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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142화 (142/166)

〈 142화 〉 슈베른 궁성 공략

* * *

“궁정 마법사군. 드디어...”

오스트 공작은 드물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드베리히 후작도 자세를 고쳐 앉았고, 나도 손을 쥐었다 펴며 마력을 굴려 보았다.

이윽고, 다섯 성탑에서 일제히 마법이 쏟아져 나왔다.

불길이 가장 먼저 치솟았다.

그 다음에는 냉기가 휘몰아쳤다.

그리고 가시나무와 쇳조각이 흩날렸고, 마지막으로는 땅이 아래로 푹 꺼졌다.

성문을 공격하러 들어갔던 병사들은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대기하고 있던 용병 기사단도 상당히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런...”

아끼는 기사들을 잃은 수드베리히 후작은 표정을 마구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남부군 마법사들이 즉각 마력 방어막을 형성해내면서 기사단이 궤멸적인 피해를 입는 것만은 막아낼 수 있었다.

아우럼 백작과 그 휘하의 마법사단도 동부군 마법사들과 함께 곧장 대응에 나섰다.

그들은 도리어 공세를 취하며 궁정 마법사를 압박했다.

거대한 황금 방패가 성탑 위로 떨어져 내렸다.

물론 궁정 마법사도 만만치는 않아서, 황금 방패를 밀어내거나 두 쪽으로 갈라내기도 했다.

­ 쾅!

­ 우르르르르....

­ 콰앙!

화, 수, 목, 금, 토.

오대속성의 마법이 서로 물고 물리며 부딪쳤다.

마법이 충돌하면서 하늘이 울리고 번개가 내려쳤다.

꽤나 멀찍이 있는 내게도 그 마력의 파동이 전해지는 듯한데, 전장은 어떨까.

마법을 피해 간신히 살아남은 병사들도 더 버티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어마어마한 마력이 그들의 빈약한 몸을 찌부러뜨린 것이다.

기사들도 괴로워하며 전장에서 이탈했다.

섬광이 번뜩이고, 굉음이 울려 퍼졌다.

성벽이 무너지고, 지면이 뒤엎어졌다.

마법사들은 모든 것을 무너뜨릴 기세로 마법을 난사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상대편 마법사뿐이지만, 보병이나 마력병은 물론, 기사까지도 거기에 휩쓸리는 것만으로 치명상을 입었다.

“참으로 장관 아닌가? 전장의 주역은 역시 마법사지.”

오스트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내게도 아름답게 보이기는 한다.

마법은 응축되어서 피어나다가 한 순간 폭발하고 져버렸다.

저 마법 하나가 수백의 목숨을 거두어가는 죽음의 꽃이라지만, 전장을 오시하는 대귀족에게는 그 또한 하나의 유희인 것이다.

마법전은 치열하게 이어졌다.

능력은 궁정 마법사단이 조금 더 우월한 편이지만, 연합군 마법사의 수가 더 많았고 무엇보다도 이쪽에는 대마법사인 아우럼 백작이 있었다.

그가 황금 방패를 떨어뜨릴 때마다 궁정 마법사들은 기를 쓰고 막아야했다.

아우럼 백작은 성탑 두 개에 동시에 황금 방패를 두들겨 대고 있었는데, 그 혼자서 이십 명 가까운 마법사를 상대하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연합군 마법사들은 세 개의 성탑만을 상대하면 되었고, 당연히 승기는 우리 쪽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 쿠르르르릉!

남부군 마법사들이 기반을 뒤흔들던 성탑이 제일 먼저 무너져 내렸다.

그 안에 있던 마법사들은 기사에게 안겨서 급히 뛰어내렸지만, 난중에 깔려 죽은 자들도 적지 않았다.

마법사를 잃은 것 만큼이나 성탑이 무너진 것도 적들에게 있어 큰 피해였다.

성탑은 마법전을 위해 치밀하게 설계된 보루였다.

그 성탑이 무너졌다는 것은 높은 방호력과 넓은 시야, 갖가지 마도구를 모두 잃었다는 의미가 된다.

다섯 성탑은 서로 지키며 보완해주고 있었으니, 그 중 하나가 무너졌다면 나머지도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 긴 마법전도 끝인가 싶었는데, 갑자기 아우럼 백작과 함께 서 있던 마법사 하나가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그의 그림자에는 피 묻은 비수가 들려 있었다.

아우럼 백작은 급히 그림자를 밟았다.

그림자 속의 암살자는 몸이 터져서 절명했다.

“정오의 그림자... 전멸했던 게 아니었나?”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면 아주 초짜거나, 정예 중의 정예겠지요. 불행히도 저 자는 후자였던 것 같고.”

“끙... 기사들에게 마법사들 보호 철저히 하라고 지시해.”

마법사 암살은 가장 효과적인 마법사 대응책 중 하나다.

보는 눈이 많은 전장에서의 암살은 무척 어려운 일이고, 마법사도 나름대로 자구책을 마련하고 호위병을 두겠지만, 죽음을 도외시하고 달려드는 암살단원을 막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직 마법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지금 아우럼 백작이 죽어버리면 곤란하다.

오스트 공작은 내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고는 연이어 호위기사들을 증파했다.

마법사들을 노린 암살 시도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대개는 막혔지만 드문드문 성공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 마법사를 죽이지 못해도 그의 집중력만 흔든다면, 그것만으로 이득이었다.

아우럼 백작에게는 최고의 기사들이 붙어있었지만 최정예만 남은 정오의 그림자도 만만치 않았다.

아우럼 백작에게 칼끝이 닿는 일은 없었으나 그는 종종 집중력을 잃었고, 성탑을 때리려던 황금방패는 물렁하게 녹아내렸다.

물론 우리 쪽에서도 당해주지만은 않았다.

오스트 공작은 그의 비밀 단원들을 내보냈는데, 아우럼 저택에서 정오의 그림자 단원들과 대등하게 암투를 벌이던 걸 떠올리면, 그 실력이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수드베리히 후작도 키만큼 금화를 쌓아서 고용했다는 암살단을 내보냈다.

궁정 마법사의 마법 폭격도 이내 잦아들었다.

마법전은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서로 암살자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 상황.

나는 오스트 공작에게 눈짓을 보냈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단은 아우럼 백작에게 호위기사를 더 보내줘야겠어. 그래야 그가 이 사태를 타개하지 않겠나.”

그것 자체는 당연한 일이니 수드베리히 후작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스트 공작은 기사들을 아우럼 백작 쪽으로 보냈는데,그들 사이에 왜소한 체격을 가진 자들이 섞여 있었다.

오스트 공작이 보내준 호위 기사들은 이제껏 몇 번이고 아우럼 백작을 구해냈다.

그러니 아우럼 백작은 이번에도 안심하고 다시 마법을 휘둘렀다.

거대한 황금 방패가 적 성탑을 두들기는 것으로, 다시 마법전이 재개되었다.

아우럼 백작은 궁정 마법사들을 상대하기 위해 마력을 아끼지 않고 쏟아부었다.

그로서는 이번 전쟁에서 화려한 활약을 벌여 죄를 갚고 공을 쌓겠다는 생각도 있겠지.

어쨌거나 끝까지 고생해주는 늙은이다.

그래도 저 늙은이는 오래 괴롭히지 않고 금방 보내줄 테니 그걸로 공에 대한 보답은 되지 않을까 싶다.

아우럼 백작은 두 팔을 넓게 펼치고 거대한 황금 방패를 소환해냈다.

성탑을 통째로 가릴만한 크기에 적들은 압도 당해서 할 말을 잊었다.

­ 우르르르릉...

황금 방패가 떨어져 내리면서 천둥 소리가 울렸다.

궁정 마법사들은 사력을 다해 황금 방패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예정된 운명을 막을 수는 없었다.

황금 방패는 성탑을 직격했다.

아우럼 백작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 등 뒤에서 칼날이 번뜩였다.

­ 콰르르릉!

성탑이 무너져 내림과 동시에, 아우럼 백작도 쓰러졌다.

“비열한 국왕이 아우럼 백작을 암살했다!”

오스트 공작이 보낸 호위기사들은 그렇게 외치며 암살자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암살자들과 격투하는 과정에서 아우럼 가문의 적자들 또한 죽거나 크게 다쳤다.

***

마지막 성탑이 무너져 내림과 동시에 병사들이 슈베른 궁성 안으로 진입했다.

그 안에 온갖 함정과 몹쓸 계략이 난무할 게 분명해서, 정예한 병사들로 선발대를 꾸려 보냈다.

첫 번째로 보낸 부대는 전멸해서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부대는 도망친 병사들만이 간신히 돌아왔다.

그래도 그들 덕분에 내부의 현황을 파악해서, 네 번째로 보낸 부대에서부터는 제대로 퇴각해서 돌아왔다.

다섯 번, 여섯 번째 부대는 조금 더 깊이 나아갔다.

일곱 번째에야 궁성을 온전히 장악했다는 보고가 올라왔고, 여덟 번째 부대는 밀실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제야 나와 두 대귀족은 몸을 일으켰다.

슈베른 궁성 안은 생각보다 훨씬 좁고 음산했다.

두꺼운 석벽 구석진 곳에는 이끼가 끼어서 퀴퀴한 냄새를 풍겨댔다.

폰세르크 국왕이 그렇게 계략만 꾸며대는 성격이 됐던 건 이런 곳에서 평생을 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걸로 면죄부를 줄 생각은 없지만.

나는 석벽을 손가락으로 퉁겨보며 천천히 복도를 거닐었다.

바로 앞에는 오스트 공작과 수드베리히 후작이 나란히 걸으며 떠들어대고 있다.

“이리 보니 정말 끔찍한 성이 아니야. 후작이라면 여기서 살겠나?”

“글쎄요. 왕관이라도 닦으면서 살기에는 아주 제격인 성이 아닙니까.”

“헛. 폰세르크는 바로 그렇게 살다가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거 아닌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할 말이 없군요. 국왕을 잘못 모신 대신들 탓도 크다고 생각합니다마는.”

“아, 그 대신들이 바로 저기들 있군.”

오스트 공작은 사로잡힌 대신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복도 귀퉁이에 무릎 꿇려있었다.

대신들은 애써 의연한 척했지만, 칼키움 가문의 적자들만큼 연기력이 좋지는 못했다.

그들은 삐질빼질 땀을 흘리며 죽음을 두려워했다.

그들의 앞에 강철의 손아귀 기사들과 궁정 마법사들의 시체가 널려 있으니 더욱 두려울 법도 했다.

“키토렌! 히팅! 마뉴엘! 자네들이 이리 될지 누가 알았겠어?”

오스트 공작은 껄껄 웃으며 대신들의 얼굴을 밟았다.

대신들은 코가 부러져 코피를 흘리면서도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했다.

“공작님, 부디 살려만, 살려만 주십시오...”

“물론 살고 싶겠지. 그 많은 재화와 아리따운 여인들, 널찍한 저택과 빛나는 보화들을 두고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는 말이야.”

가진 자들은 가진 것을 잃는 것이 두렵다.

그렇기에 모든 걸 잃는 죽음이 가장 큰 복수가 되는 거겠지만.

바로 죽이기에는 너무나도 아쉽다.

미녀의 젖가슴이나 주무르며 조용히 살려고 했던 나를 여기까지 끌어낸 죗값은 치러야지.

“다른 자들은 몰라도 정무대신만은 제가 처단해야겠습니다.”

정략을 실행한 것은 국왕이었지만, 그것을 짜낸 것은 정무대신이었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저 놈만은 내 손으로 죽여야겠다.

하지만 오스트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되지, 백작.”

“... 그를 살려두려 하십니까?”

“그럴 리가 있겠나. 나도 이 놈에게는 원한이 많단 말이지. 그러니 내가 처단하고 싶다 이 말이네.”

“나도 마찬가질세. 뭐, 우리 말고도 정무대신의 목을 원하는 자는 왕국에 넘쳐나겠지만.”

여자도 아니고 남자를 갖고 싶어서 다투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노회한 오스트 공작이 금세 꾀를 냈다.

“그럼 이렇게 나누세. 가장 끔찍한 벌을 떠올린 자가 정무대신의 처단권을 가지는 게지. 물론 자신이 떠올린 가장 끔찍한 벌로써 말이야.”

“그거 좋군요.”

“그거라면 찬성입니다.”

정무대신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와 운명이 그리 다르지 않을 다른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일단 나부터 말하자면 말이야. 커다란 솥을 만들어서 저 자의 식솔과 친지들을 모조리 모아 찔 걸세. 그 위에 정무대신을 매달아놓으면, 아내와 자식들의 열기로 제 몸이 천천히 익어가지 않겠는가?”

정무대신은 듣기만 해도 끔찍한지 눈을 감았지만, 수드베리히 후작은 아랑곳 않고 자신이 생각한 벌을 읊었다.

“내 영지의 남쪽 끝에 신비한 섬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반나절은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나머지 반나절은 비가 내리지요. 이제 이 자를 그 섬에 보내고 몸에 피와 꿀을 잔뜩 발라서 묶어놓으면, 낮에는 벌레들에게, 밤에는 물고기에게 온종일 뜯기게 되지 않겠습니까?”

수드베리히 후작은 자신의 벌이 가장 끔찍한 벌이라 자신했지만, 나도 내가 생각한 벌에 나름 자신이 있었다.

“저는 항상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수인은 짐승과 동혈의 인간이 교배해서 나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은혈 귀족을 짐승과 흘레붙이면 어떻게 될까, 라는 겁니다.”

“... 허! 정말 백작다운 발상이군!”

“하여튼, 마침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딱 좋은 소재가 생겼으니 실험을 해보려고 합니다. 정무대신의 새끼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 아침에는 암퇘지와, 저녁에는 수퇘지와 교배시켜볼 겁니다.”

정무대신은 전혀 웃지 못했지만, 기사들은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오스트 공작도 물론 걸걸 웃었다.

“전부 다 독특하고 재밌는 발상들이라 무엇 하나를 고르기가 힘들군. 이럴 바에는 그냥 다 해보는 게 어떻겠나?”

“나쁠 것 없지요. 그럼 정무대신이 실험 도중에 죽지 않도록 명의를 붙여야겠습니다.”

“조절을 잘못해서 죽게 한 사람은 술을 사는 걸로 하지요.”

정무대신은 바락바락 고함을 지르며 버텼지만, 기사들에게 머리카락이 붙잡혀 질질 끌려 나갔다.

다른 대신들의 운명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궁성 밖으로 끌려나가 병사들에게도 조리돌림 당할 것이다.

대신들의 운명을 결정짓고 나면, 이제 남은 것은 왕가 뿐이다.

왕을 끌어내리거나 죽인 전례가 한 번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왕을 벌한다는 개념 자체가 익숙지 않고 낯선 것임은 분명했다.

오스트 공작과 수드베리히 후작은 조금 주저하며 서로 눈치를 보았다.

결국 내가 나서야 했다.

"그리 망설일 필요가 무에 있습니까? 국왕은 의무를 저버렸고, 우리는 그를 징벌하러 왔습니다. 그래서 싸웠고, 이겼지요. 이제는 축배를 들 일만 남은 게 아닙니까?"

내 말에 오스트 공작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백작 말이 옳아. 폰세르크는 졌고, 우리는 이겼으니 이제 축배를 들 일만 남은 게지."

"그럼, 축배를 들기 전에 잠시. 우리의 안쓰러운 국왕 전하를 만나러 가볼까요."

나는 고갯짓을 하고는 반쯤 가려져 있는 밀실의 문을 열었다.

자욱한 먼지 속에 한 인영이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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