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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134화 (134/166)

〈 134화 〉 합류

* * *

헤시아스 남작은 죽을 상이었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병사들을 데려왔냐는 무언의 항의였다.

내가 병사들을 풀어놓으면 항구도시가 개판이 되기 때문에 그로서는 정말 죽을 맛이기는 할 것이다.

“그렇게 싫어할 필요 없네. 배만 징발이 되면 바로 출발할 터이니.”

“싫어하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헤헤...”

“아버지는 요즘도 건강히 잘 지내시나?”

“물론입니다. 절도(?)의 저택에 틀어박혀서 도통 나오시질 않지만.”

그거면 됐다.

나는 몇 마디 덕담을 남기고 헤시아스 남작을 돌려보냈다.

그는 이번에도 상당한 액수의 군자금을 금화로 바치고 물러났다.

항구는 상당히 부산스러웠다.

선장은 급히 선원들을 모으고, 선원들은 짐을 부리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배가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모인 군병들을 다 수송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다.

미리 징발령을 내려두긴 했지만, 그렇다고 선주들이 순순히 그 명령에 따를 리는 없으니.

내가 도착하기 전에 징발을 피해 서둘러 출항한 것이다.

“불충한 놈들입니다!”

파샨은 나무통을 걷어차며 씩씩거렸다.

“이해는 가. 이득도 안 나는 병력 수송에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기는 싫겠지.”

“이 항구가 도련님의 직할령이었다면 다들 먼저 배를 내왔을 겁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항구도시를 발전시켜 온 헤시아스 남작의 수완도 무시할 수는 없다.

괜히 황금 알을 낳는 오리의 배를 가를 필요는 없지.

“징발을 피해 나갔다고는 해도 멀리 가진 않았을 거야. 근처 포구나 섬에 몰래 정박해있겠지.”

“찾아올까요?”

“그럴 필요 있나. 스스로 오게 하면 되지.”

나는 사면령과 함께 전쟁채권을 선주들에게 우선적으로 판다는 통지문을 돌리게 했다.

뱃삯 대신인 셈인데, 돈 냄새를 맡은 배들이 꾸역꾸역 헤시아스 항구로 돌아왔다.

“놀랍군요.”

마리안은 배로 가득 찬 항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뭐가?”

“누구보다 이문에 밝은 상인들이 전쟁채권을 사려고 모여들었다는 건... 이들이 백작님의 승전을 기대하고 있다는 게 아니겠어요?”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나 다 알 법한 사실 아닌가.”

“그렇지만 중앙은...”

“친중앙파 귀족들을 잃었고, 정오의 그림자를 잃었고, 세 개의 기사단을 잃었지. 이제 그 놈들이 가진 게 뭐야?”

마리안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서운 사람.”

“내가 혼자서 한 일은 아니야.”

“하지만 당신이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일이지요.”

“그래서 마리안도 이렇게 나를 찾아 온 거 아닌가?”

마리안은 나를 노려보다가, 그 뒤에 애매한 표정으로 선 체닐린을 보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체닐린도 어색한지 작게 헛기침을 했다.

마리안이 켈자르의 마력병을 이끌고 내 진영에 찾아온 이유도, 저 상인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녀도 내 승리를 점치고 있는 거지.

판세가 기운 판이지만, 켈자르는 더 올릴 패가 없다.

그래서 마리안은 그녀의 몸을 스스로 올린 것이다.

나는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 읏.”

“배가 모이는대로 출항할 테니까, 오늘 밤은 술이나 한 잔 하지.”

마리안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내 손을 떨쳐내지도 않았다.

#

즐거운 밤을 며칠 정도 느긋하게 보냈다.

그 사이 배는 충분히 모였다.

병사와 군량을 다 싣고도 넉넉히 남을 정도였다.

“채권 이자를 너무 높이 적어줬나.”

“도련님이 왕도를 가지시게 된다면 그 정도야 푼돈일 겁니다!”

“글쎄. 파샨. 그게 전부 다 내 몫은 아닐 거야.”

오스트 공작이나 수드베리히 후작은 물론이고, 내 가신들에게도 넉넉히 나눠줘야 한다.

저택 방어전에서 기사들이 많이 죽었는데, 그들에게도 보상을 해줄 걸 생각하면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그래도 왕도는 왕국의 부가 몰리는 곳인걸요!”

“그래. 나도 좀 기대가 되긴 하네.”

어렸을 적에 어머니 손을 잡고 한 번 갔던가.

기억은 애매하지만, 왕도의 부유함은 어릴 적의 내게도 놀라웠다.

도로는 반질반질한 반석으로 포장되어 있고, 아카데미와 교회는 수도 어디서든 그 장관이 보였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쳐났고 그들의 지갑 안에는 금화가 굴러다녔다.

이제부터 그걸 손에 넣으려 가는 거지.

그 정도면 지금까지 굴러온 보상은 될 거다.

왕가의 미녀들도 얻을 수 있으면 좋을 거고.

나는 뱃머리에 발을 딛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파샨, 체닐린, 헬무트, 그리고 저쪽에서 마리안과 토루만 기사단장도 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출항해라.”

나는 하늘 위로 불길을 뿜어 올렸다.

일직선으로 날아오른 화염은 구름을 뚫고 폭발하는 화산처럼 화려하게 터졌다.

병사들은 함성을 내질렀고, 선단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차례대로 항구를 빠져나갔다.

나는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

선단은 토캄 남작령 인근의 항구에서 내렸다.

거기서부터는 토캄 남작의 성까지는 도보로 행군해서 나흘 정도가 걸렸다.

너른 초원길에 도로가 잘 깔려 있어서 행군은 어렵지 않았다.

토캄 남작령은 내가 마법사 게임으로 따먹은 곳이다.

대귀족들의 여흥으로 운명이 정해졌다는 게 고약하긴 하지만, 어쨌거나 친중앙파인 토캄 남작이 그 목숨 부지하고 있는 것도 내 덕분이다.

그래서 내가 대놓고 토캄 남작부인의 풍만한 몸을 주물러대도 뭐라 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욕구불만에 빠져 있었다.

여체를 주무르면서도 이렇게 집중이 안 되기는 처음이었다.

약속한 기일이 거의 다 되어 가는데도 오스트 공작이 나타날 낌새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마 내 뒤통수를 후려치려는 건 아니겠지?

밀약과 배신은 다키아 왕가와 대귀족들의 유구한 전통이니까 가능성이 아주 없는 얘기는 아니다.

아니. 그럴 이유가 없지.

주머니까지 탈탈 중앙이 이제 오스트 공작에게 내어줄 수 있는 건 왕관 뿐이다.

왕관을 내어주는 건 전부 내어주는 거고.

중앙에서 오스트 공작을 회유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초조함을 달래며 여자들을 불렀다.

하지만 불시에 대비해서 마력을 아껴야하기 때문에 마음껏 여자를 안을 수도 없었다.

기껏해야 하루에 한 번 정도.

그래도 괜히 부하들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이느니, 평소처럼 여자를 방으로 불러들이는 게 나았다.

불안한 시간들이 흘러갔다.

그러나 오스트 공작은 약속 기일을 결국 넘겼다.

나는 고민하다가 파샨을 불렀다.

“공작가로 보낸 전령들은 아직 안 돌아왔지?”

“예. 도련님. 빠른 말을 타고 갔지만 아직 돌아오려면 한참 걸릴 겁니다.”

“병사들 사기는 어때?”

“병사들이야 약속기일을 모르니까 동요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슬슬 군기가 느슨해지고 있습니다.”

“당장 군기를 잡을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언제든 이틀 이내로 출병할 수 있도록 준비해놔.”

파샨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나가는데, 엇갈리듯 토루만 기사단장이 달려 들어왔다.

“백작님!”

“무슨 일인가?”

“남쪽입니다! 남쪽에서 대군세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남부라면 수드베리히 후작의 영역이다.

여기 토캄 남작령으로 집결지를 정한 게 그를 압박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는데.

오스트 공작은 아직 오지 않았고, 수드베리히 후작이 대군세를 끌고 온다고…….

“도련님!”

“침착해, 파샨. 일단은 상황부터 파악해야 해.”

“제가 가서 보고 올까요?”

“아니. 전군에 전투대기 명령을 알리고 언제라도 전개할 수 있도록 해. 내가 직접 나가서 보고 오겠다.”

“하지만...”

“어서.”

파샨은 망설이다가 내 채근을 듣고서야 방을 나섰다.

나는 잠시 기다렸다가 가신들과 함께 나왔다.

토캄 남작령은 일대가 평탄한 초원지대라서 성탑에만 올라가도 상당한 거리까지 훤히 내려다보였다.

과연, 남쪽에서 어마어마한 대군세가 이쪽으로 향해오고 있었다.

기사단 깃발만 스무 개가 넘는다.

마력병단은 말할 것도 없고, 마법명가로 유명한 가문의 깃발도 바람에 높이 휘날린다.

보병의 수가 얼마나 될지는 세기도 어렵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평선을 줄줄 넘어오고 있으니.

토루만 기사단장은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백작님. 오스트 공작과 수드베리히 후작의 깃발이 섞여 있습니다.”

“그러네. 성문을 열도록 해. 내가 직접 맞이해야겠다.”

“저 자들이 혹시라도 다른 마음을 먹었다면...”

“이 작은 성에 의지해서 버틸 수는 없겠지. 걱정할 필요 없네.오스트 공작이 안 왔다면 모를까, 같이 왔다면 배신했을 가능성은 없어.”

나는 두 여우 기사단원들만 데리고 성을 나갔다.

그 모습을 본 성 밖의 군세는 행렬을 멈추었다.

곧 대열의 중앙에서 거대한 마차가 굴러 나왔다.

번쩍번쩍한 은갑을 입은 기사단이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다.

아우럼 백작의 저택에서 만난 은표범 기사단이었다.

그들의 위용은 중앙의 정예 기사단 못지 않았다.

마차 문이 열리고, 오스트 공작이 클클 웃으며 걸어 나왔다.

“겁도 없군! 내가 왕가에 매수당해 백작을 사로잡으려고 했다면 어쩌려고 이리 나왔나?”

“그러신다면 제가 반대로 공작을 사로잡아서 도망가야지요.”

은표범 기사단원들은 얼굴을 찡그렸지만, 오스트 공작은 박장대소했다.

“백작이라면 정말 그럴 것 같으니 내가 배신할 수가 없지.”

“늦으셨습니다.”

“후작 놈을 데려오느라 늦었네. 여기서 그가 합류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훨씬 빨랐을 게야.”

“전령이라도 보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동안 백작도 즐거운 시간 보냈을 거 아닌가.”

한 마디를 지지 않는 영감이다.

그래도 내 편이니 낫지.

“변경백 데어뷘터 가(家)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저택을 벗어날 수가 없겠다는군, 핑계겠지만 말이야.”

“그들 가문이야왕가의 검을 하사받아 변경백이 된 것이니 우리와는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겠지요.”

“공을 나눌 인수가 줄어들었으니 나야 좋지.”

오스트 공작은 호방하게 말했다.

“벌써부터 논공행상을 따지기는 이른 거 아닙니까.”

“백작도 한참 무얼 가져갈지 생각하고 있을 거 아닌가.”

“그건 그렇지요.”

“그럼 어서 가세. 이러다가 북부가 뒤늦게 한 발이라도 걸치면 콩 한 알이라도 나눠줘야 하니 말이야.”

오스트 공작은 대열이 토캄 남작성을 옆으로 끼고 행군하도록 지시했다.

아직 해가 지려면 한참 시간이 남아있기 때문에 왕도까지 조금이라도 더 가서 숙영지를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나도 반대할 이유가 없어서, 서부의 군세를 나란히 진군시켰다.

저 멀리 왕도를 북쪽으로 둘러싼 산맥이 희끗희끗하게 보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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