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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155화 (155/166)

〈 155화 〉 대운하

* * *

개울 옆의 빨간 천막에는 남자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그들이 무얼 하려고 모인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고,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멀찍이서 새어나오는 교성과 숨소리는 지저분하게 들릴 정도였다.

괜히 왔나하고 조금 후회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누구야? 누가 오는 거야?”

“카산드리아라는데?”

“무대의 장미가 나온다고?”

줄 서 있던 남자들은 갑자기 부끄러워하는 소년처럼 몸을 배배 꼬았다.

눈 버렸군.

잠시 기다리자 인파를 헤치고 한 무리의 여자들이 나왔다.

그들은 모두 커다란 칼을 하나씩 차고 있었는데, 가장 안쪽에 있는 여자만 칼을 차지 않았다. 누가 봐도 그녀가 무대의 장미라는 여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별명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이런 진흙 속에 있는 여자치고는 꽤나 미색이 훌륭했다.

피부가 좀 짙은 편이기는 했지만, 그것도 나름의 풍류라고 생각하면 풍류라고 할 법하고, 걸음걸이와 자세는 화류계 여자답지 않게 의젓하고 고아했다.

그녀는 여러 사람들 중에서도 나를 콕 집어 가리켰다.

“저 분이구나. 저 분을 모셔오너라.”

그러자 칼을 찬 여자들이 내게로 다가왔다.

페렛은 겁에 질려서 나와 모른 사람인 척하며 멀어졌다. 저렇게 소인스러우면 그것도 귀엽게 보일 지경이다.

한편, 파샨은 내 앞을 막아서고 칼 찬 여자들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무슨 용건이야?”

“카산드리아께서 그 남자를 만나길 원하신다.”

“흥. 그 여자가 어디 공주님이라도 되시나보지? 우리 도련님은 공주님 정도 되지 않으면 함부로 만나 주시지 않거든.”

칼 찬 여자들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카산드리아께서는 무대 위의 공주님이시지. 우리의 공주님이고.”

카산드리아라.

공주 카산드라와 비슷한 이름이잖아.

그건 흥미로운 우연이기도 하고, 나를 빤히 바라보는 무대의 공주라는 자가 궁금하기도 해서, 나는 초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는 빨간 천막들 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천막으로 나를 안내했다.

신기하게도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지나다니는 남자들의 수가 적어졌다.

카산드리아의 천막 근처에는 아예 남자가 없었다.

칼을 찬 여자들만 부리부리한 시선으로 사방을 경계하고 있을 뿐.

“금남(?男)의 구역이라도 되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귀하신 분을 모시려는데 실수가 없게 하려는 것뿐입니다.”

“귀하신 분?”

카산드리아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 여자, 내 신분을 눈치를 챈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시험 삼아 한 번 뻗대보기로 했다.

“내 선대 조상님이 한 때 작위를 가지시긴 했지. 하지만 나는 한참 전에 몰락한 귀족가의 방계 출신일 뿐이다.”

“설령 그러시다한들 귀하신 분이 귀인이시라는 점은 변치 않습니다. 일단은 안으로 드시지요.”

카산드리아는 내 팔을 잡고 직접 천막 문을 열어주었다.

천막 안은 상당히 넓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침상 맞은편에 작은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어린 소녀들이 악기를 들고 모여 있었다.

“울리거라.”

카산드리아의 말에, 소녀들은 제각기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퍽 실력들이 괜찮았다.

카산드리아는 나를 침상에 앉히고는 향초를 피우고 술을 따랐다.

파샨은 카산드리아가 내온 의자에 앉았고, 페렛은 그냥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저 녀석, 아까는 나를 모른 척 하더니. 카산드리아가 정중히 모셔오는 걸 보고 잽싸게 달라붙었나 보다.

어쨌거나, 나는 카산드리아가 올리는 술잔을 달게 받았다.

이런 곳에서 마시는 술맛도 꽤 괜찮았다. 나는 한 잔을 쭉 비우고 물었다.

“헌데 나를 왜 초대한 것이냐?”

“귀하신 분을 대접하는 데에 이유가 있겠습니까.”

“말 돌리긴. 그나저나 나는 귀하신 분이 아니라니까?”

“그리 말씀하셔도...”

카산드리아는 자기 안목에 상당히 자신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시험 삼아 우리 일행을 하나씩 짚어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나부터.

“말씀 드렸듯, 귀하신 분입니다.”

“어떻게 알지?”

“세상만사를 오시(??)하시는 그 눈빛으로 압니다.”

그 다음은 파샨.

“이 또한 귀하신 분입니다.”

“흐흐. 틀렸어! 난 그냥 수혈 평민 출신이거든!”

파샨이 재밌게 웃자 카산드리아는 마주 웃었다.

“귀하신 분이 아끼시는 분이, 어찌 귀하신 분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파샨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재치 있는 여자네.

마지막으로, 페렛.

얘는 내 일행이라고 하긴 애매하지만 어쨌든 따라왔으니 짚어보았다.

페렛을 본 카신드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음... 귀하신 분께서 다소 특이한 취향을 가지신 건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일단은 얘 좀 씻겨 와.”

안을 생각은 없지만 내 뒤를 이렇게 졸졸 따라다니면서 악취를 풍겨도 곤란하다.

바깥에 있을 때는 그나마 나았는데 천막 안으로 들어오니까 냄새가 더 심하다.

카산드리아는 여종을 불러 페렛을 씻기게 했다.

“나리! 나 버리고 가면 안 돼! 금방 올게!”

페렛은 여종에게 끌려가면서 불안한 표정으로 외쳤다.

갑자기 나리 운운하긴.

그리고 버린다기에는 애초에 내가 페렛을 가진 적도 없다.

귀찮아서 대답을 하지 않으니까 페렛은 빽빽 울어댔다.

“나리! 나 사기로 했잖아! 나 얼른 올게! 응!”

“알았어. 안 버리고 갈게. 얼른 씻고나 와.”

“약속이야! 약속!”

페렛이 겨우 나가고 나서 카산드리아는 자리를 한 번 정리했다.

향을 갈고, 술잔도 갈고, 작은 안주상을 내오고.

그리고 나서 그녀는 무대 위에 올라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오오...”

춤이나 노래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파샨이 감탄을 흘렸다.

무대의 장미.

무대의 공주.

으레 하는 과장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그런 말이 어울리는 춤이었다.

음욕을 자극한다기보다도 감탄을 자아내는 춤.

무희라기보다는 댄서... 아니, 아이돌이 어울린다고 할까.

한 곡을 마친 카산드리아는 옅게 한숨을 쉬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악기를 연주하던 소녀들이 그녀에게 몰려들어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

그녀는 소녀들을 물리고 내 앞으로 와서 무릎을 꿇었다.

“잘 추더군.”

“귀하신 분의 눈에 들었다면 영광입니다.”

“나는 칭찬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닌데, 정말로 잘 추었어. 그런데 왜 이런 곳에서 천막을 치고 지내는 거야?”

미모도 빼어나고 예의범절도 갖추었다.

춤에는 특기가 있고 사람을 편하게 하는 분위기까지 있으니, 그녀 정도의 매력이라면 어디 적당한 상단주의 애첩 자리를 틀어쥐는 건 일도 아닐 텐데.

조금 운이 따라준다면 동혈 귀족을 유혹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다.

카산드리아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천막 밖을 가리켰다.

“저기에 제 장미들이 있으니까요.”

“장미... 천막의 여자들이 모두 그대 소유라고?”

“그녀들은 그녀 자신의 소유입니다. 저는 단지 그녀들에게 머무를 곳을 제공할 뿐이죠.”

빨간 천막을 소유한다는 말, 그건 즉 포주라는 뜻이었다.

카산드리아와는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어쨌든 문뜩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렇다면 네 몸값은 얼만가?”

“얼마에 사시겠습니까?”

이것 봐라.

“내가 몸을 취하고 그냥 나간다면 어쩔텐가?”

카산드리아는 살포시 웃었다.

“귀하신 분이 씨앗을 주셨으니 오히려 거슬러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나오면 도리어 김이 샌다.

그렇지만 카산드리아는 대화상대로도 매력적이었다.

나는 그녀가 주는 술을 받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었다.

대운하 사업의 하부 말미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녀는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빨간 천막이 전부 그녀의 소유니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일주일마다 한 번씩 도박장이 열린다, 이 말인가? 감독관들에게는 비밀리에?”

“예. 모르긴 몰라도 인부들 절반이 한 번쯤은 들러봤을 거예요.”

“그걸 어떻게 감독관이 모를 수 있지?”

“작정하고 숨긴다면 숨기지 못할 것은 없답니다.”

“그럼 너도 도박장에 한 손 걸쳤겠지?”

도박과 술, 여자는 떼어놓기 힘든 요소다.

셋 다 남자의 이성을 흐려놓아 지갑을 털어가곤 하지.

하지만 의외로 카산드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도박에는 손대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건 사기니까요.”

“매춘은 괜찮고?”

“남자는 여자에게 돈을 주고, 여자는 남자에게 위로를 전해줍니다. 그건 공정한 거래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도박은...”

“돈 놓고 돈 먹기라 이거지.”

카산드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박도 일확천금을 노리는 자들 오락거리라고 생각하면 나름 공정한 거래가 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카산드리아의 말도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

이런 곳에서 몰래 도박장을 연 작자들이 공정한 카지노를 운영할 리는 없으니.

분명히 도박사들을 투입해서 사기도박을 하겠지. 돈을 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인부들은 탈탈 털리기만 할 거고.

“헌데 말이야. 이 이야기를 나한테 한 이유가 있겠지?”

카산드리아는 다양한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도박장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오래, 또 자세하게 말해주었다.

거기에는 선명한 의도가 엿보였다.

도박장을 어떻게든 해달라는 거 아니겠어.

카산드리아는 못 당하겠다는 듯 웃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귀하신 분께서 돌려 말하는 걸 싫어하시는 듯하니, 솔직히 말하겠나이다. 예. 도박장을 무너뜨려주세요.”

“난 누가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도 싫어해.”

“송구합니다. 다만, 이리 간청드리옵니다.”

카산드리아는 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건 꽤 현명한 태도였다.

되도 않는 조건을 걸어봐야 건방져 보이기만 했을 테니.

비천한 자가 귀한 자에게 할 수 있는 것은 협상이 아니라 간청뿐이다.

나는 카산드리아의 어깨에 발을 걸치고 물었다.

“도박장에 척진 놈이라도 있나?”

“개인적인 원한은 없습니다.”

“그러면?”

“귀하신 분께서 거하시는 위에는 위의 질서가 있겠지요. 하지만 저희 같은 아랫것들이 있는 아래에도 아래의 질서가 있습니다. 도박장은 그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저는 다만 질서를 되찾고 싶을 따름입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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