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 칼키움 가의 저택
* * *
칼키움 가 저택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었다.
그 언덕 밑으로도 자그마한 집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전부 박살이 나버렸다.
“우리 쪽에서 약탈한 건가?”
“아닙니다. 저택 안에 있던 놈들이 나와서 부수고 돌아갔답니다.”
이유 없이 그랬을 리는 없고, 목재를 가져간 건가.
나무는 공격할 때도 필요하지만 방어할 때도 필요하니까.
저렇게 주변의 목재를 미리 선점함으로써 공격자가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을 제한하는 효과도 있겠지.
그건 저택을 지키는 녀석들이 머리를 쓸 줄 알고 배포도 두둑하다는 의미가 된다.
올드완 병무대신의 피를 반만 이어받아도 그 정도는 되겠지만.
주변 길가에는 흩어져서 약탈하려다가 도리어 당한 병사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는데, 그 수가 적지는 않았다.
이것도 아마 칼키움 가문의 자들이 벌인 짓일 것이다.
파샨은 내 옆을 쫄쫄 따라다니면서도 보고를 취합해 올렸다.
“병사들이 모여서 세 번이나 공격했는데 세 번 다 막아냈다고 합니다.”
“칼키움 가는 손꼽히는 무가(?家)니까 그럴 만도 하지.”
“왜 병무대신과 함께 왕성으로 가지 않은 걸까요?”
“글쎄. 귀족의 명예란 게 그런 거 아니겠어.”
내 저택의 치열했던 방어전을 떠올려 봐도 그렇다.
이데트 누님은 결국 저택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켜냈다.
저택은 가문의 역사가 담긴 곳인 만큼 쉽사리 버리기 어려운 것이겠지.
어쨌거나 나에게는 잘 된 일이다.
슬슬 어떻게 공략할지 저택을 둘러보고 있는데, 골목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더니 한 무리의 병사들이 뛰쳐나왔다.
그 앞에 기사와 마력병들도 있는 걸로 봐서 그냥 약탈에 눈이 돌아간 탈주병은 아닌 듯싶었다.
선두에 선 선임기사는 나를 보고 좀 놀란 눈치였다.
“레, 레시아르 백작 각하.”
“누구인가?”
“수드베리히 후작께 충성을 바치는 게젤 백작의 봉신인 치아스 자작의...”
“남부군이란 거군?”
“... 예...”
“저택을 점령하러 온 것 같은데, 먼저 해보게.”
선임기사는 내 눈치를 살폈다.
내가 일면식도 없는 그에게 저택을 넘겨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자들이 칼키움 저택을 점령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들이 먼저 나서서 여력을 빼놓으면 내가 점령하기는 좀 더 쉽겠지.
나는 너그럽게 순서를 양보했다.
선임기사는 내 관대함을 칭송하고는 데려온 병사들을 호령해서 언덕을 둘러싸게 했다.
기사가 서른 명에 마력병이 오십 정도.
보병은 적당히 고기방패로 쓸 정도로는 많았다.
영지귀족의 저택을 점령하는 건 무리겠지만 궁정귀족의 저택 정도는 노려볼만한 전력이다.
“이번에야말로 저택을 점령해야 한다! 치아스 자작께서 공훈을 기다리고 계신다!”
선임기사는 저택 정문과 후문, 그리고 담장 왼편을 향해 병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한 번에 언덕을 오르게 했다.
병사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언덕을 기어 올라갔다.
그러자 저택 안에서는 활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곡사로 쏘는 게 아니라 직사로, 그것도 기사들을 조준해서 쏘는 것이었다.
방패를 들면 되련만 선임 기사는 잰 체하며 칼로 튕겨냈다.
화살을 칼로 튕겨내는 모습에 병사들의 사기가 오른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화살은 집요하게 기사들을 노리고 쏘아졌다.
기사들은 화살을 칼로 튕겨내다가 지쳐서 결국은 마력 방어막을 만들어냈다.
소 잡는 칼로 닭 잡는 격이었다.
“바보 같은 놈들입니다.”
파샨이 투덜거렸다.
“이기는 싸움을 하고 있으니까 멍청해지는 거지.”
그러다가 발목을 붙잡히는 법이다.
그렇지만 이 저택에서 하루나 이틀 정도 지체한다고 해서 전쟁의 국면이 바뀌는 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느긋하게 지켜보기로 했다.
저들이 저택의 여력을 빼놓는 만큼 내가 수월하게 점령할 수 있을 테고.
기사들이 화살에 신경을 쓰는 동안, 병사들은 언덕 끝까지 올라갔다.
그들은 헉헉거리면서 서로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사다리를 가진 자가 없었던 것이다.
“비켜!”
결국 마력병이 여남은 정도 나서서 한 번에 마력창을 쏘았다.
정문은 우두둑하는 소리를 내며 터져버렸지만, 그 뒤에도 목재를 쌓아서 만든 바리케이드가 있었다.
그것까지 전부 부수기에는 마력병들의 마력이 부족하고, 기사들은 화살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결국 병사들은 욕설을 내뱉으면서 바리케이드 사이로 들어갔다.
먼저 나선 자들은 얼마 안 있어 창에 꿰뚫려서 덜렁거리는 시체가 되었다.
“이런...!”
기사들은 뒤늦게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저택 안에서도 칼키움 가의 적자들이 나섰다.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까지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점점 기사들이 저택 밖으로 밀려나는 것 확연해보였다.
검술이야 애초에 칼키움 가문에 비할 게 아닐 거고, 마력 방어막으로 화살을 퉁겨내느라 마력을 소모한 탓도 있을 것이다.
결국 기사들은 마구 밀려나왔다.
마력병들이 저택 앞에서 기다리다가 급히 기사들을 빼왔다.
“후퇴! 후퇴한다!”
기사들은 갑주를 덜그럭거리면서 언덕 아래로 달려갔다.
병사들은 우르르 그 뒤를 따랐지만, 도망치는 병사들의 등판에도 화살이 꽂혔다.
결국 얻은 것도 없이 애꿎은 병사들만 낭비한 것이다.
선임기사는 내 얼굴을 보기가 민망했던지 왔던 길의 반대로 도망가 버렸다.
“내 그럴 줄 알았지.”
나는 손뼉을 쳤다.
저들이 기운을 빼놓고 물러났으니 이제 우리가 취할 차례다.
“하지만 도련님. 마법은...”
“알아.”
그거야말로 소 잡는 칼로 닭 잡는 꼴이다.
게다가 칼키움 가문의 적자들은 따로 쓸 데가 있으니까 혹시라도 불에 타서 죽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매번 내가 나설 수도 없고, 이럴 때 쓰라고 영리한 부하들을 데리고 있는 거지.
“파샨. 토루만 단장. 각기 정문과 후문을 공략해라.”
“예. 도련님.”
“예. 백작 각하.”
솔직히 칼키움 저택을 점령하기에는 과잉전력이지만, 압도적인 힘으로 한 번에 몰아치는 게 희생이 적을 테니까.
토루만 단장은 날랜 기사들을 앞세워 언덕 위를 오르기 시작했다.
화살이 그들을 노리고 쏟아졌다.
기사들은 검을 휘두르거나 갑주로 받아서 화살을 튕겨냈다.
이들도 이들 나름대로 공훈이 급한 거겠지만, 그 전에 나간 녀석들에게서 뭘 배웠나 싶다.
반면 파샨은 병사들을 멀리 내보내서 방패 대신 쓸 목재를 가져오게 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현명한 선택이다.
그 사이 토루만 단장의 사향노루 기사단은 저택 후문에 도착했다.
그들은 안쪽을 확인하고는 후문 공략이 어렵다고 여겼는지 그냥 담벼락을 뚫어버렸다.
지금껏 전투 한 번 참여하지 않은 쌩쌩한 기사단 전력이 모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칼키움 가의 적자들은 어쩔 수 없이 사향노루 기사단을 막기 위해 몰려갔다.
뒤늦게 파샨도 정문에 도착했다.
이들에게도 화살이 날아왔지만, 목재를 방패삼아서 나아간 덕분에 희생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파샨은 일단 멈추었다.
그녀를 따르는 건 친위대와 백여우 기사단, 그리고 잡다한 소속의 보병뿐이었는데, 결원이 많아서 사향노루 기사단만큼의 전력이 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로 담벼락을 뚫는 건 어려울 거고, 정문 안의 바리케이드는 복잡하게 얽혀있다.
나는 파샨이 이 난관을 어떻게 타개할지 궁금했다.
파샨은 수족인 친위대원들을 부려서 병사들에게 무어라고 지시를 내렸다.
곧, 병사들은 방패 대신 들고 온 목재에 기름을 바르고 불을 붙였다.
“던져라!”
파샨의 명령이 내려지기 무섭게 갖가지 모양의 횃불들이 저택 안으로 날아들었다.
마법으로 만든 화염이 아니라서 그리 강렬하게 타오르는 건 아니지만, 농성하는 입장에서는 골치가 아플 게 틀림없었다.
결국 사향노루 기사단을 상대하던 이들도 파샨 쪽으로 정신이 쏠렸다.
불을 끄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사이에 파샨이 정문을 넘어갔고, 친위대원과 백여우 기사단도 혼란을 틈타 그 뒤를 따랐다.
앞과 뒤를 동시에 들이치는데, 아무리 칼키움 가문의 혈족이라고 해도 버텨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택은 머지않아 제압되고, 레시아르 가문 기가 올라왔다.
파샨과 토루만 단장은 서로 포로를 마구 잡아서 끌고 나왔다.
서로 말은 안 해도 자기가 더 공을 세웠다고 은근히 다투고 있었다.
전력이 더 강한 것은 토루만 단장이었지만 영리하게 싸운 건 파샨이었으니.
저택 공략에 들인 공은 비슷하다고 본다.
그런데 파샨은 병무대신의 차남과 삼남을 잡았고, 토루만 단장은 사남과 막내를 잡았다고 해서 파샨의 공을 조금 더 높게 쳐주기로 했다.
어쨌거나 저택을 지키던 자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명가라고는 해도 영지귀족이 아니라 궁정귀족이니.
나는 줄줄이 잡혀온 칼키움 가문의 적자들을 지켜보다가 파샨에게 물었다.
“올드완의 장남은 없었나?”
“장남과 장손은 대신들을 호위하는 강철의 손아귀 소속의 기사라서 슈베른 궁성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고 합니다.”
“흠...”
“그 대신 장남의 아내는 사로잡았습니다.”
“잘했어.”
병무대신은 늙었고, 그의 장남도 나이가 많았기에 장남의 아내도 단정하게 나이가 든 아줌마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건 좀 아쉬웠지만 그녀 바로 뒤에 묶여있는 여자는 꽤 젊고 아름다웠다.
“저건?”
“병무대신의 장손 며느리입니다.”
그녀는 내가 자신을 바라본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내 쪽으로 기어왔다.
“오. 목숨을 구걸하고자 하는 것이냐? 내가 미인을 죽이지 않는다는 게 왕도에까지 알려졌나 보지?”
“누가 목숨을 구걸한다고! 추잡한 역도에게 침을 뱉어주려는 것이다! 퉤!”
장손 며느리는 내게 침을 뱉으려고 했지만, 파샨이 그녀의 목을 밟아서 흙바닥 위에 침을 흘렸을 뿐이다.
그녀는 꺽꺽거리면서 흙을 쥐었지만, 손등도 칼집에 두들겨 맞고는 신음을 흘렸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손가락에 물집이 잡혀있군.”
“독한 여자입니다. 다른 여자들에게 활을 가르친 게 이 여자랍니다.”
“잠깐... 활을 쏜 게 칼키움 가 여식들이었나?”
“예, 도련님. 여식들과 며느리, 그리고 여종들까지 이 여자에게 활을 배웠다고 합니다.”
기사들까지 주춤하게 만든 활솜씨라니.
미인이라는 것에 더해서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면 수집욕이 솟는 것도 당연하다.
나는 그녀의 등허리를 깔고 앉아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요 기특한 것. 너는 내가 특히 아껴주마.”
“이... 이... 추잡한 역도 놈이...! 손 대지 마라! 손 대지 말란 말이다!”
여자는 몸을 바동거렸지만 손과 발, 손목과 발목까지 꽁꽁 묶여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활달하고 통통 튀는 게, 미끼로 쓰기에 딱 알맞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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