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153화 (153/166)

〈 153화 〉 대운하

* * *

인부들 사이에 끼어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워낙 인부들이 많기도 하고, 이 시대의 행정 관리라는 게 적당히 주먹구구식이기도 해서.

나는 적당히 힘이 있어보이는 작업반장의 반으로 들어갔다.

땅바닥에 널려 있는 삽을 들고 어슬렁거리는데, 수염이 거뭇거뭇한 인부 하나가 물었다.

“응? 너희들 뭐야? 못 보던 얼굴인데?”

파샨은 잽싸게 그 녀석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악!”

“쓸데없이 관심 갖지 말고 네 일이나 신경 써!”

“아, 알겠습니다요...”

“무슨 일이야?”

비명소리를 들었는지, 작업반장이 다가왔다.

나와 파샨은 정강이를 붙잡고 있는 인부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는 잽싸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 일도 아닙니다요.”

“싱겁긴. 어서 그 쪽이나 파도록 해. 높으신 분께서 오셨으니 곧 감찰관이 돌게야.”

작업반장은 그렇게만 말하고 돌아섰다.

인부는 눈물을 찔끔거리면서 나와 파샨의 몫까지 열심히 땅을 팠다.

“도련님. 이것 좀 보... 켁, 켁. 켈록!”

파샨은 옆에서 마석을 찾는다고 동글동글한 돌을 줍다가 흙내 나는 기침을 했다.

십만을 훌쩍 넘는 인부들이 일사분란하게 삽질을 하고 있으니 흙먼지가 어마어마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저기서 물을 뿌려댔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자욱이 일어나는 흙먼지에 파샨의 윤기 흐르는 여우 꼬리도 금세 더러운 거적떼기처럼 변해버렸다.

“이거 생각보다 번거로운데.”

기침을 하는 파샨을 보면서 그냥 그만 둘까 하는데, 작업반장이 수레를 끌고와서 소리쳤다.

“식사들 해. 식사.”

그래. 그래도 밥 한 끼는 먹고 가야지.

마리안에게 이것저것 이야기 해놓고 하루도 못 버티고 돌아가면 그것도 면이 안 산다.

나는 파샨과 줄을 서서 배식을 받았다.

식사라고 나온 건 양파와 걸쭉한 맥주, 그리고 말린 생선 한 토막이었다.

“이걸 먹으라고 준 건가?”

마리안이 공사비를 착복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인부들은 껄껄 웃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여기서 먹은 맥주처럼 맛있는 맥주는 먹어본 적이 없어!”

“물을 한참 탄 주점 맥주랑은 비교할 수도 없지!”

저렇게 호쾌하게 마시는 걸 보니 괜히 군침이 도네.

나는 그들을 따라 맥주를 들이켜 보았다.

“생각보단 맛있네.”

미지근하고 걸쭉하긴 했지만 곡물 본연의 맛이랄까. 고소하고 진해서 맛있었다.

양파도 신선한 편이고, 생선으로 만든 포도 그럭저럭 먹을 만은 했다.

“그치만 도련님이 드시기엔 너무 저급입니다!”

파샨은 우적우적 생선포를 뜯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자기도 잘만 먹으면서 말이지. 은근히 내 손에 들린 생선포를 바라보는 걸 보니, 자기 걸로는 성에 안 차서 그렇게 말하는 게 분명하다.

“옛다. 저급 생선포.”

“헤헷... 앗. 달라고 말한 건 아닙니다!”

“됐어. 난 이따가 상인 마차에나 가볼 테니까. 넌 그 생선포나 많이 먹어라.”

“히잉...”

파샨은 시무룩해진 것치고는 맛있게 생선포를 뜯어먹었다.

점심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작업반장이 다시 와서 작업이 재개되었다.

“해 지기 전까지 힘들 내자고. 지금 작업 속도가 좋단 말이야.”

각 작업반마다 정해진 작업량이 있고, 그 작업량을 초과하면 추가 수당이 나온다는 듯하다.

월등한 성과를 보인 작업반에는 특식과 상금이 내려지기도 하고.

역시 마리안이 이것저것 세심하게 신경 쓰고 있는 듯하다.

그 덕분에 대운하 작업은 큰 차질 없이 착착 진행되고 있는 듯 보였다.

파샨에게 정강이를 얻어맞은 인부가 내 눈치를 보면서 흙 포대를 수레에 올렸다.

나는 그가 돌아서기 전에 말을 걸었다.

“어이.”

“저, 저 말입니까? 나으리?”

“그래. 자네 이름이 뭔가?”

“이반이라고 합니다요.”

얼굴처럼 평범한 이름이구먼.

“그래. 이반. 자네는 뭘 하다가 왔나?”

“그...”

“편하게 말해도 돼. 자네도 말동무가 있으면 일하면서 덜 심심할 거 아니야.”

이반은 그럴 거면 자기 일을 좀 도와달라는 눈치를 보냈지만, 나는 가볍게 넘겼다.

이반은 한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이런 데 와서 삽을 푸는 놈들이 다 똑같지 않겠습니까요. 저기 가는 놈이나, 여기 코 후비는 놈이나, 저나 마찬가지로 다 자기 밭도 없는 무지렁이 농꾼입지요.”

“어디서 왔는데 그래?”

“호그 마을이라고 있습니다. 카난 자작령에 있는 곳인데, 거기 영주가 이번 전쟁에 휘말려서 가계가 박살이 났습니다요.”

카난 자작이라는 이름은 생소하긴 하지만, 어쨌건 중앙파 귀족이었던 것 같다.

줄을 잘못 선 죄로 멸문이 된 모양이다.

이반은 거의 하소연 조로 말했다.

“위에 다스리는 분이 그렇게 되시니 아랫것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탈영병에, 도적에, 마수들까지 날뛰어서 결국은 고향을 나왔습니다. 그나마 가진 게 없어서 뛰쳐나오는 것도 쉬웠지요.”

“살던 곳 근처에는 일거리가 없었나? 여기 서부까지 오려면 꽤 힘들었을 텐데.”

“목숨 부지하는 것도 어려운데 일거리가 있겠습니까? 그나마 서부는 많이 안정되었다고 들어서 오던 길에 대운하 일이 있다고 들어서 이렇게 오게 된 겁니다요. 그래도 여기 일은 좋지요. 수당도 밀리는 일 없이 꼬박꼬박 나오고, 밥도 세 끼씩 챙겨주고.”

사연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반은 지금에 만족한다고 했다.

돈을 벌어서 가능하면 서부에 정착하고 싶다고.

오지랖이 넓어서 파샨에게 정강이를 걷어차이긴 했지만, 일하는 걸 보니 이반은 나름대로 성실하고 괜찮은 녀석이었다.

나는 수레에서 일어나서 이반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었다.

“그래, 그래. 열심히 하다보면 볕 들 날 있을 게야. 열심히 해.”

파샨은 웬일로 생면부지의 사내놈에게 덕담을 해주느냔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나로서는 이반과 같은 이들이 유입될수록 이득이다.

평상시라면 농노로 각 지역의 신분구조에 예속되어 있었을 자들.

이들이 전쟁과 혼란으로 풀려나거나 도망쳐서 서부로 와준다면 그야 환영할 일이다.

인구수는 곧 국력이니까.

이반은 어리둥절해하다가도 내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흙 수레를 몰고 갔다.

내 정체를 알지도 못하고 짐작하지도 못하겠지만 누군가에게 복종하는 데에 익숙하기 때문이겠지.

이만하면 대충 이쪽은 다 구경한 것 같다.

점심을 부실하게 먹어서 슬슬 배가 고픈데.

“이동 마차에 가시죠! 도련님! 거기서는 먹을 만한 걸 팔 겁니다!”

“파샨 넌 아까 내 몫까지 먹었잖아. 넌 여기서 삽질이나 해.”

“그, 그런...!”

“농담이야. 어서 가자. 어느 쪽이지?”

“저 쪽입니다!”

파샨은 붕붕 꼬리를 흔들면서 앞서나갔다.

***

돈 냄새를 잘 맡는 상인들이 거대한 대운하 사업에 끼어들지 않을 리가 없다.

십만을 훌쩍 넘는 인부들이 쓸 삽이며, 괭이며, 작업복과 수레, 식사로 나오는 양파나 맥주, 생선포까지 그게 다 금화 냄새를 풀풀 풍기는 것이지.

현대의 지구에서도 대규모 사업은 이권을 갈라먹는 장사인 것인데, 이 세계에서는 굳이 더 말할 것도 없다.

서부의 삼대 상단이자 나와도 인연이 깊은 유라지아, 토커만, 디칸트 상단이 각자 한 숟가락씩을 걸쳐두고 있지.

세 상단 모두 계승식 전에 내게 공물을 바친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디칸트 상단은 한 때 좀 밀려나긴 했지만, 그 상단주가 바친 고타마의 진가를 알게 되고 나서는 다시 세 상단 모두 평등하게 대우해주고 있다.

여하튼 이들이 사업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면, 사업의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 상인들도 있다.

그들은 이동 마차를 끌고 다니며 인부들을 대상으로 각종 부식과 생필품, 잡화 등을 판다.

“어서 옵쇼.”

이동 마차 앞에 선 뚱뚱한 상인이 손을 비비며 나와 파샨을 맞이했다.

푸근한 인상에 비해서는 꽤 단련된 기세를 풍기고 있다.

거친 작자들을 상대로 장사하려면 상인도 보통 담력으로 해서는 안 되는 거겠지.

어쨌거나 나는 슬슬 이동 마차 안에 든 상품들을 둘러보았다.

대단한 물건이야 없었지만, 눈을 즐겁게 하는 장신구나 좋은 냄새를 풍기는 향나무 같은 게 있었다.

물론 가장 많이 들여놓은 것은 술과 부식이었다.

“이건 뭔가?”

“고기파이입니다. 오늘 아침에 카르마시아에서 받아온 것이라 드실 만 하실 겁니다.”

“이런 것도 찾는 사람이 있나?”

“사람이 많으면 개중에는 고기파이를 찾는 사람도 있겠지요.”

상인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

상재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곳에서 고기파이라니... 어쩐지 굉장히 먹고 싶어졌다.

“이거 주게. 여기서 먹고 가도 괜찮겠지?”

“물론입죠. 바로 잘라드리겠습니다.”

상인은 희희낙락한 얼굴로 큼지막한 칼을 들어서 고기파이를 자르다 말고,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야! 이 재수 없는 년아! 돈 없으면 오지 말라니까!”

고개를 돌려보니, 이동 마차 바로 앞에서 작은 수인 여자 하나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체구가 작고 둥근 귀가 머리에 바싹 붙어있는 걸 보니 족제비나 담비 수인이 아닌가 싶다.

그녀는 새까맣고 동글동글한 눈동자로 고기파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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