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130화 (130/166)

〈 130화 〉 레시아르 저택 방어전

* * *

깊은 밤.

한창 전투가 이어지던 레시아르 저택도 고요한 어둠에 묻혔다.

물론 속 편하게 잠을 청하는 이는 없었다.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혹시라도 기습해올 적이 있을까 두려움에 떨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지휘관이라고 해서 상황이 다르지는 않았다.

거베라 단장은 간신히 차지한 저택 식당에 앉아서 치즈를 씹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페튜니아 단장이 처량하게 와인을 홀짝였다.

“기사들이 생각보다 너무 많이 상했어.”

“얼마나 죽었나?”

“사십. 자네는?”

“나는 쉰둘이네.”

"아네모네 기사단은..."

거베라 단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네모네 단장은 부하들을 거의 다 잃고 미친 듯이 날뛰다가 쓰러졌다.

죽지는 않았지만 기력이 쇠해서 며칠간은 꼼짝없이 요양만 해야 한다고 한다.

하루, 이틀 만에 결판이 갈릴 저택 공방전에서는 쓸모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페튜니아 단장은 아네모네 기사단이야 어찌 됐든, 죽은 자신의 부하들이 아까웠다.

“영주군과도 결전을 벌여야하는데, 이 마굴 같은 저택에서 부하들을 다 잃게 생겼구먼.”

“이렇게 끈질길 줄은 몰랐네. 어떻게 아이부터 여자까지 다 죽을 각오로 달려드는 거지?”

“레시아르 백작이 처우를 꽤 괜찮게 해줬다는군.”

“호색가에 탕아라도 내 사람에게는 잘 해줬다, 이건가.”

쿵­­

어딘가에서 또 폭류탄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짧은 휴식을 취하던 기사들이 벌떡 일어나서 공황에 빠질 게 눈에 선했다.

“지독하군. 쉴 틈을 안 주는 거야.”

“레시아르 백작이 돌아오기 전에 여자들을 잡아야할 텐데.”

“후일을 생각하면 피해를 도외시하고 무작정 달려들 수만은 없단 말이지.”

“내일 점심쯤에는 레시아르 백작의 가신들이 합세할 걸세. 시간이 더 지나면 켈자르 가문과 파티스트롬 가문에서도 원군을 보낼 테고.”

“그 자들이야 조무래기지.”

“조무래기래도, 이미 우리는 포위당해있다는 걸 있으면 안 되네.”

한숨이 새어나왔다.

“결국은 시간 싸움이지.”

“자네도 술은 그만 마시고 마력을 비축해두게. 내일은 직접 나서야 할 테니까.”

“금혈의 여인들을, 상처 입히지 말고 고스란히 사로잡으려면 말이지? 자네는 그게 가능할 것 같은가?”

“어쩌겠나. 그게 명령인걸.”

페튜니아 단장은 울적하게 와인잔을 바라보다가 남은 와인을 부어버렸다.

거베라 단장이 그에게 치즈를 건넸다.

“그래도 좋은 소식이 하나 있네.”

“뭔가?”

“정오의 그림자 단원 하나가 이데트 레시아르의 거처를 찾아냈어.”

“그게 정말인가?”

“3층에 은신처가 숨겨져 있다더군.”

이데트 레시아르는 현재 이 저택에 있는 유일한 레시아르의 직계 혈족.

그녀만 잡는다면 다른 이들의 투항을 이끌어내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리라.

페튜니아 단장은 와인잔에 새로 와인을 따랐다.

“한 잔 안 마실 수 없겠군.”

“함정일 수도 있어.”

“아무리 약화되었다고 해도 정오의 그림자는 정오의 그림자야. 녀석들이 물고 온 정보라면 믿을 만하지.”

“그건 그렇지. 나도 한 잔 주게.”

두 사람은 미리 축배를 들었다.

#

프렌다는 조용히 검을 만지작거렸다.

하나 뿐인 친구를 떠나보낸 후로, 검은 자신의 친구가 되었다.

자신은 멍청하고 이기적이고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런 자신에게 의미가 있다면, 그건 검을 휘두르는 것이었다.

프렌다는 버려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명령에 따라 검을 휘두르는 것만이 지금의 프렌다에게 유일한 의미였다.

그러니 조금 어렵고 위험한 일이라도 그녀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왜 내가... 왜 내가.... 왜 나인 거야...”

넬라라고 했던가.

프렌다는 울상이 되어서 중얼거리는 여자를 휙하고 올려다보았다.

얼마 전에 새로 들어온 메이드였다.

그녀는 메이드복이 아닌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게 기쁘지 않은 건지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하지만 딱히 프렌다는 그녀가 신경 쓰이거나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프렌다의 친구가 아니니까.

프렌다의 친구는 하나뿐이었고, 그녀는 떠나버렸다.

그러니 프렌다에게는 오직 검뿐이다.

프렌다는 검집을 다시 한 번 꾹 잡았다.

넬라 곁에 선 체닐린과 세리야도 각자 무기를 꾹 쥐었다.

“곧 옵니다.”

기감이 제일 밝은 체닐린이 알렸다.

미리 언질 받은 대로 비밀통로가 열리고, 기사들이 들어왔다.

다해서 열. 상당한 숫자였다.

개중에는 거베라 단장도 있었다.

그들은 드레스 차림을 한 넬라를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아가씨가 여기 있었군요!”

“내가 그렇다고 하지 않았어. 그림자는 아무리 작아도 그림자라니까.”

거베라 단장은 마지막으로 따라 들어온 복면 소인의 어깨를 두들겼다.

자신보다 한참 큰 단장에게 어깨를 맞은 소인은 휘청거리다가 자세를 바로 잡았다.

거베라 단장은 그 모습을 보고는 또 크게 웃고 넬라에게 한 발자국 다가섰다.

“이데트 레시아르 아가씨 되십니까?”

넬라는 부들부들 떨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이 웃겼는지 기사들은 또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거베라 단장도 따라 웃다가 갑자기 뚝 그쳤다.

“뭐야. 정말 아닌데?”

“단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모르겠나? 이 여자한테서는금혈 특유의 존재감이 하나도 느껴지질 않아.”

“그럼 이 여자는...”

“제기랄!함정이다!”

거베라 단장의 외침소리와 동시에 벽면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화살은 눈이 달린 것처럼 적 기사들만을 노리고 날아갔다.

애초에 이 방은 은신처가 아니라, 이런 목적으로 적을 끌어들여 참살하기 위한 함정실이었다.

“큭!”

"크아악!"

기사들은 재빨리 방어막을 전개했지만, 반응속도가 느린 둘은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졌다.

거베라 단장은 송충이 같은 눈썹을 틀어 올리며 넬라의 목을 따려 했지만, 화살비가 그치자마자 이번에는 뜨거운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아악!”

발밑에서 튀어나온 기름불에 기사 둘이 불덩이가 되어서 쓰러졌다.

선대 레시아르 백작들이 숨겨둔 함정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체닐린과 세리야은 함정에 정신이 팔린 기사들을 하나씩 습격해서 쓰러뜨렸다.

“우오오오! 이 비열한 계집들!”

거베라 단장은 부하들이 참살 당하는 꼴을 보고는 분기탱천해서 도끼 두 자루를 마구 휘둘렀다.

“큭... 무슨 힘이...”

체닐린은 두 손으로 쥔 검으로도 거베라 단장의 기세를 흘려내지 못했다.

세리야가 옆에서 협공하려 했지만, 거베라 단장은 그녀의 무릎을 발로 차서 거꾸러뜨렸다.

세리야가 빠진 자리로 프렌다가 급히 합세했다.

그녀는 작은 체구를 이용해 거베라 단장의 등을 타고 올라 검을 쑤셔 박으려 했다.

하지만 거베라 단장은 체닐린을 상대하면서도 가볍게 프렌다를 메쳤다.

“윽!”

몸이 바닥에 부딪히면서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프렌다는 괴로운 한숨을 쉬면서도 잽싸게 몸을 굴렀다.

그녀가 있던 곳을 찍은 도끼는 바닥을 한 뼘이나 파고들었다.

체닐린은 필사적으로 검격을 쏟아내며 거베라 단장의 주의를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한 손으로도 그녀를 위협적으로 몰아붙였다.

셋이 붙어도 승산이 없다. 둘이 붙으면 위험하고, 하나가 붙으면 답이 없다.

프렌다는 몸을 일으켜 체닐린을 도우려 했지만, 부러진 갈비뼈가 폐부를 찔렀다.

“아흑...!”

멈칫한 순간, 벼락 같이 도끼가 내리쳤다.

프렌다는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체념했다.

의외로 담담한 기분이었다.

평온해진 마음을 흔든 것은 고통이 아니라, 어떤 한 목소리였다.

“프렌다!”

“... 토모?”

그건 분명 친구의 목소리였다.

프렌다는 친구를 찾아 고개를 돌리다가, 복면을 쓴 소인이 거베라 단장의 발등을 단검으로 내리찍는 장면을 보았다.

“그림자! 배신한 거냐!”

거베라 단장은 포효하며 그녀를 걷어차려 했다.

그녀는 공중제비를 돌며 피했다.

그 바람에 얼굴에 쓴 복면이 벗겨졌다.

“토모...!”

“그래! 나야, 프렌다!”

“상봉은 나중에! 일단은 이 자를 어떻게 해야 해!”

체닐린이 땀을 뻘뻘 흘리며 소리쳤다.

세리야가 무릎을 절뚝이면서도 다시 싸움에 가세했다.

프렌다와 토모도 마찬가지.

넬라는 구석에서 덜덜 떨기만 했지만, 어쨌거나 그녀에게 합류하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네 명이 동시에 협격하자 거베라 단장도 상당히 버거워하는 듯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갈수록 휘말리는 건 거베라 단장이 아니라 그들이었다.

두 자루의 도끼가 이리저리 회전할 때마다 조금씩 핏방울이 튀기고 상처가 늘어났다.

"죽어라! 토끼 같은 계집년!"

"프렌다! 조심해!"

날카로운 도끼날이 프렌다의 분홍색 머리카락을 한 뼘이나 잘랐다.

조금만 반응이 늦었다면 목이 날아갈 뻔 했다.

그걸 본 토모는 고개를 젓고 소리쳤다.

“안 되겠어요! 물러나요!”

“부관께서는 여기서 거베라 단장을 해치우라고 하셨는데!”

“그게 가능하면 말이죠!”

체닐린은 잠깐 고민하다가 기겁하며 물러났다.

그 사이에 도끼날이 자신의 갑주 절반을 찢어 놓았다.

"그래. 이건 안 되겠어..."

"누가 보내준다더냐? 나를 우롱한 죄는 죽음으로 갚아라!"

"한 번에! 한 번에 공격해!"

네 명은 일단 합을 맞춰서 거베라 단장을 일격에 공격하고, 동시에 물러났다.

거베라 단장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는 도끼 자루를 다시 쥐었다.

거대한 산멧돼지가 달려드는 품새였다.

그가 먼저 달려들려고 하는 순간, 토모는 미리 받아둔 폭류탄 세 개를 한꺼번에 던졌다.

쾅­­ 쾅­­ 콰앙­­

폭음이 겹치면서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거베라 단장은 일단 방어막을 전개하는 수밖에 없었다.

세리야는 연기 속에 몸을 숨기고, 반대쪽 비밀통로를 열어주었다.

가장 먼저 넬라가 뛰어 들어갔다.

그 다음에 토모가 프렌다와 어깨를 부축한 채 들어갔고, 절뚝거리는 세리야도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체닐린이 들어가 출구를 꼭 닫았다.

연기가 걷히고 나자, 비밀통로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거베라 단장은 허탈하게 죽은 부하들의 시체를 내려다보다가 소리쳤다.

"이런 비겁한 계집년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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