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 선물
* * *
국왕은 간단히 그를 저버렸지만, 병무대신의 존재감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올드완의 죽음을 목격한 왕국군은 확실히 흔들리고 있었다.
진격의 깃발을 흔들자, 연합군은 기세를 타서 단번에 성벽을 올랐다.
왕국군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두 번째 성벽 쪽으로 달아났다.
“열어! 열란 말이다!”
겁에 질린 병사들은 성문을 두들겼지만, 성벽 위에 선 기사들은 가로 고개를 저었다.
“물러서지 말고 싸워라!”
“병무대신도 죽었습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맞선단 말입니까!”
“의무를 다해라!”
“그럼 사다리라도 내려주십시오! 싸우더라도 성벽 위에서 싸우겠습니다!”
하지만 기사들은 사다리를 내려주지 않았다.
병사들은 주먹이 터지도록 성문을 두들기다가, 결국은 아군 쪽으로 달려와서 넙죽 엎드려 항복을 청했다.
“흥. 이제 와서 투항인가.”
“굳이 받아줄 필요도 없습니다.”
수드베리히 후작은 가신과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오스트 공작은 생각이 다른지 내게 물었다.
“백작은 어찌 생각하는가?”
“투항을 받아주고, 그 대신 가장 먼저 앞서서 싸우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다가 다시 칼 끝을 우리에게로 향한다면?”
“대세가 뒤집어진 것을 저들이라고 모르겠습니까. 그리고 투항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저들도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겁니다.”
“그건 확실히 그렇군.”
그래서 투항은 받아주기로 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신뢰를 얻기 위해 가장 앞장서서 기사의 칼과 궁수의 화살을 받아내야 할 것이다.
이래저래 그들의 투항을 받는 사이에 해가 저버렸다.
그렇다고 전투가 끊긴 것은 아니다.
싸울 시간과 장소를 정할 수 있다는 것이 공격자의 이점이니까.
귀족들은 각자 징발한 저택으로 흩어졌지만, 병사들은 횃불을 들고 산발적인 공격을 이어나갈 것이다.
왕국군은 밤사이에도 편하게 눈을 붙일 수 없을 것이다.
반면 귀족 연합군은 동부와 서부, 남부군이 돌아가면서 쉴 수 있겠지.
여하튼 나도 칼키움 가의 저택으로 돌아가서 올드완의 장손 며느리를 희롱하며 놀려고 했는데, 오스트 공작이 자신이 차지한 저택으로 나를 초대했다.
“간단히 저녁이나 들고 가지.”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저녁 식사는 성대한 만찬이었다.
음식의 질과 가짓수로만 따지자면 내 계승식 때와 비견할 정도였다.
“역시 동부의 주인은 다르군요. 전장에서도 이리 드실 정도라니.”
“전장이라 이리 차린 것이야. 내가 성대하게 식사를 할수록 아랫것들이 주군이 건강하시다며 안심을 할 테니 말이야.”
오스트 공작의 발상은 종잡기 힘든 때가 종종 있다.
어쨌거나 음식은 맛있었기에, 나는 마음껏 배를 채웠다.
오스트 공작은 직접 고기를 썰어주거나 와인을 따라주면서 식사를 주관했다.
“많이 들어. 첫 번째 성벽은 백작 덕분에 넘긴 거나 다름없으니. 올드완이 성벽을 지키고 서 있을 때는 저걸 어찌 넘을까 했는데 말이야.”
“제 업보를 받은 거 아니겠습니까. 어중간한 게 제 죄지요.”
그가 차라리 아주 영악해서 가족들을 일찍이 피난 보냈거나 슈베른 궁성 안으로 들여보내놓았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죽진 않았을 것이다.
“어중간한 것이 문제였지. 험. 그래.”
오스트 공작은 헛기침을 하고는 내 눈치를 살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나는 그릇을 밀어두고 물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으흠. 백작. 내 솔직히 말하지. 그 철통같은 슈베른 궁성, 첫 번째 성벽이 하루 만에 넘어왔어. 가장 두려웠던 병무대신도 목 없는 귀신이 되었고 말이야. 내 저번에도 말하지 않았어. 이번 전쟁은 동부와 서부, 남부가 모인 시점에서 이미 이긴 게야.”
“그렇지요.”
“그렇다면 그 후의 일도 슬슬 생각을 해둬야 하지 않겠나?”
나는 허리를 뒤로 빼며 느긋하게 앉았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하지만 노회한 오스트 공작도 바로 본론을 꺼내지 않고 빙 둘러 변죽만 울렸다.
“폰세르크 다키아노스는 죄의 무게를 짊어져야 할 테니 왕관을 내려놓아야 하지. 그 아들인 츠빙거와 루코스 왕자도 죗값을 져야 할 게야.”
“그야 당연하지요.”
“하지만 국왕의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다고 우리 중 누군가에게 덜렁 왕관을 씌울 수도 없고 말이네.”
그 또한 당연한 말이다.
나나 오스트 공작, 수드베리히 후작 중 누군가가 왕이 된다?
왕이 된 자는 왕이 되지 못한 나머지 둘에 의해 끌어 내려지거나 죽임을 당할 것이다.
어찌어찌 권력투쟁에서 이겨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다키아노스 왕가의 피가 흐르지 않는 자가 다키아 왕국을 잇는다는 건 여러모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누군가 왕가의 방계 혈족을 왕으로 옹립해야 할 텐데,자신과 조금이라도 혈연이 겹치는 자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오스트 공작은 똑바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백작. 내 부탁하지. 차기 국왕으로 에티렌 다키아노스를 지지해주게.”
“에티렌, 이라니...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인데요.”
“폰세르크 국왕의 조카일세. 내 사촌누이의 아들이기도 하지.”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살짝 와인을 머금었다.
오스트 공작도 바로 대답해주기를 기대한 건 아니라는 듯, 느긋하게 스테이크를 썰었다.
차기 국왕이라.
물론 나도 생각해본 문제였다.
따지고 보면 그것만큼 중요한 문제도 없으니.
하지만 왕가에 혼맥과 혈연이 닿은 오스트 공작가나 수드베리히 후작가와 달리, 레시아르 백작가는 그런 관계가 전혀 없다.
서부에서는 명문가였지만 중앙 정계에는 희한할 정도로 인연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누이들을 팔아치우듯 대신들에게 보낸 것이기도 하고.
어쨌거나, 그런 이유에서 나와 피를 나눈 이를 왕으로 옹립하는 건 불가능하다.
카산드라 공주... 는 나와 피를 나눈 것도 아니고, 폰세르크 국왕의 딸이라는 이유에서도 왕관을 줄 수가 없다.
그녀가 내 아이를 배었다면 그에게도 왕위계승권이 있겠지만, 그 아이가 클 때까지 왕위를 비워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건 논외.
그래서 나는 이 문제에서 한 발 떨어진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다.
대귀족의 삼두정치에서 내가 결정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오스트 공작은 내게 지지를 요청한 것이리라.
내가 그의 손을 들어주면, 수드베리히 후작은 승복할 수밖에 없으니까.
반대로 내가 수드베리히 후작의 손을 들어준다면, 오스트 공작도 그 결정에 맞서기가 쉽지 않다.
결국 아쉬운 건 오스트 공작이라, 그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며 물었다.
“백작. 무엇을 원하나?”
오스트 공작은 그렇게 묻고는 아차 싶었던지 손을 내저었다.
“아니. 답하지 말게. 내가 답하지. 백작은 미녀를 좋아하니 왕가의 여자들, 왕비와 왕세자비와 공주를 모두 주겠어. 저번에 왕비의 허리를 의자로, 왕세자비의 가슴을 목받침으로, 공주의 손을 와인잔으로 쓴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미소만 띄웠다.
그것까지 기억해준 건 고마운 일이지만, 왕가의 미녀는 그를 지지해주는 대가로는 너무 싸다.
오스트 공작도 그것만으로 입을 씻으려 할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백작에게 백작위는 너무 작지. 후작위... 아니, 공작위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어떤가?”
그 또한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사실 레시아르 백작가의 영향력은 이미 한참 전에 백작가의 수준을 뛰어넘었으니.
게다가 차기 국왕이 내게 공작위를 내려준다면, 왕가와의 관계도 깊어지겠지.
그는 그 외에도 이런저런 회유책들을 내놓았다.
전화를 입은 레시아르 영지가 단번에 부흥할 수 있을 정도의 선물 보따리였다.
하지만 수드베리히 후작도 자신을 지지해주는 대가로 그 정도는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오스트 공작에게 바라는 건 그만이 줄 수 있는 것이다.
“아우럼 백작... 말인가...?”
오스트 공작은 고심하는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국왕과 대신들은 곧 올드완을 따라 불지옥에 떨어질 거다.
그럼 내 누이의 인생을 파탄 낸 작자들은 대략 정리되는 것이다.
아우럼 백작만 빼고.
그건 완전한 복수라고 할 수 없다.
나는 완전한 복수를 원한다.
오스트 공작은 한참 앓는 소리를 내며 고심했다.
“아우럼 백작이 강독을 만든 죄가 크다 하나, 그가 연합군에 합류해서 세운 공도 적지는 않아. 당장 백작도 그의 도움을 얻은 적이 있지 않나?”
"그야 그렇지요."
나는 전장을 통째로 뒤덮은 대마법을 떠올렸다.
그 덕분에 검은튤립 기사단은 궤멸했고, 서부군은 값진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로 인한 휴전 기간 동안 서부는 동부와 남부를 끌어들여서 중앙을 포위했으니, 그 거대한 황금 방패는 역사를 바꾼 대마법으로 기억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애초에 그가 강독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생기지도 않았을 일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내가 하려는 말은 이거야. 내가 함부로 그의 목을 내놓을 수 있는 입장도 아니라는 거지.”
동부에서 오스트 공작가의 영향력은 막대하지만, 아우럼 백작가도 유서 깊은 마법명가다.
오스트 공작이라고 해서 독단적으로 아우럼 백작의 목을 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그가 연합군에 협조하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그렇고.
나도 그 사정은 이해하고 있다.
그렇기에 바로 지금이 아니면 오스트 공작에게 아우럼 백작의 목숨을 요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차기 왕위의 결정권이 내게 있는 바로 지금.
"크으응... 어려운 결단을 하게 만드는구먼."
"아우럼 가의 저택에서 정오의 그림자와 대등하게 암투를 벌이던 그 비밀단원들... 그 자들의 손을 쓰면 되지 않겠습니까?"
"세상에 암살단이 많다하나, 실력 있는 암살단은 적어. 아우럼 백작 같은 거물의 목을 취할 수 있는 암살단은 더욱 드물지. 아우럼 백작이 석연치 않게 죽으면 나도 의심을 받게 된다는 게야. 동부의 주인으로서 내가 그의 목숨을 취했다는 게 얼마나 큰 흠이 되는지 아는가?"
"차기 국왕이 될 자가 그 흠도 덮지 못하겠습니까?"
"그건..."
오스트 공작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아우럼 가 저택에서 백작과 헤어졌을 때 말이야... 그 날 아우럼 백작의 적손이 하나 사라졌던가.”
나는 내심 뜨끔했다.
그 난전 중에 그것까지 확인한 건가.
“이름이 분명...”
“뤼지냥.”
“그래. 그랬지. 뤼지냥 아우럼이라는 계집이었어.”
오스트 공작은 그 이름을 한 번 곱씹어 보고는 손을 휘저었다.
"아우럼 백작을 치우고, 그 계집을 이용해서 아우럼 백작가를 차지할 생각이군?"
역시 만만한 노인네가 아니다.
어차피 다 들킨 바에야,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그의 목숨만 가져가는 건 너무 값싼 복수가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의 가문도 가져야겠습니다."
"허...! 백작은 참 욕심도 많군."
"왕위를 아우를 공작님만 하겠습니까."
"그리 생각하면 해볼만 한 거래인 듯도 하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민하던 오스트 공작은 결국 결단을 내렸다.
"그래! 백작의 말대로 그리하도록 하지! 대신 백작은 차기 다키아 국왕으로 내 사촌누이의 아들인 에티렌을 단단히 지지해주어야 할 게야."
"물론입니다. 대신 공작께서는 아우럼 백작을 치고, 차기 아우럼 백작으로 뤼지냥 아우럼을 지지해주셔야 합니다."
"좋네."
오스트 공작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끝을 맞잡았다.
수드베리히 후작의 조건을 들어보지 않고 정한 건 좀 성급하지 않았나 싶지만, 아우럼 백작의 목을 따기 위해서는 오스트 공작의 편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만약 내가 수드베리히 후작에게 붙는다면 그는 세력 균형을 위해서라도 아우럼 백작을 살리려고 할 테니.
완전한 복수.
그걸 바라는 나로서는 처음부터 오스트 공작의 손을 잡을 생각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선물들까지 받았으니 일석이조지.
왕가의 여자들에, 공작위, 아우럼 백작가에 대한 영향력과, 막대한 금은보화까지.
선물 보따리는 푸짐하기 그지 없었다.
밤이 늦도록 이어진 만찬은, 우리가 결론을 내리면서 곧 끝이 났다.
오스트 공작은 저택 밖까지 나를 배웅한다면서 클클 웃었다.
“저 아래에 백작이 아주 좋아하는 선물을 하나 더 준비해 놨지.”
계단을 몇 칸 정도 내려갔을까.
저 밑의로비에 사람들이 꽉 차게 들어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 모두 여자들이었다.
그것도 전부 미녀.
“아니, 이게 다 몇 명입니까?”
“백 하고도 한 명.”
허, 소리가 나올 정도로 미녀들이 많았다.
오스트 공작이 왕도를 약탈하며 붙잡은 여자들이었다.
"알겠지만 오늘 밤에 품는 건 그리 권장하지 않아."
"그거야 물론입니다."
나는 미녀들을 이끌고 칼키움 가문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저택에는 수드베리히 후작이 보낸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오스트 공작에게 저녁을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몸이 달아오른 거겠지.
오스트 공작의 손을 잡기로 했지만, 수드베리히 후작과 완전히 척을 질 수도 없다.
일단은 이야기를 듣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밤은 이미 깊었지만, 나는 수드베리히 후작이 묵는 저택으로 향했다.
그는 나와 만나자마자 북부를 치고 변경백 작위를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서부와 북부의 패자라.
그렇게 되면 내가 오스트 공작이나 수드베리히 후작보다도 더 큰 권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하지만 그걸 다 소화시키려면 수십 년이 걸릴 테고, 끝임 없는견제에 시달려야 하겠지.
나는 그렇게 귀찮은 일을 하면서까지 이루고 싶은 포부는 없다.
그래서 적당히 주는 선물만 받아왔다.
재밌게도 수드베리히 후작 또한 미녀들을 딸려 보내주었다.
그 수가 딱 백 명이었다.
안타깝지만 선물로 받은 미녀들은 레시아르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품을 수 없다.
언제 궁정 마법사들과 싸워야 할지 모르니,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전까지는 성욕을 참는 수밖에.
그래서 나는 즐거우면서도 괴로운금욕의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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