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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141화 (141/166)

〈 141화 〉 슈베른 궁성 공략

* * *

다음날.

나는 느지막이 일어났지만, 공성전은 내가 잠에 든 사이에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밤사이 왕국군 별동대가 첫 번째 성벽을 탈환하려고 왔다가 격퇴 당했다고도 하고.

연합군 기사들이 모여서 두 번째 성벽을 점령하려다가 피해만 입고 돌아왔다고도 한다.

병사는 수천, 기사도 수백 단위로 죽어나갔지만 전체적인 규모로 보자면 가볍게 날린 잽 같은 것이었다.

나는 웅웅 울리는 함성 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지휘막사로 들어갔다.

“백작. 젊은 사람이 그리 아침잠이 많아서야 어떡하나?”

오스트 공작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나를 맞이했다.

지난밤에 오스트 공작과 손을 잡기로 하고서도 수드베리히 후작의 초대에 불려 간 것에 관해서 은근히 추궁하는 것이다.

나는 잡아떼거나 변명하지 않고 당당히 말했다.

“귀하신 분들이 서로 이 몸을 청하니 고민이 많아 쉬이 잠을 이루기가 어렵더군요.”

이렇게 나오니 오스트 공작은 오히려 당황했다.

수드베리히 후작은 그 틈을 타 나를 잡아 앉혔다.

“공작께서 타박이 심하시군. 백작. 어서 앉게.”

“아니, 이쪽에 앉아.”

“아니아니. 이쪽에.”

“이 사람아. 백작이 나랑 얼마나 친한 줄 아나?”

“공작께서 친한 척을 하시니 얼마나 부담스러웠겠습니까. 여보게, 백작. 나는 그대에게 부담 줄 일은 안 할 걸세.”

원숭이 같은 노인네와 비만한 아저씨에게 인기 만점인 지옥 같은 수라장이라니.

나는 둘 사이 적당히 거리를 둔 자리에 앉았다.

“일단은 슈베른 궁성을 점령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런 후에야 논공행상을 따지고 승계의 율법을 바로 세울 것 아닙니까?”

“그, 그래. 그렇지.”

“백작 말이 백 번 옳네.”

“지금 전황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서로 가볍게 주고받는 정도지. 이제 백작이 왔으니 본격적으로 두들겨 보세나.”

오스트 공작과 수드베리히 후작은 양쪽에서 나를 밀어대며 부대꼈다.

지옥 같은 수라장이다. 정말로.

어쨌거나 우리는 지휘 막사를 나와서, 첫 번째 성벽 위로 올라갔다.

반쯤 무너진 성탑은 밤 사이에 이전보다 훌륭하게 복구되어 있었다.

안쪽에는 양탄자가 깔려있고 다과상까지 차려져 있어서 어지간한 저택의 응접실 못지않게 꾸며져 있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점은 미녀들이 시중을 들어준다는 것이었는데, 여자가 있으니 확실히 오스트 공작이나 수드베리히 후작에게서 나는 냄새가 중화되는 느낌이다.

성탑에서는 슈베른 궁성 전역이 훤히 내려다 보였는데,첫 번째 성벽과 두 번째 성벽 사이의 안뜰에는 임시로 만든 참호와 요새가 널려 있었다.

안뜰의 모든 영역이 왕국군 사정거리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아군 병사들은 편히 쉴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연합군은 서부군과 동부군, 남부군이 번갈아가면서 교체할 수라도 있다.

반면 밤사이에도 쉬지 않고 몰린 왕국군은 멀리서 보기에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대로 파상공격을 되풀이하면 저들이 스스로 무너질 테지만, 시간을 끌면 불리한 건 우리 쪽도 마찬가지다.

수십만의 군병들이 하루에 소모하는 군량의 양은 무서울 정도다.

입성 후에도 산발적으로 약탈이 계속 벌어지다보니, 배짱 두둑한 군상(??)들을 제외하고는 상인들이 물건을 내놓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군량에 여유가 있기는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슈베른 궁성을 장악하는 것이 최선책이다.

나와 오스트 공작, 수드베리히 후작은 공세를 어떻게 전개할지 의논하고는 곧바로 마력병들을 출격시켰다.

하룻밤 동안 잘 쉬고 마력을 비축해둔 마력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각자 정해진 구역으로 나가더니, 워낙 수가 많고 소속이 복잡해서 도중에 진열이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깃발이 서로 섞이기 시작하자 하급 지휘관들은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안뜰은 마력병들로 가득 차서 한 번 꼬여버린 진열을 고칠 수가 없었다.

“여기에 대단위 마법을 한 방만 갈기면 전황이 바뀌겠군요.”

“국왕이 궁정 마법사를 전격적으로 내보냈다면 올드완이 그리 죽지도 않았겠지.”

“하긴. 그도 그렇습니다.”

“우리 쪽도 마법사를 대기시켜놨으니 설령 궁정 마법사가 나선대도 쉽게 무너지진 않을 게야.”

잠깐 이야기하며 한 눈을 판 사이에 마리안이 사라져 있었다.

어디 갔는지 급히 찾는데, 저 멀리 그녀가 켈자르 출신의 마력병들을 이끌고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 저 여자는 겁도 없이... 빨리 돌아오라고 해!”

“언니의 성격은 너도 알 텐데. 돌아오라고 한다고 돌아올까?”

체닐린은 한숨을 쉬며 나를 비꼬았다.

나도 한숨을 쉬고는 체닐린의 엉덩이를 두들겨 때렸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그럼 네가 가서 마리안을 보호해.”

“... 읏...! 그렇게 때리지 않아도...”

“얼른!”

체닐린은 잠깐 나를 노려보더니 기사 몇과 함께 마력병들 사이로 사라졌다.

어느덧 성벽 위에도 왕국군 마력병들이 자리를 잡고 서 있는데, 마력을 강화하는 마도구를 가진 자들도 드물지 않았다.

높은 성벽 위에 단단히 방비하고 있는 태세가 첫 번째 성벽과는 전혀 다르다.

연합군 마력병들은 조금씩 꾸물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일제 사격하기 위해 거리를 좁혀나가는 것이다.

나는 손에 땀을 쥐고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마력병은 기사에 비해 마력의 보유량이 적고 마력을 운용하는 것도 효율적이지 못해 전장의 주역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저만한 수가 모였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저들이 단번에 마력창을 일제사격한다면, 왕국군은 반격할 기회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걱정되는 건 아군이 서로 손발이 맞지 않아서 산발적으로 사격하게 되는 경우인데.

그렇게 되면 난전으로 이어질 거고, 성벽에 기대어 사격할 수 있는 왕국군에게 유리하게 된다.

“아...”

전장을 지켜보던 파샨이 한숨을 흘렸다.

연합군 마력병 중 한 무리가 신호를 받기도 전에 멋대로 마력창을 쏘아 보낸 것이다.

소속과 지휘체계가 복잡해서 제대로 통제하기 어려울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저 놈들, 어디 놈들인가?”

오스트 공작이 잔뜩 화가 나서 가신에게 물었다.

“깃발을 보니 세잔 자작의 병사들이군요.”

“그 빌어먹을 놈의 자식은 조련을 어떻게 한 거야?”

뿔나팔 소리에 맞춰서 일제사격하라고 다시 군령을 내려 보냈지만, 이미 늦었다.

마력병들은 아군 마력병 중 일부가 사격한 것을 보고 뒤따라서 산발적으로 사격을 개시했다.

“이런...”

무질서하게 쏘아진 마력창이 성벽을 때렸다.

마력창 사격은 유의미한 화망을 형성하지 못했고, 성벽은 공격을 건재하게 버텨냈다.

한 차례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고.

이제는 적들이 공격할 차례다.

아직도 산발적인 사격이 이어지고 있지만, 성벽 위의 왕국군 마력병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가끔씩 마력창에 꿰뚫려 성벽 아래로 떨어지는 자들도 있지만, 소수다.

그들이 마력창을 던지기 직전, 아군은 각기 마력병 전대끼리 모였다.

“집결! 집결!”

“깃발 밑으로 집중한다!”

하급 지휘관 쪽으로 마력병들이 붙었다.

안뜰에는 금세 촘촘한 원진이 수백 개나 생겨났다.

거리를 잰 왕국군 마력병들은 원진을 향해 마력창을 날렸다.

공기를 찢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렸다.

하급 지휘관들은 제각기 마력 방어막을 형성해냈다.

그 쪽으로 모인 마력병들은 어깨를 움츠린 채, 마력 방어막이 마력창을 튕겨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니, 마력창이 아닙니다!”

파샨이 전장을 손가락질 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정말로 마력창이 아니었다.

“재블린... 투창이군.”

“어쩐지 적들의 사격이 길다 싶더니.”

왕국군은 마력병들 사이에 투창병들을 섞어서 아군을 교란한 것이다.

물론 투창병들이 던지는 창도 상당히 위력적이었기에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창으로는 마력 방어막을 깨뜨릴 수가 없다.

그러니 마력 방어막을 깨뜨리는 것은 결국 마력병인데...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안뜰의 한 쪽에서는 막 마력 방어막이 부서져서 그 밑에 몰려 있던 마력병 전대가 학살당하고 있었다.

투창병이 교란하는 사이에 마력병들은 아군 부대를 하나씩 노려서 집중사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켈자르의 깃발을 급히 찾아보았다.

마리안이 떠나 간 곳을 눈여겨본 덕분에, 어렵지 않게 그들 부대를 찾을 수 있었다.

켈자르 마력병 전대도 집중사격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안과 체닐린, 은혈이 둘이나 있었기 때문에 넉넉하게 버텨내면서 오히려 반격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건 다행이군.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아군의 피해가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지금 퇴각시키는 건 어렵겠지.”

“공격도 신호에 따르질 못했는데 퇴각이라고 질서정연하겠습니까. 오히려 피해가 더 커질 겁니다.”

“어쩔 수 없지. 일단은 투항병부터 보내지. 시간이라도 끌 수 있을 테니.”

투항병들은 적과 아군 어느 쪽에게도 배신자일 뿐이다.

그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것은 전공을 세우는 것 뿐이므로, 그들은살기 위해 악착같이 성벽에 달라붙었다.

하지만 마력병의 주의를 분산시키지는 못했고, 그나마 투창병들의 과녁이 되었을 뿐이다.

그래도 그들이 시간을 끌어준 동안, 오스트 공작은 자신의 정예 기사단을 준비시켰다.

“판테라.”

“예. 어르신.”

“할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판테라 단장은 발뒤꿈치를 모아 군례를 올리고는 성탑 아래로 내려갔다.

그를 따라 은표범 기사단이 튀어나갔다.

그들은 아군 마력병 진형도 마구 헤집으며 성벽을 향해 내달렸다.

눈에 띄는 쾌진격에, 적 마력병들이 은표범 기사단으로 사격을 집중했지만 쓰러지는 기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화망이 분산된 덕분에 아군 마력병들이 적 마력병에게 반격할 기회가 생겼다.

“위로, 위로!”

판테라 단장은 수직으로 된 성벽을 맨손으로 기어 올라갔다.

은표범 기사단이 사슬로 된 갈고리줄을 던져 그 뒤를 따랐다.

왕국군 측에서도 급히 기사들을 내보냈지만, 판테라 단장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들을 썰어버렸다.

그 사이 은표범 기사단원들이 성벽 위에 올라 교두보를 넓혀나갔다.

한 번 침투가 성공하고 나니 전황은 급격하게 우리 쪽으로 기울었다.

은표범 기사단은 동부의 최정예 기사단답게 중앙 기사단을 매섭게 밀어붙였고, 그런 상황에서 왕국군 마력병들의 공격은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적 마력병들이 흔들리는 사이에 아군 마력병은 반격을 시작해서 기세를 더 확고히 굳혔다.

두 번째 성벽이 넘어간 것은 순식간이었다.

적 지휘관은 기사단을 추가로 투입하는 대신, 남은 병력을 슈베른 궁성 안쪽으로 후퇴시켰다.

"이겼다!"

"와아아아!"

두 번째 성벽을 차지한 병사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아군의 피해는 결코 적지 않았지만, 사기는 높은 편이었다.

계속 이기면서 성벽을 하나씩 점령해나가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높은 사기를 계속 유지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병사들에게 빵과 와인을 나눠주어서 기력을 회복하게 하고, 눈에 띄는 공을 보인 자에게는 금화를 주었다.

오스트 공작은 돌아온 판테라 단장에게 장난스레 물었다.

"금화 백 개, 필요한가?"

"아닙니다."

"임자는 돈 귀한 줄 모른단 말이지."

재미 없는 농담이었지만 가신들은 껄껄 웃었다.

어쨌거나 이기고 있으니 분위기는 좋았다.

이제 남은 마지막 성벽은 슈베른 궁성의 외벽이었는데,그 벽은 지나온 두 벽을 합친 것보다도 두꺼웠다.

북쪽으로는 산맥을 끼고 있어서 서쪽에서 남쪽, 동쪽으로 반원형의 호선을 그린 성벽의 곳곳에 성탑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수가 무려 다섯 개였다.

“성탑마다 마법사가 배치되어 있군요.”

“그러게 말이야. 이건 만만치 않겠어.”

하지만 아직 해가 지기까지 한참 남아있었기에, 일단 보병들로 가볍게 두들겨 방비태세를 확인해보기로 했다.

보병들은 함성을 지르며 궁성을 향해 돌격했다.

도중에 설치된 함정과 목책은 인파에 모두 쓸려나갔다.

적들은 화살을 쏘고 끓는 기름을 부어대며 사다리를 기어오르는 병사들을 막았다.

반복되는 공성전을 몇 차례나 보고 있자니 좀 시큰둥하게 된다.

그건 나나 오스트 공작, 수드베리히 후작은 물론이고 상대방 지휘관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이 쪽에서 보병만 내보냈다면 저 쪽에서도 보병만으로 상대하는 게 당연하다.

어차피 서로 가볍게 밀고 당기는 전초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사태가 급변했다.

­ 콰앙!

성문에 몰려있던 병사들이 놀라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보병들 사이에 숨어있던 투척병들은 그 사이에 일제히 폭렬탄을 내던졌다.

­콰콰콰쾅!

여러 개의 폭렬탄이 한 번에 터지자 폭발이 겹치면서 성문은 박살나버렸다.

“저게 그 폭렬탄인가? 아껴둔 이유가 있었군, 그래.”

“이제 이게 다입니다.”

“에잉. 그걸 누가 믿는다고. 어쨌거나 고마우이.”

뚫린 성문을 향해 병사들이 쇄도해나갔다.

왕국군은 급히 진열을 정비하고 있지만, 병사들이 뚫지 못한다면 대기하고 있는 기사단이 진격할 것이다.

수드베리히 후작은 이미 용병 기사단을 다섯이나 소환해 놓았다.

그 때, 궁성의 다섯 성탑이 오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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