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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132화 (132/166)

〈 132화 〉 레시아르 저택 방어전

* * *

헬무트와 미장센이 좌우에서 달리며 타라를 지켰다.

이데트가 멀리서 엄호하고, 아마트리체가 퇴로를 지켰다.

금혈의 두 여인들이 동시에 수백 개의 마력창을 쏘아내자, 중앙의 기사들도 쉽게 접근하지는 못했다.

타라와 두 기사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며 달렸다.

그 기세 때문인지 중앙의 기사들은 주춤주춤 물러났다.

이제 적 마법사가 바로 지척에 있었다.

타라는 멀리 뛰면서 검 끝을 내질렀다.

“걸렸군.”

페튜니아 단장이 타라의 검을 끌어 쳤다.

텅!

타라는 빙그르르 돌다가 간신히 착지했다.

그녀가 떨어지길 기다리던 기사들이 한 번에 창칼을 내질렀다.

헬무트가 검무를 추면서 날붙이를 걷어냈다.

타라는 얼떨결에 감사를 표했다.

“고... 고마...”

“조심하십시오!”

미장센이 크게 외치며 검을 올려쳤다.

타라의 어깨를 노리고 내려쳐지던 검이 비스듬하게 궤도를 틀었다.

페튜니아 단장은 감탄하며 검을 거두었다.

“젊은데 실력이 제법이군. 누구에게 배웠나?”

“고난과 비참함에게.”

“허…….”

헛웃음을 삼키는 페튜니아에게, 미장센은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헬무트는 기사들을 견제하기 위해 빙빙 돌며 검을 휘둘렀고, 타라는 이 틈을 타서 마법사를 향해 다시 돌진했다.

쿵!

“... 큭...”

그녀의 발 앞에 도끼가 찍혔다.

나뭇조각이 튀어서 타라의 허벅지를 파고들었다.

“거베라 단장...”

일대일로는 무승부조차 기대할 수 없는 강적이다.

하지만 도움을 청할 이는 없다.

이데트나 아마트리체는 기사들이 몰려들지 않도록 마력창을 쏘아내는 것만으로 이미 탈진 직전까지 가 있으니.

결국 타라는 혼자서 거베라 단장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검과 도끼가 맞붙으며 불똥이 튀었다.

후방에서도 상황은 악화일로였다.

화리메는 진땀을 빼며 황금방패를 유지하려 했지만, 가시나무 넝쿨은 어마어마한 압력으로 방패를 짜부러트리고 있었다.

이오시스는 안절부절 못하며 상황을 살폈다.

“화리메 마님. 지금 방패가 무너지면 전선이 다 망가져요. 조금만 있으면 타라 부관이 마법사를 참수하고 돌아올 테니...”

“그 조금을 못 버틴다니까...!”

화리메는 이를 악물며 마력을 짜냈다.

온몸의 마력회로가 바싹 말라가고 있었다.

반대로 가시나무 넝쿨은 시시각각 무성하게 자라나며 황금방패를 얽매었다.

그 압력은 고스란히 화리메에게 전달되었다.

“더는... 안 돼...! 카학...!”

화리메는 울컥 피를 토하며 앞으로 쓰러졌다.

콰지직...

황금방패에 벌어진 균열은 이내 굵은 선으로 변했고, 결국은 파편이 되고 말았다.

카캉캉!

황금방패가 무너지자, 가시나무 넝쿨이 채찍처럼 레시아르 측 대열을 휩쓸었다.

맨 앞에 서 있던 기사들은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제 진형을 유지한 채 싸우면 마법사에게 몰살 당할 뿐이다.

이오시스는 결국 난전을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붙어라!”

백여우와 적여우 기사들은 마구 달려서 적 진영 안으로 파고들었다.

또다시 무지막지한 살육전이 펼쳐졌다.

“아아아아아아악!”

마티란 자작은 난산의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죽어가는 기사들의 단말마가 묻힐 정도였다.

침대 안도 침대 밖과 마찬가지로 생지옥이었다.

시트지가 마티란 자작의 피로 물들어서 다시 갈아야 했다.

산파를 돕던 개 수인 코코는 지독한 피 냄새에 기절하고 말았다.

메이드 유리는 그녀를 침대 아래에 눕히고, 달달 떠는 데이지를 그 옆에 앉혔다.

“백작님... 제발... 저희를 구해주세요...”

유리는 입 속으로 이미 수백 번도 더한 기도를 올렸다.

창문 너머로는 해가 지고 있었지만, 레시아르 백작이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체닐린도 검을 휘두르며 저도 모르게 그를 찾았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냐...”

자신이 이렇게 간절하게 그 남자를 찾게 될 줄은 몰랐다.

능글맞고 음흉하기 짝이 없지만 내 편이면 누구보다 든든했는데.

잠깐 다른 생각에 빠진 사이, 적 기사가 검을 쳐내고 몸을 붙여왔다.

그 눈동자에서 잠깐 음욕이 스친 것을 체닐린은 놓치지 않았다.

“멍청하긴.”

상대를 죽이는 게 아깝다고 생각하는 순간, 검은 날카로움을 잃는다.

체닐린은 둔한 검을 어깨로 받아내고 그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었다.

다음 적을 찾아 고개를 돌리는데, 문뜩 프렌다와 토모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들은 작은 체구를 이용해 시체들 사이에 숨어있었다.

“프렌다. 저기까지만 기어가면 도망칠 수 있을 거야. 지금 가자.”

토모는 프렌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프렌다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망설였다.

토모는 다시 한 번 더 속삭였다.

“왜 그래? 판세가 더 기울면 도망가기도 힘들어져. 어서 가야 해.”

“그렇지만...”

“정이라도 든 거야? 이 저택에?”

프렌다는 고개를 저었다.

이 저택에 정이 들 이유는 없었다.

그렇지만 단 한 가지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스승님이...”

“스승님?”

감히 스승님이라고 부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노예 출신인 자신에게 직접 검을 가르쳐주신 고마운 분이었다.

검이라도 있었기에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프렌다는 고개를 들어 체닐린을 찾다가,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체닐린은 대충 상황을 이해하고 입술로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가라. 너희는 할 만큼 했으니.”

프렌다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친구를 저버리는 경험은 한 번이면 충분했다.

그녀는 검을 쥐고 일어났다.

토모도 한숨을 쉬고 따라 일어나서 단검을 붙잡았다.

“내가 아는 프렌다는 순 겁쟁이였는데.”

“겁내서 도망치는 게 더 괴롭다는 걸 알았으니까.”

“... 알았어. 함께 해줄게.”

“고마워, 토모. 내 친구.”

두 친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고는 피와 살점이 튀는 지옥으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

그 모습을 이데트도 지켜보고 있었다.

“세리야.”

“네, 아가씨.”

“저 아이들은?”

“백작님께서 들여오신 노예들입니다.”

“싸움이 끝나면 내가 데려가고 싶어.”

“아가씨께서 청하신다면 백작님께서도 당연히 들어주시겠지요.”

“저 아이들을 데려가기 위해서라도 노력해야겠네.”

이데트는 다시 팔을 들어 마력창을 만들어냈다.

기사를 견제하기 위한 게 아니라 마법사에 대적하기 위한 것 인만큼, 그 크기와 마력량 모두 막대했다.

가시나무 넝쿨이 그녀를 노리고 날아왔다.

이데트는 전력으로 마력창을 내질렀다.

거대한 마력이 서로 맞붙으며 사방으로 충격파를 뿜어냈다.

투쿵!

쿵!

투쿵!

화려한 마력 싸움이 벌어지는 사이, 베티아는 간신히 타라를 레시아르 측 벽면으로 끌어왔다.

그녀의 아름다운 백발은 혈육이 덕지덕지 묻어서 걸레짝처럼 보였다.

그나마 팔다리 온전하게 빼온 것이 천운이었다.

이오시스가 급히 그녀들 쪽으로 달려왔다.

“베티아! 부관님은?”

“큰... 상처를... 입으셨... 습니다...”

목숨은 붙어있지만, 당장 치료가 필요했다.

이오시스는 타라를 메이드들에게 맡기고 전장을 둘러보았다.

헬무트와 미장센은 보이지도 않았다.

사로잡히거나 죽었으리라.

후위를 지키던 아마트리체라도 겨우 몸을 빼친 게 다행일까.

“하아아…….”

쓸 수 있는 패는 전부 다 썼다.

신무기도 썼고, 함정도 팠고, 지원군도 불렀고, 기책도 냈다.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이오시스는 뒤로 물러나며 울분을 삼켰다.

싸움의 균형은 점점 더 일방적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평균적으로 마력량이 더 적은 레시아르 측 기사들이 더 먼저 마력을 소진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검술과 체술만으로 마력을 비축한 중앙의 기사들을 상대해야 했다.

검이 잘려나가고, 갑옷이 부서졌다.

피가 흘러 바닥에 흥건하게 넘쳤고 주인 없는 팔다리가 발에 채였다.

하지만 모두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해가 지면 백작님이 오십니다!”

“해가 지면 백작님이 오신다!”

정말로 그럴지 아닐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믿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

창문 너머로는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마티란 자작의 침대가 창문 바로 옆까지 옮겨갔다.

그리고 남은 방어자들은 그 침대를 겹겹이 둘러싼 채 포위 당해 있었다.

하지만 중앙의 기사들도 지치고 힘들기는 마찬가지.

그들은 헐떡이며 레시아르 측 방어자들을 노려보았다.

잠깐의 소강상태.

거친 숨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먼저 움직이는 순간 다시 피 튀기는 살육전이 재개될 것이었다.

방어자들은 제발 이 시간이 영원하기를 빌었다.

하지만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지금이 바로 달콤한 과실을 취할 때였다.

"이제 끝을 내자! 이 지긋지긋한 놈들!"

거베라 단장이 육중한 발을 디디며 도끼 자루를 고쳐 잡았다.

그 뒤로 중앙의 기사들이 피로 얼룩진 검을 세운 채 다가오기 시작했다.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낙담과 좌절감이 방어자들의 얼굴에 그늘로 졌다.

“백작님이 오신다! 바이스, 레시아르가... 레시아르의 탕아가 온다!”

체닐린은 피를 토하는 목소리로 내질렀다.

사기를 올리기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부터가 그 호색한을 미칠 듯이 보고 싶었다.

그 순간이었다.

눈이 감길 정도로 환한 빛이 창문으로 쏟아져 내려왔다.

끼루루루룩­

이어서, 괴조 고타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바이스...!”

체닐린은 힘이 풀려서 앞으로 쓰러질 뻔했다.

한 남자가 열린 창문으로 훌쩍 뛰어내려서 그녀를 받쳐주었다.

“체닐린. 기다렸어?”

“... 하아...”

체닐린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혼절했다.

안심해서 기절해버린 것이었다.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자신을 구세주라도 되는 양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중앙의 기사들은 반대로 그를 악마처럼 두려워하고 있었다.

“일단은...”

바이스 레시아르는 대열을 훑어보다가 마법사를 발견하고 그를 가리켰다.

“너부터 죽어.”

화염이 가시나무 넝쿨의 마법사를 휘감았다.

"아아아악...!"

“그리고 너랑, 너, 그리고 너희들 내 저택에 발을 들인 도둑놈들 전부.”

"카아아아악!!!"

화염은 거베라 단장과 페튜니아 단장, 그리고 기사단원들을 모두 휘감았다.

비명소리를 장작 삼아서 불길은 더 거세게 타올랐다.

“다 죽여라!”

어느새 창문으로 뛰어내린 파샨이, 여우 꼬리를 빳빳하게 치켜세운 채 맨 앞에서 달려갔다.

멍하니 서있던 백여우 기사들이 먼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적여우 기사들이 뒤를 이었고, 나중에는 메이드들까지 검을 주워서 달려 나갔다.

"죽어! 이 나쁜 놈들!"

"하아아악!"

"백작님의 불맛이 어떠냐, 이 놈들아!"

"끄르르륵..."

"죽어! 죽어! 죽어!"

"윽... 윽... 윽..."

산 채로 불타는 적들은 검을 세 자루씩 박아 넣어야 간신히 비명 소리를 그쳤다.

죽음이 오히려 자비로운 처분이었다.

하지만 이틀 내내 적들에게 시달린 방어자들은 어떻게든 제 손으로 그들의 목을 치고, 배를 가르고 싶어했다.

한 차례 처형식이 몰아치고.

이오시스는 애써 침착한 말투로 보고를 올렸다.

"백작님. 거베라 단장과 페튜니아 단장을 잡아왔어요."

"그래? 그런데 타라는 어디 있지?"

"거베라 단장과 결투를 벌이다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거베라 단장이란 놈이 내 부하들을 많이 상하게 했다면서?"

기사들은 너나할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끼를 마구 휘둘러 동료들을 참살한 거베라 단장에 대한 분노는 컸다.

"중앙의 기사단장이면 남작 작위 정도는 있을 테니까 명예로운 포로로 대해야겠지만..."

"백작님...!"

"그리 보챌 것 없어. 이 놈들이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내 저택에 침노해서 여자들을 잡으려 하고 부하들을 죽였으니, 귀족이 아니라 도적이나 다름 없지. 도적으로 대하도록."

레시아르 백작은 너그러이 가혹행위를 허락했다.

기사들은 기뻐하며 거베라 단장을 둘러쌌다.

거베라 단장은 자신의 몸이 튼튼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저주하며 천천히 죽어갔다.

페튜니아 단장도 공포에 떨면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거베라 기사단과 페튜니아 기사단은 저택 안에서 소멸했다.

정원에서 대기하던 아네모네 기사단의 잔당만이 간신히 아티아를 탈출할 수 있었지만, 끝내 왕도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중앙은 세 개의 기사단을 소모하고서도 끝내 인질을 잡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제는 복수의 시간이 돌아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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