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131화 (131/166)

〈 131화 〉 레시아르 저택 방어전

* * *

여기저기서 폭류탄 터지는 소리가 울리고, 마력창이 마력방어막을 두들기는 소리가 겹쳤다.

거베라 기사단과 페튜니아 기사단은 작정한 듯 단원들을 갈아 넣으며 저택을 차례대로 점거해나갔다.

바리케이드가 하나씩 무너지고, 방어선은 점점 뒤로 물러났다.

부게른 남작과 기돔 자작이 급파한 지원군이 저택 정원까지 들어오긴 했지만, 그들은 아네모네 기사단의 잔당도 뚫지 못하고 물러났다.

영지군과 중앙군 간의 수준 차이가 너무 나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레시아르 방어자들은 적에게 출혈을 강요하면서 어찌어찌 오후까지는 버틸 수 있었다.

그것도 이제 한계였다.

“물러나라! 물러나!”

타라는 검집으로 기사들의 갑주를 두들겼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흥분한 아군 기사들을 물릴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혈기 왕성한 기사 하나가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하지만 부관님! 여기를 넘겨주면 더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꼭대기층에서 최종 방어선을 꾸린다! 나는 아직 그대들이 필요하다!”

“그리 말씀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기사들이 물러서는 사이에 친위대원들이 초개같은 목숨을 내던졌다.

타라는 그들에게 경례를 보내고는 계단 위로 올라가, 남은 폭류탄을 한꺼번에 모두 던졌다.

꽈과과광­­

뒤섞여 싸우던 적 기사들과 함께 층계가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이걸로 잠시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타라는 기사들을 데리고 급히 달려서 복도 맨 끝의 방으로 향했다.

방문은 철판과 널빤지로 보강해서 완전히 요새 입구나 다름없었다.

이오시스가 직접 타라의 얼굴을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저택에서 가장 넓은 방이었지만,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북적이니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사이에서도 신음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으흐으으윽...”

마티란 자작은 커튼을 친 침대에서 끙끙 앓으며 산통을 참아내고 있었다.

평민 출신의 메이드인 유리와 데이지, 코코가 산파를 돕고 있다.

타라는 고개를 돌려 다른 이들을 살폈다.

이데트는 메이드장 세리야와 함께 기사들에게 마실 것을 나누어주고 있다.

화리메는 벽에 머리를 기대고 유석죽을 천천히 먹으며 마력을 회복하는 중이다.

아마트리체는 창문을 열고 레시아르 백작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카산드라 공주는 은근한 감시 속에 쌓여서 책을 읽는 시늉을 했다.

처녀를 레시아르 백작에게 넘겨버린 그녀로서는 함부로 어느 쪽을 편들 수도 없었기에 복잡한 심경이었다.

자정의 여명 단원들과 친위대원, 백여우와 적여우 기사들, 메이드, 시종, 그 외 여러 가신들이 북적거리면서 불안을 씹고 있었다.

타라는 한숨을 내쉬려다가 참았다.

많은 이들이 그녀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부관님.”

이오시스가 다가와서 그녀에게 귀엣말을 했다.

“거베라 단장과 페튜니아 단장이 대화를 요청하고 있어요.”

“투항 제안입니까?”

“아마 그렇겠지요. 그래도 나가는 보셔야 해요.”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 수 있다면... 예. 그래야겠지요.”

타라는 기사 헬무트를 대동하고 층계 쪽으로 향했다.

이미 적 기사들이 뻥 뚫려버린 층계에 걸칠 간이 사다리를 만들고 있었다.

층계 아래에서 거구의 남자 둘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거베라 단장, 그리고 페튜니아 단장.”

“오록스의 딸이여.”

“레시아르 백작님의 부관 타라입니다.”

거베라 단장은 어깨만 으쓱해보였다.

하지만 강대한 마력이 그 안에 숨겨져 있었다.

타라는 그의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기세에 움찔했다.

거베라 단장은 비웃으며 물었다.

“왜. 내 목이 그렇게 탐나나?”

“왜 아니겠습니까.”

“원한다면 이리 내려와서 가져가 보시지.”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이미 서로가 악에 받힌 상황이다.

기사도를 지켜줄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터.

함부로 내려갔다가는 사로잡혀서 인질 꼴이 될 게 뻔했다.

타라는 층계 위에서 거리를 유지한 채 거베라 단장을 노려보았다.

그는 또 한 번 어깨를 으쓱하고는 물었다.

“그래. 부관 여사. 이만 포기하고 명예롭게 항복하는 게 어떻겠소?”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끝내려고 한다면 당장이라도 끝낼 수 있다. 저택에 불을 놓으면 그만이니.”

“그럴 수 있다면 진작 그렇게 했겠지요. 하지만 단장들께서는 인질을 잡으러 온 게 아닙니까.”

거베라 단장이 입을 다물자, 페튜니아 단장이 나섰다.

“지금 투항한다면 저택에 남은 모든 이들을 명예로운 포로로 대우해줄 것이오.”

“나를 비롯해 이 저택의 모든 이들은 명예로운 포로가 되어서 백작님의 발목을 잡기보다는 명예로운 순직자가 되어서 백작님을 위해 죽기를 바랍니다.”

“정말 항복하지 않을 거요? 부하들이 다 죽는대도?”

“목숨이 아깝다고 검을 던진다면 충성이 무슨 의미겠습니까?”

페튜니아 단장은 탄식하고 등을 돌렸다.

“돌아가시오. 사다리가 완성되면 다시 공격을 시작할 것이고, 그 때는 그대 휘하 부하들의 목숨을 모조리 거둘 것이니.”

“그럼 사다리를 부수고 가겠습니다.”

타라는 마력창을 던져서 사다리를 우지끈 부러뜨렸다.

너무 담담한 말끝에 한 행동이라 누구도 막지 못했다.

열심히 사다리를 만들던 기사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타라를 올려다보았다.

“저... 저...!”

“잠시 후에 다시 뵙지요.”

타라는 헬무트와 함께 다시 복도를 돌아와 방으로 들어갔다.

방어자들은 마지막으로 무기와 마력을 점검하고 의지를 다졌다.

“해가 지면 백작님이 오신다! 그 때까지만 버티만 우리가 이긴다!”

하지만 기행으로 번 시간은 고작해야 십 분 남짓.

거베라 기사단과 페튜니아 기사단은 사다리를 금세 복구해냈다.

그들은 드디어 꼭대기층에 발을 딛고 올라와서는, 마지막 방을 향해 내달렸다.

쿵­!

쿵­!

쿵­!

두텁게 보강한 방문이 묵직하게 흔들렸다.

밖에서 적 기사들이 힘을 모아 후려치고 있는 듯했다.

“이러다 뚫리겠습니다!”

“뒤로 물러나!”

타라의 명령에, 기사들은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문은 결국 우지끈하고 무너졌다.

“쏴라!”

부서진 틈새로 비친 적들의 형체를 향해 마력창이 날아갔다.

하지만 적들도 이미 공격에 대비해 방어막을 전개한 상태였다.

일제사격한 마력창이 퉁퉁퉁 튕겨나갔다.

한 차례 공방이 서로 무위로 돌아가자, 양측 모두 검으로 맞붙었다.

좁은 방에 금세 쇠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줍잖은 이들은 이미 모두 죽었다.

레시아르 측도, 중앙 측도 남은 이들은 정예 중의 정예 뿐.

기사들은 서로를 향해 평생 익혀온 살인기술을 풀어놓았다.

“나를 속인 계집들은 어디 있나!”

거베라 단장은 양손 도끼를 마구 휘둘러 기사들을 쳐 죽이며 외쳤다.

“여기 있다!”

체닐린이 동료 기사의 등을 밟고 뛰어올라 그에게 검격을 날렸다.

세로로 내리찍은 쾌검이었지만, 거베라 단장은 도끼 자루로 손쉽게 막아냈다.

하지만 그도 옆구리를 노리는 마력창을 피하기 위해서는 꼴불견처럼 허리를 뒤틀어야 했다.

“칫...”

마력창을 날린 세리야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베라 단장은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그 앞을 프렌다와 토모가 막아섰다.

“쥐알만한 것들이...”

프렌다와 토모는 동시에 그를 노렸다.

거베라 단장은 크게 도끼를 사선으로 휘둘러 둘을 동시에 견제했다.

빈틈을 노리고 비수가 날아들었다.

쨍!

거베라 단장은 이빨로 비수를 물어서 깨뜨렸다.

회심의 공격이 실패했지만, 베티아는 다시 모습을 숨기고 암습의 기회를 노렸다.

“한 번에 덤벼라! 한 번에!”

거베라 단장은 호기롭게 소리치며 발을 굴렀다.

바닥이 통째로 들썩이는 바람에 토모의 자세가 무너졌다.

그녀의 머리를 노리고 휘둘러지는 도끼를 체닐린과 프렌다가 동시에 받아쳤다.

어이없게도 그녀들의 검 두 자루는 동시에 박살이 나고 말았다.

스승과 제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납작 엎드렸다.

도끼가 살벌하게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세리야는 급히 동혈의 메이드들을 모아서 거베라 단장에서 마력창을 날렸다.

베티아는 자정의 여명 단원들과 함께 돌아가며 그의 발목을 노렸다.

그 틈을 타서 체닐린과 프렌다는 토모를 끌고 나왔다.

“이 벌레 같은 계집들이...”

거베라 단장은 휙휙 도끼를 휘둘러 적여우 기사를 쳐죽이는 것으로 앙갚음을 했다.

하지만 다섯 명의 여자들이 손을 맞추며 견제하자, 다시 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연계가 훌륭하군.”

페튜니아 단장은 싸움에 가세하지 않고 판세를 지그시 지켜보았다.

거베라 단장이 맹렬하게 견제 당하는 것은, 그의 뒤를 받쳐줄 기사들이 악착같이 달려드는 레시아르 측 방어자들의 기세에 눌려 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전력만으로 비교하자면 진작 밀어냈겠지만 마지막 방에 몰린 이들은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검을 휘둘렀다.

이런 난전 속에서는 훈련도보다도 기세가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 기세를 휘어잡을 수단이라면...

페튜니아 단장은 고민하다가 뒤에 선 남자에게 속삭였다.

“쏘즈 공께서 나서주셔야겠습니다.”

갑주를 입고 있던 남자는 마스크를 살짝 내렸다.

그 아래 드러난 얼굴에는 상흔 하나 없이 말끔했다.

“레시아르 백작이 돌아오면 어떡합니까?”

“그러니 그가 돌아오기 전에 싸움을 끝내야지요.”

“그와 맞서라고 나를 데려온 것이 아니었습니까? 레시아르 백작과 맞서려면 마력을 아껴야지요.”

“부탁드립니다. 쏘즈 공.”

페튜니아 단장이 고개를 숙이자, 쏘즈는 혀를 차면서도 건틀렛을 벗어 던졌다.

맨살이 드러난 두 손에서 마력이 휘몰아쳤다.

방 안쪽에서 애써 눈을 감고 명상하던 화리메가 빽 소리를 질렀다.

“종군마법사잖아!”

“누, 누가 말입니까?”

“저 남자 말이야! 이런...!”

그녀는 급히 황금방패를 만들어서 레시아르측 방어자들을 크게 둘러쌌다.

찰나의 간격으로 가시나무 넝쿨이 황금방패에 부딪쳤다.

금속을 두들기는 소리가 소나기처럼 울렸다.

가시나무 넝쿨은 쏘즈가 손을 휘두를 때마다 채찍처럼 움직여 황금방패를 두들겼다.

“오래 못 버텨!”

이미 아네모네 기사단을 상대로 마력을 소진한 화리메로서는 쌩쌩한 종군마법사를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황금방패가 무너지면, 마법사는 무차별적으로 레시아르의 기사들을 죽일 것이다.

어떻게든 마법사를 먼저 참수해야 했다.

“내가 가겠어요.”

이데트가 작심하고 나섰다.

“안 됩니다. 아가씨가 사로잡히면 다 끝납니다.”

타라가 바로 말렸고, 이오시스와 메이드들도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당할 수는 없잖아요.”

“그럼... 제가 갈게요.”

아마트리체가 머리를 질끈 묶고 말했다.

타라는 망설였지만, 금혈인 그녀만한 전력을 묵힐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시다면, 제가 모시겠습니다.”

타라는 아마트리체와 함께 나갈 기사로 헬무트, 미장센을 뽑았다.

속전속결,소수로 단숨에 치고 나가서 마법사를 참수하고 와야 한다.

이데트는 애써 씩씩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무운을 빌었다.

“내가 그대들을 엄호하도록 하겠어요. 조심히 다녀오도록 해요.”

“감사합니다, 아가씨. 이오시스님. 뒤는 맡기겠습니다.”

타라는 고개인사를 하고는 단숨에 황금방패를 뛰어넘었다.

그녀의 뒤를 아마트리체와 두 기사가 따랐다.

기다렸다는 듯 마력창이 날아왔다.

“무례한 놈들!”

아마트리체는 비단 장갑을 벗어던지며 수십 개의 마력창을 마주 쏘았다.

금혈이 만들어낸 순도 높은 마력창에, 적들이 쏜 마력창은 산산조각 나서 깨어졌다.

“가요!”

그녀의 외침소리와 동시에 타라는 가시나무를 조종하는 남자를 향해 달렸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