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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149화 (149/166)

〈 149화 〉 귀환

* * *

슈베른 궁성의 이곳저곳에서 망치 두들기는 소리가 울렸다.

그렇다고 모든 망치가 똑같은 의미의 망치는 아니었다.

한 쪽에서는 복구를 위해 못을 박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파괴를 위해 탑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차기 국왕이 될 에티렌 다키아노스는 무난한 인물이지.”

성벽 위에 뒷짐을 지고 선 오스트 공작이 문뜩 말했다. 그의 옆에는 은표범 기사단과 아직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조직의 단원들이 서 있었다.

내 뒤를 따라온 파샨과 체닐린은 긴장해서 어깨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오스트 공작을 아는 나로서는 그렇게 긴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는데.

그는 나만큼 교활하고 계산 빠른 인간이기에, 지금 이 시점에서 대귀족 간의 분쟁은 무용하다는 것을 나만큼이나 잘 알고 있다.

나는 그의 옆에 가서 마찬가지로 뒷짐을 지고 선 채로 대답했다.

“오스트 공작께서 세우셨으니 당연히 무난한 인물이었겠지요.”

“옳아. 걸출한 인물을 세웠다가는 무너진 다키아노스 왕가의 위세를 드높인다고 개짓거리를 할 테니 말이야.”

“성탑을 부수는 것도 벌써 차기 국왕에게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주지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우리 대귀족은 언제든 다시 왕도로 돌아와서 궁성을 불태울 수 있다고.”

“그런 일이야 또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왕가가 멍청한 선택을 반복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

성벽 아래로는 왕도의 참상이 그대로 드러났다.

징발과 약탈 때문에 성한 집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공터마다 시체를 가매장한 탓에 지표면이 울퉁불퉁하게 되어있었고, 골목 으슥한 곳에서는 점호를 빠져나간 병사들이 제 욕구를 풀고 있었다.

오스트 공작은 그 모습을 흘려보내고는, 뒤를 돌아 물었다.

“궁성 지하실에서 꽤 오래 있었다지. 좋은 시간 보냈나?”

“좋기야 좋았습니다만, 방해받지 않았다면 저택에서 보낼 시간을 보상받을 만큼 좋았는지는 잘 모르겠더군요.”

“그렇다면 레시아르 공작도 늙은 게야.”

“그렇습니까?”

“젊은 것들이 싸돌아다니지. 노인네들한테 집이 제일이거든.”

전생의 나이까지 더하면 나도 마냥 젊은 나이는 아니니까.

오스트 공작의 말에,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오스트 공작이 한 마디를 더 했다.

“솔직히 말해도 되나?”

“그러시죠.”

“자네가 어서 집에 돌아갔으면 좋겠어.”

“왜 그러십니까?”

“자네가 두려우니까.”

나는 픽 웃었다.

“동부의 주인이시자 이제는 차기 국왕의 섭정이 되실 분이 어찌 저를 무섭다 하십니까?”

“이번 사태로 가장 크게 얻은 것이 누구라고 생각하나?”

글쎄. 일단 파워게임에서 밀린 수드베리히 후작은 제외.

그럼 오스트 공작과 나, 둘 중 하나인데...

“자네, 아니, 레시아르 공작이지.”

“그야 보는 관점의 차이 아니겠습니까.”

“이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도 나는 오스트 공작이자 동부의 주인이었어. 하지만 자네는 서부의 패권도 확실히 잡지 못한 여러 백작 중 하나였지. 하지만 이제 보게. 자네는 이 나라에서 손꼽는 대귀족이 되지 않았나? 그런 자네가 왕도에 계속 남아 있는다면 언젠가는 왕가를 흡수할 것 같단 말이야.”

“지나친 생각 아니십니까? 그건.”

오스트 공작은 잠시 쉬었다가 말을 계속했다.

“하늘이 돕는 사람이 있어. 천운이라고 할까. 그런 사람이 나오면, 절대 맞서려고 해서는 안 돼지. 호의를 벌어두고 그와 맞서는 일이 없기만을 바라야지. 젊었을 적의 폰세르크가 그랬는데...”

“지금의 저도 그런 자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 하지만 내가 늙어죽기 전에 바이스 레시아르 제1세가 즉위한다고 해도 그리 놀랄 것 같진 않구먼.”

“뭐, 그리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저는 오스트 공작께서 바라시는 대로 서부로, 집으로 돌아갈 테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정 걱정되시면 가끔 동부의 미녀들이나 보내주시죠. 그럼 제가 치마폭에 싸여서 흥청망청 지내주지 않겠습니까.”

오스트 공작은 껄껄 소리 내어 웃고는 그러겠노라고 약속했다.

며칠 후.

세 대귀족은 차기 국왕에게 조건적 충성을 맹세하고, 다시 각자의 영지로 돌아갔다.

***

왕도에서 레시아르 령까지 돌아가는 길은 참 멀고도 멀었다.

왕실 비밀 금고에서 턴 보물과 다른 귀족들이 알아서 바친 약탈품, 그리고 왕도의 미녀와 기술자들을 끌고 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카데미까지 이렇게 통째로 옮겨오실 필요가 있었습니까?”

파샨은 지평선 끝까지 늘어선 대열을 보면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노예로 끌고 온 왕도민들이 아카데미를 주춧돌 하나까지 빼서 짊어지고 옮기고 있었다.

징발할 수 있는 한계까지 우마와 수레를 징발하기는 했지만, 역시 아카데미를 통째로 옮기는 건 무리였나.

“나도 좀 후회가 되긴 해. 생각보다 너무 느려지고 있단 말이지.”

“그럼 지금이라도 포기하시면 안 될까요?”

“그건 안 돼. 레시아르 령에도 번듯한 아카데미 하나쯤은 세워야지.”

레시아르 령을 공국으로 선포하려면 그 격에 맞게 기반시설들을 새로 세워야 한다.

도로나 댐 같은 거야 금화를 바르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지만, 아카데미 같은 특수한 건물은 처음부터 지으려면 한 세월이 걸릴 거란 말이지.

그래서 왕도민들을 노예로 끌고 오는 대신 아예 석재까지 싹 다 옮기려고 한 것인데.

“이러다가는 내년 넘어서야 돌아가겠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수드베리히 후작... 아니, 공작이 자기 배를 이용하게 해줄 테니까 항구까지만 참아.”

파샨은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군례를 올리고는, 친위대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대열 선두로 떠나갔다.

기사들은 노예들을 다루는 것을 마뜩치 않아했고, 보병들은 너무 무식해서 노예들을 학대하다가 죽이지나 않으면 다행이라서, 결국 노예들을 다루는 일은 친위대원이 할 수밖에 없었다.

내 영지로 돌아가면 친위대원들에게는 따로 상을 내리고 조직도 좀 확충을 해야겠다.

어쨌거나 우리는 한 달 정도 걸려 토캄 남작령에 도착했고, 거기서 다시 한 달 정도 걸려 수드베리히 공작이 열어준 항구에 간신히 도착했다.

배를 타고 항구도시 헤시아스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거기에서 다시 주도 아티아까지는 또 한 달이 걸렸다.

차라리 나만 앞서 갈까 했지만, 그럼 뭔가 기분이 안 산단 말이지.

내가 데려간 병사들과, 내가 끌고 온 노예들, 그리고 내가 쟁취한 보물들과 함께 입성해야 제대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 것 같아서 애써 참기로 했다.

물론 그 기간 동안에는 굳이 성욕을 참을 필요가 없어서, 오스트 공작과 수드베리히 공작이 넘겨준 왕도의 미녀 이백 명을 나날이 바꿔치워 가면서 안았다.

그 사이 마력을 넣어서 쥐곤 하던 고타마의 알이 부화했다.

막 나온 고타마 새끼는 손바닥에 올려둘 만큼 자그마해서, 나는 심심할 때마다 녀석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삐, 삐!”

“우헤헤...”

파샨은 고타마 새끼가 내 손바닥 위에서 울 때마다 양젖을 먹이며 재밌어 했다.

“그 녀석이 마음에 들어?”

“네. 도련님. 귀엽잖아요.”

“글쎄. 난 귀여운지 잘 모르겠는데... 그렇게 마음에 들면 줄까?”

“저, 정말요?”

파샨은 깜짝 놀라서 펄쩍 뛰었다.

“그치만 그 성혈(?血)인가 하는 걸 포기하시는 대가로 얻어오신 거 아닙니까? 그런 걸 저한테...”

나한테는 딱히 그 성혈이라는 게 필요하지 않으니까.

게다가 파샨에게 준대도 파샨이 내 밑에 있는 이상 그것은 내 것과도 같은 것이고.

나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파샨에게 고타마 새끼를 주겠노라고 했다.

사실 지금까지 파샨이 내게 해준 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당연한 거지.

“대신 잘 키워야 해.”

“물론입니다! 으흑... 도련님...! 감사합니다...!”

파샨은 얼마나 좋았는지 눈물까지 흘렸다.

이러니까 괜히 내가 안 챙겨준 것 같네. 친위대원을 확충하면서 파샨한테도 이것저것 더 해줘야겠다.

그런 일도 잠시.

우리는 겨우 아티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

***

먼 길을 돌아오느라 행색이 꾀죄죄하게 된 병사들이 창칼을 갈고 옷을 빨았다.

아티아에 개선하기 전에 최대한 멋있는 모습을 갖추기 위해 힘을 내고 있는 것이다.

반면, 노예로 끌려온 왕도민들은 제대로 씻을 물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부유하고 풍요롭게 살아오던 왕도의 시민들이 처참한 몰골을 보여줄수록, 그것은 더 화려한 승리의 증명이 될 테니.

“... 공작님.”

기사 헬무트가 침울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민중의 기사라고 불리던 그로서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노예 취급당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나의 용맹한 기사 헬무트 경이여. 우리가 승리하고 돌아오는 날, 어찌 그리 어두운 낯을 하고 있는가?”

“공작님의 위대한 승리는 저의 마음을 밝히는 것이나, 이 많은 이들이 노예 생활을 할 것이고 생각하니 마음 한 편이 어두워집니다.”

“그렇다면 걱정 말게. 저 자들을 모두 노예로 팔아치울 것은 아니니까.”

“그, 그렇습니까?”

“당연하지. 이제 레시아르도 공국으로 거듭날 텐데, 레시아르 영지민만으로는 부족하지 않겠는가? 이들은 몇 년 정도 강제노동을 하고 나서는 자연스레 레시아르 공민이 될 것이야.”

헬무트의 얼굴이 밝아졌다.

“역시 공작님께서는 큰 뜻을 품고 계셨군요.”

“그러니 민중의 기사인 경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네.”

“알겠습니다. 공작님을 위해, 그리고 민중을 위해 충심을 다하겠습니다.”

그는 군례를 올리고 노예들 쪽으로 뛰어갔다.

아마 자기 몫의 보급품을 나눠주거나 하려는 모양이다.

파샨은 입술을 쭉 내밀었다.

차기 백여우 기사단장으로 그가 낙점된 것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오록스 단장은 도련님께 충성한 이래로는 다른 것들을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그런 인간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록스 단장의 딸인 타라는 기사단장을 맡기기에는 용력이나 마력에서 조금 아쉬운 점이 있고.

그래도 헬무트는 실력도 있는데다가 기사와 민중들의 지지를 동시에 얻고 있으니, 가끔씩 선의를 베풀게 하고 부리면 괜찮을 것이다.

“그래도 공작위까지 받았는데 기사단 두 개는 좀 적긴 하지. 이 참에 기사단도 몇 개 새로 만들자. 파샨. 너한테도 하나 줄까?”

“저는 도련님 옆에서 친위대장 하는 게 더 좋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 체닐린. 너는?”

“나... 말인가...? 음, 으흠...”

체닐린은 의외로 기쁜 듯 했다.

켈자르에서도 기사단장을 역임했으니, 새로 기사단을 창설한대도 단원들을 잘 이끌어주겠지.

“생각은 하고 있으라고.”

“알겠다... 고맙다.”

“응? 뭐라고?”

“아무 말도 안 했다!”

“고맙다고 한 거 다 들었어.”

체닐린은 귀까지 빨개져서 괜히 말한테 화를 냈다.

잠시 기다리는 사이, 아티아의 상공으로 폭죽이 올라왔다.

아직 한낮이라 폭죽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어떻게든 환영한다는 뜻을 보이려는 것 같다.

성문이 활짝 열렸다.

나는 말을 몰아 가장 먼저 성 안으로 들어갔다.

“레시아르 공작님 만세!”

“공작님 만만세!”

“국왕보다 고귀하신 분이시여!”

아티아의 시민들이 꽃잎을 뿌리며 나를 환영했다.

그들은 시뻘게진 얼굴로 열광적으로 외쳤다.

남자들은 팔을 치켜들었고, 여자들은 키스를 날렸다.

간혹 열기에 취한 여자 몇몇은 가슴을 내보이며 윙크하기도 했다.

그런 자들은 곧 무례하다고 다른 시민들에게 잡혀서 내려가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여기 모인 나의 백성들은 나를 사랑한다.

싸웠다 하면 이기고, 그 때마다 어마어마한 보배를 가져다주니 그럴 법도 하지.

“이들이 단순히 계산만 따져서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이오시스.”

타라와 함께 아티아에 남았던 이오시스가 가신들과 함께 마중을 나와서 내게 허리를 굽혔다.

“공작님께서는 이들의 지주(??). 이들은 공작님 백성이자 아들, 딸이고 종복입니다. 그러니 공작님의 승리가 곧 이들의 승리, 공작님의 행복이 곧 이들의 행복인 것이지요.”

“나를 우상화한다는 건가?”

“우상화... 예, 그 말씀 그대로에요. 레시아르 공작령은 앞으로 더더욱 넓어지겠지만, 이 곳 아티아의 시민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충성스러운 세력이 되겠지요.”

나는 이오시스와 이야기를 나누며, 또 열광하는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거리를 나아갔다.

서민들의 거리를 지나고 가면, 귀족들의 거리가 나온다.

성내 귀족들은 어린 아이부터 늙은이까지 일가족이 모두 나와서 나를 영접했다.

그들은 꽃잎 대신 비싼 향유와 술을 뿌리며 나를 맞이했다.

얼마나 술병을 부어댔는지 바닥에서 독한 냄새가 풍길 정도다.

“오늘 아티아의 거리는 한 삽 떠다가 그대로 주점에 팔아도 되겠군!”

내가 농담을 하자 다들 배꼽이 빠져라 웃어댔다.

내가 생각해도 별로 재미없는 농담이었지만, 이게 권력의 힘이지.

계속 말을 몰다보면, 저 멀리 저택이 보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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