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 대운하
* * *
“내가 이렇게 깽판을 쳐 놨는데, 화나지도 않나?”
“천둥과 폭풍에 화를 내는 건 우둔한 짓 아니겠습니까.”
“그렇단 말이지... 그럼 내가 강한 자라는 건 어떻게 안 거야?”
갬블은 우선 카산드리아를 보고는, 파샨과 나를 차례대로 살펴보고 말했다.
“무대의 공주라는 자가 남장을 하고 따르시는 분이니 강하신 분이겠지요. 수인답지 않게 강하신 분을 다루시는 분이니 강하신 분이겠고. 또, 자유로이 폭력을 휘두르시는 모습에서 강하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카산드리아가 내 신분을 맞춘 것과 비슷했다.
카산드리아는 귀하신 분이라고 했다면 갬블은 강하신 분이라고 했다는 게 약간 다를 뿐이지만, 둘 다 맞는 설명이지.
카산드리아는 갬블을 싫어하는 듯하고, 덩치들 말을 들어보니 갬블도 카산드리아를 해치워버릴 계획을 세웠다던데.
서로 사이가 나쁜데 똑같이 내 신분을 맞췄다는 점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갬블은 내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헌데, 그 쪽의 강한 여우 수인님은 혹시 파샨님이 아니십니까? 그리고 그 파샨님이 따르시는 분이라면 레시아르 대공작님이 아니신지...”
시큰둥하게 서 있던 방랑기사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죄, 죄송합니다! 공작님! 존안을 몰라뵙고!”
“파이선. 말로만 죄송하다고 되뇌는 것보다는 차라리 손 한 쪽이라도 바치는 게 자비를 청하기에는 나을 듯 싶네만.”
“윽...”
기사는 정말로 손을 자르려고 했다.
갬블 이 녀석이 친구를 구하려고 머리를 쓰는구먼.
“됐어. 그럴 필요는 없고. 죄송하다 싶으면 저기 짖어대는 개새끼나 좀 어떻게 해 봐.”
“예! 공작님!”
기사는 갑주를 덜그럭거리면서 달려가서 풀려나온 맹견들을 때려잡았다.
곧 개소리는 멈추었다.
나는 카산드리아가 찾아온 의자에 앉아서 잠시 숨을 돌렸다.
그 사이 갬블은 물론이고 먼저 잡혀 있던 덩치들도 숨을 죽이고 내 처분을 기다렸다.
처분이라.
“일단은 말이야.”
“예, 존귀하신 대공작님.”
“다른 것보다도 공사 자재를 빼돌려서 도박장을 지은 것부터 따져보지.”
대운하 공사대금은 내 금고에서 나왔다.
그러니 자재를 빼돌린 건 결과적으로는 내 금고를 턴 것과 마찬가지다.
중죄라는 말이다.
하지만 갬블은 침착하게 말했다.
“소인이 감히 해명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해봐.”
“도박장을 지은 자재가 대운하 공사에 투입되기 위해 들여온 자재인 것은 맞지만, 대운하 공사에 쓰일 자재는 아니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말입니다. 대운하 사업의 총괄을 맡으신 마리안 마이포흐님께서는 공사 자재를 엄격한 기준으로 검사하셔서,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자재들은 전부 반송처리를 지시하셨습니다. 그런데 상단 입장에서는 여기까지 운송비를 들여서 가져온 자재를 다시 운송비를 들여 반송하느니, 싼 값에라도 처리하는 것이 나으니 제가 싸게 사들인 것이지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공사 자재에 관해서는 갬블이 죄 지은 것이 없다.
약삭빠르긴 하지만 그게 죄는 아니니까.
“자네 말이 사실이라는 건 어떻게 증명하지?”
“영수증과 자료들을 준비해뒀습니다. 거래 상단에 사람을 보내셔서 확인하셔도 됩니다.”
자신 있는 걸 보니 사실을 말한 것 같다.
“하지만 허가 받지 않은 도박장을 연 것은 어떻게 해명할 건가?”
“... 그 점에 관해서는 해명 드릴 것이 없습니다. 우둔한 소인이 구차히 욕심을 부렸으니 대공작님의 처분을 기다릴 뿐입니다”
해명이 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해명이 어려운 것은 괜한 변명을 하느니 잘못을 인정하겠다는 거지.
이렇게 보면 갬블, 이 녀석은 상당히 쓸 만한 녀석인 것 같다.
감독관의 눈을 피해 이만한 도박장을 운영한 것이나, 떠돌이라고는 해도 기사를 친우로 삼은 것이나, 내 앞에서 떨지 않고 술술 대답하는 것도 다 능력이니까.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평민이 스스로 이 정도의 능력을 갖추었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나는 한 가지만 더 물어보기로 했다.
“자네, 위험한 걸 알면서 왜 도박장을 열었지?”
“처음부터 도박장을 열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술장사를 하려고 했는데 아랫놈이 보관을 잘못해서 술이 다 쉬어버리는 바람에...”
“아니.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야. 내가 보니 자네는 꽤 영리한 사람인 것 같은데 어째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도박장을 열었냐는 거지.”
갬블은 살짝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욕심, 또는 야망이라고 할 만한 것이 가득 차 있었다.
“위로 올라가고 싶었습니다.”
“위로?”
“물론 존귀한 귀족이나 명예로운 기사가 되고 싶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저 같은 평민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은 금화를 손에 쥐는 것뿐이니, 어떻게든 부자가 되어서 위를...”
아마 그건 향상심이란 거였다.
욕심이 있어야 발전도 있으니까.
나는 갬블이라는 인재가 마음에 들었다.
“내가 위로 올라갈 수 있게 해준다면 어떡할 테냐?”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갬블은 처음으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
꼼짝없이 중벌을 받겠거니 했는데 갑자기 상을 내리겠다고 하니까 믿기지 않는 건가.
“나는 두 말 하지 않아.”
“받잡겠습니다!”
갬블은 쿵하고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그 모습을 본 방랑기사 파이선과 대머리 덩치들도 급히 머리를 찧었다.
“당연한 거지만 도박장 뒤처리는 자네가 해야 할 거야.”
“물론입니다!”
“그리고 저 놈, 내 친위대장을 건드리려고 했어.”
파샨에게 손을 대려고 한 덩치가 흠칫했다.
갬블은 벌떡 일어서서 파이선의 검을 뽑더니, 그대로 칼날을 내리쳤다.
“개, 갬블님... 제, 제발...”
“잘못을 빌 분도 몰라 뵈다니. 너 같이 멍청한 놈은 필요 없다.”
“으악!”
덩치는 쓰러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갬블은 피 젖은 칼을 파이선에게 돌려주고, 다시 내게 머리를 조아리며 복종의 의미로 금화 한 닢을 바쳐 올렸다.
“더러운 피보다 백배는 귀한 것이 금화이니, 대공작님께 금화를 바쳐 올립니다.”
나는 그 금화를 받아들였다.
***
뇌물을 받고 도박장 운영에 관여하거나 방관해준 자들의 명단을 주니, 마리안은 무척 수치스러워했다.
그들에게는 죄질에 따라 나름대로의 처벌이나 징계가 내려졌다.
마리안은 내게 사죄하는 의미로, 또 고생을 위로하는 의미로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나는 그녀에게 몇 명을 더 데려가겠노라고 전했다.
“그래서 분명 미인을 발견하신 거겠거니 했는데요...”
마리안은 내 뒤로 선 이들의 면면을 보며 좀 놀라워했다.
파샨이 있는 거야 당연한 일이고, 카산드리아야 매력적인 여성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뚱뚱한 도박장 주인 갬블과 하급 기사인 파이선, 그리고 아무리 봐도 평범한 인부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반, 족제비 수인의 특징이 선명한 페렛에 이르러서는 도저히 무슨 이유로 데려온 것인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저 밑에서 만난 인연들이지. 일단은 식사나 내줘. 암행한답시고 변변찮은 걸 먹었더니 허기가 지는걸.”
“그러실 거라고 생각하고 요리는 이미 다 준비해뒀어요. 일단 자리부터 안내해드리겠어요.”
마리안은 직접 의자를 끌어 나를 앉혀주었다.
당연히 내가 제일 상석이었고, 그 좌우로 마리안과 파샨이 자리했다.
마리안은 그 다음 서열이 누구일지를 고민하다가, 카산드리아를 제 옆에 앉히고 페렛을 파샨 옆에 앉혔다.
여자들이 모두 앉은 후에 조금 떨어진 자리에 갬블과 파이선, 이반이 앉았다.
우리가 착석을 마치자마자 요리사들이 줄줄이 나와서 식탁에 요리들을 내놓았다.
카르마시아 근처의 지류에서 잡은 민물고기 찜과 치어 튀김 등 물고기 요리가 주가 되었다. 물론 새와 돼지, 소고기도 빠지진 않았다.
먹음직스러운 요리의 향연에 다들 군침을 꼴딱꼴딱 삼켰다.
“다들 들지.”
내 말에, 페렛이 먼저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시녀가 눈치를 주었지만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쨌거나 먹성 좋게 먹는 녀석이 있으니 다른 이들도 따라서 식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만, 이반은 공사장에서 만났던 나와 파샨이 좋은 옷을 차려 입고 상석에 앉은 걸 보고 아직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이반. 왜 먹질 않나. 어서 들어.”
“예? 예, 예... 나으리... 가, 감사합니다요.”
이반은 슬금슬금 좌우를 살피면서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였다.
처음에는 자리가 불편한지 꾸물거리면서 영 둔하게 움직이더니, 한 번 민물고기찜을 입에 넣고 나서는 페렛처럼 걸신들린 듯이 먹어댔다.
“제린. 저 쪽 잔이 비었네요.”
“네. 마님.”
마리안은 시녀들에게 잔을 채우라고 해서, 먹성 좋은 페렛과 이반을 다소 자제하게 만들었다.
한편, 카산드리아는 우아하게 고기를 썰었고 갬블은 어색하게나마 그녀를 따라했다.
파이선은 등을 의자에 딱 붙인 채로 직각으로 식기를 움직여댔다.
마리안은 그들을 하나씩 살펴보고, 또 그들을 보는 내 시선을 읽고는 차분히 물었다.
“공작님. 저 밑에서 빨간 천막과 도박장만 발견하신 건 아닌 것 같네요.”
“그래. 이것저것 발견했지.”
“무엇을 또 발견하셨나요?”
“삶이 아주 좆같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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