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화 〉 대운하
* * *
도박장은 지하에 있었다.
감독관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지하로 숨어든 건가.
바로 근처에서 대운하를 파다보니 땅을 팔 도구는 흘러넘치고, 또 남아도는 게 인력이니까, 이렇게 지하 도박장을 만드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거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렇게까지 번듯하게 만들어두었을 줄이야.”
도박장은 상당히 넓고 쾌적했다.
다소 흙냄새가 나기는 했지만 흙벽이 드러난 곳은 없었다. 전부 목재와 벽돌로 지어진 것이다.
“자재들을 은근히 빼돌려서 지었겠지요. 작업반장 중에서도 도박장에 손을 댄 이가 꽤 많을 거예요.”
카산드리아가 내게 속삭였다.
그녀는 가면을 쓰고 남장까지 하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감독관에게 들키면 좋은 꼴은 못 볼 텐데.”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겠어요?”
이제 들켰는데.
마리안에게 한 마디 해두어야겠다.
그래도 도박장은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도박보다도 도박에 빠진 사람들이 구경거리였다.
카드를 치는 녀석들은 매번 한숨을 내쉬었고, 공을 굴리는 녀석들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가장 사람이 많이 몰린 곳은 격투장이었는데, 그 안에서는 상의를 벗은 곰 수인 두 명이 서로 격투를 벌이고 있었다.
둘 다 죽일 듯한 기세로 치열하게 다투었다.
“쿠오오오!”
검은 곰 수인이 몇 번이고 붉은 곰 수인의 갈비뼈를 후려쳤지만, 붉은 곰 수인이 반대로 상대의 목을 물어뜯으면서 극적인 반전극을 연출해냈다.
“죽여! 죽여버려!”
“제렐, 이 개새끼! 내 돈 내놔!”
“씨발! 또 망했어!”
인부들은 격투장을 둘러싼 철망에 빼곡하게 달라붙어서 저주와 욕설을 내뱉었다.
다들 눈이 시뻘게져 있었다.
“음... 보다보니 별로 보기 좋은 꼴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일주일 동안 내내 흙을 캐서 번 돈을 여기 와서 한 시간 만에 탕진하는 이들도 많답니다. 성실하게 장사 밑천을 모으던 청년이 한 번에 돈을 다 날리고 자살하는 일도 있었어요.”
카산드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어느 정도는 자기 책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이들을 속이고 돈을 갈취해가는 갬블의 책임도 결코 적다고 생각지는 않아요.”
“갬블?”
“도박장 주인의 이름입니다.”
도박장 주인의 이름답긴 했다.
격투장 옆에는 다른 경기장들도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닭싸움을 벌이는 투계장, 개싸움을 붙이는 투견장, 그리고 한 번에 여러 마리의 동물들을 몰아넣고 싸우게 하는 투기장도 있었다.
“여자만 좀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내가 한 말이 아니었다.
팔짱을 끼고 어슬렁거리는 대머리가 한 말이었다.
도박장 안에 대머리는 한 둘이 아니었다.
다들 꽤나 덩치가 크고 위압적인 인상이었는데, 아마 대머리들로 도박장의 질서를 유지하는 건달패를 꾸린 듯했다.
그 대머리는 입맛을 다시며 동료에게 주절거렸다.
“도박장에 여자가 없다는 게 말이 되냐?”
“카산드리아가 도박장에는 여자를 보내지 않겠다잖아. 어쩔 수 없지.”
“그러니까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거지. 포주가 창녀를 안 보낸다니.”
“말조심해. 그 년을 함부로 욕했다가 칼침 맞은 놈이 한둘인 줄 알아?”
대머리는 바닥에 침을 탁하고 뱉었다.
“시발. 포주를 포주라고도 못하나. 하여튼 그 년 참 뻣뻣해서 마음에 안 들어. 언제 한 번 버릇을 고쳐줘야 하는데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갬블님이 곧...”
머리를 빡빡 민 덩치들이 서로 떠들다가 우리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제 힘 믿고 날뛰는 놈들이 으레 그렇듯, 놈들은 까닭도 없이 입술을 비쭉이면서 겁주는 시늉을 냈다.
“역겨운 놈들.”
카산드리아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남장 기술은 꽤 뛰어나서, 덩치들은 바로 앞에 카산드리아를 보면서도 그게 카산드리아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카산드리아와 덩치들의 악연이야 어쨌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마침 그 덩치들 근처에 재밌어 보이는 보드 게임이 벌어지고 있었다.
주사위를 던져서 말을 움직이는 게 윷놀이랑도 비슷해 보여서, 나는 곧장 그 쪽으로 향했다.
카산드리아와 파샨이 내 뒤를 따랐다.
동료와 떠들어대던 대머리는 남장한 카산드리아와 나는 그냥 보내고, 끝에 따라오던 파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제 딴에는 희롱한답시고 엉덩이라도 만지려고 한 모양이었다.
“어딜 감히!”
파샨은 녀석의 손목을 비틀어서 바로 팔을 뒤로 꺾었다.
“아아아악!”
대머리는 돼지 멱따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파샨은 손목을 한 바퀴 더 돌려서, 놈의 뼈를 완전히 부러뜨렸다.
“커헉...!”
대머리는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대머리의 동료는 어안이 벙벙해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이 미친 여우 년이! 악!”
놈은 파샨의 뒤돌려 차기를 얻어맞고는 코피를 줄줄 흘리며 쓰러졌다.
근처 시시덕거리던 다른 대머리들이 단검을 빼어들며 외쳤다.
“죽여!”
도박장이 꽤 넓다고는 해도 결국은 지하 밀실.
열이 넘는 대머리들이 단검을 빼들고 고성을 내지르자 소리가 웅웅 울렸다.
그 바람에 난리가 난 것은 당연했다.
여기저기서 도박판이 엎어지고, 인부들은 이때다 싶어서 돈을 훔쳐 달아났다.
난리통에 투견장 문이 열려서 피를 잔뜩 흘린 투견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크르릉! 컹!”
“으아악! 살려줘!”
야비해 보이는 도박사가 개한테 물려서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대머리들은 동료가 물리건 말건 우리, 정확히는 파샨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카산드리아는 파샨의 팔을 잡고 다급히 외쳤다.
“도망쳐요!”
“내가 왜?”
어이없다는 듯한 파샨의 대답에, 카산드리아도 무언가를 떠올린 듯 했다.
“아, 그, 그랬군요. 알았습니다. 가세할게요!”
그녀는 근처에서 카드를 집어 들더니 손가락을 튕겨서 카드를 한 장씩 날렸다.
우습게보던 놈들은 제 눈에 카드가 찍히자 더는 웃지 못했다.
“아아악!”
아무리 체격이 크고 힘이 좋아도 안구를 단련할 수는 없는 법.
카산드리아가 날린 카드는 날카로운 모서리 부분으로 눈을 찍었다.
그 공격에 벌써 대머리 두 명이 눈에서 피를 흘리며 주저앉았다.
“씨, 씨발! 뭐야!”
대머리들은 욕을 해대면서 주춤거렸다.
카산드리아가 카드를 날리면서 대머리들을 견제하는 사이, 파샨은 탁자를 뛰어넘으며 놈들을 마구잡이로 걷어찼다.
“악! 씨발! 뼈 맞았어!”
“저 미친 여우년! 악! 미, 미안! 미안하다고! 악!”
뻥뻥 발차기를 날릴 때마다 파샨보다 서너 배는 큰 사내들이 휙휙 날아갔다.
“컹! 컹컹!”
파샨이 발로 차서 날려 보낸 대머리를 투견이 물어서 다시 되던졌다.
대머리 열 명이 모두 정리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죄송합니다!”
건달패들은 줄줄이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반항하는 놈은 없었다. 이 자들이야말로 누구보다도 힘의 논리에 익숙한 녀석들일 테니까.
파샨과 카산드리아는 나를 쳐다보았다.
이제 어떡하냐는 눈치인데.
딱히 이러려고 한 건 아니지만, 분위기상.
“주인 나오라고 해.”
“주인이라 하시면...”
“갬블이라고 있잖아.”
그 순간, 입구 쪽에서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아주 뚱뚱한 작자거나 아니면 갑옷을 입은 놈일 텐데.
지하 도박장에 내려오고 있는 것은 후자였다.
아니, 후자와 전자가 함께 있었다.
더러운 갑옷을 입은 기사가 무척 뚱뚱한 사내를 데리고 계단을 막 다 내려온 참이었다.
무구 수준을 보니 방랑 기사거나 기사 흉내를 내는 종자인 것 같다.
여하튼, 기사는 난장판이 된 도박장을 둘러보고는 혀를 끌끌 찼다.
“갬블. 이거 완전히 박살이 났는데? 다시 영업할 수나 있겠어?”
“집기가 부서지고 사람들이 도망간 건 별일이 아닙니다. 부서진 거야 고치면 되고 사람이야 부르면 되니까요. 하지만 계속 영업하는 건 힘들 수도 있겠군요.”
“왜?”
“저렇게 강한 분의 심기를 건드렸는데 어떻게 영업을 계속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갬블일 뚱뚱한 남자는 내 쪽을 정중히 가리키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기사는 나를 한참 살펴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력은... 잘 안 느껴지는데?”
“푸른 피를 가진 분들 중에는 마력을 갈무리해서 숨길 수 있는 분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정말 저 높이 계신 분들이잖아. 그런 분이 왜 이런 구질구질한 도박장에 오셨겠어?”
“파이선. 친구로서 충고합니다. 저 분은 당신의 상대가 아닙니다. 싸우려고 들지 마시길.”
기사는 검집에 손을 얹은 채로 고민했다.
파샨은 팔짱을 낀 채로, 그 검이 뽑히기를 기다렸다. 그 검이 뽑히면 당장 기사의 머리도 뽑아줘야 할 테니까.
기사에게는 다행히도 그는 친구의 말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가 검집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자, 갬블은 내 앞으로 와서 바싹 엎드렸다.
“무엇이든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 어떤 처분이라도 달게 받을 테니, 강하신 분의 자비를 구합니다.”
자기 사업장에 갑자기 쳐들어와서 박살을 낸 놈한테 이렇게 저자세로 나온단 말이지.
이것도 참 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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