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 대운하
* * *
난데없이 괴조가 날아들자, 수인들은 겁에 질려서 삽을 던져두고 도망쳤다.
“도망쳐! 마수다!”
“히이익! 괴물!”
“저건 레시아르 공작님의 애완조다! 이 멍청한 녀석들! 당장 돌아오지 못해? 삽을 던진 녀석들은 죄다 감봉이다!”
작업반장이 고래고래 소리를 쳐도 그 말을 귀에 담는 자는 적었다.
레시아르 령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모아온 인부들이었기 때문에 고타마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이다.
어쨌거나 고타마가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마구 도망치는 꼴이 재밌어서, 나는 한동안 파샨에게 고타마를 계속 움직이게 했다.
몰이사냥을 하는 기분이군.
“당장 이리 내려오세요!”
청명한 목소리가 울렸다.
마리안이 말을 타고 나와서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파샨에게 고타마를 착륙시키게 했다.
마리안은 고타마가 내려앉자마자 이 쪽으로 달려와서 눈에 쌍심지를 켰다.
“공작님! 이게 대체 무슨... 대체 무슨 생각이세요?”
“재밌었잖아.”
“인부들이 다 도망가서 오늘 작업 분량을 전부 망쳤는데... 재미라니... 아아...”
현기증이 나는 표정을 짓는 그녀를, 시녀가 얼른 받쳐주었다.
나를 노려보는 고양이 같은 얼굴이 기억이 날락말락한데.
“제린이었던가.”
시녀는 깜짝 놀랐다.
설마 내가 자기 이름을 기억할 줄은 몰랐던 걸까.
그러자 마리안이 얼른 나서서 시녀를 가렸다.
“이 아이는 건드리지 않기로 하셨잖아요.”
“내가? 언제?”
“…….”
마리안은 또 이마를 싸매 쥐고 끙끙거렸다.
역시 성실한 여자를 괴롭히는 게 제일 재밌다.
그 다음으로 재밌는 건 악녀를 괴롭히는 거.
마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게는 서부를 다 뚫으라고 명령해놓으시고, 공작님께서는 새를 타고 날아다니며 즐기시는 거군요.”
“즐긴다기보다도, 감찰이지. 감찰.”
“두 번 감찰 받다가는 인부들이 다 도망가겠어요. 애초에 이렇게 큰 운하를 파는 게 필요했나요?”
“그건 당연히 필요하지.”
나는 마리안의 안내를 받아서 언덕 위의 오두막집으로 올라가며 대답했다.
그 사이 흩어졌던 인부들이 다시 삼삼오오 모여들고 있었다. 도망친 게 빠른 만큼, 다시 모여드는 것도 빨랐다.
높은 언덕에서 보면 개미들이 모여드는 것 같다.
저 자들이 내 명령 한 마디에 움직이고 내 기침 한 번에 움찔하는 걸 떠올리면, 약간은 타이쿤하는 기분도 든다.
하지만 대운하 사업은 재미만 따져서 한 건 아니다.
“그럼 어떤 대계를 가지신 건가요?”
마리안은 나를 오두막집으로 들이며 물었다. 약간은 비꼬는 투다.
작업을 망치게 한 게 아직도 분이 덜 풀린 모양이었다.
나는 테이블 앞에 앉아서 마리안의 화가 풀릴 때까지 오두막을 둘러보았다.
내부는 귀부인이 머무를 정도로는 잘 꾸며져 있었다.
곧 시녀 제린이 차를 타왔다.
마리안과 나, 그리고 파샨의 몫까지.
나는 찻잔을 받아 한 모금 홀짝였다.
"차향이 좋은데."
"공작님."
“알아. 무슨 대계로 대운하를 파라는 건지 물었지?"
"예."
"왕도에서 아티아로 돌아오면서 느낀 게 있어. 서부는 너무 멀고 길이 제대로 안 깔려 있다는 거였지.”
동부나 남부군에 비하면 서부군은 수가 한참 적었다.그럼에도 그들을 이끌고 육로로 이동하는 것은 질릴 정도로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나마 속도가 난 것은 배로 움직일 때였다.
“그래서 서부에 운하길을 뚫으시려는 건가요?”
마리안의 질문에, 차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켈자르의 주도인 카르마시아에서부터 지류가 흘러서 켈자르 령과 레시아르 령의 경계가 되는 라울 강까지는 이어진다.
거기서부터 한쪽으로는 레시아르의 주도인 아티아 인근을 거쳐 항구도시 헤시아스로 가는 운하길을, 다른 한 쪽으로는 파티스트롬령을 거쳐 마찬가지로 헤시아스로 가는 운하길을 만들 계획이다.
그렇게 하면 보다 쉽게 사방으로 움직일 수 있고, 여차하면 중앙을 다시 압박할 수도 있다.
돈을 뿌린 만큼 영지의 경기도 좋아지고 거대한 대공사로 내 위명도 올라가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서부가 더 긴밀하게 뭉치겠네요.”
영리한 마리안은 바로 요점을 눈치챘다. 어쩌면 운하 공사를 맡겼을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맞아. 길이 통하면 사람이 다니고, 사람이 다니면 지역은 가까워지지.”
왕도에서 털어온 막대한 양의 금화는 서부를 하나로 통괄하는 데에 쓰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레시아르 공작령은 굳이 병사를 일으키지 않아도 켈자르 백작령과 파티스트롬 공작령은 천천히 잠식하게 되겠지.
마리안은 표정을 굳혔지만, 레시아르에의 종속은 그녀도 이미 각오하고 있던 바였다.
그녀가 스스로 몸을 바친 것은 어떻게든 켈자르에게 유리한 정국을 꾸리려고 한 것이었고.
대운하 사업을 그녀에게 맡긴 것은 그게 적절한 인선이기도 했지만 그녀 스스로에 대한 대가이기도 했다.
마리안은 공정한 인물이지만 그녀는 그래도 켈자르 사람이니까.
아무래도 조건이 비슷하다면, 다른 곳보다 조금 더 켈자르의 물산을 쓰려고 하겠지. 인부들도 마찬가지고.
그 정도의 편향은 자비로이 넘겨줄 수 있다.
마리안이 선을 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도 하고.
“어쨌든, 와서 보니 잘 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이네.”
사실 총책임자인 마리안은 저택에 앉아서 손가락질만 해도 되는데 이렇게 현장에 나와 있는 건 그녀의 성실함 때문이겠지.
마리안이 라울 강까지 나와 있는 걸 보니, 카르마시아에서 라울 강까지의 작업은 완료된 모양이다.
“그 쪽 구간은 하천 지류가 있으니까요. 그나마 작업이 수월했지만, 이제 여기서부터는...”
“좀 힘들어지겠지. 걱정 마. 곧 있으면 왕도에서 잡아온 포로들도 보내주고, 어떻게든 흙 마법사도 포섭해볼 테니까.”
그 말에 마리안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마법사를... 운하 작업에 동원해주신다는 말씀이신가요?”
“확정된 건 아니지만 아마 가능할 거야.”
“그게 어떻게...”
그녀가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마법사는 필연적으로 귀족이니까.
귀족의 가계에서 태어나지 않는 극히 소수의 마법사도 결국은 귀족가에 입양되거나 스스로 가문을 일군다.
귀족 중의 귀족인 마법사가 공사에 나선다는 건 언뜻 생각하면 이해되지 않는 일이지만,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게 대귀족의 위엄이다.
물론 금화도 좀 쓰긴 해야겠지만. 어쨌거나 돈을 써서라도 마법사를 부릴 수 있다는 것은 대귀족 정도 되니까 가능한 일이다.
“최대한으로 지원해주겠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우는 소리 하지 말라고. 다른 쪽으로 우는 소리는 해도 되는데...”
“됐어요.”
마리안은 내 손등을 꼬집어서 들어냈다.
나는 그녀의 허벅지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리안은 뒤늦게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공작님...”
“왜?”
“... 송구합니다. 제가 무례를.”
내가 능글맞게 대한다고 해도 나는 대귀족의 반열에 오른 공작.
내가 그녀의 허벅지를 더듬은 것만큼이나 그녀가 내 손등을 꼬집은 것도 무례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딱히 무례 운운할 계제는 아니지.
나는 그녀의 뺨을 한 번 쓰다듬고 속삭였다.
“그런 거 아니야. 이제 가서 운하를 직접 확인해보려고.”
“직접이라니...”
“인부들 사이에 섞여서 작업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보겠다는 거지. 허름한 옷 좀 준비해줘. 파샨 것까지 두 벌.”
***
나와 파샨은 마리안의 오두막에서 허름한 인부 옷으로 갈아입었다.
마리안은 내 얼굴에 숯 검댕을 칠해주면서도 내키지 않는 듯했다.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나요?”
“위에서 보는 거랑 아래서 보는 건 다른 법이니까. 직접 땅을 파고 돌을 캐는 인부들에게 벌어지는 문제는 어지간해서는 위까지 올라가지 않아. 하지만 그 문제들이 쌓이고 쌓여서 운하 전체를 망치는 법이지.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는 아래에 내려가서 볼 필요가 있는 거야.”
“... 그렇군요.”
“놀랐어?”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놀랐어요. 아니, 다시 봤다고 해야 할까요.”
“무례하다!”
“... 다시 볼 필요는 없었는지도.”
마리안은 자기 엉덩이를 주물러대는 내 손을 다시 쳐냈다.
“이만하면 인부들도 어지간해서는 귀족으로 보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문제는 마력인데...”
“잘 갈무리해서 숨겨놓으면 괜찮을 거야. 기감을 살필 정도의 능력이 있는 자들이라면 인부나 하고 있지는 않겠지.”
“그도 그렇네요. 그럼 부디 너무 큰 사고는 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사고나 치고 다니는 사람으로 보여?”
마리안은 대답 대신 살짝 웃었다.
“해가 지면 나가세요. 어둠이 내려오면 인부들 사이에 쉽게 섞일 수 있을 테니. 작업반장들에게는 미리 이야기를...”
“아니. 아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분명 이야기가 나돌 거야.”
내가 보고자 하는 건 평시의 운하 공사가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다.
보여주기식 치레 같은 건 관심 없다.
“그러니까 이건 마리안과 나, 파샨만 아는 일로 하자.”
삑! 삑!
파샨이 안고 있던 고타마 새끼가 자기도 끼워달라는 듯이 울었다.
“그래. 너까지.”
마리안은 파샨에게 작은 도시락을 주었고, 고타마 새끼에게도 빵 조각을 하나 물려주었다.
슬슬 해가 지고 있었다.
"그럼 다녀올게."
"너무 큰 사고는 치시지 말기를 부탁 드릴게요."
"내가 사고만 치고 다니는 줄 알아?"
"..."
나는 마리안의 침묵을 뒤로 하고 파샨과 함께 오두막을 나섰다.
삑! 삑!
고타마 새끼도 함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