라졌군. 언제 그 폭탄이 날아올지 모르니 다들 경계해라.”

그들은 주위를 샅샅이 노려보며 습격을 경계했다.

“다, 단장님! 저기!”

선임기사가 갑자기 천장을 가리켰다.

아네모네 단장은 고개를 들어보았다.

황금으로 장식된 샹들리에일 뿐이었다.

아니, 그 위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치렁치렁한 금발이 화려한 여자였다.

“안녕. 그리고 안녕.”

그녀에게서 강대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아네모네 단장은 사색에 질려 소리쳤다.

“마법사다!”

“피해!”

“나가라! 나가야 해!”

“밀지 마!”

도망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샹들리에가 그대로 떨어졌다.

쿵­­­

#

집무실에 앉아있던 타라에게도 그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초조함을 숨기려고 애써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오시스는 그 마음을 짐작하고 묻지 않은 말을 미리 대답해주었다.

“황금마법에 맞춰서 반격이 들어갔을 테니, 남은 절반 중에서 다시 절반은 날아갔을 거예요.”

“그럼...”

“아네모네 기사단은 사실상 와해된 거라고 봐도 좋겠죠.”

그제야 타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했는데 성과가 나와서 다행이군요.”

“거베라 기사단과 페튜니아 기사단도 아네모네 기사단을 수습하는 데에 손을 보태야 할 테니... 어느 정도는 시간을 벌었다고 할까요.”

응접실 문이 열리고, 화리메가 들어와서 소파에 털썩 누웠다.

“아~ 힘들다.”

“대단한 전과를 거둬주셨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거야 당연한 거고. 아무튼, 오늘은 다시 마법 못 쓰겠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끈지끈해.”

“예. 적들도 한동안은 함부로 저택에 들어오지 못할 겁니다.”

아래층에서 고함과 비명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은 귀를 쫑긋 세웠다.

“이게 무슨 소리지?”

“정문 쪽은 아닌 듯한데...”

“창문입니다!”

창문에는 모두 커튼을 내리고 책장으로 막아두었다.

하지만 방비가 정문만큼 탄탄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거베라, 페튜니아 기사단은 정문을 통해 아네모네 기사단을 구원하는 대신 창문으로 들어와 저택 공략을 우선시한 것이다.

“이,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화리메는 허둥지둥거리며 물었다.

“이것도 상정한 범위 내입니다. 저택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만들어서 기사들을 배치해놨으니, 하루 정도는 넉넉히 버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마님께서는 편한 마음으로 마력을 회복시켜 주시면 됩니다.”

“알았어. 그럼 올라가 있을게.”

화리메가 나가기까지 기다렸다가, 타라는 세리야를 호출했다.

그녀는 금방 응접실로 들어왔다.

“메이드장님. 상황이 좀 어렵게 됐습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지시만 내려주세요.”

“감사합니다. 동혈의 메이드들을 따로 뽑아서 기동대를 편성해줄 수 있을까요?”

“메이드가 기사들을 상대로 싸우는 건 힘들 텐데요.”

“직접 전투에 참여하시지는 않아도 됩니다. 부상자를 옮기고, 소식을 계속 전달해주세요. 친위대원들과 함께하면 됩니다.”

“알았습니다.”

세리야가 나가고 나서, 타라는 책상에 이마를 기댔다.

서늘한 온도가 머리의 열을 조금이나마 식혀주는 것 같다.

하지만 편안한 감정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비명소리가 웅웅 울렸기 때문이었다.

시시각각 적과 아군이 서로의 목숨을 취해가고 있었다.

“책임이란 참 무거운 거였군요.”

“부관님...”

“백작님이 이렇게 보고 싶은 건 처음입니다.”

“하루만 버티면 됩니다. 하루만요.”

그녀에게는 가장 긴 하루가 이어지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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