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143화 (143/166)

〈 143화 〉 전리품 분배

* * *

안쪽의 밀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공기조차 무겁게 느껴지는 암울한 공간이었다.

탁자 앞에 앉아 있는 늙어 보이는 사내가 폰세르크 국왕이었다.

그의 목은 왕관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할 정도로 얇았는데, 그래서 굳이 칼로 치지 않아도 스스로 부러져버릴 듯 했다.

“오스트 공작, 수드베리히 후작, 그리고... 레시아르 백작.”

잔뜩 쉰 목소리에, 오스트 공작은 혀를 끌끌 찼다.

“국왕 전하. 폰세르크 자네.”

“폰세르크 자네라니... 짐은 이 나라의 왕이다. 예우를 갖춰라.”

나는 곧장 탁자를 발로 차서 뒤엎었다.

“왕관을 내려놓을 날밖에 남지 않은 자는 국왕이 아니라 폐주(??)지.”

폰세르크는 넘어진 탁자를 지켜보다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등에는 시퍼렇게 핏줄이 섰지만, 승패는 이미 명확히 갈린 후.

그는 내게 한 마디 대꾸도 하지 못했다.

오스트 공작은 그래도 나름 국왕과 친분이 있어서 조금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그러게 왜 그리 욕심을 내었나? 그리 추잡한 수를 쓰지만 않았더라도 적당히 성군 소리를 들으면서 통치할 수도 있었을 텐데.”

폰세르크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권력은 집중되어야 하니까. 언제까지고 영주들이 조각난 땅에서 나뉘어 다툰다면 왕국은 안에서든 밖에서든 잡아먹히고 말 테니.”

“그래서 독물과 괴수로 권력을 집중하려 했나?”

“...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테지. 마음대로 하게. 이제 자네들은 승자고 나는 패자일 뿐이니.”

나는 밀실을 둘러보고 국왕에게 물었다.

“왕자들은 어디 있나?”

“탈출시켰지. 자네라면 안 그랬겠나?”

이거 귀찮게 됐다.

왕자들이 궁성 밖으로 탈출했다면 분란이 길어질 텐데.

하지만 오스트 공작은 밀실 밖으로 고갯짓을 하더니, 추레한 몰골의 남자 둘을 끌어오게 했다.

장남 츠빙거 왕자와 차남 루코스 왕자였다.

그들의 손목에는 옥색의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폰세르크는 어금니가 부서질 정도로 턱을 깨물었다.

“어떻게...”

“이상한 일도 아니지. 가라앉는 배에서도 쥐새끼들이 가장 먼저 탈출하는 법인데, 그 쥐새끼들에게 조그마한 널빤지라도 던져주면... 응?”

왕자들을 믿고 맡길 정도의 최측근들이 국왕에게 등을 돌렸다는 말이었다.

폰세르크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지만, 그가 과연 그럴 자격이 있나 싶다.

어쨌거나 그는 왕자들까지 죽게 할 수는 없었던지 엎드려서 애원하기 시작했다.

“나 하나로 족하지 않은가? 자네들은 왕가를 절단 낼 생각인가?”

“왕가를 절단 낼 생각은 없네. 왕가는 말이지.”

직계가 끊기고 방계가 새로운 직계가 된다.

그리 드물지도 않은 일이다.

“이럴 수는 없다... 이 나라의 주인인 내게 이럴 수는...”

폰세르크 국왕은 부들부들 떨면서 마력을 일으켰다.

금혈인 그는 그 스스로가 뛰어난 마법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대귀족도 마찬가지.

우리가 지금껏 전투에 나서지 않은 것은 왕가의 일원들을 압박하기 위해서기도 했다.

물론 우리 휘하의 기사들도 가만히 있지 않고, 폰세르크와 왕자들에게 곧장 검을 겨누었다.

검 끝을 바라본 폰세르크는 분통을 터뜨렸다.

“이... 이런... 자네들이 어찌... 이 나라의 주인인 내게...!”

“고귀할 수는 없더라도 고상한 척은 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도 국왕으로 대우해줄 때 얌전히 승복하시게. 그렇지 않으면 돼지 잡듯 두들겨 패야 하니 말이야.”

폰세르크는 눈썹을 떨다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바마마!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맞서 싸우셔야 합니다!”

차남 츠빙거 왕자가 마력을 휘둘러 자신의 수갑을 깨부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얇디얇은 수갑조차 깨부수지 못하고 오히려 앞으로 휘청거렸다.

오스트 공작은 혀를 끌끌 찼다.

“소용없네. 저항하려고 했다면 그 수갑이 채워지기 전에 저항 했어야지.”

“이, 이게 무슨...”

“아우럼 가문의 보배야. 딱 세 개밖에 없는데다가 한 번 사용하면 평생 그대로 귀속되는 대단한 귀물이네. 이런 귀물로 끝을 배웅해주는 것이 예우가 아니면 무엇이 예우란 말이야?”

“그 배신자들이 끝까지...!”

“너무 노여워 말게.”

아우럼 백작은 암살당했고, 그의 후계자 후보들도 죽거나 중상을 입었으니.

그들 가문의 앞날도 이들만큼이나 깜깜한 것은 틀림없었다.

분노한 폰세르크와 그의 아들들에게는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 사실이겠지만.

“손목을 내미시오.”

동부의 마법사가 폰세르크에게도 옥색의 수갑을 들이밀었다.

폰세르크는 본능적으로 저항하려고 했지만 내가 불길로 두 왕자의 머리카락을 조금씩 그슬리자, 분노에 찬 신음소리를 흘리면서 손을 내밀었다.

찰칵.

그에게도 수갑이 채워지자, 기사들이 그의 손목과 발목을 꽁꽁 묶어서 돼지처럼 끌고 가려 했다.

그들은 이제 고문실로 끌려갈 것이다.

단지 괴롭히기 위한 것은 아니고,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는 왕가의 비밀들을 알아내기 위해서다.

“드디어 끝났군.”

수드베리히 후작이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나는 이걸로 복수를 끝마칠 생각은 없어서, 파샨에게 몰래 지령을 내리고 내보냈다.

오스트 공작은 내가 고갯짓하는 걸 보았지만 딱히 말리지는 않았다.

***

끝났다고 말했지만, 전후 뒤처리는 전쟁만큼이나 신경 써야 할 게 많은 작업이었다.

이것은 당연히 대귀족들의 일이다.

슈베른 궁성 안에서는 그나마 식당이 가장 넓고 환했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리로 자리를 옮겨서 과일과 술을 먹고 마시며 잠시 쉬었다.

“아. 그러고 보니, 왕가의 여자들을 보지 않았군.”

오스트 공작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수드베리히 후작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반문하다가, 뒤늦게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이권을 갈라먹을 일밖에 남지 않은 지금, 왕가의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의도는 나를 포섭하기 위한 것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오스트 공작의 소유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가 먼저 화두를 선점했다는 점은 크다.

수드베리히 후작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왕가의 여자들에게도 죄를 따지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 일단은 얼굴부터 보지요.”

여기서 왕가의 여자들이라 함은 왕비와 왕세자, 그리고 공주.

세 명의 가장 고귀한 여자들이었다.

그녀들은 곧 기사들에게 끌려 왔다.

물론 끌려왔다고 해서 밧줄에 묶이거나 팔을 잡혀 온 것은 아니다.

그녀들은 당당하게 제 발로 걸어왔다.

하지만 그 태도는 패배자로서 위축된 것을 숨기기 위하여 과장된 것이었다.

“무례하다고 하지는 않겠어요. 내가 그대들에게 무례하다고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니까. 하지만 불쾌하군요.”

왕비는 서른 후반 정도로, 검은색 머리카락을 위로 땋아 올린 요염한 상의 미인이었다.

마흔을 넘으면 좀 그렇지만 서른 후반이면 괜찮지.

고상한 디자인의 드레스 너머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젖가슴와 엉덩이 라인이 성욕을 자극한다.

내가 훑어보는 시선을 향하자 왕비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레시아르 백작! 그 시선은 매우 신사적이지 못하군요!”

왕비에 향한 시선을 가리듯 나선 것이 왕세자인 츠빙거의 처인 왕세자비.

그녀는 금발 벽안의 인형 같은 외모대로 머릿속에 꽃밭이 피어나있는 듯 했다.

아마도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영지전에서야 적당히 포로를 예우하고 귀족가 여성을 건드리는 일도 그다지 없다지만, 이번의 싸움은 서로의 명운을 건 전면전이었다.

죽을 듯이 다툰 만큼 영지전에서의 예법을 지킬 리가 없는데.

어쨌거나 이 여자는 프렌다처럼 깜찍하면서 아마트리체만큼이나 예뻤기 때문에 꼭 저택에 가져가고 싶다.

“…….”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마지막 여성은 유페리아 공주.

그녀는 카산드라 공주의 동생으로, 분홍색 머리칼을 단정히 묶은 차분한 미소녀였다.

프렌다의 머리카락은 쨍한 분홍색이라면, 유페리아 공주의 머리카락은 연분홍빛이라는 점에서 조금 달랐다.

어쩐지 안경을 씌우면 잘 어울릴 것 같은 인상이다.

그녀는 변경백 아들과 약혼했던 사이이기도 하다.

변경백이 참전했더라면 굉장히 어색하게 되었겠지만,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내가 그의 아들의 약혼녀를 취해도 말릴 사람은 없게 되었다.

나는 그녀들을 천천히 살펴보면서 와인을 머금었다.

오스트 공작과 수드베리히 후작은 둘이서 치열한 언쟁을 펼치면서도 왕가의 여자들에게 연좌제와 그 죄에 따른 처분을 고지했다.

물론 그 처분은 나에 대한 노예로서의 귀속이었다.

“그런 야만적인! 나는 금혈 귀족이에요! 노예라니! 나를 노예로 한다니! 누구도 그럴 수는 없어요!”

왕세자비는 머리를 흔들었지만 왕비와 공주는 그녀들의 운명을 이미 직감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왕비와 왕세자비와 공주를 모두 가까이 끌어당겼다.

“고귀하신 분들. 당신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을 겁니다. 스스로의 목숨이든, 지위든, 친한 친구든, 재물이든, 가족이든, 혹은 지아비나 약혼자이든. 그 모든 것들을 나는 이렇게...”

손바닥 위에 화염을 일으킨다.

크기는 작지만 온도는 지극히 높은 푸른색의 불꽃.

“불태워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지요.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그... 그렇지만... 나는 왕세자비로, 금혈 귀족이고...”

“패자(?者)이고.”

왕세자비는 급히 고개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녀를 도와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왕비와 공주마저도 이미 운명을 받아들이고 침울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러니 내게 잘 보이는 게 좋을 겁니다. 나는 나한테 잘하는 여자한테는 잘해주는 편이니까. 물론 여자가 셋이나 있으니 공평하게 잘 대해줄 수는 없겠지만...”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손을 내밀었다.

복속을 다짐하는 순서대로 아껴주겠다는 제스쳐였다.

의외로 공주가 가장 먼저 무릎을 꿇고 내 손등에 키스했다.

그 다음으로 왕비가 눈을 질끈 감고 손등에 키스했다.

마지막으로는 역시나 현실 인식이 좀 떨어지는 왕세자비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친위대원들에게 떠밀려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그녀들에게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