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 악연의 끝
* * *
끌려온 자들의 모습을 본 오스트 공작과 수드베리히 후작은 크게 기뻐했다.
“역시 백작이야! 이런 무시무시한 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쓴단 말이지! 내, 백작과는 절대 척을 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백작. 혹여라도 내가 잘못한 일이 있다면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게.”
기뻐한 거겠지.
어쨌거나.
나는 그들을 뒤에 거느리고 천천히 성벽 앞까지 걸어 나갔다.
친위대원들이 줄줄이 엮은 남녀를 툭툭 걷어차면서 나를 졸졸 따라왔다.
무너진 성탑 위에 앉아 있던 올드완이 벌떡 일어섰다.
그의 표정은 붕대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지만, 어깨가 움찔하는 것만은 확실히 보였다.
나는 그에게까지 들리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 잘 들어라! 폰세르크 다키아노스는 그에게 충성하는 영주들을 배신하고 그가 다스려야 할 백성들에게 전화를 미치게 하였으니 그 의무를 저버리고 사욕을 위하여 왕국을 뒤흔든 것이다! 그런데 병무대신 올드완은 폰세르크 다키아노스에게 맹종하여 그 검 끝을 그가 지켜야 할 자들에게 돌렸으니 그 죄가 적지 않다!“
올드완은 가만히 서서 대꾸 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이에 나, 바이스 레시아르 백작이 추상같은 계승법율에 따라 칼키움 가문의 혈족들에게 그 아비와 할애비의 죄를 묻겠다! 이의 있는 자가 있다면 지금 당장 내 앞으로 나와서 시시비비를 가리도록 하라!”
수면에 던진 돌에 파문이 일어나듯, 성벽 위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분위기가 퍼져나가는 느껴진다.
국왕과 병무대신을 싸잡아 도발한 것이니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당연하다.
올드완이 어떤 방식으로든 대응을 하면 그에 따를 텐데, 정작 그는 무심하게 성벽 밑을 내려다보고만 있을 뿐이니.
수비병들은 우왕좌왕하면서 올드완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결국은 제 혈족의 피를 보겠다는 거지.
나는 고갯짓을 해서, 엮어온 남녀 중 맨 앞에 있는 자를 끌어오게 했다.
친위대원들은 개중 가장 나이가 많은 남자를 질질 끌고 와서 내 앞에 무릎 꿇렸다.
그가 바로 올드완의 차남이었다.
“그대 아비의 죄가 명백하니, 그 죄는 그 피와 함께 그대에게 이어졌다. 죽기 전에남길 말이 있는가?”
내 물음에, 차남은 의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역도에게 남길 말은 없다.”
나는 친위대원에게 눈짓했다.
그는 두꺼운 검을 단번에 내리쳤다.
서걱.
머리가 잘려서 흙바닥을 구르다가 쌓인 시체 사이로 사라졌다.
저 위를 올려다보자, 올드완은 우지끈 소리가 날 정도로 성벽을 움켜쥐었다.
돌조각이 부서져서 성벽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 돌을 내게 던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게 의미 없다는 걸 알 정도로는 침착하다는 거겠지.
아직 피가 부족한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처형식을 이어나갔다.
삼남과 사남은 차남과 마찬가지로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올드완은 충혈된 눈을 빛내며 처형식을 지켜만 보았다.
구하려고 올 법도 하건만, 그는 꿋꿋이 성탑 위의 자리를 지켰다.
칼키움 가의 사내들이 차례대로 죽고, 막내아들까지 나왔다.
그는 어리다고는 할 수 없어도 젊은 편이었다.
그는 형들처럼 순순히 죽기는 싫은지 온몸을 흔들면서 비명을 내질렀다.
“아버지! 아버지! 살려주십시오! 아버지!”
하지만 올드완은 가만히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소란이 길어져서인지 그 옆으로 몇몇이 다가와서 무어라고 말을 걸고 있었다.
하지만 올드완은 결국 막내아들의 목이 떨어지기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서있기만 했다.
잘린 목에서 피분수가 쏟아지자, 올드완의 옆에서 떠들어 대던 이들이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올드완의 장남과 장손인가.
칼키움 가의 여식들이 급히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피하는 걸 보니, 맞는 것 같다.
나는 올드완의 맏며느리와 장손 며느리를 데려오게 했다.
욕과 저주를 떠들어대느라 시끄러워서 입에는 이미 재갈을 물려놨다.
"으읍...! 읍...! 읍...!"
"죽어서 볼 줄 알았던 지아비를 살아서 보니 반가운가 보군. 감동적인 재회 아닌가."
나는 그녀들의 옷을 찢어서 젖가슴을 내보였다.
늙어서 쳐진 가슴과 탱탱한 젖가슴이 덜렁덜렁 나란히 드러났다.
병사들은 킥킥거리면서 그 모습을 가리켰다.
아군 병사 뿐 아니라 성벽 위에 선 왕국군 병사들도 갑자기 드러난 젖가슴에서 시선을 떼질 못했다.
“저 비열한 놈이 내 아내를...! 이 쓰레기 같은 역도 놈아!”
결국 올드완의 장손이 참지 못하고 성벽 밑으로 뛰어내렸다.
거의 동시에 장남이 그 뒤를 따랐다.
가문을 이을 장남, 장손까지 내칠 수는 없었던지 올드완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성벽 밑으로 뛰어내렸다.
병무대신을 따라 내려온 것은 검은색 갑주를 입은 기사 열 명 남짓이었다.
검은튤립 기사단의 생존자들이겠지.
올드완은 내게 바로 달려들려는 장손과 장남, 그리고 기사들을 손짓으로 물리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 레시아르... 백작...”
“올드완 병무대신. 내가 저번에 한 말을 기억하시나?”
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결투에 정오의 그림자를 끌어들여 나를 습격했을 때 맹세한 말이었다.
칼키움 가문의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는 모두 범하겠다고.
“그렇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할 줄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고?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내 저택에까지 기사단을 보낸 것은, 내 누이와 처첩들을 인질로 잡으려던 것은 누구였나?”
“그것은...”
“나와 그대의 차이는 하나 뿐이야. 하려고 했던 것을 했는지, 아니면 하지 못했는지. 그 뿐인 거지.”
병무대신은 충혈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 그대는 악마인가...”
“내가 악마로 보인다면 그건 그대가 겁에 질렸기 때문이 아니겠어.”
“... 재미없는 농담이군...”
“이제 곧 죽을 늙은이를 웃겨줄 이유는 없으니까.”
나는 두 손에 불길을 일으켰다.
올드완은 검을 세워 잡았다.
그가 달려들기 직전, 나는 훌쩍 뒤로 뛰어서 몸을 빼냈다.
친위대원들은 칼키움 가의 여식들을 때려눕히고 그 자리에 털썩 엎드려 누웠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마력창이 쏟아져 내렸다.
만 단위의 마력병과 기사들이 단숨에 일으킨 마력의 폭풍우.
미리 신호했던 대로, 마력창은 올드완과 그 부하들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성벽 앞에 나란히 서 있던 자들은 좋은 과녁이 될 뿐이었다.
검은튤립 기사단원들은 마력창이 쏟아짐과 동시에 다진 고기가 되어버렸다.
올드완의 장남과 장손은 급히 마력 방어막을 만들어냈지만, 그것도 잠시.
압도적인 수의 폭력은 빈약한 방어막을 박살내고 칼키움 가의 적손들을 나란히 꿰뚫어버렸다.
“크아아아아아...!”
그 와중에도 올드완은 무서운 기세로 검을 돌려가며 마력창을 튕겨냈다.
마법사도 아니고 마력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신기할 뿐이다.
나는 박수를 치면서 그의 집념에 찬사를 보냈다.
“저것 좀 보시지요! 대단하지 않습니까! 저 늙은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내기라도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오스트 공작과 수드베리히 후작은 질린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기에 가담했다.
그들은 일이 분 내로 올드완이 죽을 거라는 데에 걸었지만, 나는 그가 이 무지막지한 난타전을 견뎌낼 거라는 데에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들이 여력을 아껴두기 위해 마력창을 거둘 때까지 올드완은 살아있었다.
견갑과 흉갑이 박살나고 머리카락이 온통 쥐 먹은 것처럼 잘려나가긴 했지만, 어쨌거나 살아있었다.
그는 절반도 안 남은 검을 휘두르며 버럭버럭 소리쳤다.
“레시아르 백작! 바이스 레시아르! 내 앞으로 와라! 그대에게 한 줌이라도 명예가 있다면 기사로서 싸워라!”
“싫은데.”
“바이스 레시아르!! 이 역도여! 끔찍한 악종아!”
올드완은 발악하며 허공에 검을 휘둘렀지만, 내가 그와 맞서 싸워줄 이유가 하나도 없다.
나는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이제는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검 대신 장창과 그물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멀리서 그물을 던지고 장창을 찔러서 올드완을 눕히려 했다.
다키아 왕국의 무의 정점이었던 자를 사냥하듯 모는 것이다.
올드완은 지친 노구를 움직여 그물을 찢고 창끝을 걷어냈다.
맹수는 역시 맹수였다.
그는 틈틈이 간격을 좁혀서 병사들을 단번에 잘라 죽이곤 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죽어도 금방 빈 자리를 채우며 끈질기게 그를 괴롭혔다.
병사들은 내가 물러나라는 명령을 내릴 때까지 한참이나 그를 괴롭히다가 물러났다.
그들이 물러난 후에는 궁수들이 그를 겨누고 활시위를 당겼다.
칼키움 가문의 여식들만큼의 명사수는 아니었지만, 어차피 궁수는 많고 화살은 더 많다.
“쏴라!”
“바이스 레시아르으으으!!!”
이번에는 마력창 대신 화살이 허공을 뒤덮었다.
올드완은 가쁜 숨을 내쉬면서 검을 휘둘렀다.
무뎌진 검으로도 화살을 걷어낼 수는 있었지만, 이제 검의 궤적은 그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는 듯 했다.
그의 갑주에 화살이 튕겨나가다가도 하나씩 박히기 시작했다.
깨지고 부서진 빈틈 사이로 화살이 그의 살을 노려 파고들었다.
올드완은 화살비가 끝나도록 허우적거리면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 검으로 벨 수 있는 것은 화살 뿐이었다.
그의 마지막은 결국 아무 것도 베지 못하는 허무한 싸움이 된 것이다.
기사인 그에게는 가장 치욕적인 결말이겠지.
올드완은 검을 땅에 박고, 무릎을 꿇었다.
잘리고 헤진 머리카락에는 피와 한탄이 잔뜩 묻었다.
나는 병사들을 물리고 그 앞으로 다가갔다.
“병무대신.”
“…….”
“그러게 왜 어중간하게 이랬소. 기사다울 거면 아예 기사다워서 더러운 쪽에는 손도 대지 않든지. 그게 아니고 더러울 거면 아예 작정을 하고 손을 더럽히든지.”
“…….”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니까 결국은 국왕에게 좋은 대로 써 먹히고 버려진 거 아니오.”
“…….”
폰세르크 국왕이 올드완을 구하려고 했다면 진작 궁정 마법사를 보냈을 것이다.
전격적으로 마법사끼리 붙었다면 우리 쪽 피해도 만만치는 않았겠지.
물론궁정 마법사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겠지만, 어쨌거나 그 틈을 타서 올드완을 구출해낼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폰세르크 국왕은 지금까지도 궁성 안에서 마법사 카드를 움켜쥐고만 있다.
올드완이 성벽 밑으로 내려간 순간, 이미 그를 버리기 했는지도 모르지.
“주군으로 모신 국왕에게는 버림받고, 아들들은 다 죽고. 생애 마지막 싸움은 무엇 하나 베는 것도 없이. 다키아 왕국 무의 정점이던 분이 이게 뭐요.”
“…….”
“지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싹싹 빌어보면 어떻겠소. 그럼 내가 그대를 용서해줄 지도 모르는데.”
“…….”
“사실 용서해줄 생각은 없지만."
“…….”
“그래도 칼키움 가문의 여자들은 내가 잘... 어이쿠.”
채앵!
섬광처럼 번쩍인 것은 검날과 검날이었다.
지면에 박혀 있던 올드완의 검이 횡으로 휘둘러졌고, 그 검을 파샨이 위로 튕겨낸 것이었다.
나는 심장이 벌렁거리는 걸 들키지 않게 고개를 치켜 들었다.
어쨌거나 마지막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올드완은 깊은 한숨을 흘렸다.
“... 후우우우...”
모든 회한이 다 담긴 깊은 한숨이었다.
나는 씩 웃었다.
“왕국 제일의 기사라는 분이 결국은 마지막까지 속임수만 쓰는구먼. 올드완. 그대는 가장 기사답지 않은 기사로 기억될 거요.”
“이... 이... 이... 커허억...!”
올드완은 눈이 터질 정도로 나를 노려보다가 피를 토했다.
눈썹 위에는 혈맥이 도드라질 정도로 부풀어올라서 얼굴이 시뻘게졌다.
"우욱...! 이...! 이이이이...!"
올드완은 몸을 비틀면서 피 끓는 소리를 냈다.
나는 쯧쯧 혀를 찼다.
맹세한 대로 칼키움 가문의 남자는 모두 베었고, 여자는 모두 취할 것이다.
올드완은 끝까지 나와는 직접 대결하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다가 쓰러졌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가장 기사답지 않은 기사로 기억되겠지.
이쯤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나는 그의 뒤로 돌아가서 검을 치켜들었다.
"이이이...! 이이이이이이이이익...!"
내가 검을 내려칠 때까지도 올드완은 발작하면서 신음소리만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비참하고 한심한 말로였다.
서걱!
그 목은 그의 차남과 삼남, 사남의 목이 그러했던 것처럼 시체들 속으로 굴러가 버렸다.
악연의 끝이었다.
나는 목 없는 시체를 발로 걷어찼다.
성벽 위에서는 울음이, 성벽 아래서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