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 악연의 끝
* * *
폰세르크 국왕은 왕도를 통째로 약탈당하면서도 끝까지 기사단을 내보내지 않았다.
비겁한 겁쟁이라고 해도 저렇게 일관적이면 감탄이 나온다.
고급 전력을 소모하지 않고 고스란히 온존했으니, 우리 쪽에서는 골치가 아파진 것도 사실이고.
슈베린 궁성은 산맥을 끼고 건축되어 있는데다가 성벽도 세 겹이나 된다.
성탑, 해자, 관문도 수십 개에 이르니까 난공불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에 기사단과 마력병, 그리고 정예한 군사들이 몽땅 들어가 있단 말이지.
그래서 오스트 공작과 수드베리히 후작은 궁성을 포위해놓고도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저걸 어떻게 점령하지?”
“공작께서는 그래도 자주 드나드신 편 아닙니까? 어떻게 쉽게 공략할 방법이 없겠습니까?”
“잘 아니까 더 막막하단 말이야. 쥐새끼 한 마리 드나들 틈도 없단 말이지.”
오스트 공작은 내게 은근히 물었다.
“자네가 새로 개발한 무기가 유명하던데.”
“폭렬탄 말입니까? 그거 몇 개 안 됩니다.”
“그래도 쓰려고 가져온 거 아닌가.”
“지금 써도 큰 효과는 없을 텐데요.”
가지고 온 폭렬탄을 전부 다 써도 세 겹이나 되는 외성을 전부 부술 수는 없다.
그건 난전에 써야 효과가 높을 테고.
내가 고개를 젓자, 오스트 공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은 소모전인가.”
외성 공략과 시가전을 쉽게 넘긴 만큼, 이번의 싸움은 더 치열하게 되었다.
우리는 일단 병사들을 쉬게 하는 한편 공성무기를 끌고 와서 공략을 준비하기로 했다.
“슈베린 궁성은 산맥에 절묘하게 걸쳐 있어서 병사들을 투입할 곳이 한 곳 뿐이네.”
“기사라면 험지라도 돌파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좋은 생각이군. 자네 기사를 먼저 보낼 건가?”
“그건 안 되지요.”
이미 철통 같이 방비하고 있을 곳에 아까운 내 기사를 먼저 내보낼 순 없다.
그건 오스트 공작이나 수드베리히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마법사를 투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궁정 마법사의 전력은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지만, 연합군 마법사 전력보다 우세하면 우세했지 열등하지는 않을 테니까.
섣불리 마법사 카드를 내보였다가 반격이라도 당하면 대군을 추스를 수가 없게 된다.
결국 내려진 결론은 통상적인 소모전에 따른 전략이었다.
보병을 먼저 투입해서 적들을 충분히 지치게 한 후에 기사 전력을 투입한다는 것.
대귀족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슈베른 궁성을 둘러싼 포위망은 대략 완성되었다.
수십만에 달하는 인력들이 슈베른 궁성 주변의 저택과 민가를 징발하거나 부수면서 일대 소란을 일으켰다.
오스트 공작은 혀를 끌끌 차며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포위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오래 포위하고 있기는 힘들 거야. 왕도는 소비도시니까.”
“압니다. 벌써 군량을 빌리는 자들도 있더군요.”
기세만 앞서서 병사들을 많이 끌고 온 자들이 그랬다.
그런 우둔한 자들은 약탈을 해도 식량이 아니라 금붙이를 약탈했기 때문에, 벌써부터 군량 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상위귀족에게 식량을 요청하면 그걸 아주 모른 척 할 수는 없다.
이들은 왕도까지 군사를 이끌고 옴으로써 의무를 다한 것이므로, 상위귀족도 그를 돌봐야 할 의무를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포위해서 슈베른 궁성을 통째로 말려 죽이는 방법은 쓸 수 없었다.
그러다가 말라죽는 건 우리가 될 테니.
오스트 공작은 곧장 형식적인 항복 권고를 보냈고, 폰세르크 국왕은 역으로 항복 권고를 보내면서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곧장 수드베리히 후작이 이끄는 남부군이 투석기를 운용해 돌을 날렸다.
이번에는 궁성 안쪽에서도 투포환이 날아왔다.
“이런!”
슈베린 궁성 안에 거치된 투석기는 정확도가 어마어마했다.
그것들은 눈이 성벽에 달리기라도 한 듯 남부군 투석기를 하나씩 요격해서 부숴버렸다.
가끔 성벽을 넘어온 투포환이 투석기 옆이나 뒤를 때리기도 했는데, 이쪽에는 병사들이 밀집해있는 만큼 피해도 클 수밖에 없었다.
거석에 찍힌 병사들은 형체도 없이 으스러졌다.
“병사들이 동요하는군.”
“대열을 무너뜨리느니, 지금 바로 돌격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이봐, 후작. 남부군 먼저 보내지. 내 술 한 잔 살 테니.”
“그러지요.”
수드베리히 후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 보병이야 만 단위로 죽어도 그에게 그리 아까운 것은 아니었으니.
수드베리히 후작이 눈짓을 보내자, 그의 곁에 시립해있던 기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곧 남부군 진영이 물결치듯 흔들리더니 와아아 하는 함성을 내지르며 슈베른 궁성 쪽으로 달려갔다.
그 사이에도 연합군과 왕국군 사이에서 투석기 공격은 계속 되고 있었다.
가끔 투포환이 뚝 떨어져서 길을 데굴데굴 구르면, 한 줄로 서서 달리던 병사들이 통째로 사라지곤 했다.
“으으으... 이건 미친 짓이야...”
“달려! 살고 싶으면 성벽에 붙어야 한다!”
겁에 질린 병사를 선임 병사가 일으켜서 앞쪽으로 걷어찼다.
그러나 선임 병사도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목에 화살을 꿰뚫렸다.
궁성에서는 이제 화살 비를 퍼붓고 있었다.
칼키움 가 저택에서 그랬던 것처럼 날카로운 저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워낙 성벽에 몰린 병사가 많다보니 그냥 마구 쏴도 누구 하나는 화살에 맞아서 쓰러졌다.
남부군 병사들은 해자 앞에까지 간신히 도착했다.
하지만 거기서 걸친 사다리는 너무 짧아서 성벽 위까지 닿지 않았다.
허탈해하는 병사들의 머리 위로 끓는 기름과 화살이 쏟아졌다.
“아아아악!”
“후작 각하! 부디 자비를!”
“부디 퇴각을 용서해주십시오!”
남부군 병사들은 화살에 하나둘씩 쓰러지면서 외쳤다.
기사를 배치하지 않고 보병만 밀어 넣은지라 이들은 높은 성벽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수드베리히 후작은 애초부터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이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손을 흔들었다.
남부군은 결국 성벽에 사다리도 거치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러자 순번을 교체하듯 이번에는 동부군이 나섰다.
동부군은 남부군보다 대체적으로 정예한 편이었다.
이들은 낭창낭창한 대나무 사다리를 휘두르며 달려갔는데, 눈 먼 화살을 그걸로 어느 정도 튕겨낼 수 있었다.
선두로 달려간 병사들은 대나무 사다리를 해자 위에 얽거나 바로 성벽에 걸쳤다.
수성군이 사다리를 밀쳐내려고 했지만, 날랜 병사들은 잽싸게 성벽을 기어 오른 후였다.
“가장 먼저 성벽에 오른 이에게 금화 백 개! 가장 먼저 성탑에 깃발을 꽂은 자에게는 금화 천 개!”
누군가가 소리치자 성벽에 오른 동부군 병사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그 함성소리에 수성군 병사들이 잠시나마 어깨를 움츠렸고, 덕분에 동부군 병사들은 약간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어서 들어와!”
성벽을 넘어간 병사들은 적들에게 바싹 붙어 검을 휘두를 거리를 내어주지 않으면서 사다리 너머로 손을 뻗어서 아군을 끌어당겼다.
어느새 성벽 위에 올라간 이들의 수가 수십여 명이 되었다.
하지만 안쪽에서 마력병들이 일제히 마력창을 쏘면서, 밀집해 있던 동부군 병사들은 줄줄이 꿰뚫려 죽었다.
사다리는 부서졌고, 운 좋게 마력창을 피한 병사들도 모두 학살당했다.
이게 바로 일반 보병이 쓸모 없다고 천시 받는 이유였다.
바로 그 이유로 지금과 같이 초전에 적의 기운을 빼놓는 데에 쓰이는 까닭이기도 했고.
어쨌거나 그 다음은 서부군이 나서야 했다.
“보내는 시늉만 하면 안 될까?”
나는 허리를 숙여서 파샨에게 속삭였다.
파샨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다시 속삭여주었다.
“오스트 공작이나 수드베리히 후작이 만만한 자들이 아닌데... 다 알 겁니다, 도련님.”
“그렇겠지? 으후.”
국왕을 필두로 똘똘 뭉친 왕국군과 달리, 연합군의 수장은 셋이나 된다.
서로 자기네 병사가 아깝다고 조금씩 사리기 시작하면 결국 연합은 붕괴하고 말거다.
나는 결국 출정 명령을 내려야 했다.
서부군은 그래도 동부군이 차지했던 교두보까지는 다시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마력병 전대가 대응하기 전에, 곧장 사다리를 내려왔다.
수드베리히 후작이나 오스트 공작이 내게 은근히 눈치를 주었다.
“서부군은 가장 먼저 일어난 연합군 아닙니까. 잇따른 전투 때문에 병사들이 많이 상해서 숙련병이 적습니다.”
“크흠. 그렇다고는 해도 말이야...”
“제 저택에서 기사단 세 개가 갈려나갔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걸로 압니다. 솔직히 그만한 공훈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할 말이 없어지는 건 그들 쪽이었다.
수드베리히 후작은 헛기침을 하고 다시 남부군을 내보냈다.
교두보는 조금 더 늘어났다가 다시 재탈환 당했다.
동부군은 피로 젖은 영역을 조금 더 넓혔고.
그 다음은 다시 서부군, 그리고 남부군, 다시 동부군.
연합군이 돌아가면서 성벽을 공격하면서 교두보는 점차 늘어났다.
해자에는 꽤 튼튼한 가교까지 놓였다.
그 가교 바로 밑까지 시체가 쌓여서 다리가 필요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화살비를 쏟아내던 성탑은 이미 반쯤 무너졌다.
하지만 무너진 벽돌 위에도 궁수들이 올라가서 손가락이 터지도록 활줄을 당기다가 반대로 화살을 맞고 굴러떨어져 내렸다.
병사들은 양쪽에서 정말 무수하게도 죽어나갔다.
“적들이 피곤해하는군.”
오스트 공작은 그렇게 한 마디를 했을 뿐이다.
밤중에는 병사들을 다시 내보내서 시체를 치웠다.
궁성 쪽에서는 이따금 화살을 쏘거나 돌을 던지기도 했지만, 적극적으로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본격적인 공성전이 다시 시작될까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이튿날에도 소모전이 반복되었다.
병사들이 성벽의 한 면을 통째로 차지하기도 했지만, 적 기사들이 출격하면서 금세 물러났다.
하지만 보병만으로 기사 전력을 이끌어냈다는 건 적들이 꽤 소모되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셋째 날에는 드디어 기사들을 내보내기로 했다.
연합군을 통틀어 마력병들을 끌어 모으니 그 수가 일 만을 족히 헤아렸다.
이 어마어마한 수의 마력병들이 성벽을 둘러싸고 어지럽게 마력창을 쏘아 엄호사격을 하자, 적들은 감히 성벽 밖으로 고개를 내밀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사이에 남부군에서 기사들을 내보냈다.
수드베리히 후작 휘하의 정예 기사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사는 기사다.
그들은 금세 성벽 위에까지 올라갔다.
적들은 이미 어마어마한 마력창 세례에 박살이 난 후라 아군 기사를 막지는 못했다.
기사들이 성벽을 차지하고 성탑에 깃발을 꽂았다.
그들이 내지르는 함성이 내가 있는 곳까지 들렸다.
“곧 성벽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파샨도 들떠서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적들이 쉽게 첫 번째 성벽을 내어줄 것 같지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우렁찬 함성은 곧 비명소리로 끊겨버렸다.
성벽 밖에서 사다리를 걸치던 병사들은 성탑 한 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기! 저기 병무대신이다!”
반쯤 무너진 성탑 위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붕대로 얼굴을 전부 가린 자였다.
병무대신 올드완.
그는 나와의 싸움에서 아직 상처를 다 회복하지 못한 듯싶었다.
하지만 그는 붕대를 휘감은 얼굴로 무심하게 검을 휘둘러 기사들을 참했다.
기사들은 명예와 봉작을 위해서 호기롭게 그에게 달려들었지만, 늙고 다친 병무대신은 세 합 이내로 젊은 기사들의 가슴을 갈랐다.
기껏 성벽 위로 올려간 기사들은 허겁지겁 성벽 밑으로 뛰어내려야 했다.
“쯧! 다 회복하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늙은이가 여전하군, 그래.”
오스트 공작은 혀를 차며 마뜩찮은 표정을 지었다.
나와 수드베리히 후작도 골치가 아프기는 마찬가지였다.
올드완은 규격 외의 강자다.
그런 그를 잡기 위해서는 각자의 세력에서 가장 강한 기사 전력을 내보내야 하는데, 당연히 먼저 나서는 자가 가장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고 각자의 기사들을 섞어서 보내는 건 어려운 일이다.
손발이 제대로 맞을지도 모를 뿐더러, 적 앞에서 그들끼리 몸을 사린다면 그것처럼 멍청한 일이 없을 테니.
결국 연합군은 결속이 가장 약한 고리 그 자체다.
강한 적 앞에서는 그 결속이 시험 받기 마련이고,올드완은 그걸 노리고 지금 나섰는지도 모른다.
오스트 공작은 한참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십니까?”
“예로부터 기사 잡는 건 마법사 아니었나.”
오스트 공작의 말에, 수드베리히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궁정 마법사가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데, 지금 마법사를 쓸 수는 없지요.”
"그렇다고 기사를 갈아 넣을 순 없지 않나?"
"병사들을 밤낮으로 밀어 넣으면..."
"칠일밤낮이라도 병사들로는 안 될 게야."
그들은 한참 말다툼 하다가 결론이 나질 않았는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백작, 뭔가 좋은 수가 없겠나?”
“글쎄요. 올드완을 성벽 밑으로 끌어내리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수는 없겠지. 그런데 그게 가능하겠나?”
나는 가볍게 미소 짓고 손짓했다.
“끌고 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