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 외성 공략
* * *
“백작님. 출전을 허가해주십시오.”
토루만 단장은 안절부절 못하는 기색으로 내게 말했다.
파티스트롬 공작을 대리해서 나를 따라온 그로서는, 어떻게든 전공을 세워서 돌아 가야할 테니 몸이 달아오른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이길 싸움에서 피를 흘릴 필요는 없지.
나는 헬무트를 포함한 백여우 기사단원들에게 귓속말로 지시를 하고는 성문 쪽으로 내보냈다.
헬무트는 대열의 선두에서 백기를 들고 있었다.
서문의 방어를 맡은 기사는 고민하다가 성문을 열지는 않고, 줄사다리를 내려 보냈다.
백여우 기사단원들을 줄사다리를 붙잡고 성벽 위로 올라갔다.
그들은 잠시 이야기를 하다가 적 기사를 베어버리고는, 깜짝 놀란 보병들에게 투항을 권유했다.
보병들은 잠시 눈치를 보다가 너나 할 것 없이 달아났다.
“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토루만 단장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동문과 남문의 함락 소식이 전해졌을 테니 서문만 지킨대도 의미가 없지. 병사들에게는 이제 곧 약탈이 시작될 테니, 각자의 가족들을 구하러 가라고 전한 걸세.”
“그것만으로 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의무를 저버리고 저렇게 흩어진단 말입니까?”
“국왕이 내성에 틀어박혀 숨어있는데 누가 그를 위해 싸운단 말인가? 아, 헬무트가 성문을 열었군. 이제 들어가세.”
나는 서부군을 몰아서 성문으로 당당히 입성했다.
헬무트는 내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에게 검을 주며 치하했다.
“명예롭지 못한 일을 시켜서 미안하네.”
“이것이 더 많은 이들을 구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대라면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지.”
나는 그를 내 뒤에 붙이고 성 안을 돌아보았다.
성벽에 가까이 붙은 집들은 이미 텅텅 비어있었다.
병사들은 화단을 발로 걷어차거나 창문을 깨고 그 안에 든 것을 손에 움켜쥐었다.
이 정도면 그래도 군기가 양호한 편이다.
성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이들의 욕심을 통제하는 건 어려워지겠지.
딱히 통제할 생각도 없지만, 통제하려고 해서 통제가 될지도 모르겠다.
대귀족의 군세만 이미 셋이다.
거기에 군소 영주와 방랑 기사, 용병, 의용군, 은근 슬쩍 끼어든 도적놈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지휘계통은 복잡하기 짝이 없고, 이런 상황에서 군기가 정연하기를 기대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대로에 들어서자, 역시나 먼저 입성한 남부군 병사들이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아악!”
병사 하나는 피로 번들거리는 칼을 한 손으로 쥔 채, 다른 손으로 여자의 머리채를 끌고 가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고 멈칫하더니 그대로 넙죽 엎드렸다.
그래도 눈치가 없는 놈은 아니다 싶어 손을 휘저어 보냈다.
하지만 보내고 보니 그 놈은 양반이었다.
눈이 뒤집혀서 우리에게도 칼을 들고 달려드는 놈들이 있어서, 전부 목을 베게 했다.
"미친 놈들입니다."
파샨은 죽어가는 놈의 다리를 걷어찼다.
"남부군이 서문까지 약탈하러 들어왔으니 그게 제대로 된 놈이겠어?"
"전부 죽일까요?"
"팔다리만 그어 놓으면 여기 성민들이 알아서 하겠지. 가자."
"예. 도련님."
대로를 걷다보면 집집마다 창문이 깨지고 문이 박살나있었다.
남부군 병사들은 한 번 턴 집에 다시 들어가서 먼지와 재까지 싹 다 털곤 했다.
금 목걸이를 목에 수십 개나 걸친 놈이 있는가 하면, 동전 자루를 낑낑거리며 끌고 가는 놈도 있고, 피에 미쳐서 시체를 칼로 푹푹 쑤셔대는 놈도 있었다.
외성 공략이 어렵지 않았고, 희생도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왕도를 약탈한다는 생각에 다들 눈이 뒤집어진 것이다.
예쁘게 꾸며진 부유한 집을 한 채만 털어도 평생 신세를 고칠 수 있을 테니.
가끔 기사들이 거리를 돌면서 병사들을 제지하기도 했다.
대개는 불을 지르려고 하거나 지나치게 값비싼 물건을 손에 쥔 자들이 그 대상이었다.
적당히 털어먹는 것은 기사들도 눈감아주었다.
그러다보니 약탈은 점점 더 기세를 올렸다.
병사들은 슬그머니 대열에서 빠져나가 여자들을 뒷골목으로 끌고 가거나, 남자들을 벽 앞에 꿇어앉히고 창대로 두들겨 팼다.
카산드라 공주는 분개해서 입술을 씹었다.
“백성들은 잘못이 없지 않은가!”
“내 기사들은 잘못이 있어서 죽임 당한 건가? 내 누이들은 죄가 있어서 십 년이나 배양액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이고?”
“그건...”
카산드라 공주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내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리안은 달랐다.
그녀는 당당하게 내게 요구했다.
“레시아르 백작가의 깃발을 빌려주세요.”
“성민들을 보호할 생각인가?”
“이럴 때 나선다면 레시아르 가문의 위명을 높일 수 있을 거예요.”
그거야 맞는 말이지.
하지만 맨입으로 해줄 수는 없다.
나는 입술에 검지를 톡톡 댔다.
마리안은 머뭇거렸다.
두꺼운 커튼이 드리운 방 안에서 키스하는 것과 눈이 모인 대로에서 키스하는 건 천지차이니까.
그래도 나는 자신이 있었다.
왕도를 뒤엎고 왕관을 굴리면, 내가 마리안을 정부로 한다고 해도 켈자르에서 불평을 말할 수 없을 테니.
마리안으로서도 못미더운 켈자르를 버리고 아예 레시아르로 들어오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나 마리안은 내 손을 잡아 그 손등에 키스했다.
마음대로는 되지 않는 여자야.
그게 마음에 든단 말이지.
“파샨. 깃발을 내줘.”
“예. 도련님.”
마리안은 파샨에게 깃발을 받고는 그녀 휘하의 마력병들과 함께 급히 뛰어갔다.
그들은 막 창을 내지르려는 병사들을 제지하고 곤죽이 된 성민들을 하나씩 부축해서 일으켰다.
그 모습을 잠시 보다가 다시 군을 움직이려는데, 헬무트도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백작님.”
“그대도 깃발을 원하는가?”
“예.”
“그대는 내 밑에서 선행을 베풀겠다고 했지. 좋아. 그대에게도 깃발을 내리겠다.”
헬무트도 깃발을 받아서 떠나갔다.
그를 흠모하는 백여우 기사단원들도 그를 따랐다.
백여우 기사단을 재건하는 건 어렵겠다고 생각했는데, 헬무트가 그래도 단원들을 잘 장악하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오록스 단장은 내게 무조건 충성했지만, 헬무트의 충성을 얻기 위해서는 가끔씩 그가 원하는 대로 선행을 베풀 기회를 내주어야겠지.
카산드라 공주의 표정도 조금 폈다.
그렇지만 마리안과 헬무트를 보낸 것은 바다에 민물을 조금 부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대군세가 통째로 성 안에 밀려 들어가면서, 왕도는 정말 철저하게 약탈 당했다.
지휘관들도 도저히 통제가 어렵다고 여겼는지 직속 정예부대가 아니고서는 그냥 풀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적들이 반격한다면 피해가 클 겁니다.”
파샨이 진지하게 의견을 내비쳤다.
“오스트 공작이나 수드베리히 후작도 알고 있을 거야.”
“그런데 어째서...”
“직속 부대는 잡고 있으니까. 이선부대쯤이야 털려도 상관없는 거지. 그리고 폰세르크 국왕이 그렇게 용맹한 자였다면 상황이 이렇게 흐르지도 않았을 거고.”
그 비열한 자라면 내성에서 마법사와 기사들을 꽉 붙잡고 있을 것이다.
자기 안위가 가장 중요한 놈이니.
기껏해야 마력병이나 조금 내보내고 말겠지.
나도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약탈조를 꾸려서 내보냈다.
이들은 금화 따위가 아니라 각종 문서와 미술품을 잔뜩 들고 왔다.
“지도 가져왔나?”
“예. 약탈조가 가져온 문서 중에 있습니다... 이것입니다.”
나는 펼쳐진 지도를 내려다봤다.
친위대원들은 그 위에 작은 깃발들을 올려놓았다.
오스트 공작 가문기, 수드베리히 후작 가문기, 그리고 레시아르 백작 가문기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동부군은 동문, 남부군은 남문, 서부군은 서문을 위주로 점령했다.
물론 입성이 빠른 동부군과 남부군의 영역이 조금 더 넓기는 했지만 큰 차이는 아니었다.
내성은 북문 쪽에 가까워 아직 세 깃발 모두 접근하지 못한 상태고.
사실 여기의 방비는 외성과 다르게 철통 위에 가시를 둘러놓은 것 같을 테니, 누가 먼저 가서 피를 보고 싶진 않겠지.
이 쪽의 공략은 다시 대귀족끼리 모여서 정해야 할 거고.
그 외에도 군데군데 항전하고 있는 지역 위에는 검과 창을 든 말이 올라갔다.
아카데미와 자그마한 관문 몇 곳, 그리고 저택.
"저택? 누구의 저택인가?"
"칼키움 가 저택입니다."
"잠깐. 병무대신 올드완의 가문이..."
"예. 칼키움 가입니다."
"대신들이라면 다들 내성으로 가족들을 빼돌렸을 거라 생각했는데."
"병무대신은 가문의 역사가 깃든 저택을 저버릴 수 없다고, 일가를 모아 저택을 수호하라고 명령했다고 합니다."
그런 명령을 내리는 병무대신도, 그 명령에 따르는 칼키움 가문 일족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잘 됐다.
병무대신에게 한 약속을 지킬 수 있겠어.
"여기에 마법사가 있을까?"
"칼키움 가문은 기사 가문입니다. 일족 내에 마법사는 없고, 일족 외에서 마법사를 불러오는 건..."
"불가능하겠지. 폰세르크 국왕이 전부 내성으로 모았을 테니 말이야."
나는 주변에 있는 병사들을 모아 그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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