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 귀환
* * *
저택은 언제 파괴되었냐는 듯이 단정한 모습이었다.
내가 떠나올 때만 했어도 저택 공방전의 여파로 너덜너덜했었는데. 지금 보니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라, 나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복구는 모두 끝마쳤고, 새로 증축할 수도 있었지만, 이데트 아가씨께서 저택을 어떻게 바꿀지는 공작님의 의사를 여쭙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시어...”
이오시스가 그렇게 설명했다.
역시 누님처럼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은 없단 말이야.
그렇지만 이번에 새로 데려온 미녀들이 워낙 많으니, 저택을 증축하긴 해야겠다.
어차피 공국을 선포하는 김에 아티아도 새로이 개발하려고 했으니 제대로 토목 공사를 벌여봐야지.
“참. 타라는?”
“타라 부관은 저택 공방전 때의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아서 와병 중이에요.”
“아직도 누워있단 말이야? 걱정인데...”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고 하지만, 다시 검을 잡는 것은 힘들 수도 있다고 해요.”
“상심이 크겠네. 병문안이라도 가야겠어.”
“공작님께서 그래주신다면 타라 부관도 기뻐하겠지요.”
이제 저기 보이는 저택의 대문은 활짝 열려 있다.
대문 앞까지 나와 있는 것은 세 첩실.
마티란 자작 루이사, 화리메 아우럼, 그리고 아마트리체 파티스트롬.
“공작님!”
아마트리체가 가장 먼저 내 쪽으로 뛰어왔다.
그러자, 질세라 화리메도 뛰었고, 루이사도 아기 루이즈를 품 안에 안고 뛰었다.
첩들이 그렇게 뛰자 시녀와 메이드들도 죽어라 뛰었다.
“다들 그렇게 뛸 것까진... 억.”
“기다렸습니다! 정말 오랫동안 말이에요!”
아마트리체는 눈물을 글썽이며 내 품 안에 뛰어들어서는 내 얼굴 곳곳에 키스를 퍼부었다.
원래 사모하는 아가씨 같던 그녀에게는 내 귀환이 아름다운 동화의 끝처럼 보이려나. 그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나는 그녀의 허리를 휘어잡아 번쩍 들었다.
아름다운 백금발이 태양빛에 반짝였다.
“이제는 기다리게 하지 않을게.”
“공작님...!”
“잠깐! 뭘 둘이서만 좋은 분위기를 만들고 그래! 나도 여기 있단 말이야!”
화리메가 내 옆구리에 달라붙었다.
역시나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불균형하게 큰 젖가슴이 뭉개졌다.
“크. 이 감촉도 그리웠지.”
“내, 내가 아니라?”
“너도. 겸사겸사.”
나는 화리메도 안아 들어서 키스해주었다.
화리메는 머뭇거리면서 시선을 돌렸다.
“그... 고마워... 요...”
“뭐가?”
“아우럼 저택에서 유모를 데려와준 거. 중앙의 기사단 놈들이 저택에 쳐들어 왔을 때는 정신이 없어서 말 못 했지만...”
그러고 보니, 화리메의 곁에 서글서글한 인상의 미녀가 서 있었다.
화리메의 유모라고 생각하고 봐서 그런지, 아니, 그렇게 보지 않아도, 그녀의 젖가슴도 무지막지하게 컸다.
“어딜 보는 거야!”
“젖.”
“이이이익...! 정말...!”
나는 투정을 부리는 화리메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화리메의 얼굴에 놀람과 희열, 그리고 복수심 같은 것이 스쳐지나갔다.
“저... 정말...?”
“그럼. 나중에 시간 좀 내.”
“그... 정말... 고마워... 요...”
머뭇거리는 화리메를 밀치고 이번에 내 주의를 차지한 것은 마티란 자작 루이사.
그녀는 이제 옹알이를 시작한 듯한 루이즈를 내게 내밀었다.
“공작님. 공작님의 딸아이가 그 사이 이렇게나 컸답니다.”
“오! 귀여운 내 딸 루이즈!”
루이즈는 정말 귀여웠다.
루이사도 예쁘고, 나도 잘생겼으니 그럴 만도 하지.
“후후후. 공작님의 귀엽고 귀여운 첫 번째 딸이랍니다?”
“그래, 그래. 물론이지.”
은근슬쩍 첫 번째라는 것을 강조하는 루이사의 음흉함까지도 꽤나 그리웠다.
나는 귀엽게 옹알거리는 루이즈를 껴안고 앞으로 나아갔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니, 메이드들이 양 옆에 도열해서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다.
유리, 데이지, 코코, 넬라, 그리고 어쩐지 프렌다와 토모까지 있었다.
“저 녀석들은 왜? 저택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조건으로 잔류한 거 아니었나?”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않아야 한다고 하니, 자발적으로 메이드 일을 하겠다고 하더군요.”
메이드장 세리야가 나서서 말하곤, 완벽한 각도로 허리 인사를 했다.
“어서 돌아오십시오. 주인님.”
“그래. 다녀왔어. 빌어먹게 긴 시간이었지.”
“이제는 이 저택과 영지를 돌봐주세요.”
“그러려고. 한동안은 아무 데도 나가지 않을 거야. 누님은? 아니, 누님들은?”
“정원에 계십니다.”
내가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것은 아닐 텐데.
이데트 누님이라면 당연히 가장 먼저 뛰어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나?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일단은 행렬의 해산을 명했다.
“이오시스. 그대가 고생을 좀 해야겠어. 사람도 많고, 보물도 많거든.”
“목록을 좀 확인해도 될까요?”
“여기.”
이오시스는 목록의 길이만 보고도 기절할 뻔 했다.
“이... 이건... 아티아가 하나 더 생긴 정도 아닌가요?”
“그런 셈이지. 당장 어떻게 하라는 게 아니라, 내가 쉴 동안 관리만 하고 있으라고. 참, 왕비하고 왕세자비, 공주도 데려왔어. 일단은 내 노예인데 그래도 금혈에 왕가 출신이니까 대하기가 어려울 거란 말이야. 그건 세리야랑 의논해서 정하도록 해.”
이오시스는 현기증이 나는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다.
타라가 돌아올 때까지는 그녀 혼자 고생하는 수밖에.
슬슬 문관도 본격적으로 기용을 해주어야 하는데 전쟁이 이어지는 탓에 통 인재 채용을 못했단 말이야.
왕도에서 끌고 온 녀석들 중에 쓸 만한 자가 있기를 바라야지.
나는 이오시스에게 일을 떠맡기고, 정원 안으로 들어갔다.
가볍게 돌아다닐 때는 언제나 그렇듯 파샨과 체닐린만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장미정원에는 푸른 장미가 활짝 피어 있었다.
그리고 장미 덤불이 절묘하게 가린 곳, 그 너머에 정갈하게 차려진 티테이블이 보였다.
등을 돌리고 앉은 사람은 굳이 누군지 묻지 않아도 이데트 누이인 게 확실했다.
그녀를 시중들던 메이드는 나를 보고는 세 걸음 뒤로 물러나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이데트 누이는 등을 돌린 채로 입을 열었다.
“돌아왔구나.”
“예.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마중 나오시지 않으셨더군요.”
“서운하니?”
“조금 서운합니다.”
“당연히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차를 마시며 차분히 기다렸지.”
이데트 누이는 후후 웃고는 찻잔을 기울였다.
그러자 덤불 옆에 숨어있던 여자가 불쑥 머리를 들었다.
“네가 이겼다는 소식이 전해진 날부터 세 달 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이렇게 정원에서 티파티를 했단다. 언제 돌아오든 의연하게 기다렸다고 말해주려고 했던 건지...언니도 참 대단해.”
그녀는 내가 아우럼 저택에서 데려온 레시아르 가문의 차녀, 파레트 누이였다.
저택 공방전 직후에는 아직 강독에 취해서 눈도 뜨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몸조리를 마치고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그 옆에서 또 한 명의 여자가 불쑥 머리를 들었다.
“빗속에서도 장대비를 줄줄 맞으면서 찻잔을 들더라니. 차분히 기다리기는 무슨. 큰 언니도 참 바보 아니니? 안 그래?”
이건 우리 레시아르 가문의 삼녀, 수잔느 누이.
다들 괜찮아졌구나.
나는 말없이 두 누이들을 끌어안았다.
“어... 응...”
“자, 잘 지냈지? 생각보다 엄청 컸네...”
그녀들은 장성한 내 모습에 좀 어색해했지만, 그건 시간이 차차 해결해주겠지.
몸의 대화를 나누면 더 친해질지도 모르겠지만...
언제나 온화하던 이데트 누이가 째릿한 시선을 보내고 있으니 그건 좀 쉽지 않겠다. 나도 안을 여자들이 많은데 굳이 누이들을 다 품겠다는 건 아니고.
이데트 누이는 찻잔을 내려놓고 코웃음을 쳤다.
“파레트. 수잔느. 너희도 바이스가 보고 싶다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지 않았니.”
“언니. 그거야 당연히 보고 싶지만, 우리는 언니처럼 처량하게 기다리지는 않았단 말이에요.”
“처, 처량하다니...”
“큰 언니는막내 소식만 기다리면서 그거야 정말 낭군님을 기다리는 부인의 얼굴로 오매불망...”
“수잔느!”
“꺅!”
세 누이는 서로 붙잡아서 혼쭐을 내주겠다고 테이블을 빙빙 돌면서 뛰놀았다.
그녀들의 몸은 이미 완숙한 성인 여성이었지만, 내 눈에 비치는 그녀들의 마음은 꽃을 따고 놀던 소녀들이었다.
내가 어릴 적, 나의 세계였던 누이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체닐린의 등 뒤로 돌아가서 얼굴을 묻었다.
키 큰 그녀의 뒤라면 내 모습이 다 가려질 테니.
체닐린은 무어라 말하지 않고 그냥 등을 빌려주었다.
"도련님..."
파샨은 내 발치에 기대 누워서, 온기와 포근한 여우 꼬리로 조용히 나를 달래주었다.
"괜찮아. 그냥, 그냥 기뻐서 그런 것 뿐이야."
내가 체닐린 뒤에 숨어있자, 누이들이 어느새 내 쪽으로 다가와서 내 어깨를 두들기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 좋은 날에 우리 막내는 왜 우는 거니?"
"큰 언니가 너무 유난이라 놀라서 그런 가봐요!"
"수잔느!"
"그건 그렇고, 무슨 여자들을 저렇게 많이 데려왔어? 건강하고 강한 아이를 가지는 건 가주로서 당연한 일이라지만, 저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우리가 없어져서 성욕이 뒤틀린 게 분명해요. 바이스는 어머니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데 우리들까지 하나둘씩 떠나버렸으니까. 모성이 고파서 닥치는 대로 여자들을 안은 거예요. 분명해요."
아니,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그, 그런가?
나는 부정도 긍정도 못하고 그냥 눈만 껌뻑였다.
그러자 세 누이는 미안하다는 듯이 나를 세 방향에서 안아 들어왔다.
"미안하구나. 바이스."
"이제 다시는 떠나지 않을게."
"언니들처럼 말하는 건 낯간지럽긴 하지만... 뭐어... 구해줘서 고마워..."
나는 따스한 품 안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