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 귀환
* * *
저택 안에서 편히 지내겠다고 했지만, 생각보다 저택 안의 생활은 편치만은 않았다.
감히 내 저택에서 내 심기를 건드리는 녀석들이 누군고 하니... 그건 바로 세 누이들이었다.
장난기 심한 수잔느 누이는 내가 여자를 품을 때마다 내 방으로 숨어 들어와서 나나 여자들을 놀래키곤 했고, 이데트 누이는 내가 너무 방탕하게 지낸다며 못마땅해 했다.
수잔느 누이는 둘째치고서라도, 이데트 누이는 은근히 다른 여자들을 질투하는 게 아닐까 해서 몇 번 뜨겁게 안아주었는데, 그게 하마터면 파레트 누이한테 들킬 뻔 했다.
사실 현장을 덮치지 못한 것 뿐이지, 거의 들켰다고 해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파레트 누이는 슬슬 나와 이데트 누이의 사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들키면 어때,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사실 들키면 나는 그렇다 쳐도 이데트 누이가 곤란해지겠지.
잠시 거리를 두면 파레트 누이의 의심도 옅어질까 해서, 나는 결국 며칠 바람을 쐬겠다고 하고 저택을 나왔다.
나왔다고 해도 멀리 나간 것은 아니고, 그냥 이 주변을 돌아보고 다시 돌아갈 예정이다.
“공작님!”
아티아의 주민들은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거리를 걸었다.
“안녕들 하신가.”
“우리의 공작님!”
“그래, 그래...”
“공작님! 저 좀 봐주세요!”
“잘들 지내지?”
“위대하신 공작 각하! 그 멋있는 검은 마수 같은 폰세르크 놈을 물리치고 얻으신 거군요! 대단하십니다!”
“그건 어떻게 안 거야. 아니. 이거 좀 지치는데.”
아티아에 사는 이들 중에 내 얼굴을 모르는 이가 없다보니, 한 걸음 가다가 인사를 받아주고 또 한 걸음을 가다가 다시 인사를 받아줘야 한다.
모르는 척 하고 그냥 가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지만, 나 좋다고 인사하는데 무시하고 지나가기도 뭐하단 말이지.
“베티아.”
“예... 주인님...”
담벼락에서 흐릿한 인영이 흘러나와 내 앞에 섰다.
“망토 같은 거 있어?”
“주인님이... 쓰시기에는... 조금 더러운...”
“괜찮아. 줘 봐.”
베티아는 황송해하며 거친 망토를 건넸다.
나는 그걸 그대로 뒤집어썼다.
“어때? 이제 못 알아 볼 것 같아?”
“예...”
“좋았어. 그럼 계속 수고해.”
베티아는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인기척을 죽이고 경호에 들어갔다.
마력을 펼쳐 살펴보면, 이 근처에도 베티아를 비롯해 열 명은 족히 되는 자정의 여명 단원들이 나를 경호하고 있다.
이들의 유용성은 몇 차례의 정보전과 암투에서 인정된 만큼, 친위대원과 함께 크게 개편하면서 확충할 생각이다.
이제는 베티아를 수장으로 해서 내 직속으로 독립시켜야지.
이오시스가 은근히 제 휘하에 두려고 수를 썼단 말이야. 나중에 엉덩이를 두들겨줘야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길거리를 걸었다.
아티아 시민들의 얼굴은 밝았다.
수많은 전투를 모조리 이겼을 뿐만 아니라, 전리품으로 챙겨온 금화가 풀리면서 일자리도 늘어나고 소득도 높아진 것이다.
게다가 곧 있으면 영지를 공국으로 승격시킬 것인 만큼 그들의 자부심도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덕분에 사람들의 마음도, 씀씀이도 넉넉해졌다.
나는 주점 밖에서 나눠주는 사과술을 단번에 들이켜고 계속 걸었다.
귀족의 거리 한 쪽에 있는 저택.
그리 규모가 큰 것도 아니고 화려한 것도 아니지만, 경비병들은 목에 힘을 주고 근무를 서고 있다.
“수고들 하네.”
“누구... 앗! 레시아르 공작 각하!”
“타라는 안에 있나?”
“예! 그렇습니다!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경비병은 긴장해서 뻣뻣하게 굳은 팔과 다리를 동시에 움직이면서도 나를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나는 그에게 금화를 한 닢 주고 돌려보냈다.
저택의 가장 안 쪽에 있는 방.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틈 사이로, 순백의 미인이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카산드라나 유페리아 공주에게는 미안하지만, 타라가 백배는 더 공주 같단 말이야.
나는 반가움을 참지 못하고 바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백... 아니, 공작님...!”
타라는 나를 보고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았는지 이내 표정을 찡그렸다.
"아윽..."
“그냥 누워 있어.”
“하지만...”
“부관이 나를 위해 싸우다가 몸져 누웠는데, 내가 병문안 좀 왔다고 아픈 몸을 일으키면 내 마음이 편하겠어?”
나는 타라를 반강제로 눕히고, 그녀 곁에 앉아서 그간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당분간은 오대공작이 국정을 운영하게 될 거야. 실세는 나와 오스트, 수드베리히의 삼대 가문일 테지만.”
“역시 공작님은 대단하십니다.”
타라는 선망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다가 조금 시무룩해졌다.
“스스로의 힘으로 공작위를 쟁취하셨으니, 이 모습을 아버지께서 보셨더라면 정말 기뻐하셨을 겁니다.”
“오록스 단장이라면 분명 그랬겠지.”
“... 차기 백여우 기사단장은 이제 헬무트 경으로 낙점됐습니까?”
“타라가 갖고 싶다고 한다면, 주지.”
진심이었다.
하지만 타라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기사들이 헬무트 경을 인정하고 있더군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가 저보다 단장직에 더 어울립니다.”
“그래. 그래도 타라는 백여우 기사단의 일원이야. 자랑스러운 내 부관이고.”
“그야 물론입니다.”
나는 허리띠를 풀어, 왕가의 비밀금고에서 가져온 명검을 그녀에게 선물로 주었다.
고대의 기술로 벼려낸 마검이었다.
예전에 하이덴이 쓰던 마검은 이것에 비하면 장난감이나 같은 것이다.
“... 이건... 정말... 정말로 명검입니다...”
타라는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에 넋을 놓았다.
“어때, 선물 받으니까 기운이 좀 나?”
“예.”
“그럼 얼른 일어나. 나한테는 타라가 필요하니까. 아니, 그렇다고 아픈데 억지로 일어나라는 건 아닌데...”
타라는 지그시 웃었다.
“공작님은 참 나쁜 사람입니다.”
“왜?”
“모든 여자한테 그런 말을 하고 다니시니까요.”
“모든 여자는 아니야. 내가 사랑하는 여자한테만 하지.”
“공작님이 사랑하는 여자가 너무 많아서 저는 걱정입니다. 그리고 은근슬쩍 엉덩이 만지지 마세요.”
좋은 분위기라고 생각했는데.
어쨌거나, 기껏 번 호감도를 다 까먹기 전에 돌아가기로 했다.
“다음번에는 과일이라도 들고 올게.”
“제가 저택으로 출근하겠습니다.”
“무리는 하지 말라니까.”
“무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저도 어서 나아서 공작님을 모시고 싶네요.”
타라는 상체만 간신히 일으켜서 군례를 올렸다.
창문에서 들어온 햇빛에 순백의 천사가 반짝였다.
하얀 머리카락과 하얀 얼굴, 그리고 가녀린 하얀 손.
그 모습은 정말 예뻐서, 나는 하마터면 타라에게 반할 뻔했다.
“그, 그래... 다음에 또 보자고.”
나는 허겁지겁 오록스 가문의 저택을 도망쳐 나왔다.
잘못하다가는 타라 부관에 의한 갱생 순애 루트로 빠질 뻔 했다.
안 돼지, 안 돼. 그 고생을 하고 미녀들을 데려왔는데.
적어도 데려온 미녀들을 다 임신시킬 때까지는 탕아로서의 생활을 그만 둘 수 없다. 억울해서 절대 못 그만두지.
이 간질간질한 마음은 얼른 털어버려야겠다.
“베티아! 좀 달려야겠어! 말 좀 끌고 와!”
베티아는 십 분도 지나기 전에 말을 두 마리 끌고 왔다.
나는 바로 말 위에 뛰어올랐고, 베티아가 내 뒤를 따랐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꺄아악!"
“어떤 미친놈이 상점가에서 말을... 위대하신 레시아르 공작 각하 만세!”
“위대하신 레시아르 공작 각하 만세!”
나는 손을 휘저어 인사를 대신하곤, 그대로 성문 밖으로 나갔다.
성벽에 기대어 놀고있던 기사들이 황급히 말을 타고 나를 쫓아 나왔다.
언제 기별을 받았는지, 맨 앞에는 제트리 단장까지 나와 있었다.
“공작 각하! 아티아를 나가실 때는 최소한이라도 호위를 붙이셔야 합니다!”
“누가 감히 나를 해한단 말인가? 그리고 누가 감히 나를 지킨다고?”
나는 그들에게 돌아가라고 일렀다.
기사들은 내 명령과 자신들의 의무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돌아갔다.
얼마나 달렸을까.
끼루룩!
기괴한 새 울음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다.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다니는 것은 고타마였다.
파샨이 내게 무어라 소리쳤고, 새끼 고타마도 대가리를 삐죽 내밀고 나를 향해 울고 있었다.
자기네들이라도 따라가겠다고 하는 거겠지.
“알았어! 따라와!”
파샨은 또 한 번 무어라고 소리쳤다.
아마 알겠습니다, 라거나 예 도련님. 같은 말일 거다.
끼루루룩!
고타마는 말 달리는 속도에 맞추어 활강하며 나를 따라왔다.
날개 밑에서 어마어마한 풍압이 느껴진다.
고타마는 솜씨 좋게 내 말을 전진시키는 방향으로 바람을 뿜어냈다.
시원한 바람을 순풍으로 맞아 해방된 기분을 느끼면서, 나는 계속 말을 달렸다.
그대로 잘 포장된 길을 달리면 소도시 카락투스가 나온다.
베티아가 노예로 팔린 곳이자, 그녀의 아들인 카이가 지내던 수도원이 있는 곳.
카이는 잠시 내 저택에 왔다가 친위대원 쪽으로 보내졌지만.
거기서도 워낙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뭘 하는 건 아니고, 그냥 글이나 배우고 마력 수련 정도나 하고 있다.
나름대로 잘 키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
베티아는 그 점에서도 내게 감사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장난삼아 그녀와 카이 간의 모자관계를 깨뜨려버렸다는 건 기억하지도 못하는 걸까.
“그런 거야?”
“... 제게는... 주인님... 뿐이십니다...”
“음.”
베티아는 언제나처럼 행복감 옅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입 꼬리는 살짝 올라와 있었다.
헌신하는 데에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아마 그녀도... 글쎄.
나는 또 다시 마음이 간질간질해지는 걸 느끼며, 더 강하게 말을 채찍질해서 달렸다.
우리는 카락투스를 그대로 지나쳐갔다.
그렇게 한참 달리다보면, 저 멀리 마티란 성이 보였다.
마티란 성을 크게 돌아서 한참을 가면 라울 강이 멀리서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켈자르 령과의 경계가 되는 강인데.
거기에는 바글바글하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목적지까지는 조금만 더 가면 되지만, 한참을 질주한 말은 이미 입에 거품을 물고 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내렸다.
끼루룩!
고타마가 너른 초지 위에 날개를 펼치며 착지하고, 파샨이 굴러 떨어지듯 뛰어내렸다.
“도련님! 운하 현장에 가려고 하신 겁니까?”
"그래. 어쩐지 한 번 둘러보고 싶어서. 고타마에 좀 태워줘."
"물론입니다!"
고타마는 나와 파샨, 새끼 고타마를 태우고 날아올랐다.
베티아는 지면에 남아 말들을 챙기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끼루루룩!
라울 강까지는 고타마의날갯짓 몇 번이면 금방이었다.
수십 만에 달하는 수인들이 땀을 흘리며 곡괭이질을 하는 현장이 바로 여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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