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 전리품 분배
* * *
엉덩이에 와닿는 촉감이 기분 좋다.
세상에 이렇게 호화스러운 의자는 없겠지.
손을 뻗어 둥근 궁둥이를 어루만지자, 왕비는 신음소리를 흘렸다.
금혈 귀족인 그녀가 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것은 아닐 테니, 치욕스러워서 그러는 거겠지.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뒤로 목을 젖혔다.
크지는 않지만 적절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젖가슴이 후두부와 목을 받쳐준다.
왕세자비는 질색해서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바싹 얼어붙었다.
이 좋은 날에 술이 빠질 수 없지.
“와인.”
붙잡아온 시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공주의 손에 와인을 따랐다.
공주는 곱게 모은 손에 받은 와인을 옮기다가 주르륵 흘려버렸다.
나는 가차 없이 손을 들어서 왕비의 궁둥짝을 후려쳤다.
“아흑!”
“왕비 전하!”
왕세자비가 기겁해서 몸을 뒤로 뺀다.
목 뒤를 받쳐주던 베게가 없어지니까 화가 나서, 다시 한 번 의자를 후려쳤다.
“아윽...!”
“배, 백작! 왕비 전하께 대체 이 무슨 무례입니까! 이런 짓을 하고서도 어찌 신사임을 자처한단 말입니까!”
나는 말없이 손을 들었다.
짝!
“그만하세요! 그만하시란 말입니다!”
짜악!
“왕비 전하! 이... 이... 무도한 작자!”
짝! 짝! 짝!
고부관계가 별로였던 모양이다.
아니면 왕세자비는 머릿속이 꽃밭이다 못해 텅 비었던지.
며느리가 매 맞을 일을 자꾸 벌어다주는 덕에 시어머니 엉덩짝만 부어오른다.
결국 유페리아 공주가 나섰다.
“세자비 저하. 그만하세요. 저하께서 왕비 전하를 오히려 다치게 하고 있습니다.”
“공주님? 저는 그럴 의도가...”
“의도가 어떻든 결과가 그렇습니다.”
공주는 어미가 치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지만, 내게 무어라 항변하지는 않았다. 이 상황에서 내게 대들지 않을 정도의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데...
제 언니인 카산드라 공주보다 낫군.
공주는 다시 손에 와인을 받아서 내 입가에 옮겼다.
이번에는 거의 흘리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받아온 와인을 천천히 다 마셨다.
왕비의 허리를 의자로, 왕세자비의 가슴을 목받침으로, 공주의 손을 와인잔으로.
이런 호사를 즐긴 건 역사를 다 뒤져봐도 나 밖에 없지 않을까.
내가 호사를 즐기는 동안 오스트 공작과 수드베리히 후작도 내 눈치만 살피며 기다리고 있다.
차기 국왕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내가 밀어주는 쪽이 이길 수밖에 없는 구조인 만큼, 지금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수드베리히 후작은 물론 오스트 공작도 긴장된 표정을 하고 있다.
내가 마지막 순간에 그의 뒤통수를 치고 수드베리히 후작의 손을 잡을 가능성도 있으니.
하지만 딱히 그럴 생각은 없다.
앞으로 못 해도 십 년은 정국이 불안정하게 돌아갈 텐데, 그나마 왕국을 건사하려면 귀족 연합체가 제대로 기능해야 하니까.
나는 약속한대로 오스트 공작에게 무게를 실어줄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드베리히 후작이 말을 꺼내기 전에 내 의사를 밝힐 필요가 있다.
수드베리히 후작이 오스트 공작과 다른 이를 옹립하겠다는 말을 꺼낸 후에 오스트 공작이 미는 자가 국왕이 되면, 후작으로서는 막대한 정치적 부담을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서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레시아르 가문의 번성은 지금의 삼두정치에서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을테지.
나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에티렌 다키아노스는 왕가의 피를 이은 분으로 총명하고 덕이 많으니 왕관의 무게를 가히 짊어질만하지 않겠습니까?”
수드베리히 후작은 내 말에 얼굴을 찌푸렸지만, 곧장 표정을 관리했다.
내가 오스트 공작의 손을 들어준 것이 내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가 다른 이를 옹립하겠다고 말하기 전에 내가 결론을 지어주었다는 점에서 상황이 아주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는 오스트 공작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티렌님은 왕재(王?)를 지니신 분임을 내 익히 알고 있었지.”
“후작도 에티렌님을 지지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수드베리히 후작이 그렇게 말하자, 오스트 공작도 수드베리히 후작을 배려해서 차기 왕비는 수드베리히 후작이 추천하는 자로 하고, 몇 가지 이익을 덧붙여주었다.
나도 물론 상당한 이익을 챙겼다.
우선 공작위와 서부의 맹주라는 칭호.
이걸로 나도 명실상부한 서부의 지배자가 되었다.
켈자르 백작가는 물론 파티스트롬 공작가까지 내 영향권 안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수드베리히 후작도 공작으로 올라가고, 반대로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데어빈터 변경백은 공작으로 내려가면서 왕국은 다섯 공작의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희소성이 옅어진 감이 없지 않긴 하지만, 그래도 공작의 지위는 크다.
스스로 공국을 선포할 수도 있고, 그 공국 안에서 법을 만들 수도 있다.
"왜 그리 웃나?"
"내 영지에서 어떤 법률을 만들지 고대가 되어서 웃습니다."
"실 없는 사람 보게."
어쨌거나, 그 다음으로 나누어 가질 것은 왕실 재보인데,왕실 금고에는 아직도 막대한 양의 금화와 보물들이 잠들어 있었다.
강독을 제조하고 전쟁을 벌이면서도 이만한 축재를 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이 막대한 왕실 재보는 나와 오스트 공작, 수드베리히 후작, 그리고 차기 국왕이 될 에티렌 다키아노스가 공평하게 갈라먹기로 했다.
의논하는 도중에 고문실에서도 따끈따끈한 정보가 전해져왔다.
고문에 못 이긴 왕과 왕자들이 구전으로만 전해진 왕가의 비밀금고를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그 목록을 대략적으로만 적었는데도 입이 쩍 벌어질 정도였다.
오스트 공작은 목록을 하나씩 짚어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가 안 가는군. 이걸 절반만 털었어도 전쟁의 향방이 바뀌었을 텐데. 이걸 그대로 끌어안고 있다니.”
“병무대신이 죽건 말건 마법사들을 궁성 안에 처박아둔 것을 보면 모르십니까. 폰세르크는 성정이 원래 그런 자입니다. 끝내 못 써도 제 손에 쥐고 죽으려는 자.”
“참. 그 말 그대로군.”
덕분에 우리만 살 맛 났다.
비밀금고의 존재는 구전으로만 전해지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것은 다른 귀족들이나 심지어는 차기 국왕에게도 나눠줄 것이 없이, 우리 셋이 나눠먹을 수 있다.
"어디 한 번 보자고."
비밀금고는 왕도 북부의 산기슭에 묻혀 있었기에 지금 당장 파올 수는 없다.
그래서 고문실에서 따끈따끈하게 전해진 것은 비밀금고에 들어있는 보물의 목록이었다.
금은보화는 물론이고 큼지막한 마력석에, 마도구는 물론이고, 고문서, 명화, 그리고...
“네마로우스의 성혈(?血)! 이게 사실인가!”
위세를 잃기는 했지만 구원자로 추앙받는 자의 혈액까지 있었다.
“이것만 있으면 황금의 시대를 재현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설마 그렇기야 하겠습니까만... 수백 년 정체된 금혈은 넘어설 수도 있겠지요.”
황금의 인간의 혈액도 본 나로서는 그다지 감흥이 없지만, 오스트 공작과 수드베리히 후작은 다른 듯 했다.
그들은 희희낙락해서 똑같이 갈라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금혈이니 황금의 시대니.
하이브의 마석에 내 마력과 황금마법사의 피만 있으면 되는데.
게다가 나는 네마로우스의 정체에 대해서 대략 짐작이 간다.
그러니 그 놈의 피를 가지는 건 그다지 의미가 없는 일이지.
나는 왕비의 엉덩이나 만지작거리면서 다음 목록이 뭘지 기대했다.
다음 목록에는 강독이 적혀 있었는데, 이건 대귀족들의 입회 하에 모두 폐기하기로 했다.
빼돌리고 싶은 생각이 없지는 않지만 혹시라도 들키면 연합체가 무너질 테니.
“호... 마수의 알까지?”
특이한 걸 발견한 오스트 공작이 탄성을 질렀다.
“비밀 금고 안에 마수의 알까지 넣어두었답니까?”
“백작, 아니, 이제는 레시아르 공작이지. 공작도 친숙한 물건이야.”
“친숙하다니... 혹시 고타마의 알입니까?”
“옳아. 옳아.”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사실 날아다니는 탈 것은 매우 귀하다.
고타마가 나를 태우고 활약했던 걸 손꼽아보면 녀석의 가치는 결코 낮지 않지.
그런데 이게 왕실 비밀 금고에 있을 정도로 값진 거라니... 괜히 그 알을 구해다 준 상인 녀석에게 막 대했던 게 미안해지는 걸.
어쨌거나 고타마의 알은 꼭 하나 더 얻어가고 싶은데.
고타마에게 짝을 찾아주면 앞으로 수십 년 뒤 레시아르 백작령에서는 고타마를 탄 기병이 양성될지도 모른다.
실현 가능성이 낮은 일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고타마를 두 마리 가지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이점이 된다.
나만큼이나 욕심 많은 두 대귀족도 군침을 줄줄 흘렸다.
“아니, 레시아르 공작은 이미 한 마리 가지고 있지 않나?”
“한 마리니까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마수라도 짝이 맞아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알에 있는 녀석도 암컷이면 어쩌려 그러는가?”
“암컷이 암컷과 짝짓지 못한다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오스트 공작은 허허 웃었다.
“그럼 네마로우스의 성혈이라도 포기하게. 그러면 마수의 알을 주지.”
“뭐, 그러지요.”
“... 정말인가?”
“사내놈의 피를 아낄 이유가 무에 있겠습니까. 성혈이니 뭐니 하는 건 두 분이 나눠 가지시고, 대신 마수의 알은 제가 갖는 걸로 하지요.”
오스트 공작과 수드베리히 후작은 내가 말을 바꿀새라 얼른 그렇게 하자고 정했다.
그리고 나서도 전리품 분배는 한참 이어졌다.
우리는 웃고 떠들고 때로는 기싸움도 하면서 즐겁게 왕가의 보물을 나누어 가졌다.
시간이 흘러, 목을 축인 와인으로도 슬슬 취기가 돌 무렵.
오스트 공작과 수드베리히 후작은 자리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험. 어느새 시간이 이리 되었나?”
“궁성은 어두워서 빛이 안 드니 시간을 가늠하기가 어렵군요.”
오스트 공작과 수드베리히 후작은 늙으니, 살찌니 잠드는 것이 힘들다며 징발한 저택으로 돌아갔다.
"좋은 시간 보내게."
"알고 있겠지만 죽이면 안 되네. 그 작자들에게 원한을 품은 것은 레시아르 공작만이 아니야."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들이 식당을 나선 후, 나는 크게 기지개를 켜며 뒤에 서 있던 왕세자비의 볼을 꼬집었다.
"...!"
그래도 이제 좀 교육이 됐는지 소리를 지르지는 않는다.
이 정도면 되겠지.
너무 기를 죽여 놓으면 앞으로 있을 유희에 재미가 준다.
나는 세 여자들을 앞세우고 왕과 왕자가 있을 지하 고문실로 발길을 향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