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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135화 (135/166)

〈 135화 〉 외성 공략

* * *

왕도가 가까워지자 피난민 행렬이 보였다.

가진 것 없는 자들이다.

가진 자들은 진작 떠났거나, 아니면 손에 쥔 것이 아까워 끝내 터전을 떠나지 못했을 테니.

어쨌거나 가진 것 없는 자들이라도 그 수는 상당히 많았다.

“어떻게 할까요?”

파샨이 내게 물었다.

“쓸 만한 자들이 있으면 데려 와.”

“알겠습니다!”

“아. 안 오겠다면 굳이 힘을 써서 데려올 필요는 없어. 오고 싶다는 자만 데려와.”

“네, 도련님!”

파샨은 친위대원들을 앞으로 내보냈다.

잠시 소란이 이는 게 보인다.

대들거나 싸우려는 건 아니지만, 순순히 잡혀오고 싶지도 않은 것이겠지.

겁에 질려서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이다.

결국 친위대원들이 데려온 것은 장인으로 보이는 자 서넛과 그 가족들뿐이었다.

파샨은 부하들에게 눈총을 쏘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저들이 미욱해서 아직도 눈을 덜 뜬 거지. 계속 가자.”

그 사이에도 영주군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진격 속도는 빠르지 않지만, 그 수는 주변의 모든 길을 뒤덮는다.

피난민들은 군대와 마주칠 때마다 돌아갔다.

하지만 사방이 군병들이었다.

그들은 돌아가고, 돌아가고, 돌아가다가 결국 주저앉았다.

인마가 피난민의 대열을 감싸서 흡수해버렸다.

기사들은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마력병단이 지나가고, 정예 보병이 행진한 다음에는 군기 느슨한 병사들이 몰려왔다.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가진 것 없는 자들이 보따리를 빼앗기고 희롱당하는 소리였다.

거친 병사들은 힘을 자랑하며 칼을 휘두르기도 했다.

그제야 피난민들은 비정한 현실에 눈을 떴다.

“살려주세요! 나으리! 제발 살려주세요!”

파샨은 코웃음을 쳤다.

“도련님의 자비도 거부한 놈들이...”

“친위대원들을 다시 내보내.”

“지금 말입니까?”

“그래. 오고 싶다는 자들이 있다면 다 데려와.”

파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두 번 묻지 않고 친위대원들을 다시 내보냈다.

친위대원들은 넓은 군세 사이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미 군세에 피난민들이 파묻힌 이상, 데려올 수 있는 인원은 그리 많지 않을 거다.

나는 다시 군을 몰았다.

그날 저녁, 왕도 앞에 숙영지를 건설한 후에 친위대원들이 데려온 피난민을 세어보니 그 수가 고작 백 명이었다.

백 명에 들지 못한 피난민들의 운명이 어찌 되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피난민들은 따로 천막을 치게 하고 격리시켰는데, 해질 무렵에 어디선가 한 무리의 피난민들이 더 들어왔다.

희한하게도 모두 여자인 데다가 미인이었다.

이 커다란 군세 사이에서 정확히 우리 진영을 찾아온 능력도 알아줄만 했다.

체닐린은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나 해서 말해두지만...”

“알아. 알아. 이건 함정이라기에도 너무 뻔하잖아.”

“함정이라는 걸 알면서 일부러 밟아보는 남자이기에 불안한 것이다.”

“내가 그 정도 참을성도 없어 보여?”

체닐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리고, 새로 들어온 여자들을 모두 가두도록 시켰다.

하지만 피 끓는 전장에서 미인계만큼 뻔하면서 잘 통하는 수도 없다.

나는 얼굴에까지 털이 덥수룩하게 난 수인 여자들을 불러서 춤추게 하고 애써 잠을 청했다.

#

다음날 아침.

나와 오스트 공작, 수드베리히 후작은 일단 작전 회의를 위해 모였다.

오스트 공작은 차 향기를 맡더니 내 얼굴을 보고 물었다.

“백작. 어제 잠자리가 불편했나? 눈 밑이 시꺼먼데.”

“그냥 잠을 좀 설쳤습니다.”

“뭐... 좋아. 폰세르크 국왕은 농성전을 벌일 생각인가 보더군. 성문을 모두 닫아걸고 성벽 위에 병사들을 배치해두었어.”

“왕도의 성벽은 그리 높지 않던데 말입니다.”

“그 안에 있는 슈베른 궁성은 절벽을 오르는 것 같을 게야. 외성을 함락시키고 내성을 다시 함락시켜야 하는 거지. 음흉한 폰세르크 국왕이라면 그 사이에도 병사들을 숨겨놓을 테고.”

두 번의 공성전과 그 사이의 시가전이라.

우리가 결속력이 약한 연합군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저 쪽에서는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버티려고 할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가 지치면 협상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고.

물론 그건 그들의 희망일 뿐이겠지만.

“미리 걱정할 필요 있겠습니까. 일단은 가볍게 두들겨 보지요.”

“그러세.”

오스트 공작이 동문, 수드베리히 후작이 남문, 내가 서문의 공략을 맡았다.

북쪽은 산맥이 둘러싸고 있어서 감시할 정도의 병력만 남겨두었다.

외성의 방비는 생각보다 허술해서 사나흘이면 뚫릴 게 확연해보였다.

나는 서문을 마리안에게 맡겨두고 동문과 남문을 돌아보기로 했다.

셋 방면에 포진한 공성군 중에서 가장 먼저 공격이 시작된 것은 오스트 공작이 맡은 동문 쪽이었다.

그는 휘하의 중소영주들의 군세를 먼저 성벽에 밀어붙였다.

색색의 깃발이 휘날리며 왕도를 향해 달려갔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누비이불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 누비이불을 상대해야 하는 수성군 입장에서는 그만한 공포도 없을 것이다.

파도에 돌을 던져 멈출 수 없는 것처럼 화살을 쏘고 기름을 부어도 공세를 늦출 수가 없으니.

수만 명의 보병들은 뒤에서부터 밀리고 밀려서 성벽을 향해 달려갔다.

기세에 달려간 보병들은 성벽에 머리를 처박고 쓰러지기도 했다.

“사다리! 사다리!”

병사들이 성벽에 사다리를 걸쳤다.

수성군은 어떻게든 사다리를 밀쳐내려고 했지만, 날랜 살쾡이처럼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기사 하나가 성벽 위의 보병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삭하고 허리들이 갈리며 순간적으로 피안개가 꼈다.

“사다리가 올라갔다! 쾨젠 경을 따라라!”

공성군은 기사가 버티고 있는 사이에 사다리를 타고 성벽 위로 올라갔다.

뒤늦게 수성군 쪽에서도 기사가 달려왔지만, 넓은 성벽 전체를 방어해야 하는 수성군과 공략 지점을 고를 수 있는 공성군의 차이는 확연했다.

수성군 기사가 도착한 것은 공성군 기사가 다섯도 넘게 사다리를 넘어온 이후였다.

“이런...”

기사는 몇 번 검을 맞대다가 등을 돌려 달아났다.

보병들을 방패로 도망치려 한 것이지만, 이내 그 등판에 마력창을 꿰뚫려 쓰러졌다.

동문을 방어하는 병사들의 사기가 뚝 떨어진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수성군은 이내 주춤주춤 물러나더니 너나 할 것 없이 도망쳤다.

서로 밀치고 떠미는 바람에 발을 헛디딘 병사들이 성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퍽퍽하고 머리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한 번 밀리니 그걸로 끝이었다.

기사와 마력병들이 가장 먼저 도망쳤다.

언제나 그렇듯 보병들은 고급 병종이 퇴각하기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화살 받이가 되었다.

그들이 왕가를 저주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동문은 결국 오스트 공작의 직속 부대가 나서기도 전에 열렸다.

“너무 쉽게 열리는데.”

“외성을 지킬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테니까. 왕가로서는 차라리 버티는 시늉만 내고, 병력을 온존하여 내성을 지키려고 하였을 것이다.”

내가 중얼거리자, 카산드라 공주가 대답했다.

그녀는 행군 중에는 나와 멀찍이 떨어져 있더니 왕도에 가까워오자 애가 타는지 어떻게든 내 옆에 붙어 다녔다.

내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슥 고개를 돌렸다.

이 여자도 팔자가 기구하단 말이야.

싸움을 중재하려고 한 것뿐인데 인질로 잡혀서 못 볼꼴을 당하질 않았나, 세력 사이에 끼어서 어느 쪽에서도 눈치를 받질 않나.

“어떻게 할 셈이오?”

“...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수밖에.”

“나를 암살한다든가?”

공주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호위기사가 저지른 짓은 그녀 스스로가 자신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게 했다.

저택 방어전에서 그녀가 배신하기라도 했다면 상당히 힘들어졌겠지만, 그녀는 마지막까지 중립을 지켰다.

“하지만 이제 중립이란 건 있을 수 없어. 나는 공주 전하의 아비를 칠거고, 국왕께서는 내 머리를 부수고 싶겠지.”

“알고 있다.”

알고 있다면 됐다.

나는 등을 돌렸다.

그녀의 뒤통수를 파샨과 체닐린이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두 여자의 어깨를 감싸쥐고 걸었다.

한 쪽은 어깨가 낮고 한 쪽은 높아서 삐뚤빼뚤하게 되긴 했지만.

“남문으로 가보자.”

공성장비를 가장 충실하게 갖춰온 것은 수드베리히 후작의 남부군이었다.

해운무역으로 쌓은 막대한 부를 다 털어 넣은 듯 했다.

투석기 수십 대가 한꺼번에 바위를 던지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쿠쿠쿠쿵­

투석기가 일제사격을 할 때면 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잘 연마한 석탄알은 바람을 찢으며 날아가 외성과 외벽, 그리고 그 위에 올라간 병사들을 짓뭉갰다.

남문의 적들은 칼을 한 번 맞대기도 전에 전의를 상실했다.

투석기를 부술 마법사도, 유격대로 보낼 기사단도 모두 내성 안으로 도망쳐서 웅크리고 있을 테니 사기가 높을 수가 없지.

수드베리히 후작은 성벽 한 군데가 무너질 때까지 돌탄환을 날렸다.

그리고는 무너진 곳에 기사단을 내보냄과 동시에, 다른 성벽에도 공성탑과 바퀴 달린 사다리를 붙였다.

병사들은 마구 함성을 지르며 성을 넘어갔다.

여기서도 수성군의 사기는 바닥을 쳐서, 잔뜩 어깨를 움츠린 채 창칼을 내밀다가 도리어 창칼을 맞고 하나둘씩 쓰러졌다.

무난하게 이기겠군.

나는 서문 쪽으로 돌아갔다.

마리안은 내가 지시한대로 서문을 포위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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