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133화 (133/166)

〈 133화 〉 저택 안과 밖의 자유

* * *

아기를 처음 본 건 아니었다.

다른 집의 아기들은 물론이고, 내 피를 이어받은 아기들도 몇 번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세리야가 내게서 은근히 떼어놓았지.

메이드 소생의 아이들에게 정을 깊이 붙이면 안 된다는 거였다.

그거야 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이지만, 그렇게 쉽게 정을 붙일 리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모르겠다.

그 아이들도 이렇게 계속 붙어있었다면 정이 들었을지도.

나는 아기를 위로 아래로 얼렀다.

“브아브아.”

아기는 통통한 팔다리를 버둥거리면서 옹알이를 했다.

뉘 집 자식인지 참 귀엽다.

마티란 자작, 이제는 루이사로 부르는 내 여자가 흐뭇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루이즈도 백작님을 좋아하네요.”

“아빠를 알아보는 걸까.”

“물론이에요.”

“내가 좀 늦었지?”

루이사는 대답 대신 눈물을 훔쳤다.

꼬박 이틀이 걸린 난산이라고 했다.

그것만도 지옥 같은데, 저택 방어전 와중에 그런 고통을 겪었으니.

나는 루이사의 어깨를 쓰다듬어주었다.

“고생했어.”

“이제 가시려나요?”

“더 있다가는 내 복수심이 무뎌질 것 같아서.”

오스트 공작과 합류할 것도 생각해야 한다.

루이사는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 옆에 앉아 있던 이데트 누님이 내게 두 손을 내밀었다.

나는 누님에게 루이즈를 넘겨주었다.

“귀엽구나. 참으로 귀여워.”

누님은 조카의 귀여움에 쏙 빠져서 입가를 올렸다.

그 모습을 세리야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한 때는 정말 어찌되나 싶었습니다만...”

“마티란 자작께서도 무사하고, 귀여운 조카도 무사하니 다행이지.”

누님은 루이즈를 능숙하게 재우고는 품에 꼭 껴안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로 말했다.

“어서 다녀오렴.”

“이번에는 말리지 않으십니까?”

“루이즈가 무사히 태어난 건 다행이지만, 죽은 아이들이 너무 많았어.”

이데트 누이, 그녀도 레시아르의 혈족이다.

내가 없는 동안 저택 방어전을 지휘한 것은 타라였지만, 책임을 지는 자는 누님이었다.

그녀의 휘하에서 기사와 메이드, 병사와 친위대원들이 죽어나갔다.

복수를 요청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른 누님들이 눈 뜨는 건 돌아와서야 보겠군요.”

“나도 시간이 걸렸으니, 그 애들도 시간이 좀 걸리겠지. 너는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려무나.”

“알겠습니다.”

나는 허리를 숙여 누님의 뺨에 키스했다.

묵묵히 서 있는 세리야에게도 키스하고, 루이사와 쌕쌕 잠든 루이즈에게도 키스했다.

“이제는 정말 모든 걸 끝내러 갑니다. 이번에 돌아오면 한동안은 아무 것도 안 하고 내 영지에서만 지낼 겁니다.”

“네 영지니 당연히 네 하고 싶은 대로 해야지. 어서 다녀오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이데트 누이는 내게 눈인사를 보냈다.

나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왔다.

저택은 한창 보수 중이라 여기저기 시끄러웠다.

겨우 잠든 루이즈가 깰지도 모르겠다.

루이사와 함께 마티란 성이나 인근의 별장이라도 보내야 하나.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집안일은 누님과 세리야가 알아서 처리하겠지.

복도에 서 있던 이오시스가 내 뒤에 따라붙었다.

부관 타라는 그녀 곁에 없었다.

“타라는 좀 더 쉬어야겠지?”

“본인은 의욕이 충만하지만, 의사들이 몇 달 간은 정양해야 할 것 같다고 해요.”

“그럼 쉬게 해야지.”

이왕이면 화리메나 아마트리체도 데려가고 싶지만, 그 둘은 저택 방어전 끝에서 마력탈진에 빠졌다.

암브로시아와 넥타르가 있으니 걱정은 없지만 전장에 세우는 건 힘들겠지.

그나마 카산드라 공주가 면사포를 쓰고 이오시스의 뒤에 붙었다.

왕가의 공주 출신인 그녀는 어느 편도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저택 안의 사람들에게 눈총을 심하게 받고 있다.

차라리 내가 전장에 데려가는 게 나을 거다.

그리고 파샨이 몇 남지 않은 친위대원들과 함께 대열의 끝을 따른다.

개중에는 아우럼 저택에서 데려온 뤼지냥 아우럼도 있었다.

저택을 나서기 직전, 세 명의 여자들이 나를 막아섰다.

체닐린과 프렌다, 그리고 토모.

“사랑스러운 내 인질과 노예들이군!”

질색하는 그녀들을 한 번에 끌어안아 키스를 해주었다.

다 같이 질색하지만 태도가 조금씩은 다르다.

체닐린은 싫으면서 좋은 척, 프렌다는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눈썹만 찡그리고, 토모는 정말로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토모. 내가 좋아서 돌아왔으면서 그렇게 질색할 것까지 있나?”

“저는 백작님이 좋아서 돌아온 게 아닙니다.”

토모가 당돌하게 나서자, 파샨이 발끈해서 털을 세웠다.

하지만 나는 뒤로 손을 들어서 파샨을 제지했다.

토모가 저택 방어전에서 꽤 큰 기여를 해줬다는 걸 들었기 때문이다.

“충성심으로 행한 일은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충성스러웠으니까 대가를 내어줘야지. 뭘 원해서 돌아왔나?”

“프렌다와 저를 풀어주세요.”

“그건 안 되겠는데.”

“그럼 이만 골드를 주세요. 제가 돌아와서 살린 목숨들이 합해서 이만 골드는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안 된다고 말하면 내가 좀스러운 놈이 되겠지.

제 친구인 프렌다보다 백 배는 영특한 여자야.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금화를 원한다면 주지. 이만 골드쯤이야.”

“그 이만 골드로 저와 프렌다의 자유를 사겠습니다.”

“그걸 내가 허락...”

허락... 하기로 했다.

토모를 정오의 그림자에 심으면서 약속한 말이었지.

워낙 다사다난해서 잊고 있었는데.

여기서 내가 약속을 모른척해도 토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하지만 공을 세운 건 사실이니까, 괴롭히는 건 그만두도록 할까.

예전 같으면 절대 그러지 않았겠지만.

내 아이를 보고 나와서 나도 물러진 걸지도 모르지.

“내가 허락한다고 하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프렌다와 함께 떠나고싶지만... 프렌다가 저택에 남아있는 걸 원하니까 당분간은 남을 생각입니다.”

“그래?”

“그 대신 자유로운 몸으로 고용해주세요. 저희의 몸을 건들지 않는 조건으로.”

“그거야 어려울 거 없지.”

나는 뒤로 손을 내밀었다.

누군가가 종이와 잉크 적신 깃펜을 공손히 내밀었다.

글씨를 휘갈겨 적었다.

­ 프렌다와 토모는 내 저택에서 자유인임을 보장한다.

­ 바이스 레시아르 백작.

그렇게 적고, 종이를 토모에게 넘겨주었다.

토모는 띄엄띄엄 글자를 읽고는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체닐린은 눈살을 찌푸리며 내 바로 뒤로 다가와서 속삭였다.

“저택 안에서는 자유인이라니. 저택 밖에서는 어떻게 되는 건가?”

“그건 저희들이 알아서 해야지.”

“결국은 놓지 않겠다는 거 아닌가?”

“맘 내키면 언젠가는 놓아줄 지도. 아무튼, 체닐린 너도 저택을 지켜줘서 고맙다.”

“... 흥.”

체닐린은 코웃음을 치면서도 내 뒤를 졸졸 따라온다.

저택을 나서자, 기사들이 이열로 쭉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끝까지 항전한 백여우, 적여우 기사들의 수는 적다.

헬무트의 모습은 보이는데, 미장센은...

“기사 미장센은 명예롭게 전사했어요. 백작님.”

이오시스가 속삭여주었다.

결국 죽었나.

그가 이목을 끌어준 덕분에 베티아가 타라를 무사히 빼내올 수 있었다고 한다.

정원에 서서 나를 배웅하는 메이드들 중에서 오페이아가 눈에 띈다.

애써 울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이오시스가 내 표정을 읽고 눈치 빠르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나는 내가 놀랄 정도로 꽤 고민했다.

오페이아는 좋은 여자지.

하지만 미장센의 충성에는 대가를 보상해야 한다.

프렌다와 토모에게 저택 안에서의 자유를 주었다면, 그녀에게는 저택 밖에서의 자유를 주어야 할지도 모르겠군.

“그, 예전에 유리가 지냈던 수녀원 말이야. 거기 지내기에 어떤가?”

“한적하고 좋은 곳이지요.”

“그럼 오페이아에게 선택하게 해. 저택에 남을 건지, 수녀원으로 갈 건지. 미장센의 유해는 그녀가 수습해도 좋다고 전하고.”

“예. 백작님.”

이오시스는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저택을 재건하려면 그녀를 아티아에 남길 필요가 있으니.

나는 기사와 투척병, 그리고 날랜 보병들만 이끌고 출병했다.

주도 아티아 인근에서 가신과 주변 영주들이 군세를 이끌고 합류해왔다.

이들의 일부는 저택 방어전에 가세했지만 패주했고, 또 일부는 아예저택까지 오지도 못했다.

결국 이들은 저택 방어전을 돕지 못한 것에 사죄를 표하며 선물을 바쳐 올렸다.

방어전에 가세하지 못한 거야 이해한다.

중앙에서 기동력이 월등한 기사단만 동원해서 실행한 참수 작전이었으니까.

저택은 박살이 났지만 실제로는 이틀 만에 끝난 혈전이었다.

멀리 떨어진 이들은 전투가 끝난 후에야 전투가 벌어졌다는 걸 알았겠지.

그래도 선물은 다 받아뒀다.

저택을 재건하려면 금화가 또 무지막지하게 들 테니까.

행군길에 깃발은 점점 불어났다.

파티스트롬 공작이 보낸 사향노루 기사단과, 켈자르 출신의 마력병들을 이끈 마리안도 합류했다.

오스트 공작과 만나기로 한 곳은 토캄 남작령.

두 달이라는 기한보다는 넉넉히 도착하는 게 좋겠지.

물길이 뭍길보다 빠른 거야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항구도시 헤시아스로 향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